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창33:1)
본문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안에 있었던 모든 문제들을 기도하므로 해결한 야곱은 이제 담대하게 얍복 강을 건넜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는 장면에서 에서는 자기의 군대 400명을 거느리고 왔고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환도뼈를 다쳤기 때문에 다리 한쪽을 절며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여 나아가면서 쉴새없이 고개를 숙여 형에게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도 지금 같은 인사는 아닙니다. 우리처럼 무릎 꿇고 하는 인사는 그들에게는 없는 인사법 입니다. 동양권에만 그런 인사법이 있어요. 그러니까 인사하는 것도 보면 그 목을 안고 울면서 포옹하는 것이지요. 울면서 “내가 형님 보니 하나님 얼굴 보는 것 같소.” “이 큰 떼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복주신 큰 떼니 뚝 떼어 반 가지시요.” 반이나 주겠다 한 말은 무슨 말입니까 표현법으로 해서는 전체를 주겠다는 뜻입니다. 내 나라 반이나 주겠다 하는 그런 것은 막판 거래 입니다. 이제 그래놓고도 종들은 앞에 세우고 자기가 제일 예뻐한 라헬은 뒤에 세우고 아차 하면 반떼 가지고 도망칠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것 큰놈 쫓으니라고 정신 없는데 나를 쫓아 오겠소 아주 야곱이 장삿속이 능합니다. 아주 그렇게 작전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니까 야곱이 얼만큼 꾀가 많습니까 그러니 얍복 강 가에서 밤 새우고 궁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판 사판입니다. 뒤로 돌아서 삼촌한테는 갈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못가게 되니까 밤새껐 하나님 앞에 엎드렸는데, 그것을 “하나님과 씨름했다”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다. 그렇게 해서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자라!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도 그 씨름한 사람 안 놓아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를 놓아라”하니까 “아니요. 나를 복주기 전에는 못놓겠소.”
그런데 그 때 야곱이 묻습니다.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왜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이름으로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묻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니까 “야곱입니다”하고 대답하지요. 그래서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즉 하나님을 이긴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2장 31절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했는데, “해가 뜨더라”고 한 것은, 그 어두운 고통이 다 지난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꺾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 행위를 보아서는 복받을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자기 형님한테 죽어도 마땅할 인격 밖에는 안됩니다. 그 씨름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단지 아브라함의 장막에 사람의 몸을 입고 가셔서 교제했던 그 분이 여기서는 야곱과 싸우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거기 씨름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요즘같은 씨름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이 굉장히 강력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도망도 못갈 입장으로 지금 하나님 앞에 이판사판으로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진실하셔야 됩니다. 야곱의 그 행위를 보아서는 믿음을 따라서 산 것이 아닙니다. 순 사깃꾼 입니다. 그 동안 했던 일이 그 행동의 중심으로 보아서는 순 도둑질 하고 돌아온 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떼를 일으킨 것 뿐입니다. 야곱이 축복 받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단지 하나님이 그 언약의 진실 안에서 아브라함의 씨로 오시도록 약속하셨고 바로 그 구원약속을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약속 때문에 야곱과 함께 하시고 복을 주셔서 야곱에게 진 것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언약의 땅으로 부르실 때 그를 꺾으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 수 있는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제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야곱은 여종과 자식들을 옆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서 형 에서를 향하여 사랑과 두려움 섞인 공경의 태도를 보이면서 형이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며 나아갔습니다. 야곱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이제 그런 처절한 사투를 거친 야곱의 모습은 한쪽 다리의 환도뼈가 상했으므로 바로 걸을 수도 없어서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형 에서 앞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밤새 씨름했기 때문에 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에서 앞에 나아오는 야곱의 모습을 보는 형 에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됐든 여기서 에서의 대인다운 풍모가 나타납니다. 죽이려고 20년 한을 품고 왔지만 야곱의 그런 처절한 모습을 보는 순간 20년 묵은 한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형제로서의 정이 왈칵 솟아났습니다. 모든 생각 다 잊고서 동생 야곱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모든 옛일은 다 용서하고 화해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큰 두려움으로 형 앞에 나아갔는데 뜻밖에도 형이 반갑게 맞아주었으므로 자신도 형의 눈물 앞에서 지나간 날에 형을 속이고 마음 아프게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사죄의 눈물을 진정으로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제는 목을 어긋 맞기고 입맞추고 피차 울었습니다. 