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사랑하고 (창3:7-12)
본문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조개구이집이 잘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조개구이로 몰립니다. 전통찻집이 잘 된다 하면 너도나도 전통찻 집입니다. 요즈음 인기있는 텔런트가 연속극에서 예쁜 옷을 입으면 당장 텔 런트의 이름을 붙인 패션이 유행합니다. 심지어는 누구누구 머리 핀, 누구식의 헤어스타일이 금방 유행합니다. 힙합이 유행하면 누구나 바지를 헐렁하게 입고 다닙니다. 예외가 없어요. 전부 그 렇게 합니다. 내 나름의 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겁니다. 파리 패션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파리에서 그대로 따라 입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전부 자기 식을 창조하고 또 유행도 자 기에 맞게 변형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은 개성을 존중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또 프랑 스에서는 중학생까지는 석고 뎃생을 미술 시간에 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석고 뎃생은 하나의 모델을 주입해서 가치관을 획일 화시키고 개성을 말살한다는 거지요. 그냥 느끼는 데로 그리는데 중점을 둡니다. 나 나름의 표현에 충실해 보는 것을 가장 중시합니다. 남과 다른 나를 용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겁니다. 남과 다른 나를 가치 있게 평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단 적으로 말하면 자기 사랑의 훈련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자기 자신을 가꾸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자기 사랑이 싹이 틉니다.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자기가 있기 때문이지요. 생기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해 당당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 신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에덴 동산의 원래 아담과 하와도 그랬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 담과 하와는 자신에 대해 전혀 열등감을 갖거나 불만족하지 않았 습니다. 벌거벗은 몸이라도 넉넉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2:25) 비록 벌거벗고 있었지만 자신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갈등하거나 불만족하 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평화가 가득했습니다. 내적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타락하기 시작하는 아담은 자신에 대한 불만이 싹 텃습니다. 자신의 개성,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꾸려 하지 않고 남 잘 난 것이 보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 비교의 대상 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 을 알 줄을"(창3:5) 열등감이 찾아 왔습니다. 더 잘나 보이려는 욕망이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교만을 향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갈등하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지요. 자신과 화해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불만족스러 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로 향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있었나요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졌나요 자 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당당할 수 있었나요 하고 싶은 걸 다 해 본 아담과 하와는 갈등이 완전히 해소 되었나요 아닙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은 자기 자 신의 모습에 대한 수치심입니다. 옛날에는 아무 문제가 없던 자 신의 몰골에 대한 수치심입니다.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를 엮어 치마를 하였 더라"(창3:7)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로 치마를 만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 한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엮은 치마를 한다고 해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나요 자신에 대해 이미 수치심이 극에 달한 아담 과 하와가 나뭇잎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고 해서 수치심이 가려지 나요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7절)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에 숨은지라 '(8절)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10절) 가리고, 숨고, 피하는 모 습이 3장에 집중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가리고 숨고 피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갈등의 표시입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갈등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가리고 숨고 피하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 이후로 가인도 똑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에 대해 항상 불만족하고 갈등했습니다. 남과 비교된 자신과 화해 할 수 없었 습니다. 끊임없이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결국은 더 높아지기 위해, 살인을 합니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인간은 필경 이웃과 도 화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해하게 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인간은 이웃을 증오하고 살해합니다. 이 것이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열등감에 시달리던 인간은 이내 우월감에도 쉽게 빠져듭니다. 그래서 열등감과 교만심은 동전의 앞, 뒷면입니다. 열등감 을 뒤집으면 교만이 됩니다. 이후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과 이 웃에게 교만해 지는지는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해 가르친 말씀을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 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 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여기서 율법은 율법서를 말하고 선지자는 예언서를 말합니다. 