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선악과를 먹으매 (창3:6-13,눅15:17-24)
본문
범죄자로 지목되어 경찰에 끌려가는 사람의 대부분은 자신의 얼굴을 가립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토록 합니다. 맨손으로 가린 사람, 외투를 머리끝까지 올려 가린 사람, 고개를 숙여 윗저고리에 가린 사람, 머리를 책상이나 의자 밑으로 숨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치심, 그것은 범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는 수치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다'(창 2:25)라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치심은 범죄 이후에 생긴 것으로 인간 관계의 파멸을 가져옵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의 관계도 깨질 수 있습니다. 부모와 이웃과의 관계, 그간에 쌓아 놓았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모두 무너져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정신적, 심리적 파멸을 가져오게 되어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거나 도망하려고 한다든가, 공포의식에 사로잡혀 무의식중에도 자신을 숨기려합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의 파멸입니다. 죄의식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회피 하게 합니다. 이것이 범죄자들이 갖는 여러 가지 증상들입니다. 간교한 사단(뱀)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담의 아내를 찾았습니다. 뱀과 여자의 대화 중에 아담의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자가 혼자 있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때 사단은 여자를 미혹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이 그를 무너뜨리기에 가장 좋은 기회로 여기고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쉽게 사단의 작전에 무너졌습니다. 미혹(迷惑)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에 홀려서 정신을 치리지 못하는 것',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함'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처음 여자는 사단의 미혹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여자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것을 공격하여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사단은 여자에게 교묘한 질문을 던지므로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약화시키게 하였으며, 본래의 말씀에 더 첨가하여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라고 대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끝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인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미혹되는 3단계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거나 본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더하거나 때로는 생략하여 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여 마침내 사단의 계획대로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아담과 여자의 범죄가 그저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처음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은 피의 약정입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엄위한 선언이었습니다. 언약대로 처음 사람 아담과 여자의 범죄로 그들과 인간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담도 먹고 사단의 그럴듯한 말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여자의 눈에 보인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그 많은 나무가운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창 3:6). 아담과 여자에게 중앙에 있는 나무는 분명 경계해야할 나무였습니다. 항상 그 나무를 바라보며 피조 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복을 누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경계심을 늦추고 탐욕의 눈으로 바라볼 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가 더욱 맛있게 보였으므로, 그는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어기고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담도 그 여자와 함께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졌습니다. 여자는 그렇다 치고 아담은 누구입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직접 들은 자로서(창 2:16-17) 여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토록 이끌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받아먹은 것은 아담 자신이 자의(自意)로 여자의 범죄에 동참하였음을 말합니다. 또한 죄는 전염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스게 소리로 인간이 여자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나고 남자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이 남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맛있게 먹는다할지라도 그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의 범죄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과실을 성큼 받아 먹고 말았습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생활과 교회 생활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면 그 공동체는 쉽게 무너집니다. 모든 사람들을 불만으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아담과 그 아내의 범죄가 그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아담의 죄의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들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이것은 시력이 향상되어 더 잘 보게 되었다는 것보다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이나 혹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순수한 작품이 아니라, 이미 사단의 미혹에 오염된 존재로써, 그들이 눈이 밝아져 처음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벗고 있었으나 느끼지 못했던 수치심이 그들에게 어느 순간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순수하고 고귀한 영적 순결을 잃어버린 아담과 그 아내는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습니다(창 3:7). 그 누구도 수치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포악한 죄를 짓고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의 반응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죄가 아니라 조그마한 실수를 해도 얼굴이 벌개진다거나, 행동의 부자유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범죄는 개인적인 수치심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범죄한 인생들의 두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것이었습니다(창 3:8).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이 두려웠습니다(창 3:10). 얼마쯤 시간이 흐른 듯 합니다. '날이 서늘할 때에'란 '바람이 부는 때에'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그 아내가 수치심을 느끼며 흥분된 마음을 정돈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뒤돌아보기에 알맞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하나님은 찾으셨고, 그들을 찾는 음성이 그들의 귀에 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그들이 에덴 동산에서 있을 때 항상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는 죄의식으로 인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낯을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것은 영적 관계의 파멸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도 흔히 있는 것이 바로 여기 아담과 그 아내가 가졌던 도피 심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져버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은 지역에 가서 인간 육신의 욕심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회피하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직감해야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이미 파괴되고 있거나 파괴되었음을 직시하고, 영적인 관계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그 아내는 그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워하여 숨었고 창세기 3:8에서 '숨은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숨기다'란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은 죄를 깨닫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범죄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숨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숨은 이유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었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창 3:10). 여기에서 '듣고'의 히브리어 (쇠마티)는 '주의 깊게 듣다', '이해하다'의 의미를 가진 (shama 솨마)의 완료형으로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그 같은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에(창 3:8)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이미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이 정신적, 심리적 안정이 깨져버렸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 그는 세상에서 공포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 우리 스스로 느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못했을 때 오는 두려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지 못해서 오는 두려움이 없으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즉시 여러분의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숨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앞에 나아가십시오. 