에서는 눈을 들어 야곱 곁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야곱의 자식들은 가장 큰 아이라고 해야 14살을 넘기지 않았을 열 하나의 소년들 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네 아내가 함께 있었습니다. 에서는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야곱은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 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아이들과 아내 넷이 차례로 에서에게 나아와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야곱이 자기에게 보낸 많은 선물들을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한사코 이 선물들을 받아 줄 것을 강청합니다. 야곱의 생각에 에서가 그 선물들을 안받는 것은 자기를 향한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물들을 되돌려 받는 것은, 또 언제 에서의 마음이 변해서 자기를 치러 올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인간적인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도 기어코 선물을 받아 줄 것을 간청합니다.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야곱의 지금 경우는 선물이라기 보다는 뇌물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야곱은 선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에서는 야곱의 강권에 못이겨 선물을 받아들입니다. 야곱의 선물을 받아들인 에서의 얼굴을 보면서 야곱은 에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의 선물을 받을 때 이제는 어느정도 안심할 수 있다고 하는 안도감을 느꼈고 거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자비의 손길이 함게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서 진정한 화해의 내용을 읽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용서하시는) 본 것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야곱은 너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그만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에서는 야곱과 동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도 형 에서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다 가시지 않아서 형과 함께 있는 것 조차도 겁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짐승들과 자식들이 어리고 둔하므로 행보를 따라갈 수 없다는 핑게를 대서 형을 먼저 가라고 한 다음 곧 뒤따라 가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에서는 나쁜 뜻으로가 아니라 자기의 종자들을 야곱의 곁에 둠으로 동생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 야곱은 형을 완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도 보면 야곱 안에 옛 본성이 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도망칠 준비 다 하고 건너가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형님이 “내가 호위자가 되마” 그러니까 야곱이 불안합니다. 죄짓고 아버지 밥상에서 밥 먹으면 불안하지요 빨리 물 말아서 살살 먹어버리고 옆방 가야 시원하지. 아 형님은 그냥 마음을 확 풀었는가 몰라도 형님 속은 단순하단 말이요. 형님을 믿을 수도 없겠지요. 누가 속닥 속닥하면 변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에서의 기질입니다. 아무튼 형님을 쫄쫄 따라다니는 것이 겁나고 400명이나 되는 동맹군이 있는데 겁나요! “먼저 가십시요. 형님을 뵙는 것이 하나님을 뵙는 것 같은데 이 양새끼가 많고 새끼들도 있는데 형님 말 하고 같은 속도로 몰면 다 죽소. 그러니까 내가 천천히 갈테니까 형님이 먼저 가서 계시면 내가 형님을 가서 뵈올랍니다. 먼저 가십시요.” 에서는 속이 좋아가지고 “내가 네 보호자가 되마. 같이 가자.” 했는데, 야곱은 아니어요. 같이 있으면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야곱을 꺾으셔서 그는 이제는 그 전처럼 살 수 없는데도 옛 본성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새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새 이름을 부를 때는 벧엘로 돌아와서 입니다. 그 전에는 새 이름을 주어놓고도 이스라엘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3
5장에 보면 벧엘로 돌아왔는데 부르지를 않습니다. 야곱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고 거기에 거주하는 아버지 이삭에게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같은 날 세일산으로 떠났지만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외양간을 지었습니다. 얼마동안 거기에 머무른 야곱은 요단 나루를 건너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기 전에 벧엘에서 하나님께 맹세하며 요청했던 일이 이제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평안히 아비의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야곱은 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일백 개를 주고 샀습니다. 이제 그곳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곳이었고 장래에는 그 땅이 자기의 후손들에게 주어질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전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 했던 것처럼(12:7)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 즉 “하나님(전능하신 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야곱이 가나안에 돌아옴으로 그의 할일은 거의 다 하였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열 두번째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고 그 12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하나님의 눈으로 살펴볼 때 한 민족을 이루는 기초로서 봉사하는 생애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고난 가운데서 참 언약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에 의한 언약의 