말 하자면 예수님 당시의 구약 성경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 의 강령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 다음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바로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 니" (39절) 이 구절을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그 양 만큼 너의 이웃을 사랑하 라" (Love your neighbor as much as you love yourself-Living Bible) 자기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똑 같은 비중과 그만한 정성으 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까 이것도 명령입니다. 자 그러면 비교를 해 봅시다. 가령 자신의 몸을 손톱만큼 사랑한 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웃을 아주 조금 사랑해도 됩니다. 왜요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으니까요.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태평양 바다처럼 사랑한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이웃도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왜요 "네 몸만큼" 사랑해야 하니까요. 만약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고 칩시다. 그러 면 "네 몸과 같이" 한다면 이웃도 증오해야 마땅합니다. 원리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웃사랑이 먼저 입니까, 아니면 네 몸 사랑 이 먼저 입니까 '네 몸 사랑' 즉 자기 사랑이 먼저입니다. 자기 사랑이 이웃 사랑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기 사랑은 이 웃 사랑의 모체입니다. 어머니의 자궁이 없는 아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자기 사랑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 자신을 버 리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하니까, 너무 자신을 부정하는데 만 초 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지나치게 고난 콤플렉스에 빠져 있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죄악인양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무엇을 혼동하고 있습니까 자기 사랑과 이기심을 혼동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사랑과(愛己) 이기심(利己心)은 다릅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기심은 '자기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그거 서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가두어 놓 습니다. 이거 이기심입니다. 그러나 삼단 폭포처럼 차 오를수록 자꾸 자꾸 아래로 흘러가는 사랑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기 사랑입니다. 히브리어로 '에덴'은 기쁨,환희,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에덴'이라는 말이 제귀동사가 되면 '주색에 빠지다'라는 말 뜻이 된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되 그 사랑이 밖으로 향해 뻗어나가면, 기쁨 이요, 환희요 아름다움이 되는 겁니다. 애기(愛己)입니다.
하지 만, 자기 사랑이 자기 안으로만 향하고 있을 때는 타락하고 추해 보이는 것이 됩니다. 이기심(利己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의 발원지입니다. 발원지는 물을 흘려 보내야 의미가 있습니다. 흘러가지 않는 발원지는 세상에 없습니다. 또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의 발전소입니다. 전기를 내 보내지 않는 발전소는 없습니다. 발전소는 전기를 내 보냄으로써 전기 생 산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을 해 보세요. 발원지에 물이 말랐다고 가정 을 해 보세요. 발전소에 전기가 충전되지 않고 있다고 가정해 보 세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자기 자신을 풍부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원지는 물을 풍족하게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힘있게 사랑 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소는 전기를 강력하게 내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만큼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잘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하나님 사랑이 제일 우 선이요, 그 다음은 자기 사랑이요, 그 다음은 이웃 사랑입니다.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단 폭포 원리입니다. 삼단 폭포는 위에서 물이 내 려와야 합니다. 그 만큼 아래로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제일 위의 폭포가 흘러 넘쳐야 자기 사랑이라는 이단 폭 포가 넘칩니다. 자기 사랑의 폭포가 넘쳐야 이웃사랑이라는 마지 막 폭포가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잘 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꼭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하나님 사랑에서 이웃 사랑으로 마구 넘어 갑니다. 자기 자 신은 메마르고, 그러다가 황폐해 집니다. 그러면 이웃사랑은 의 무감이나 윤리로만 남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되고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식에 넘치는 메마른 율법주의자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파괴하고 이웃도 파멸시킵니다. 명심하시 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은 인간은 자신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자 신과 화해하지 않은 인간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창조된 여러분의 지금 형편과 지금의 모습 을 그대로 참으로 존중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참으로 존중하고 소 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개성을 참으로 멋있어 합니다. 다듬고 가꾸면 빛나는 보석이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우주적인 대가를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는 그대로의 처지를 사랑하고, 자신의 개성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환경을 사랑하고, 자신의 약점들을 사랑하십시오.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 고, 자신의 미래를 사랑하십시오. (기도문)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듯,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흘러 넘쳐, 참으로 자신과 화해하 게 하여 주옵소서. 자신을 용납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사랑이 이웃들을 풍성하게 하는 힘이 되게 하소서.