인생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찾아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요, 그 안에 하나님도 거하시며,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러움을 내어쫓는다"(요일 4:16-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실 때 여러분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적극적인 해석은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 할 수 없고,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주므로 먹었나이다 범죄한 인생의 증상에서 가장 비열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그들의 죄를 전가시키며,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에 대하여 조사하기 위해 묻지 않았습니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그들을 찾지 않으셨고, 이미 그들의 죄에 대하여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둔한 인생들의 변명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아담은 대답했고,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라고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신 것에 대해 도리어 원망하며 또한 부부간의 한 몸 의식(창 2:24)을 팽개쳐 버리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있으며, 창세기 3:13에서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인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에서 '어찌하 여'라는 말이 '어떻게'(how) 또는 '왜'(why)라는 뜻이 아닌 '무엇 때문에'(what)라는 물음이므로, 하나님은 하와의 죄악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악한 교만과 욕망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여자 역시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변명에서 뱀이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에서 '꾀므로'라는 말의 의미가 '잘못 인도하다' 즉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게 막고서 그릇된 길로 이끌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뱀의 유혹이 잘못된 길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잘못을 시인치 않고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갖게된 증상은 부끄러움(수치심)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그리고 두려움과 죄에 대한 변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인생들 찾으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을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담을 보고 계셨으며,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바르게 파악키를 애타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토로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죄를 자복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죄인들을 찾으셨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들과 병자들, 그리고 일반 서민들이 가는 곳마다 넘쳤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배경도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몰려오는 것을 보고 자칭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는 말을 듣고, 그들을 향해 교훈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죄인 하나로 인하여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인 아흔 아홉보다도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 하나로 인하여 더욱 기뻐하고(한 마리의 잃은 양 비유, 열 드라크마 중 잃은 한 드라크마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는 돌아온 작은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며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천국의 하나님의 기쁨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은 누구나 범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때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숨어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그 배의 가장 밑에 숨었지만 하나님을 결코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인생을 부르신다는 것은 곧 그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 음성을 듣고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 잔치에서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고, 발에는 새 신을 신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만든 맛있는 요리를 먹으십시오. 여기 제자공동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잔치를 베푸신 곳입니다. 죄인들이 모여 죄를 고백하고 풍류와 춤추는 소리가 있는 곳,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치심과 죄에 대한 책임 회피로 인해 파괴된 인간 관계와 두려움으로 인한 도피와 공포의식으로 파멸된 정신적 심리적 상태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또한 죄의식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회복하여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제자공동체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쉽게 사단의 작전에 무너졌습니다. 미혹(迷惑)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에 홀려서 정신을 치리지 못하는 것',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함'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처음 여자는 사단의 미혹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여자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것을 공격하여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사단은 여자에게 교묘한 질문을 던지므로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약화시키게 하였으며, 본래의 말씀에 더 첨가하여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라고 대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끝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인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미혹되는 3단계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거나 본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더하거나 때로는 생략하여 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여 마침내 사단의 계획대로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아담과 여자의 범죄가 그저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처음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은 피의 약정입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엄위한 선언이었습니다. 언약대로 처음 사람 아담과 여자의 범죄로 그들과 인간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담도 먹고 사단의 그럴듯한 말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여자의 눈에 보인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그 많은 나무가운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창 3:6). 아담과 여자에게 중앙에 있는 나무는 분명 경계해야할 나무였습니다. 항상 그 나무를 바라보며 피조 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복을 누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경계심을 늦추고 탐욕의 눈으로 바라볼 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가 더욱 맛있게 보였으므로, 그는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어기고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담도 그 여자와 함께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졌습니다. 여자는 그렇다 치고 아담은 누구입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직접 들은 자로서(창 2:16-17) 여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토록 이끌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받아먹은 것은 아담 자신이 자의(自意)로 여자의 범죄에 동참하였음을 말합니다. 또한 죄는 전염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스게 소리로 인간이 여자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나고 남자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이 남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맛있게 먹는다할지라도 그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의 범죄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과실을 성큼 받아 먹고 말았습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생활과 교회 생활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면 그 공동체는 쉽게 무너집니다. 