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가정의 개혁 (창35:1)
본문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돌아선 이후 10여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버지 이삭의 장막(하나님의 언약이 머무르는)에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에 그가 에서를 피하여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과 서원하였던 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평화를 주지 않으셨고, 결국 이러한 야곱의 머뭇거림 때문에 딸 디나가 불행에 빠졌고, 그에 따른 지나친 보복의 행위로 인하여 사면초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야곱 가정의 지나친 복수로 인하여 가나안 지방의 여러 부족들로 부터 화를 입을 위험에 직면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당한 것은 전적으로 야곱의 책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셨던 일을 기억하시고 야곱을 돌아 보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벧엘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벧엘에서(하나님께서 사닥다리 위에서 야곱의 장래를 인도하시기로 약속하셨던) 다시 한번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야곱은 가나안 땅에 돌아왔을 때 벧엘에서의 서원을 기억하여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벧엘은 잊혀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정이 환란에 빠졌을 때 야곱에게 나타나시고 다시금 벧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전에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서원(27:1-22)을 기억하였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너무나도 부정한 죄가운데 빠져있는 자기 가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자신을 정결케 하고 가족들을 정결케 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전에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의 신상(드라빔)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야곱의 장막에 은연중 이방신인 우상이 섞여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그 지역의 모든 주민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多神敎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야곱은 우상 숭배자와 섞여 살았고 자기 아내 라헬이 그토록 열렬하게 우상을 섬기는데도 그것을 묵인하였습니다. 이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제사를 받으셨고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자비였습니다. 그럴찌라도 야곱의 잘못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야곱의 타락과 위험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일에도 하나님은 은혜로써 모든 문제들을 덮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벧엘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서 자신의 모든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즉시로 벧엘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여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라헬의 드라빔과 모든 우상을 섬기는 신물들을 함께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파묻은 것은 우상의 오염으로 부터 마음을 정결케 하는 표식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을 정결케 하는 것과 마음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몸을 깨끗이 하므로 정신도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야곱의 장막에 일대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청결케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지려면 먼저 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마침내 야곱의 장막은 성결케 되었습니다. 야곱의 언약 장막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다시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준비를 갖췄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떠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죄악으로 인한 위험으로 부터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세겜 사람들의 멸망으로 인하여 인근의 모든 민족들은 야곱의 가족들에게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직접 일어나 복수하려고 나서는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두려움을 갖게 하시므로 그들이 감히 야곱의 가족들에게 복수하려고 나아가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여호와를 예배할 단을 쌓음으로 서원을 다 이루고난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고 예배한 후 거기에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고 야곱은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 나무 밑에 장사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부터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 즉 “곡함의 상수리”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야곱의 집이 드보라의 죽음을 슬퍼하였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습니다. 드보라는 리브가가 자기 며느리들과 손자들을 보살피도록 보냈든지 아니면 자기 여주인 리브가가 죽고난 이후 자진하여 야곱의 집으로 왔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녀를 영구히 기념했던 것은 그녀가 야곱의 집에서 신실하고 높이 평가된 종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셨고 그의 이름도 이스라엘이라고 확실히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용서하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축복을 야곱에게 허락하셨는데 다시 한번 그 약속을 반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 거듭 신실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한 국민을 이루고 많은 국민을 이루게 할 것이고 야곱의 허리에서 왕들이 나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수다한 백성이 나게 하시고 민족을 이루므로 나라가 번창하여 왕들이 다스리는 왕국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야곱 개인의 명예와 축복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서 떠나 올라 가시고난 후 오래동안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야곱의 가족들은 가나안에서 많은 연단을 받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실성을 확증한 후 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고 시험에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야곱도 그 언약을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기념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돌기둥은 하나님과 야곱 사이의 언약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벧엘에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살았던 마므레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이미 죽었습니다. 야곱은 전에도 아버지 이삭을 방문한 적이 있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모든 가족을 거느리고 조상으로 부터 상속받을 땅(약속된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앞길은 순탄하지가 못했습니다. 이제는 여러가지 시련이 계속해서 야곱을 괴롭혔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이었습니다.
둘째, 장자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근친상간의 범죄를 한 일은 야곱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셋째, 아버지 이삭의 죽음은 더 큰 슬픔을 주었습니다.
넷째,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그의 형들이 애굽의 상인들에게 팔고 아버지를 속인 일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요셉이 맹수에게 갈갈이 찢겨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슬퍼합니다. 다섯째, 이러한 슬픔으로 인해 기진맥진해 있는 가운데 그 땅에 기근이 발생합니다. 여섯째, 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하게 되는데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 조차 빼앗기는 슬픔을 당합니다. 야곱은 이렇게 극한 상황에서 가혹한 투쟁을 해야 했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많은 재난으로 연단을 받으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미래(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마므레로 가는 도중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고 죽었습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라헬은 자신의 슬픔에만 관심이 있었고 언약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출생한 것은 분명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언약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아이의 이름을 베냐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통해 야곱은 이제 열 두 명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인하여 기쁨을 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보낸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야곱이 너무도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징계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더 큰 은혜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당신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 가운데에서 야곱을 도구로 쓰셔서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아내 라헬을 무덤에 매장시키면서 미래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나타냈습니다. 그러한 슬픔 가운데서도 야곱은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선택된 백성에게 계속 환란이 임하였는데, 그것은 사단의 궤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장자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이 이 일로 인하여 그 당시에는 침묵을 지켰지만 그것은 그러한 죄에 대한 묵인이 아니라 너무도 엄청난 슬픔으로 인하여 그의 경건한 가슴이 타는듯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모든 외적으로 드러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은 자신의 임종시에 아들들을 축복할 때에 장자인 르우벤에게 내릴 축복을 거절하였습니다(49:31-33).
