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십니다 (창3:9)
본문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중요한 질문 몇 가지를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왜 인생이 불행한가 그 다음은 왜 인생에게 행복이 없는 가 마지막으로 인생에 참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꼭 같은 질문 같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분석해 보면 서로 다른 대답 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불신자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구원은 받았으나 확신이 없이 생활하는 신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번째 질문은 사명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당신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인생의 불행은 하나님을 떠남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는 물음은 아담이 하나님을 떠남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창세기 3:9). 왜 당신에게 행복이 없는가 그것은 당신이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 으나 당신의 집에 오신 손님으로 있는 이상 당신의 삶은 항상 모자라는 삶입니다(요한복음 2:1-11). 그러면 인생의 참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당신이 사명을 따라 살 때입니다. 당신이 목숨을 바칠 사명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사도행전 20:24). 전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형벌입니다. 198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하인리 뵐이 쓴(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작품에서 그는 전쟁을 통한 인간성을 상실한 세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한번 서치고 간 자국에는 인간의 모든 죄성이 다 드러납니다. 피비릿내 나는 인간의 잔인성을 보게 됩니다. 짐승과 같은 인간의 부도덕성이 나타납니다. 온갖 질서가 파괴된 혼란한 상태를 보게 됩니다. 가정의 파괴로 인하여 전쟁 고아가 생겨나며, 사회의 윤리와 도덕 이 깨어짐으로 인간의 정욕은 야수와 같이 변해 버립니다. 국법 질서가 허물어 지므로 창조질서가 파괴됩니다. 오늘 본문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비밀한 게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 물음에서 하나님의 숨은 뜻을 발 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현주소는 어떠한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에서 질문자인 하나님 편에서 먼저 생각해 봅시다. 이 물음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당신을 찾으시는 절규의 음성입니다. 당신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탄 식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 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고 했습니다.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단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계약을 파 괴하므로 계약 속에 담겨진 복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순간에 너무도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을 때 많은 것을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 (창세기 8)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 시간에 찾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더운 떼약 볕이 내리쬐는 오후에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깊은 흑암이 깔린 어두운 밤도 아니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맞쳐져 가는 서늘한 때 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또한 인류 심방의 기원입니다. 이 물음에는 기독교 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의 경지를 추구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는 계시 종교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해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무능력한 인간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와 같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주인과 같이, 잃은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비와 같습니다(누가복음 15장). 하나님의 널리 용서하는 긍휼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인간이 없습니다. 당신이 범죄하여 어디를 숨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다윗의 시편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 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 시니이다 (시편 139:2-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것으로 생각한 인생은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둘째:당신은 인생의 실존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응답자인 인간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이 물음은 인간의 실존이 어떠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물음을 통해서 인간의 실존을 바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본래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는 음성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교제 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계약의 파괴로 인하여 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고 부터는 우리의 양심이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우리의 양심의 가장 자리에 좌소를 정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단절하게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아담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지혜와 지각과 건강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 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교만이요, 악의 발상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 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더러운 것이 무엇인가 자기 자리를 이탈한 무질서한 혼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창조 질서인 자연질서가 있습니다. 이 질서를 깨뜨릴 때 대 혼란이 일어납니다.
아담이 자신의 자리를 이탈함으로 이러한 불행이 오게 되었 습니다. 현재 처한 상태를 알려주는 음성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했던 자가 이제 나무 아래 숨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은 너의 처절한 모습을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나무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자가 나무 아래 숨어서 나 무의 도움을 구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영장이 나무 아래서 숨은 비굴한 자가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가 어두움에 거하는 현장 을 고발하는 감시 카메라와 같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아덴에 갔을 때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 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 게 하리라 (사도행전 17:23)고 했습니다.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신상 앞에 엎드 려 숭배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십니다. 당신의 지금 비참한 모습을 깨우쳐 주는 음성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구원의 음성입니다. 내가 네에게 준 시간과 공간세계에서 사명을 감당했는가 그렇지 못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정오하고 정죄할 분이 아닙니다. 나의 수치와 허물을 가리워 줄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 위에 주님 앞에서 구원받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인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 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 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 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9)라고 했습니다.