성취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고 야곱의 모든 인간적인(육적인) 욕망이 깨졌을 때 하나님의 (영적인)방법으로 에서와 화해하게 하시므로 야곱을 가나안에 무사히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언약의 씨를 출생키 위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일에 야곱의 생애가 뜻있게 사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와 깉은 방법으로 계속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육의 완전한 깨어짐이 없이는 우리의 생애에 진정한 화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옛사람의 깨어짐을 위하여 성령님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영으로 사는 삶을 이룰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엘엘로헤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 고백하는 날,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야곱이 묻습니다.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왜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이름으로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묻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니까 “야곱입니다”하고 대답하지요. 그래서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즉 하나님을 이긴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2장 31절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했는데, “해가 뜨더라”고 한 것은, 그 어두운 고통이 다 지난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꺾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 행위를 보아서는 복받을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자기 형님한테 죽어도 마땅할 인격 밖에는 안됩니다. 그 씨름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단지 아브라함의 장막에 사람의 몸을 입고 가셔서 교제했던 그 분이 여기서는 야곱과 싸우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거기 씨름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요즘같은 씨름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이 굉장히 강력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도망도 못갈 입장으로 지금 하나님 앞에 이판사판으로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진실하셔야 됩니다. 야곱의 그 행위를 보아서는 믿음을 따라서 산 것이 아닙니다. 순 사깃꾼 입니다. 그 동안 했던 일이 그 행동의 중심으로 보아서는 순 도둑질 하고 돌아온 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떼를 일으킨 것 뿐입니다. 야곱이 축복 받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단지 하나님이 그 언약의 진실 안에서 아브라함의 씨로 오시도록 약속하셨고 바로 그 구원약속을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약속 때문에 야곱과 함께 하시고 복을 주셔서 야곱에게 진 것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언약의 땅으로 부르실 때 그를 꺾으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 수 있는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제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야곱은 여종과 자식들을 옆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서 형 에서를 향하여 사랑과 두려움 섞인 공경의 태도를 보이면서 형이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며 나아갔습니다. 야곱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고 이제 그런 처절한 사투를 거친 야곱의 모습은 한쪽 다리의 환도뼈가 상했으므로 바로 걸을 수도 없어서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형 에서 앞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밤새 씨름했기 때문에 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에서 앞에 나아오는 야곱의 모습을 보는 형 에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됐든 여기서 에서의 대인다운 풍모가 나타납니다. 죽이려고 20년 한을 품고 왔지만 야곱의 그런 처절한 모습을 보는 순간 20년 묵은 한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형제로서의 정이 왈칵 솟아났습니다. 모든 생각 다 잊고서 동생 야곱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모든 옛일은 다 용서하고 화해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큰 두려움으로 형 앞에 나아갔는데 뜻밖에도 형이 반갑게 맞아주었으므로 자신도 형의 눈물 앞에서 지나간 날에 형을 속이고 마음 아프게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사죄의 눈물을 진정으로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제는 목을 어긋 맞기고 입맞추고 피차 울었습니다. 에서는 눈을 들어 야곱 곁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야곱의 자식들은 가장 큰 아이라고 해야 14살을 넘기지 않았을 열 하나의 소년들 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네 아내가 함께 있었습니다. 에서는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야곱은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 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아이들과 아내 넷이 차례로 에서에게 나아와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야곱이 자기에게 보낸 많은 선물들을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한사코 이 선물들을 받아 줄 것을 강청합니다. 야곱의 생각에 에서가 그 선물들을 안받는 것은 자기를 향한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물들을 되돌려 받는 것은, 또 언제 에서의 마음이 변해서 자기를 치러 올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인간적인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도 기어코 선물을 받아 줄 것을 간청합니다.