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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창32:1)

본문

라반이 야곱을 평안히 보내었을 때 야곱은 계속해서 가나안으로 여행하였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중에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이제까지 야곱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호하였는데 이제는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부딪쳤던 것들 보다도 훨씬 더 큰 위험에 부딪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장인 라반에게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형 에서가 20년이 지났어도 옛일을 잊지않고 자기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뒤에는 외삼촌 라반이 있었고 앞에는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기를 호위하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자 하여 그곳을 마하나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군대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군대들은 야곱의 앞뒤를 호위하였습니다. 즉 뒤편의 라반으로 부터와 앞편의 에서로 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서 가나안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가나안에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고 야곱은 약속의 땅에서 받을 기업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에는 형 에서와의 관계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형의 분노를 가라앉혀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 형의 복수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있었습니다.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은 일대 전환점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육의 사람 야곱이 영의 사람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육의 사람 야곱이 영의 사람 이스라엘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에서가 듣고 벌써 400인을 거느리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당시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을 때에 400명의 군대는 보통 큰 일이 아닙니다. 야곱의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야곱은 에서에게 겸손하고 정성어린 전갈을 보냅니다. 공손한 행동은 적개심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주’라고 부르며 자신을 그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에서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야곱이 떠나있는 동안 제 마음대로 자기 아버지를 떠나 세일 산으로 갔고 이렇게 해서 약속의 땅으로 부터 떠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땅의 소유권은 형제사이의 죽고 죽이는 일이 없이도 야곱을 위해서 임자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에서는 큰 부자가 되어서 떠났는데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서 아버지 이삭으로 부터 간섭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여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세일 산에 거하며 왕처럼 군림하였습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사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언약 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욕망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야곱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이렇게 에서가 아버지 이삭을 떠나 홀로 세일 산에 거한 사실을 성경은 일종의 추방이었다고 해석합니다(말1:3). 에서는 비록 스스로 그곳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의해 자기가 간절히 소원했던 땅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에서는 현재의 욕망을 따라 살기 원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야곱은 현재의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방어책을 강구합니다. 에서에게로 사람을 보내어 자기의 처지를 알리고 에서의 은혜를 구합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은혜를 구하는 말 가운데에서 그래도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라반의 집에서 얻은 모든 가산이 자기의 수고로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얻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재물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서와 다른 점입니다. 에서는 자기의 힘으로 자기 칼의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 삼촌에게 속고 속이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를 만나게 될) 장차 당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려움 당하기 전에 미리 기도하면 주께서 도우실 터인데 그는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인,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직 야곱에게는 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을 호위하고 있음을 알고도 감사가 없습니다. 아버지 이삭에게 돌아가는 길에 형 에서가 20년 한을 품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기 전에 형 에서에게 먼저 가서 인사부터 합니다. 그리고 선물을 보내면 해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야곱은 아직도 인간적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 의지하고 담대하게 당당하게 형에게로 나아가야 할 것인데 그러기에는 과거 형에게 행한 죄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줄 때에도 처음에는 덜 소중한 것을 보내고 나중에 더 좋은 것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행렬의 순서도 먼저 종들의 가족을 보내고 다음에 레아의 식구, 그리고 라헬의 순으로 세우고 자신은 맨 나중에 갑니다. 식구들을 얍복 강 건너로 보내놓고 자신은 두려움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안절부절 합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야곱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이제 야곱은 모든 인간적인 수단에 의해서도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자신에게 베푸셨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야곱으로 남아서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고 이스라엘로 변화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로 변화될 때 형 에서와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도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선한 일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에다가 호소합니다. 지금 자기 자신이 당하는 위기는 자신 만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와해되는 문제였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호소합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자신의 선을 행하려는 일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뜻에 의해서 문제의 해결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죄함 받는 근거이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약속된 상급인데 이런 것은 다 제껴놓고 그저 기도 끝에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는 형식적인 기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첫째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냥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함 받는 근거를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용서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룬 구속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합니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 즉 장래에 자기의 후손을 통해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실 것인데 그 구속주로 부터 임할 보혈의 공로에 근거해서 야곱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그 이름의 권세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음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비록 야곱은 하나님께 사죄의 기도를 드렸어도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심을 나타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상당히 많은 선물을 보냅니다. 처음에는 조금 보내고 그 다음에는 그보다 많이 보내고 하는 식으로 갈수록 좋은 것을 주면 에서의 마음이 변할 줄 알고 인간적인 꾀를 계속 발휘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상대하십니다. 그것은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야곱을 보호하시고 그를 변화시키므로 구속주의 출생을 위한 준비를 이루시려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과 야곱이 씨름을 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아침 일찍 동이 트기 전 오랫동안 야곱은 아내들과 자녀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거들었습니다. 야곱은 그후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때 야곱은 그 천사와 씨름했다고 성경에 기록했는데, 이 사실에 대하여 성경이 해석을 합니다.