셋째:당신의 삶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은 인생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당신의 삶의 현주소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것은 주민등록 카드에 기록된 등기상의 현주소를 묻는 물음이 아닙니다. 당신 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생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기독인으로 서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떠해야 하는가 삶의 현주소가 죄중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이는 마귀의 마귀 중심지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하나님의 낮을 피하 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세기 3:8)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참된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불순종하면 불행 해집니다. 소돔에 거하는 롯에게 행복이 없습니다. 들릴라의 팔을 배고 있는 삼 손에게 참된 즐거움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요나와 같이 불순종하고 나아가는 길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현주소 불확실한 자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 중심지대에 있는 자입니다. 자신 이 보좌에 앉아서 신을 좌지우지하는 자입니다. 예수가 나의 보좌의 주인으로 거하지 않고 나의 자아가 주장하는 성령님이 떠난 자들입니다. 이들은 회색지대에 있는 자입니다. 낮에는 쥐가 되었다가 밤에는 새가 되는 가면을 쓰고 사는 박쥐 인간과 같은 피곤한 인생입니다. 드로아에 유두고 바로 그러합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사도행 전 20:9)라고 했습니다. 한쪽 귀는 바울의 말씀에 두고, 한쪽 귀는 드로아의 항락 에 두어 드로아의 향락이 좋을 때는 드로아 시민 같고, 바울의 말씀이 좋으면 천국 시민 같습니다. 상황에 따라 신자 일수도 불신자일수도 있습니다. 현주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나뭇 잎사귀를 버리고 하나님의 자 비와 긍휼을 의지하고 달려 나아오는 자입니다. 거지 소경 바디메오가 주님이 오라는 명령을 받고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늘 (마가복음 10:50)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즉시 나오는 자들 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사명이 주어지면 바로 가서 장사하여 무엇을 남기는 착 하고 충성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찾으십니다. 인생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 십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은 이러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노 아는 내가 지금 하나님의 언약대로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지금 내가 지시한 산 모리아로 가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내가 지금 불의한 세력 앞에서도 뜻을 정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현주소는 어 떠한가 당신은 이 물음에 사명자답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에서 질문자인 하나님 편에서 먼저 생각해 봅시다. 이 물음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당신을 찾으시는 절규의 음성입니다. 당신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탄 식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 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고 했습니다.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단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계약을 파 괴하므로 계약 속에 담겨진 복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순간에 너무도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을 때 많은 것을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 (창세기 8)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 시간에 찾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더운 떼약 볕이 내리쬐는 오후에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깊은 흑암이 깔린 어두운 밤도 아니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맞쳐져 가는 서늘한 때 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또한 인류 심방의 기원입니다. 이 물음에는 기독교 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의 경지를 추구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는 계시 종교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해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무능력한 인간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와 같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주인과 같이, 잃은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비와 같습니다(누가복음 15장). 하나님의 널리 용서하는 긍휼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인간이 없습니다. 당신이 범죄하여 어디를 숨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다윗의 시편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 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 시니이다 (시편 139:2-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것으로 생각한 인생은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둘째:당신은 인생의 실존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응답자인 인간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이 물음은 인간의 실존이 어떠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물음을 통해서 인간의 실존을 바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본래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는 음성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교제 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계약의 파괴로 인하여 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고 부터는 우리의 양심이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우리의 양심의 가장 자리에 좌소를 정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단절하게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아담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지혜와 지각과 건강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 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교만이요, 악의 발상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 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더러운 것이 무엇인가 자기 자리를 이탈한 무질서한 혼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창조 질서인 자연질서가 있습니다. 이 질서를 깨뜨릴 때 대 혼란이 일어납니다.
아담이 자신의 자리를 이탈함으로 이러한 불행이 오게 되었 습니다. 현재 처한 상태를 알려주는 음성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했던 자가 이제 나무 아래 숨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은 너의 처절한 모습을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나무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자가 나무 아래 숨어서 나 무의 도움을 구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영장이 나무 아래서 숨은 비굴한 자가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가 어두움에 거하는 현장 을 고발하는 감시 카메라와 같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아덴에 갔을 때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 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 게 하리라 (사도행전 17:23)고 했습니다.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신상 앞에 엎드 려 숭배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십니다. 당신의 지금 비참한 모습을 깨우쳐 주는 음성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구원의 음성입니다. 내가 네에게 준 시간과 공간세계에서 사명을 감당했는가 그렇지 못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정오하고 정죄할 분이 아닙니다. 나의 수치와 허물을 가리워 줄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 위에 주님 앞에서 구원받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인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 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 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 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9)라고 했습니다.
셋째:당신의 삶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은 인생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당신의 삶의 현주소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것은 주민등록 카드에 기록된 등기상의 현주소를 묻는 물음이 아닙니다. 당신 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생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기독인으로 서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떠해야 하는가 삶의 현주소가 죄중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이는 마귀의 마귀 중심지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하나님의 낮을 피하 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세기 3:8)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참된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불순종하면 불행 해집니다. 소돔에 거하는 롯에게 행복이 없습니다. 들릴라의 팔을 배고 있는 삼 손에게 참된 즐거움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요나와 같이 불순종하고 나아가는 길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현주소 불확실한 자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 중심지대에 있는 자입니다. 자신 이 보좌에 앉아서 신을 좌지우지하는 자입니다. 예수가 나의 보좌의 주인으로 거하지 않고 나의 자아가 주장하는 성령님이 떠난 자들입니다. 이들은 회색지대에 있는 자입니다. 낮에는 쥐가 되었다가 밤에는 새가 되는 가면을 쓰고 사는 박쥐 인간과 같은 피곤한 인생입니다. 드로아에 유두고 바로 그러합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사도행 전 20:9)라고 했습니다. 한쪽 귀는 바울의 말씀에 두고, 한쪽 귀는 드로아의 항락 에 두어 드로아의 향락이 좋을 때는 드로아 시민 같고, 바울의 말씀이 좋으면 천국 시민 같습니다. 상황에 따라 신자 일수도 불신자일수도 있습니다. 현주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나뭇 잎사귀를 버리고 하나님의 자 비와 긍휼을 의지하고 달려 나아오는 자입니다. 거지 소경 바디메오가 주님이 오라는 명령을 받고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늘 (마가복음 10:50)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즉시 나오는 자들 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사명이 주어지면 바로 가서 장사하여 무엇을 남기는 착 하고 충성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찾으십니다. 인생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 십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은 이러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노 아는 내가 지금 하나님의 언약대로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지금 내가 지시한 산 모리아로 가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내가 지금 불의한 세력 앞에서도 뜻을 정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현주소는 어 떠한가 당신은 이 물음에 사명자답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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