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갈증 (창3:6-14)
본문
현대인들은 모두 심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리며 문명인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웬지 만족함이 없고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웬지 모르게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느낌일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마음이 갈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증이 심합니다. 마음에 허기짐이 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몇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을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허영 때문입니다. 허영이 문제입니다. 이 허영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것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좋은 환경이 주어졌음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삶의 행복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허영이 문제입니다.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고슨 잘 조절된 온실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에덴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덴은 낙원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5절을 그곳에 보면 사탄이 찾아옵니다. 와서 하와에 “저 열매를 따 먹으면 여호와 하나님같이 된다”고 속삭였습니다. “하나님이 된다” 이 말 한마디가 문제였습니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아담 부부가 넘어갔습니다. 그 결과 아담 부부는 낙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허영이 문제입니다. 허영 때문에 얼마나 시달리고 있습니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가슴 속을 보면 모두 이 허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슴 속이 큰 야망으로 가득 차 있고 큰 꿈으로 채워져 있고 큰 포부로 메워져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큰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별짓을 다합니다. 잠도 자지 않습니다. 안스러울 정도로 골똘히 살아갑니다.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모험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영혼이 얼마나 피곤하고 긴장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사탄이 찾아가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어.” 그러면서 편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모두 걸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젊은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 뜻대로 성공하게만 해준다면 내 영혼을 사탄에게 팔기라도 하겠다.” 얼마나 섬뜩한 생각입니까 그러니 선악과를 쳐다만 보고 있겠습니까 없어서 한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두 고독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마음을 비우지 않는 한 그 고독에서 헤어날 길이 없고 갈증을 풀 길이 없습니다. 아담 부부는 이런 허영 때문에 에덴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생각할 부분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편안함을 느낄 때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을 때입니다. 이 자기 자리가 참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리를 잃어 버리면 불행해집니다. 풀 한 포기도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아름답습니다. 나무 한 그루도 그 나무가 서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으면 가장 아름다운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돌 한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으면 예술품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힘이 있습니다. 그래야 안정감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 자리는 “하나님 품안”입니다. 인간은 그 안에 자리하고 있어야 평안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문제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품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어린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어린아이는 거기에 있기만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낙원은 어머니의 품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려면 탯줄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갓난아이가 탯줄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앙는 춥고 외롭고 배고프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나오자마자 울기부터 합니다. 이것을 즉 실존이라고 합니다. 이말은 키에르케고르라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최초로 쓴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면 탯줄에서 떨어진 아이처럼 고독해 하고 추위와 배고픔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울고 두려워하고 고독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존입니다. 아담 부부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말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눈이 뜨이고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상대방의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눈이 뜨이니까 가장 먼저 흠이 보였습니다. 아주 부끄러운 모습부터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담 부부는 당장 숲속으로 도망가서 숨었습니다. 그리고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 아담 부부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담 부부는 선뜻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나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벌을 받을까 그것이 불안했습니다. 온갖 갈등이 그들에게 엄습해 왔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오시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떨어지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때부터 부조화가 시작되었고 불안이 시작되었고 고민이 일어났고 살아갈 일을 걱정해야 했고 또 죽을 것이 아담 부부가 하나님을 떠나서 제일 먼저 얻은 저주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벌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늘 심판을 생각했고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내일에 대한 근심과 장래일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가 얼마나 큽니까 이런 모습을 톨스토이는 동굴 속의 인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다가 맹수를 만나 필사의 힘을 다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맹수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큰 동굴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동굴은 깊었습니다. 이 사람이 동굴 속으로 떨어지다가 나무뿌리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뿌리를잡고 매달렸습니다. 그 나무뿌리는 생명줄이었습니다. 그 뿌리가 끊어지면 떨어져 죽습니다.