첫째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 이후로 가인도 똑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에 대해 항상 불만족하고 갈등했습니다. 남과 비교된 자신과 화해 할 수 없었 습니다. 끊임없이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결국은 더 높아지기 위해, 살인을 합니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인간은 필경 이웃과 도 화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해하게 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인간은 이웃을 증오하고 살해합니다. 이 것이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열등감에 시달리던 인간은 이내 우월감에도 쉽게 빠져듭니다. 그래서 열등감과 교만심은 동전의 앞, 뒷면입니다. 열등감 을 뒤집으면 교만이 됩니다. 이후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과 이 웃에게 교만해 지는지는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해 가르친 말씀을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 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 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여기서 율법은 율법서를 말하고 선지자는 예언서를 말합니다. 말 하자면 예수님 당시의 구약 성경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 의 강령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 다음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바로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 니" (39절) 이 구절을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그 양 만큼 너의 이웃을 사랑하 라" (Love your neighbor as much as you love yourself-Living Bible) 자기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똑 같은 비중과 그만한 정성으 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까 이것도 명령입니다. 자 그러면 비교를 해 봅시다. 가령 자신의 몸을 손톱만큼 사랑한 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웃을 아주 조금 사랑해도 됩니다. 왜요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으니까요.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태평양 바다처럼 사랑한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이웃도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왜요 "네 몸만큼" 사랑해야 하니까요. 만약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고 칩시다. 그러 면 "네 몸과 같이" 한다면 이웃도 증오해야 마땅합니다. 원리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웃사랑이 먼저 입니까, 아니면 네 몸 사랑 이 먼저 입니까 '네 몸 사랑' 즉 자기 사랑이 먼저입니다. 자기 사랑이 이웃 사랑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기 사랑은 이 웃 사랑의 모체입니다. 어머니의 자궁이 없는 아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자기 사랑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 자신을 버 리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하니까, 너무 자신을 부정하는데 만 초 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지나치게 고난 콤플렉스에 빠져 있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죄악인양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무엇을 혼동하고 있습니까 자기 사랑과 이기심을 혼동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사랑과(愛己) 이기심(利己心)은 다릅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기심은 '자기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그거 서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가두어 놓 습니다. 이거 이기심입니다. 그러나 삼단 폭포처럼 차 오를수록 자꾸 자꾸 아래로 흘러가는 사랑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기 사랑입니다. 히브리어로 '에덴'은 기쁨,환희,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에덴'이라는 말이 제귀동사가 되면 '주색에 빠지다'라는 말 뜻이 된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되 그 사랑이 밖으로 향해 뻗어나가면, 기쁨 이요, 환희요 아름다움이 되는 겁니다. 애기(愛己)입니다.
하지 만, 자기 사랑이 자기 안으로만 향하고 있을 때는 타락하고 추해 보이는 것이 됩니다. 이기심(利己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의 발원지입니다. 발원지는 물을 흘려 보내야 의미가 있습니다. 흘러가지 않는 발원지는 세상에 없습니다. 또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의 발전소입니다. 전기를 내 보내지 않는 발전소는 없습니다. 발전소는 전기를 내 보냄으로써 전기 생 산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을 해 보세요. 발원지에 물이 말랐다고 가정 을 해 보세요. 발전소에 전기가 충전되지 않고 있다고 가정해 보 세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자기 자신을 풍부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원지는 물을 풍족하게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힘있게 사랑 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소는 전기를 강력하게 내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만큼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잘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하나님 사랑이 제일 우 선이요, 그 다음은 자기 사랑이요, 그 다음은 이웃 사랑입니다.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단 폭포 원리입니다. 삼단 폭포는 위에서 물이 내 려와야 합니다. 그 만큼 아래로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제일 위의 폭포가 흘러 넘쳐야 자기 사랑이라는 이단 폭 포가 넘칩니다. 자기 사랑의 폭포가 넘쳐야 이웃사랑이라는 마지 막 폭포가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잘 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꼭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하나님 사랑에서 이웃 사랑으로 마구 넘어 갑니다. 자기 자 신은 메마르고, 그러다가 황폐해 집니다. 그러면 이웃사랑은 의 무감이나 윤리로만 남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되고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식에 넘치는 메마른 율법주의자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파괴하고 이웃도 파멸시킵니다. 명심하시 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은 인간은 자신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자 신과 화해하지 않은 인간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창조된 여러분의 지금 형편과 지금의 모습 을 그대로 참으로 존중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참으로 존중하고 소 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개성을 참으로 멋있어 합니다. 다듬고 가꾸면 빛나는 보석이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우주적인 대가를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는 그대로의 처지를 사랑하고, 자신의 개성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환경을 사랑하고, 자신의 약점들을 사랑하십시오.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 고, 자신의 미래를 사랑하십시오. (기도문)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듯,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흘러 넘쳐, 참으로 자신과 화해하 게 하여 주옵소서. 자신을 용납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사랑이 이웃들을 풍성하게 하는 힘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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