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야곱의 지금 경우는 선물이라기 보다는 뇌물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야곱은 선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에서는 야곱의 강권에 못이겨 선물을 받아들입니다. 야곱의 선물을 받아들인 에서의 얼굴을 보면서 야곱은 에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의 선물을 받을 때 이제는 어느정도 안심할 수 있다고 하는 안도감을 느꼈고 거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자비의 손길이 함게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서 진정한 화해의 내용을 읽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용서하시는) 본 것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야곱은 너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그만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에서는 야곱과 동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도 형 에서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다 가시지 않아서 형과 함께 있는 것 조차도 겁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짐승들과 자식들이 어리고 둔하므로 행보를 따라갈 수 없다는 핑게를 대서 형을 먼저 가라고 한 다음 곧 뒤따라 가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에서는 나쁜 뜻으로가 아니라 자기의 종자들을 야곱의 곁에 둠으로 동생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 야곱은 형을 완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도 보면 야곱 안에 옛 본성이 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도망칠 준비 다 하고 건너가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형님이 “내가 호위자가 되마” 그러니까 야곱이 불안합니다. 죄짓고 아버지 밥상에서 밥 먹으면 불안하지요 빨리 물 말아서 살살 먹어버리고 옆방 가야 시원하지. 아 형님은 그냥 마음을 확 풀었는가 몰라도 형님 속은 단순하단 말이요. 형님을 믿을 수도 없겠지요. 누가 속닥 속닥하면 변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에서의 기질입니다. 아무튼 형님을 쫄쫄 따라다니는 것이 겁나고 400명이나 되는 동맹군이 있는데 겁나요! “먼저 가십시요. 형님을 뵙는 것이 하나님을 뵙는 것 같은데 이 양새끼가 많고 새끼들도 있는데 형님 말 하고 같은 속도로 몰면 다 죽소. 그러니까 내가 천천히 갈테니까 형님이 먼저 가서 계시면 내가 형님을 가서 뵈올랍니다. 먼저 가십시요.” 에서는 속이 좋아가지고 “내가 네 보호자가 되마. 같이 가자.” 했는데, 야곱은 아니어요. 같이 있으면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야곱을 꺾으셔서 그는 이제는 그 전처럼 살 수 없는데도 옛 본성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새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새 이름을 부를 때는 벧엘로 돌아와서 입니다. 그 전에는 새 이름을 주어놓고도 이스라엘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3
5장에 보면 벧엘로 돌아왔는데 부르지를 않습니다. 야곱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고 거기에 거주하는 아버지 이삭에게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같은 날 세일산으로 떠났지만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외양간을 지었습니다. 얼마동안 거기에 머무른 야곱은 요단 나루를 건너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기 전에 벧엘에서 하나님께 맹세하며 요청했던 일이 이제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평안히 아비의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야곱은 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일백 개를 주고 샀습니다. 이제 그곳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곳이었고 장래에는 그 땅이 자기의 후손들에게 주어질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전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 했던 것처럼(12:7)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 즉 “하나님(전능하신 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야곱이 가나안에 돌아옴으로 그의 할일은 거의 다 하였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열 두번째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고 그 12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하나님의 눈으로 살펴볼 때 한 민족을 이루는 기초로서 봉사하는 생애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고난 가운데서 참 언약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에 의한 언약의 성취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고 야곱의 모든 인간적인(육적인) 욕망이 깨졌을 때 하나님의 (영적인)방법으로 에서와 화해하게 하시므로 야곱을 가나안에 무사히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언약의 씨를 출생키 위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일에 야곱의 생애가 뜻있게 사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와 깉은 방법으로 계속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육의 완전한 깨어짐이 없이는 우리의 생애에 진정한 화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옛사람의 깨어짐을 위하여 성령님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영으로 사는 삶을 이룰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엘엘로헤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 고백하는 날,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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