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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 요셉 (창41:1-57)

본문

하나님의 입장에서 지난 시간 우리는 요셉의 잊혀진 세월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요셉은 2년 동안 차디찬 감옥에 갇힌 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주인의 처와 동침하려다 잡혀온 히브리 노예에 대해서 애굽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요셉에게 은혜를 입었던 술 맡은 관원도 요셉을 잊어 버렸을 만큼 요셉은 애 굽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을 위해서 구명을 운동을 해 줄 사람도 면회를 올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세월을 보내야 하는 신세가 되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체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이 2년은 어둡고 긴 터널과 같은 날들이 었을 것입니다. 나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구나. 형님들로부터 버림받아 노예로 팔리더니 이제는 억울하게 죄인 의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까지 하는구나 하면서 한숨과 원망으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입장에서 본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2년의 세월은 잊혀진 세월도 헛된 세월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단련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모난 부분을 다듬고 거친 부분을 연마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꼭 필요한 날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2년 동안 요셉의 반응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침묵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요셉이 원망이나 불평으로 이 기간을 보냈던 것이 아니라 말을 아끼며 하나님의 뜻을 살핀 그런 기간 이었기 때문에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이렇게 침묵할 수 있었던 이 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고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처지를 사람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생각을 했다면 이 기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견뎠다 하더라도 많은 원망과 불평의 나날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실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자신을 단련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기다림의 세월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런 요셉의 자세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요셉처럼 잊혀진 세월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던 잘 못하던 그것과 상관없이 이 잊혀진 세월은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이럴 때 사람의 관점에서 이 일을 살피면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망과 낙망스러움만이 내 마음 속에서 자라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일을 살피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인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어두움의 세월을 통해 어떻게 다듬어 가실 것인가를 기대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인생을 나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으로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 구절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 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라 말씀하십니까 쉽게 말씀 드리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 러니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죠.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 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그러므로 인간적인 관점을 버리십시오.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지 마십 시오. 사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들을 평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요셉은 사람들에게는 잊혀졌을 지라도 하나님께는 잊혀지지 않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둡고 긴 터널을 인내하며 견뎠던 것입니다.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사 49:15,16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 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 구절은 매우 재미있는 대조를 해 놓고 있습니다. 무엇과 무엇을 대조시키고 있죠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잊지아니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잊지 아니하는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자식을 잊을 수 있다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잊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혹시 이들이 잊을 지라도 즉, 도 무지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잊을 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아니하겠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 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람의 관점으로 우리들의 인생을 보면 잊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잊혀졌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 고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관점으로 인생을 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보면 잊혀진 것이 아니라 연단의 기간이며 훈련의 기간이 죠.
그러므로 낙망하지 마십시오. 나는 잊혀졌다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잊혀진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잊혀졌다 보다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만 2년 후 41장은 바로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함께 41장을 살펴 가면서 결코 잊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절을 읽습니다. .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 습니까 그렇습니다. 만 2년 후 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2년 후라 기록을 해도 별 상관이 없는데 만 이라는 말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혹 목사님 이제 따질게 없어서 그런 것까지 따지십니까 2년 이면 어떻고 만 2년이면 어떻습니까 그게 그거지요 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할 말이 없지만 제 생각에는 저자가 만 이라는 말을 통해서 뭔가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2년이라는 말과 만 2년이라는 말과는 느낌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느낌이 있습니까 만 2년이라는 말에는 꼭 2년을 채웠다는 그런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의 때가 2년이었는데 그 기간이 채워지자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때가 채워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저자는 만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2년 이 차자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십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요셉을 꿈에 가까이 가게 하시기 위해서 섭리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에게 희얀한 꿈을 꾸게 하심으로 구체적인 일을 시작하시고 계십니다. 바로의 꿈은 희얀한 꿈이었습니다. 너무도 이상한 꿈이어서 자다가 꿈에서 깨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잠들어 꿈을 꿈입니다. 그가 꾼 꿈에 대해서 2-7절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 궁금하게 여긴 바로는 애굽에 있는 모든 술객들과 박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꿈 풀이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꿈에 관한 한 전문적인 사람들이 었습니다. 이들은 꿈 해석에 대한 수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는 이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꾼 꿈 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꿈을 해석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방방곡곡에서 모아진 전문가들이었지만 이 꿈에 대해서 아무도 해석을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욀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누 구의 등장을 위해서죠 그렇습니다. 