그런데 나무뿌리를 곁에 있는 쥐구멍에서 두 마리의 쥐가 교대로 나와서 그 나무뿌리를 갉아 먹습니다. 밑을 보니 뱀의 소굴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고뇌스럽겠습니까 피를 말리는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뇌를 잊기 위해 야생 벌들이 물어다 놓은 벌집에서 꿀을 찍어 먹으면서 그 고뇌를 잊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이것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임어당이라는 학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고아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원래 신학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도에 타락해서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무신론적인 저서를 펴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말년에 가서 돌아옵니다. 40년 만에 방황하다가 신앙 안으로 돌아오면서 말하기를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40년은 고아와 같은 생활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사람은 때로 큰 소리를 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인간은 그 시간부터 고아입니다. 그래서 내일 걱정을 해야 하고 살아갈 일을 걱정해야 하고 장래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고아이기 때문입니다. 고아는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혼자서 걱정하고 혼자서 염려하며 수고해야 합니다. 오늘 청소년들을 보십시오. 장래 문제 때문에 얼마나 고뇌가 많습니까 거기다 사람은 장차 죽을 일까지 걱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모두 허전해 하고 갈증을 느끼고 불만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면 갈증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3. 참만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고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이웃과 관계하고 친구와 관계하고 부부와 부모와 관련을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 관계가 잘 이루어지면 세상을 사는 것이 참 재미있고 기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상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오늘은 이 좋은 관계가 모두 깨지고 상실된 시대입니다. 가족과 이웃과 친구와의 관계가 모두 깨졌습니다. 유지되고 있다 해도 지극히 계산적이고 타산적입니다. 그러니 그런 관계에 얼마나 힘이 있고 깊은 정신이 들어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모두 마음이 공허한 것입니다. 허전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갈증이 많습니다. 메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있느냐” 아담이 대답합니다. “내가 숨었나이다.” 왜 숨었습니까 숨었다는 말은 관계가 깨졌다는 말입니다. 관계가 깨졌으니 숨었습니다. 여러준, 친구와 관계가 불편해 보십시오. 그러면 숨게 됩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습니다. 관계가 깨져서 그렇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러니까 숨은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오죽이나 불편하고 두렵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것입니다. 친구간에도 관계가 소원해지면 괴로운 법인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으니 그 마음의 고독함이나 갈등이나 불편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갈증을 느끼고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4. 병든 구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저마다 갈증을 느끼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병든 구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심각한 경쟁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산업 사회는 풍요로움과 문화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지만 상대적으로 상실한 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우선 인간성의 상실이 가장 큰 손실일 것입니다. 원망이 많아지고 탓하는 일이 많아지고 핑계가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병든 의식입니다. 이웃을 탓하고 원망하고 핑계하는 것은 병든 의식의 발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너희더러 먹으라 하더냐” 그러면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진실한 대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용서받을 수 있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12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이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대답입니다. 이번에는 하와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하와가 대답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상대를 유혹자로 보고 탓하며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병든 의식이고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친구가 숙제를 못했 왔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친구가 대신 해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대신 숙제를 해주면 내신 경쟁에서 내게 불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친구가 낙제를 해야 내가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병든 의식입니다. 이웃이 원망의 대상이 되고 불평의 대상이 되는 것, 이것이 병든 구조입니다. 우리 사회가 산업 사회가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몰려듭니다. 매일같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갑니다. 겉으로 보면 틀림없는 동료이고 친구인 것같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모두 적입니다. 모두 경쟁자들입니다. 그래서 은연중 서로 경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경쟁의식이 병든 의식을 만드어 냅니다. 그래서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소유하고 살면 우선 적개심이 발동합니다. 좋은 차를 보면 긁고 지나갑니다. 좋은 집을 보면 침을 뱉고 지나갑니다. 이것이 병든 구조 때문입니다.