라헬을 먼저 보낸 슬픔과 장자 르우벤의 치욕적인 기억을 지닌 채 야곱은 마침내 이삭이 있던 마므레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생애에 많은 환란과 고통을 보면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던 것처럼 우리는 성도의 생애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새롭게 갱신하고 새롭게 되는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입는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야곱 가정에 우상이 존재하였는데 우리에게는 그러면 우상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실상 하나님 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다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실상 하나님 보다는 돈을 더 사랑하고 또 어떤 때는 명예에도 집착하게 됩니다. 또 사실 먹는 일에 자꾸 매입니다. 우리가 이런 육적인 욕망에 있어서 깨끗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데에서 늘 상당히 많이 벗어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우리의 전적인 산업이 되어야 하고 예수 믿는 일이 우리의 전공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늘 그렇지를 못하고 예수 믿는 일이 맨 나중에 할 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란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환란이 떠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환란이 있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환란이 있어야 기도하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환란 당하는 것은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그런 범죄를 하고도 야곱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기업을 받은 하나의 지파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 해서 르우벤의 잘못이 잊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로서의 명예를 지녔음에도 범죄하여 자신의 명예 만큼 큰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르우벤의 일은 큰 교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일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제 이삭이 나이 많아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삭이 자기 인생 여정을 통해서 해야할 일들을 다 이루고 떠났음을 말해 줍니다. 이삭이 죽자 에서와 야곱은 아브라함이 사 두었던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후 에서는 영원히 가나안을 떠나 에돔에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의 자손들은 번성해 나갔지만 역시 그들은 언약 밖에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집은 가나안에서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벧엘로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약을 확증해 주셨는데 그 이후의 야곱의 행보는 별로 가볍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에 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실제로 야곱의 가정에는 계속된 환란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전부가 다 망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세상에서의 번영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번성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땅위에 사는 성도는 그 나라를 세우기까지 고난의 때를 거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성도의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이러한 환란을 잘 견디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에 동참하는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의 뒤를 따라가는 믿음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평화를 주지 않으셨고, 결국 이러한 야곱의 머뭇거림 때문에 딸 디나가 불행에 빠졌고, 그에 따른 지나친 보복의 행위로 인하여 사면초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야곱 가정의 지나친 복수로 인하여 가나안 지방의 여러 부족들로 부터 화를 입을 위험에 직면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당한 것은 전적으로 야곱의 책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셨던 일을 기억하시고 야곱을 돌아 보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벧엘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벧엘에서(하나님께서 사닥다리 위에서 야곱의 장래를 인도하시기로 약속하셨던) 다시 한번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야곱은 가나안 땅에 돌아왔을 때 벧엘에서의 서원을 기억하여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벧엘은 잊혀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정이 환란에 빠졌을 때 야곱에게 나타나시고 다시금 벧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전에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서원(27:1-22)을 기억하였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너무나도 부정한 죄가운데 빠져있는 자기 가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자신을 정결케 하고 가족들을 정결케 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전에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의 신상(드라빔)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야곱의 장막에 은연중 이방신인 우상이 섞여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그 지역의 모든 주민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多神敎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야곱은 우상 숭배자와 섞여 살았고 자기 아내 라헬이 그토록 열렬하게 우상을 섬기는데도 그것을 묵인하였습니다. 이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제사를 받으셨고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자비였습니다. 그럴찌라도 야곱의 잘못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야곱의 타락과 위험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일에도 하나님은 은혜로써 모든 문제들을 덮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벧엘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서 자신의 모든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즉시로 벧엘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여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라헬의 드라빔과 모든 우상을 섬기는 신물들을 함께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파묻은 것은 우상의 오염으로 부터 마음을 정결케 하는 표식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을 정결케 하는 것과 마음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몸을 깨끗이 하므로 정신도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야곱의 장막에 일대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청결케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지려면 먼저 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마침내 야곱의 장막은 성결케 되었습니다. 야곱의 언약 장막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다시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준비를 갖췄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떠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죄악으로 인한 위험으로 부터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세겜 사람들의 멸망으로 인하여 인근의 모든 민족들은 야곱의 가족들에게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직접 일어나 복수하려고 나서는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두려움을 갖게 하시므로 그들이 감히 야곱의 가족들에게 복수하려고 나아가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여호와를 예배할 단을 쌓음으로 서원을 다 이루고난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고 예배한 후 거기에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고 야곱은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 나무 밑에 장사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부터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 즉 “곡함의 상수리”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야곱의 집이 드보라의 죽음을 슬퍼하였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습니다. 드보라는 리브가가 자기 며느리들과 손자들을 보살피도록 보냈든지 아니면 자기 여주인 리브가가 죽고난 이후 자진하여 야곱의 집으로 왔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녀를 영구히 기념했던 것은 그녀가 야곱의 집에서 신실하고 높이 평가된 종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셨고 그의 이름도 이스라엘이라고 확실히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용서하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축복을 야곱에게 허락하셨는데 다시 한번 그 약속을 반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 거듭 신실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한 국민을 이루고 많은 국민을 이루게 할 것이고 야곱의 허리에서 왕들이 나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수다한 백성이 나게 하시고 민족을 이루므로 나라가 번창하여 왕들이 다스리는 왕국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야곱 개인의 명예와 축복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서 떠나 올라 가시고난 후 오래동안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야곱의 가족들은 가나안에서 많은 연단을 받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실성을 확증한 후 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고 시험에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야곱도 그 언약을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기념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돌기둥은 하나님과 야곱 사이의 언약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벧엘에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살았던 마므레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이미 죽었습니다. 야곱은 전에도 아버지 이삭을 방문한 적이 있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모든 가족을 거느리고 조상으로 부터 상속받을 땅(약속된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앞길은 순탄하지가 못했습니다. 이제는 여러가지 시련이 계속해서 야곱을 괴롭혔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이었습니다.
