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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 (창39:7-19)

본문

인간은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동물입니다. 총각은 처녀의 눈을 의식 하고 처녀는 총각의 눈을 의식합니다. 백명의 모임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어떤 사람의 눈 보다도 사랑하는 그 한 사람의 눈 만을 의식합니다. 수 많은 눈이 있지만 그 한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그러다가 눈이 서로 마주쳐 불꽂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을 눈이 맞았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행동이 윤리로 발전합니다. '몰래 카메라, 이경규는 간다' 뭐 이런 프로 있잖습니까 이전에는 건 널목 정지선에 정확하게 차를 갔다 대는 사람들 드물었어요.
그런데 잘못 하면 나도 텔레비젼에 비쳐 온 국민들 눈에 노출될 수 있겠구나 뭐 이러니까 잘 지켜지는 거예요. 어차피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것인가 봅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 까진 좋지 만, 남의 눈을 의식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 큰 차이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이 그랬습니다.
1. 순도 높은 신앙은 우선 하나님만 의식 합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구절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 께 득죄하리이까"(9절)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잘못하기 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의 평가, 칭찬, 비난, 조소를 넘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과 평가 보다 더 엄격한 하나님의 평가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 아 닙니다. 하나님의 눈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는 눈이 밝아 진다는 뱀의 꼬임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눈이 밝아 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 눈이 독립적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 고 합니다. 눈이 멀어서 전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10년 살아 보고 이렇게 단점들이 보이고, 이렇게 못난줄 알았으면 진작에 결혼 같은 것 않했을 거야 그럽니다. 그런들 어쩌게요. 연애할 당시에는 눈 이 서로 멀어서 '무조건 좋다' 이래서 결혼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살 면서 슬슬 눈이 밝아 지는 겁니다. 그래서 단점도 보이고 못난 점도 보이고 얼굴의 흉터도 보이고 그러는 거지요. 이렇게 눈이 밝아지면 이제는 순종하기 힘들어요. 무조건 좋다고 그러기 힘들어 집니다. 마 찬가지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맞추었던 사랑과 순종의 눈을 독립 시켰습니다. 모든 것이 불평등 계약 같아 보였어요. 하나님이 모 든 걸 착취하고 이용해 먹는 것 같이 보였어요. 하나님만 바라보던 사랑의 눈이 밝아져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욕망을 보고 권력을 보았 습니다. 선악과는 따 먹을 수 없는 것,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고지 식하게만 살아왔는 데, 이제 눈이 밝아지고 보니 따 먹어도 되는 게 선악과예요. 이것이 인간이 눈이 밝아진 역사이자 타락의 역사입니다. "그 집 사람은 하나도 없었더라"(11절) 한자말에 '신독(愼獨)'이라는 게 있습니다. 혼자 있어도 삼간다는 말 이지요. 이것은 유교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이 율곡은 혼자있어도 낮 에 눕지 아니하고 자세를 흩트려 트리지 아니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신독(愼獨)이 아니라, 신독(神獨)입니다. 나혼자 스스로 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삼가는 것입니다. 나 홀 로, 무한 책임을 지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자세로 삼간다는 말입니다. "그가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8절)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고 순전한 행동이 오히려 화를 불러 오고 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무너집니다. 젊은 청년 요셉은 유혹 앞에서 피 나는 싸움을 했습니다. 자기 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의 보상이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커녕 더 처참한 파렴치범으로 몰려서 감옥에 쳐 박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인생 부침을 한 번 보세요. 견디기 힘든 부침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참으로 굳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이 있지 만 요셉 만은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신약의 예수님의 모형 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부침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늘 끝 까지 갔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꼴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행복 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찾아와, 형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대상들에게 넘겨져 이집트로 인신매매 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17살 때 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신매매의 불행 속에서도 요셉은 성실성을 인정받아 파라오의 시위대장 집의 집사장이 됩니다. 10년간 그렇게 지 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곤두박칠 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때문에 삼년 동안 감옥에 갖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다시 감옥에서 꿈 현몽으로 극적인 반전을 이뤄 약관 30세의 나이에, 일약 이집트의 총리로 발탁이 됩니다. 그 뒤 요셉은 사브낫바네아(하나님이 말씀 하 시고 그 분이 살아 계신다)라는 이집트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헬리오 폴리스 신전의 대사제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 았습니다. '므낫세'(내 고난과 내 아비 집의 일을 잊어 버리게 하셨 다)와 '에브라임'(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 다)입니다. 이름의 뜻 처럼 지난날의 고난을 다 잊고 창성하게 해 주 셨습니다. 이런 믿음의 요셉은 형들과 마지막 화해를 할 때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 라."(45:8) 이렇게 해서 그의 고난에 찬 역정은 위대한 믿음의 고백으 로 마무리를 합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후 성령님 충만해서 부활을 증거하다가 유대관원들에 게 끌려 갔습니다. 유대 관원들이 윽박지르자 이렇게 담대히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 가 판단하라."(행4:19) 그러기에 순도 높은 신앙은 하나님의 눈만 의식합니다. 사람들에게 다 인정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에 합한 사람이 아니면 안됩니다. 사람들이 다 무시하고 별거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큰 사람이 됩니다. 사람의 눈이 하나도 없어도 하나님의 눈이 있다는 것을 절절히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는 겁니다. 하나님 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 보실까 하나님은 이런 결정을 어떻게 보실 까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것이 믿음의 순도를 높여 줍니다. 여기서 담대함도 나옵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려도 헌금을 해도, 봉사를 해도 대접을 해도 사람을 너무 의식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의 식 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의 잣대에 맞춥니다. 잣대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다림줄은 건축할 때 수평 또는 수직을 가늠해 보는 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다림줄에 자주 비유 하고 있습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 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 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암7;7-8)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잣대 로 볼 때 이스라엘은 이미 "아니다" 구제불능 선언을 받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잣대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3. 