아주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오늘의 입시 교육이 얼마나 병든 인격을 만들어 냅니까 무조건 상대를 적으로 여기게 하고 경쟁자로 여기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친구집에 늦게 전화를 해봅니다. 친구가 지금 잠을 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부하고 있다고 하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경쟁으로 끝나지 않고 병든 의식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누가 전화오면 잔다고 하라 해놓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구조 때문에 발생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어디서 행복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누리며 소유하고 살면서도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 같은 병든 의식이 마침내는 생활 전반에 퍼져서 가정생활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하루
1,121쌍이 결혼을 하는데 190쌍이 이혼을 합니다. 이 같은 병든 구조 속에서 성격이 잘못 형성되어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불화해서 이혼하는 비율이 83.5%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두 고독과 불안과 불만 속에서 원망과 갈등을 지닌 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부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 좋던 에덴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린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서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1. 허영 때문입니다. 허영이 문제입니다. 이 허영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것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좋은 환경이 주어졌음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삶의 행복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허영이 문제입니다.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고슨 잘 조절된 온실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에덴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덴은 낙원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5절을 그곳에 보면 사탄이 찾아옵니다. 와서 하와에 “저 열매를 따 먹으면 여호와 하나님같이 된다”고 속삭였습니다. “하나님이 된다” 이 말 한마디가 문제였습니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아담 부부가 넘어갔습니다. 그 결과 아담 부부는 낙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허영이 문제입니다. 허영 때문에 얼마나 시달리고 있습니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가슴 속을 보면 모두 이 허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슴 속이 큰 야망으로 가득 차 있고 큰 꿈으로 채워져 있고 큰 포부로 메워져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큰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별짓을 다합니다. 잠도 자지 않습니다. 안스러울 정도로 골똘히 살아갑니다.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모험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영혼이 얼마나 피곤하고 긴장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사탄이 찾아가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어.” 그러면서 편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모두 걸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젊은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 뜻대로 성공하게만 해준다면 내 영혼을 사탄에게 팔기라도 하겠다.” 얼마나 섬뜩한 생각입니까 그러니 선악과를 쳐다만 보고 있겠습니까 없어서 한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두 고독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마음을 비우지 않는 한 그 고독에서 헤어날 길이 없고 갈증을 풀 길이 없습니다. 아담 부부는 이런 허영 때문에 에덴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생각할 부분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편안함을 느낄 때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을 때입니다. 이 자기 자리가 참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리를 잃어 버리면 불행해집니다. 풀 한 포기도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아름답습니다. 나무 한 그루도 그 나무가 서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으면 가장 아름다운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돌 한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으면 예술품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힘이 있습니다. 그래야 안정감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 자리는 “하나님 품안”입니다. 인간은 그 안에 자리하고 있어야 평안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문제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품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어린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어린아이는 거기에 있기만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낙원은 어머니의 품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려면 탯줄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갓난아이가 탯줄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앙는 춥고 외롭고 배고프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나오자마자 울기부터 합니다. 이것을 즉 실존이라고 합니다. 이말은 키에르케고르라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최초로 쓴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면 탯줄에서 떨어진 아이처럼 고독해 하고 추위와 배고픔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울고 두려워하고 고독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존입니다. 아담 부부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말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눈이 뜨이고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상대방의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눈이 뜨이니까 가장 먼저 흠이 보였습니다. 아주 부끄러운 모습부터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담 부부는 당장 숲속으로 도망가서 숨었습니다. 그리고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 아담 부부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담 부부는 선뜻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나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벌을 받을까 그것이 불안했습니다. 온갖 갈등이 그들에게 엄습해 왔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오시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떨어지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때부터 부조화가 시작되었고 불안이 시작되었고 고민이 일어났고 살아갈 일을 걱정해야 했고 또 죽을 것이 아담 부부가 하나님을 떠나서 제일 먼저 얻은 저주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벌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늘 심판을 생각했고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내일에 대한 근심과 장래일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가 얼마나 큽니까 이런 모습을 톨스토이는 동굴 속의 인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다가 맹수를 만나 필사의 힘을 다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맹수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큰 동굴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동굴은 깊었습니다. 이 사람이 동굴 속으로 떨어지다가 나무뿌리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뿌리를잡고 매달렸습니다. 그 나무뿌리는 생명줄이었습니다. 그 뿌리가 끊어지면 떨어져 죽습니다.
