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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관계가 있었느니라 (창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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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관계의 동물입니다. 제일 끊기 어려운 것도 관계입니다. 한 번 맺으면 끊기가 보통 어렵지 않아요. 부모 자식간의 관 계는 맺으면 평생갑니다. 부부의 관계는 맺으면 대개 40년 갑니다. 죽느니 사느니, 적과의 동침이니 뭐니 해도 그렇게 가야 합니다. 꼼짝 없어요. 시어머니 관계도 대개 20년은 갑니다. 싫으 니 좋으니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야합니다. 부모가 서로 관계의 끈을 맺어 한 생명인 내가 탄생하는 겁니다. 그렇게 탄생된 나는 또 어머니 아버지란 관계를 본질적으로 갖게 됩니다. 그리고 형제들도 핏줄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런 핏줄적 관계를 혈연적인 관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혈연적인 관계 뿐이겠습니까 지연, 학연의 관계, 정치적 관계, 거래적 관계, 부부관계, 연인관계, 뭐 이런 수 많 은 관계에 씨줄 날줄로 얽혀 사는 게 인간입니다. 인간 끼리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수 많은 인간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관계 로서 존재하고, 관계로서 자기를 실현하고, 관계로서 행동합니다. 십계명도 관계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법, 나와 이웃 과의 관계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한번 관계 를 맺으면 영원 까지 가야합니다. 초막이든 궁궐이든 그렇습니다. 이게 관계예요.
그런데 이런 모든 관계에는 대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 대상이 사물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습니다. 또 신(神)일 수도 있지 요. 이 관계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질은 결정 됩니다. 행,불행 도 결정되고, 성공과 실패도 결정이 됩니다. 마틴 부버라는 신학자는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를 '나 와 너'(I and YOU)의 인격적 관계로 바꾸자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물건 취급의 관계, 죽은 관계, 적대적 관계, 쓰고 이용하고 버리는 관계가 아닌,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관계를 맺기 원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고 혈연의 관계를 맺듯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으로 나눠 가진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것이 에덴의 아담과 하와입니다.
I and YOU 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는 것, 대화와 관계의 존재로 창조 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는 것, 근 본적으로 관계를 가지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눠 갖지 못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우리 속에 지어져 있는 하나님 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고 영광 돌리고 관계를 맺습니다. 슬퍼하고 탄원하고, 부르짖고 고백하고, 불평하고 요 청하고 이렇게 관계를 맺고 삽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도 관계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표현들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부모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 양과 목자와의 관계, 신 랑과 신부의 관계 등등입니다. 모두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이 있 어야 되는 사이입니다. 근본적으로 관계예요. 구원 별 것 아닙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죄 별 것 아닙니다. 관계의 단절이예요. 누구와요 하나님과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을 통한 구원의 멧 세지는 자꾸 돌아 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로, 그리고 관계를 회복하자는 겁니다. 선악과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선악과를 따 먹는 다는 것, 하나님이 인간 배부른 것을 보기 싫어해서 추방한 것 아닙니다. 인간이 약속을 파기한 것입니다. 그것이 큰 범죄입니다. 신뢰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신뢰예요. 신뢰없이 약속이 성립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작은 약속 교통신호부터 깊고 인격적인 약 속 결혼과 사랑에 이르기 까지, 모두 작든 크든 약속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파기는 신뢰의 파기가 되고 신 뢰의 파기는 관계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전부 관계예요. 선악과 뭡니까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 지속의 표시입니다. 관계 보존 의 표시입니다. 보세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 기한 인간은 곧 하나님의 얼굴을 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 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 (8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다닙니다.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이 있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아 아담아 부릅니다. 관계의 단절을 회복하기 위 해서 부르는 소리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끊어진 관계의 자리에서 떨쳐 나와 다시 관계를 갖자는 것입니다. 이 관계 회복의 부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 까지 계속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 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이것을 C.S.루이스는 책 제목에다 최대의 이혼 사건(Great Divorce)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이혼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이 절대적 이고 영원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끊어져서 이혼 관계가 성립이 됐 다는 내용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멧세지도 그런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의 회복 을 원하는 음성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의 구애작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회복을 시도해야 합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숨지 말고 사랑과 확신의 음성으로 언 제나 응답하며 뛰어 나갈 수 있는 관계가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사실 하루 하루 분주하게 살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 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텔레비젼의 밤 9시 뉴스 엥커는 매일 만나고 살지만 하나님은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만나지도 않 고도 잘 살고 있습니다. 인연은 맺어 놓았지만 무관심한 관계는 아닌지 살펴 볼 일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 만나서는 위태한 관 계입니다. 요즈음 우리 성경공부 팀에서는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만, 별 것 아닙니다. 