하나님의 평가를 지향합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6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는 "handsome and good-looking"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잘 났고, 잘 생긴 사나이라는 뜻입니다. 잘 생긴 사람 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과 과시입니다. 자긍심이 너무 높 아 과시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사람의 과시는 먹혀 들어 갑니다. 아름다움은 바로 이렇습니다. 사람들을 승복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면 참지 못합니다. 정 복 욕구가 있습니다. 쌀쌀맞고 대접받아야 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안 해 주면 되게 속상해 하고, 남들을 눌러 버리려고 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시선을 독차지 하고 남을 지배하려 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겸손한 사람은 정말로 드뭅니다. 있다면 아주 성숙한 사람입니다. 요 셉은 핸섬하고 잘 생긴 빼어난 미남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보디발 아내의 찬사를 듣고 그를 정복하거나 대상화 하지 않는 것은 큰 믿음 입니다. 더구나 잘 생긴 요셉은 겸손했습니다. 인간 앞에서의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사울이 이새의 아들 중에서 왕을 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새의 집에 갔습니다. 마음에 드는 일곱 아들을 다 지나 보내도 록 하나님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않던 양 지키는 막내아들 다윗을 불러 세울 때, 하나님이 허락을 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다가 불려 와서 극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꾼 다윗 왕입니다. 하나님은 말합니다. 나 여호와의 눈은 중심을 본다고.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의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욥의 기도 대목 중의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 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욥10:4) 하나님은 사람이 보시는 것처럼 그렇게 보시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시각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의 평가와 같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얼마나 울고 웃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조그만 무시를 해도 밤잠을 못 잘 정도로 속상해 하고 좌절합니다. 나는 없고 평판만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인간의 평판을 뛰어 넘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분의 기도버릇은 "하나님 아시지요"입니다. 그냥 기도하 러 앉으면 "하나님 아시지요" 계속 이런 기도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시고 계십니다. 나의 약점과 나의 실패와 나의 오류와 나의 성 공을 아십니다. 나의 몸부림을 아시고 나의 진보를 아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평판이 형편 없이 곤부박질 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평판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에 웃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인간의 칭찬에 들뜨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무시에도 쪼그라들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의 진노를 기억합니다. "여인이 날마다 청하였으나"(10절). 보디발의 아내는 날이면 날마다 요셉에게 간청하고 회유하고 협박합니다. 한 번 지나가는 유혹이 아닙니다. 끈질진 공격입니다.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10절). 요셉의 태도를 보세요. 숫제 함께 있지도 않습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 리라'고 했습니다. 포즈라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상도 하지 않 습니다. 악은 처음부터 원천 봉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방을 차지합니다. 유대 탈무드에 보면 "죄는 처음에는 손님이다. 그러나 그 대로 두면 손님이 그 집 주인이 되어 버린다"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초대교회의 재정담당을 하다가 땅을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어 사도들에게 내어 놓다가 책망을 받고 혼이 떠나갔지요. "어찌하여 이 일을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4) 하나님이 깨끗하시다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면 완벽하고 거룩해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 사실이 아니면 진노를 면치 못합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득죄하는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았습니다. 예견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무서운 진노와 징벌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과감 한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싸구려 복음이 되면 죄의 심판이 가볍게 처리되고 전혀 변하지 않는 외식하는 인간형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합니다.
5. 주께 하듯 합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3:22) "종들아 !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 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5-7) 모든 일을 할 때 주께 하듯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가릴 수 없습니다. 주께 하듯 하면 모든 것이 진실 되고 두렵고 떨림니다. 그러면 세상이 바뀝니다. 원수 같이 여기던 대상들도 육체의 가시구나, 내가 일 평생 섬기라고 준 대상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단 마음이 섬깁니다. 생활 현장에서도 믿음의 사람은 상사나 동료나 부하나 거래관계나 이 웃이나 친척에게 '주께 하듯' 한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눈 에 초점을 맞추고 나니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하나님 처럼 보인다는 말 입니다. 하나님 앞에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께 하듯이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눈가림'을 버 리고 '주께 하듯이'를 회복한다면 얼마나 엄청난 변화가 올까요 그러니 98년 새해에는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능력 이 두 개를 그림 으로 그려서 가지고 다닙시다. 하나님의 눈만 의식하면 감시자 하나님을 두고 사는 꼴이 됩니다. 신 앙생활이 피곤하고 의무적이 됩니다. 하나님은 메마른 감시자 역할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사는 믿음의 아들 딸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 몸부림 치는 자는, 자꾸 자꾸 능 력을 받게 됩니다. 요셉의 일생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의 능력이 요셉에게 파워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꿈을 꾸게 하고 꿈을 해몽하게 합니다. 꿈을 실현하게하고 순결을 지키게 합니다. 가나안 땅의 이민자로서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를 다스리는 유능한 총리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해 줍니다. 이집트 제국의 총리대신으로서의 역할 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있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감시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믿음의 몸부림을 하는 아들 딸들에게 능력 을 부어 주십니다. 이 야곱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도 전혀 다르지 않 게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과 정신세계가 비신앙인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 까 무엇이 이런 행동을 가능케 합니까 무엇이 이 절대 순수를 달성 하게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의 눈을 달고 사는 여러분이 되셔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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