그런데 나무뿌리를 곁에 있는 쥐구멍에서 두 마리의 쥐가 교대로 나와서 그 나무뿌리를 갉아 먹습니다. 밑을 보니 뱀의 소굴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고뇌스럽겠습니까 피를 말리는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뇌를 잊기 위해 야생 벌들이 물어다 놓은 벌집에서 꿀을 찍어 먹으면서 그 고뇌를 잊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이것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임어당이라는 학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고아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원래 신학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도에 타락해서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무신론적인 저서를 펴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말년에 가서 돌아옵니다. 40년 만에 방황하다가 신앙 안으로 돌아오면서 말하기를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40년은 고아와 같은 생활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사람은 때로 큰 소리를 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인간은 그 시간부터 고아입니다. 그래서 내일 걱정을 해야 하고 살아갈 일을 걱정해야 하고 장래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고아이기 때문입니다. 고아는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혼자서 걱정하고 혼자서 염려하며 수고해야 합니다. 오늘 청소년들을 보십시오. 장래 문제 때문에 얼마나 고뇌가 많습니까 거기다 사람은 장차 죽을 일까지 걱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모두 허전해 하고 갈증을 느끼고 불만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면 갈증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3. 참만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고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이웃과 관계하고 친구와 관계하고 부부와 부모와 관련을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 관계가 잘 이루어지면 세상을 사는 것이 참 재미있고 기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상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오늘은 이 좋은 관계가 모두 깨지고 상실된 시대입니다. 가족과 이웃과 친구와의 관계가 모두 깨졌습니다. 유지되고 있다 해도 지극히 계산적이고 타산적입니다. 그러니 그런 관계에 얼마나 힘이 있고 깊은 정신이 들어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모두 마음이 공허한 것입니다. 허전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갈증이 많습니다. 메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있느냐” 아담이 대답합니다. “내가 숨었나이다.” 왜 숨었습니까 숨었다는 말은 관계가 깨졌다는 말입니다. 관계가 깨졌으니 숨었습니다. 여러준, 친구와 관계가 불편해 보십시오. 그러면 숨게 됩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습니다. 관계가 깨져서 그렇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러니까 숨은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오죽이나 불편하고 두렵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것입니다. 친구간에도 관계가 소원해지면 괴로운 법인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으니 그 마음의 고독함이나 갈등이나 불편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갈증을 느끼고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4. 병든 구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저마다 갈증을 느끼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병든 구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심각한 경쟁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산업 사회는 풍요로움과 문화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지만 상대적으로 상실한 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우선 인간성의 상실이 가장 큰 손실일 것입니다. 원망이 많아지고 탓하는 일이 많아지고 핑계가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병든 의식입니다. 이웃을 탓하고 원망하고 핑계하는 것은 병든 의식의 발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너희더러 먹으라 하더냐” 그러면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진실한 대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용서받을 수 있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12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이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대답입니다. 이번에는 하와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하와가 대답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상대를 유혹자로 보고 탓하며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병든 의식이고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친구가 숙제를 못했 왔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친구가 대신 해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대신 숙제를 해주면 내신 경쟁에서 내게 불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친구가 낙제를 해야 내가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병든 의식입니다. 이웃이 원망의 대상이 되고 불평의 대상이 되는 것, 이것이 병든 구조입니다. 우리 사회가 산업 사회가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몰려듭니다. 매일같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갑니다. 겉으로 보면 틀림없는 동료이고 친구인 것같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모두 적입니다. 모두 경쟁자들입니다. 그래서 은연중 서로 경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경쟁의식이 병든 의식을 만드어 냅니다. 그래서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소유하고 살면 우선 적개심이 발동합니다. 좋은 차를 보면 긁고 지나갑니다. 좋은 집을 보면 침을 뱉고 지나갑니다. 이것이 병든 구조 때문입니다.
아주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오늘의 입시 교육이 얼마나 병든 인격을 만들어 냅니까 무조건 상대를 적으로 여기게 하고 경쟁자로 여기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친구집에 늦게 전화를 해봅니다. 친구가 지금 잠을 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부하고 있다고 하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경쟁으로 끝나지 않고 병든 의식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누가 전화오면 잔다고 하라 해놓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구조 때문에 발생되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어디서 행복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누리며 소유하고 살면서도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 같은 병든 의식이 마침내는 생활 전반에 퍼져서 가정생활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하루
1,121쌍이 결혼을 하는데 190쌍이 이혼을 합니다. 이 같은 병든 구조 속에서 성격이 잘못 형성되어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불화해서 이혼하는 비율이 83.5%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두 고독과 불안과 불만 속에서 원망과 갈등을 지닌 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부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 좋던 에덴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린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서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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