모든 사람들을 불만으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아담과 그 아내의 범죄가 그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아담의 죄의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들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이것은 시력이 향상되어 더 잘 보게 되었다는 것보다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이나 혹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순수한 작품이 아니라, 이미 사단의 미혹에 오염된 존재로써, 그들이 눈이 밝아져 처음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벗고 있었으나 느끼지 못했던 수치심이 그들에게 어느 순간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순수하고 고귀한 영적 순결을 잃어버린 아담과 그 아내는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습니다(창 3:7). 그 누구도 수치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포악한 죄를 짓고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의 반응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죄가 아니라 조그마한 실수를 해도 얼굴이 벌개진다거나, 행동의 부자유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범죄는 개인적인 수치심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범죄한 인생들의 두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것이었습니다(창 3:8).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이 두려웠습니다(창 3:10). 얼마쯤 시간이 흐른 듯 합니다. '날이 서늘할 때에'란 '바람이 부는 때에'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그 아내가 수치심을 느끼며 흥분된 마음을 정돈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뒤돌아보기에 알맞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하나님은 찾으셨고, 그들을 찾는 음성이 그들의 귀에 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그들이 에덴 동산에서 있을 때 항상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는 죄의식으로 인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낯을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것은 영적 관계의 파멸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도 흔히 있는 것이 바로 여기 아담과 그 아내가 가졌던 도피 심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져버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은 지역에 가서 인간 육신의 욕심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회피하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직감해야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이미 파괴되고 있거나 파괴되었음을 직시하고, 영적인 관계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그 아내는 그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워하여 숨었고 창세기 3:8에서 '숨은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숨기다'란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은 죄를 깨닫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범죄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숨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숨은 이유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었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창 3:10). 여기에서 '듣고'의 히브리어 (쇠마티)는 '주의 깊게 듣다', '이해하다'의 의미를 가진 (shama 솨마)의 완료형으로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그 같은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에(창 3:8)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이미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이 정신적, 심리적 안정이 깨져버렸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 그는 세상에서 공포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 우리 스스로 느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못했을 때 오는 두려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지 못해서 오는 두려움이 없으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즉시 여러분의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숨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앞에 나아가십시오. 인생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찾아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요, 그 안에 하나님도 거하시며,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러움을 내어쫓는다"(요일 4:16-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실 때 여러분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적극적인 해석은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 할 수 없고,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주므로 먹었나이다 범죄한 인생의 증상에서 가장 비열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그들의 죄를 전가시키며,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에 대하여 조사하기 위해 묻지 않았습니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그들을 찾지 않으셨고, 이미 그들의 죄에 대하여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둔한 인생들의 변명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아담은 대답했고,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라고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신 것에 대해 도리어 원망하며 또한 부부간의 한 몸 의식(창 2:24)을 팽개쳐 버리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있으며, 창세기 3:13에서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인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에서 '어찌하 여'라는 말이 '어떻게'(how) 또는 '왜'(why)라는 뜻이 아닌 '무엇 때문에'(what)라는 물음이므로, 하나님은 하와의 죄악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악한 교만과 욕망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여자 역시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변명에서 뱀이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에서 '꾀므로'라는 말의 의미가 '잘못 인도하다' 즉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게 막고서 그릇된 길로 이끌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뱀의 유혹이 잘못된 길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잘못을 시인치 않고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갖게된 증상은 부끄러움(수치심)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그리고 두려움과 죄에 대한 변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인생들 찾으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을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담을 보고 계셨으며,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바르게 파악키를 애타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토로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죄를 자복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죄인들을 찾으셨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들과 병자들, 그리고 일반 서민들이 가는 곳마다 넘쳤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배경도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몰려오는 것을 보고 자칭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는 말을 듣고, 그들을 향해 교훈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죄인 하나로 인하여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인 아흔 아홉보다도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 하나로 인하여 더욱 기뻐하고(한 마리의 잃은 양 비유, 열 드라크마 중 잃은 한 드라크마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는 돌아온 작은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며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천국의 하나님의 기쁨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은 누구나 범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때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숨어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그 배의 가장 밑에 숨었지만 하나님을 결코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인생을 부르신다는 것은 곧 그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 음성을 듣고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 잔치에서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고, 발에는 새 신을 신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만든 맛있는 요리를 먹으십시오. 여기 제자공동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잔치를 베푸신 곳입니다. 죄인들이 모여 죄를 고백하고 풍류와 춤추는 소리가 있는 곳,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치심과 죄에 대한 책임 회피로 인해 파괴된 인간 관계와 두려움으로 인한 도피와 공포의식으로 파멸된 정신적 심리적 상태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또한 죄의식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회복하여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제자공동체는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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