관계훈련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늘 관계를 갖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깊은 관계를 유지하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으면 베드로 처럼 물에 빠집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헌신된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관계가 회복 되는 것으로 끝입니까 관계는 사실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부부관계, 이성관계, 친구관계, 거래관계 다 밀도가 다르고 깊이가 다 달라요. 하나님과의 관계 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적대적 관계가 있습니다. 세속에 속해 있는 경우, 악과 어둠의 세력에 놓여 있는 경우는 적대적 관계이다. 뱀, 사탄, 어둠, 유혹등은 그런 표상들입니다. 그 다음은 무관심한 관계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전의 관 계입니다. 사랑도 감동도 없이 그저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또 의무적 관계, 율법적 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조건부 신앙, 조건부 봉사, 조건부 예배, 모든 것은 감격의 결과라기 보다 기대의 결과입니다. 기대와 예상이 빗나가 면 돌아 설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계산적 관계입니다. 이 해 타산적 관계입니다. 하나님도 대상화 사물화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헌신적 관계입니다.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며 나는 너로 더불어 먹으리라. 내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무엇이든 지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형통하리라. 네 길이 평탄해질 것이라. 공생적 관계입니다. 신뢰적 관계 위탁적 관계, 헌신적 관계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 적대적 관계에서 헌신적 관계로 까지 나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단계를 굳이 나누자면 이렇습니다. 군중에서 교인으로, 교인에서 헌신된 제자로! 비교인에서 정기적 예배 참석자로! 정기적 예배 참석자에서 등록자로! 등록자에서 성숙된 자로! 성숙된자에서 평신도 사역자로! 알고 성장하고, 섬 기고, 전파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예배 참석 이후에 새가족반 성경공부를 한 10 주 동안 함께 하고 그 후에 동녘교회 공동체의 신앙과 희망을 함 께 나누고난 후 교인등록을 받을까 합니다. 이제 동녘교회 공동 체의 일원이 되기도 힘들어졌다고 누군가 우스게 소리를 했습니다만, 이게 맞는 것 같아요. 관계의 단계를 정확하게 점검하고 더 깊이 나아갈 것입니다.
이럴 때는 두 번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요나야 요나야 네 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범죄한 자에게 말하는 음성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사명과 관련된 음성입니다. 요나 때문에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 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 요나가 무슨 살인죄라도 지은줄 아는 데 그게 아닙니다. 죄라고는 하나님의 사역을 거절한 것 밖에 없 습니다. 사실 요나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니 느웨는 바벨로니아 지역에 있습니다. 그 먼 이방땅으로 가서 선 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닌 바벨로니아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 포하라고 하니 도저히 마음이 허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잠시 피신한 것 뿐입니다. 사역과 관련된 음성입니다. 헌신과 관련된 음성입니다. 영화 '쿠오바디스' 잘 아시지요 베드로가 박해의 시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로마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 때 길에서 주님을 만 났습니다. 주님은 거꾸로 로마로 들어가고 있었지요. 주여, 어디 로 가시나이까 '나는 내가 버리고 간 로마로 간다' 베드로는 즉 시 길을 돌려 로마로 들어가 순교했습니다. 헌신의 길로 다시 돌 아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때때로 우리에게 음성을 발하십니다. 요청하십니다. 나타나십니다. 헌신을 위한 관계를 위해서 말이지요. 구원이 다입니까 우리가 다 신앙생활 처음 할 때는 구원-멸망 시스템입니다. 천국-지옥 시스템입니다. 생명-사망 시스템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딱 맞는 말씀입니다. 중요하고 근본적 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른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믿음의 깊이에 들어갈수록 어둠의 자식이냐, 빛의 자녀이냐 보 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릴 최고의 특권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런 자신을 몽당연필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진 달아 빠진 몽당연필, 그래도 그녀는 행복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사랑의 관계입니다. 헌신의 관계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믿음의 초보가 아닙니다. 깊은 믿음입니다. 헌신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깊이에 들어가면,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나의 관심 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중심이 완전히 이동된 것입니다. 헌신된 관계 이전 에는 중심이 모두 나에게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 중심은 하나님 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헌신의 관계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단지 구원-멸망 시스템에만 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간신히 자녀 자격을 유 지하는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라서지 않을 정도의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호적 파가지 않을 만큼의 부모 자 식 사이입니다. 결별하지 않을 정도의 연인관계입니다. 이건 불 행입니다. 부부로서의 행복, 부모와 자식간의 행복,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의 열정이 없습니다. 관계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뿐이지 헌신과 열정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깊은 헌신의 관계가 있습니다. 위탁의 관계입니다. 사역의 관계입니다. 자녀는 될 수 있어도 도구는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헌신된이라는 말은 쓰여질 수 있는 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수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제자를 삼으셨고, 수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12제자를 삼으셨고 열두 제자 가운데서 서너 제자 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파송하고 일을 맡기셨습니다. 예수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제자들, 가령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가 장 헌신된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요한은 평생 동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섬기 고 돌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자녀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요구와 감사의 시스템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헌신의 시스템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요구, 사명 이걸 위해 시간과 정렬과 인생을 바치는 관계 까지 나아가 야 합니다. 그래서 더 깊은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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