둘째, 장자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근친상간의 범죄를 한 일은 야곱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셋째, 아버지 이삭의 죽음은 더 큰 슬픔을 주었습니다.
넷째,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그의 형들이 애굽의 상인들에게 팔고 아버지를 속인 일이 발생합니다. 야곱은 요셉이 맹수에게 갈갈이 찢겨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슬퍼합니다. 다섯째, 이러한 슬픔으로 인해 기진맥진해 있는 가운데 그 땅에 기근이 발생합니다. 여섯째, 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하게 되는데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 조차 빼앗기는 슬픔을 당합니다. 야곱은 이렇게 극한 상황에서 가혹한 투쟁을 해야 했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많은 재난으로 연단을 받으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미래(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마므레로 가는 도중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고 죽었습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라헬은 자신의 슬픔에만 관심이 있었고 언약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출생한 것은 분명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언약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아이의 이름을 베냐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통해 야곱은 이제 열 두 명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인하여 기쁨을 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보낸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야곱이 너무도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징계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더 큰 은혜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당신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 가운데에서 야곱을 도구로 쓰셔서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아내 라헬을 무덤에 매장시키면서 미래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나타냈습니다. 그러한 슬픔 가운데서도 야곱은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선택된 백성에게 계속 환란이 임하였는데, 그것은 사단의 궤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장자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이 이 일로 인하여 그 당시에는 침묵을 지켰지만 그것은 그러한 죄에 대한 묵인이 아니라 너무도 엄청난 슬픔으로 인하여 그의 경건한 가슴이 타는듯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모든 외적으로 드러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은 자신의 임종시에 아들들을 축복할 때에 장자인 르우벤에게 내릴 축복을 거절하였습니다(49:31-33).
라헬을 먼저 보낸 슬픔과 장자 르우벤의 치욕적인 기억을 지닌 채 야곱은 마침내 이삭이 있던 마므레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생애에 많은 환란과 고통을 보면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던 것처럼 우리는 성도의 생애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새롭게 갱신하고 새롭게 되는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입는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야곱 가정에 우상이 존재하였는데 우리에게는 그러면 우상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실상 하나님 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다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실상 하나님 보다는 돈을 더 사랑하고 또 어떤 때는 명예에도 집착하게 됩니다. 또 사실 먹는 일에 자꾸 매입니다. 우리가 이런 육적인 욕망에 있어서 깨끗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데에서 늘 상당히 많이 벗어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우리의 전적인 산업이 되어야 하고 예수 믿는 일이 우리의 전공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늘 그렇지를 못하고 예수 믿는 일이 맨 나중에 할 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란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환란이 떠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환란이 있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환란이 있어야 기도하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환란 당하는 것은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그런 범죄를 하고도 야곱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기업을 받은 하나의 지파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 해서 르우벤의 잘못이 잊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로서의 명예를 지녔음에도 범죄하여 자신의 명예 만큼 큰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르우벤의 일은 큰 교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일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제 이삭이 나이 많아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삭이 자기 인생 여정을 통해서 해야할 일들을 다 이루고 떠났음을 말해 줍니다. 이삭이 죽자 에서와 야곱은 아브라함이 사 두었던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후 에서는 영원히 가나안을 떠나 에돔에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의 자손들은 번성해 나갔지만 역시 그들은 언약 밖에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집은 가나안에서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벧엘로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약을 확증해 주셨는데 그 이후의 야곱의 행보는 별로 가볍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에 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실제로 야곱의 가정에는 계속된 환란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전부가 다 망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세상에서의 번영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번성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땅위에 사는 성도는 그 나라를 세우기까지 고난의 때를 거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성도의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이러한 환란을 잘 견디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에 동참하는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의 뒤를 따라가는 믿음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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