요셉의 등장을 위해서 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애굽의 모든 박사들과 술객으로부터 이 꿈의 의미를 감추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생각나다 이 때 드디어 술 맡은 관원이 2년 전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함께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 저는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해서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너무도 기막혔기 때문 입니다. 만약 이 술 맡은 관원이 자신의 꿈을 풀이해준 요셉을 출옥 후 잊지 않고 출옥하자 마자 꺼내 주었다면 요셉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에게는 고뇌에 찬 2년의 세월은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바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이 이제 그것을 생각하고 바로에게 고함으로 비록 2년의 잊혀진 세월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바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애굽 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잊혀진 2년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요셉에게 잊혀진 2년의 세월은 그를 총리 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이었음을 깨닫게됩니다. 우리들이 언뜻 보기에는 이 잊혀진 세월을 필요 없는 것 같고 쓸데없는 것 같 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너무나 적절한 때 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잊혀진 세월들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40년이라는 잊혀진 세월 뒤에 민족의 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 수 많은 날들을 잊혀진 체 광야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바울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광스런 등 장을 위해서는 꼭 이 잊혀진 세월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 없이는 결코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 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쉽게 영광을 얻으려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꿉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값지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기에 영광이 값지고 고귀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수시로 만나는 잊혀진 세월들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잊혀졌다고 해서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나를 영광스러운 사람 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있어야만 하는 일들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일입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의 요셉을 보십시오. 술 맡은 관원이 기가 막힌 순간에 요셉을 생각해 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잊어버린 것이나 다시 생각난 것이 우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누구를 위한 섭리하심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의 꿈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필요하다면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애굽의 왕 바로를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술 맡은 관원을 사용하시기도 하셔서 일들을 진행시켜 나가십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요셉보다 당시 바로 왕 이 더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왕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가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애굽의 왕까지 동원하셔서 일들을 진행해 나가십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이 보기에는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미국의 대통령도 동원하실 것입니다. 아직 필요치 않거나 내가 요셉처럼 잠잠히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동원치 않으시는 것이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든지 내가 하나님의 뜻 을 살피고 기다릴 줄 안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 그 어떤 것이든 동원하시지 않으실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께서 심지어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누구까지 동원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까 지 아끼지 않고 동원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 겠느뇨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독생하신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동원하신 하나님이 다른 것은 동원 하시지 않겠느냐 미국의 대통령도 필요하다면 동원하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대통령뿐만 아닙니다. 히스기야를 위해서는 일영표를 뒤로 십도나 물러가게 하시지 않습니까 즉, 자연도 동원하시고 우주도 동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저와 여러분들은 값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는 귀한 존재들이죠. 그러므로 어두움의 세월을 걷는다 해서 낙망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셉도 이 어두움의 세월을 통해 영광스러운 자 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드디어 요셉이 바로왕 앞에 나가게 됩니다. 흥분된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일들을 준비하시고 만들어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함께 14절을 읽습니다. . 이 갑작스런 일에 요셉도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이 일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을 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도 갑작스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요셉은 때가 되자 바로 왕 앞에 등장을 하게됩니다. 어떻습 니까 여기서 뭔가를 해야 하겠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이 흥분된 장면을 보시면서 뭐 느껴지시는 것 없으세요. 왜 우리가 극장에 가서 감동적인 장면을 보면 박수를 치지 않습니까 누가 박수를 치자고 이야기 한 적도 없는데 요. 이 장면 그 어떤 영화의 장면보다 극적이고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한 번 박수를 쳐보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 요셉은 이렇게 감동적으로 바로 앞에 서서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그 꿈을 해석해 나 갑니다.
자 요셉의 이 모습이 얼마나 교훈적인가를 보십시다. 15,16절을 보십시다. . 15절의 능히 라는 말에 주목을 해 봅시다. 이 능히 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애굽의 모든 술객들과 박사들은 풀지 못 하였다. 그러나 너는 능히 풀 것이다. 하는 의미이지요. 이미 바로는 요셉을 모든 술객들과 박사들 보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점 우쭐하지 않 겠습니까 그런 능력이 없는데 칭찬을 하면 송구스러운 것이지만 그런 능력이 있는데 칭찬을 하면 신나고 기분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교만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 이 누구입니까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애굽의 왕 바로 입니다. 그가 요셉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잘만 하면 지금이 출세할 수 있는 찬스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 요셉의 이야기는 전혀 엉뚱합니다. 함께 16절 말씀을 읽습니다. .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자신은 이 일에 대해서 나는 할 수 없지만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 시오. 지금 이 자리가 어느 자리입니까 그렇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바로 앞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잘 보여야 감옥에서도 나올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는 그런 순간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자신을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 능력이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곧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다 고 말합니다. 이 말은 꿈 해석은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요셉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잘만 보이면 출세할 수 있는 그런 찬스임에도 불 구하고 그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사실 자신이 드러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자신을 감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도둑질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이 받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신은 겸손하게 넙죽 엎드립니다. 오늘 우리들도 요셉처럼 이런 순간에 우리 자신을 낮추고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요셉의 이야기는 계속 해서 하나님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진행이 됩니다. 25절을 볼까요 . 무엇이라 이야기하죠 하나님께서 그런 꿈을 꾸게 하신 것이라 말합니다.
또 28절을 보죠 . 여기서도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또 하나님이 어쩌고저쩌고 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또 32절 말씀을 보죠. . 여기서도 그는 하나님이 어쩌고저쩌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요셉은 입을 열기만 하면 하나님이 어쩌고 저쩌고를 연발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을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년 동안 무고히 옥살이를 한 요셉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럴 수 있습니까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이곳으로 팔려와 종살이를 하 게 하시더니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무고히 감옥에 넣고 2년간이나 고생을 시키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더니 순 거짓말이군요.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연발하면서 하나님이 어쩌고 저쩌고를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요셉의 처지가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들은 조그만 시험 거리에도 하나님을 팔아 버립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감옥에 10일만 쳐 넣어도 하나님이 어디 있담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성도들의 삶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운 지요. 정말 속이 탑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언제쯤 우리들은 바로 설 수 있을 것인가 답답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 비해 요셉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실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하나님을 인정함 이런 요셉의 신앙은 38절에서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함께 38절을 읽습니다. . 누가 한 이야기입 니까 그렇습니다. 바로가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더욱 아름답고 값집니다. 바로는 전혀 하나님 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요셉의 태도를 보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들이 얻을 수 없노라고 이야기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나는 얼마든지 하나님 때문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이 혹은 주변 사람이 그래 맞아 하나님 때문 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영광을 이야기 하기는 쉽지만 내가 한 그 이야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배우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때문이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내면에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 정도 되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 하셨 지 다른 사람 같으면 턱도 없다 고 생각을 합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죠. 이렇게 말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많지만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은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순전해 지십시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드러내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십시다. 새로운 시험 이 꿈풀이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랐는가를 살펴보십시다. 40 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 40절에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너보다 높은 것은 보좌뿐 이라고 말합니다.
42절에서는요 자신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에게 끼웁니다. 인장 반지는 왕의 상징이며 모든 것을 결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한마저도 요셉에게 맡긴 것입니다. 또요 세마포를 입히고 금 목고 리를 걸어 주었습니다. 43절에서는요 바로의 수레와 버금가는 수레를 주어서 타게 합니다. 그리고 그가 행차를 하면 마치 왕이 행차를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엎드리게 했습니다. 최상의 대우를 해 준 것이죠. 히브리 노예 에서 왕 버금 가는 지위로 수직 상승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수직 상승은 요셉에게 있어서 제2의 시험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목사님 그것이 왜 시험 이에요 하고 따져 물으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은 늘 가난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은 가난하고 어려운 것만이 아니 라 편안하고 출세를 하는 것도 시험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는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상황이 달라지면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요셉처럼 이렇게 수직 상승을 한 이것 역시 시험인 것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가난해져도 자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출세를 해도 자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이 둘 모두가 우리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들입니다. 언젠가 완장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천한 신 분에서 갑자기 별 대수롭지 않은 완장을 하나 차게 되었습니다. 천한 신분이었을 때는 착하고 성실하던 사람이 갑자기 변합니다. 으시대고 뻐깁니다.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망치게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 완장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요셉 도 그러하였습니다. 히브리 노예 죄인에서 갑자기 세계를 다스리는 애굽의 이인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요셉에게 다가온 제2의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50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요셉이 이 시험을 어떻게 견뎠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50절을 봅니다. 흉년에 접어들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 하지는 않지만 약 6,7년쯤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때 아들을 낳았습니다. 51,52절을 보겠습니다. . 장자의 이름을 뭐라 짖죠 그렇습니다. 므낫세라 짖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잊어버 리게 하셨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짖습니다. 둘 째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짖습니다. 하나님께서 자 신을 창성케 하셨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그는 자신을 지키기 있지 않습니까 수 직 상승을 하고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장점입니다. 그는 최악의 상황 에서나 최상의 상황에서나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요할 때 나 가난할 때나 어려울 때나 평안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지키는 삶 바로 이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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