호세아서 12:4에 “야곱은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은 울며 간구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울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야곱이 천사를 계속 붙들고 있어도 아직도 옛사람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죄인된 인간이 지배적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적인 방법을 씁니다. 에서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지만 그 정도의 선물 가지고는 안될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이제는 그가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이 아니면 못살고 이 위기를 넘어갈 수 없고 목을 내미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려서, 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축복 뿐인 것을 고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옛사람 야곱을 새사람으로 만드시고 축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도적질하던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가려면 새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새사람 만드리고 약속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는데 야곱이 그만 너무 급히 일을 이루려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은 많은 방해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이기적인 수단과 방법들 때문에 지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출생시에 벌써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기적인 수단가 방법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많은 방해를 받았고 그 일은 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렀을 때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그가 애굽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출하려는 열심이 너무 과하여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하여 일을 그르치고 애굽에서 추방당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 후에야 모세가 자신의 힘을 의지하던 데에서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모세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때문에 하나님은 40년을 더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과도한 인간적인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게 되며 그 일이 지체되곤 합니다. 이런 면에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듯이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에로의 변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성 때문에 야곱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뵙게된 것을 깨닫고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두려움으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습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도 그가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오면 다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범죄한 인생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옛사람이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얍복 강 이후에 그의 생애는 옛사람이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삼촌 집에서 처럼 속이고 뺏고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즉,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이란 옛사람을 말합니다. 자연인 혹은 죄악된 상태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이란 새사람, 중생한 사람, 영으로 사는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의 사람이 되었어도 육의 사람이 완전히 죽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육의 사람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을 지닌체 살아갑니다. 영을 사는 것과 육으로 사는 일은 동시적인 일입니다. 지금도 새 생명으로 살지 아니하면 옛사람의 방식으로 되돌아 갑니다. 그래서 루터는 말하기를 “우리가 옛사람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그 무덤을 파지만 자기 손으로 옛사람을 장사지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영으로 살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온 부활의 생명입니다. 육은 부모에게서 타고난 전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되지 아니한 전부입니다. 그리고 영은 부활의 생명으로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고 현재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새사람으로 살면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지 않고 옛사람으로 살면 새사람이 죽습니다. 이것이 동시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옛사람의 일이 모두 다 과거지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사람으로 살도록 끊임없이 주께 의지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야곱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자기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형 에서에 대한 공포가 사라집니다.
야곱의 행위로 보아서는 야곱이 복받을 사람이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시고 복 주시기로 하신 것은 세상 구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목적 아래에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하되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도 계속 야곱이기를 고집하던 죄많은 자를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십니다. 언약의 땅에서 인간 야곱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변화된 이스라엘이 필요할 뿐입니다. 세상 구속을 이루실 하나님의 큰 일에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주신 믿음 때문에 야곱에게 얍복 강변에서의 씨름에서 진 것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도 이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믿음 안에서 자기 백성과 만나시고 약속하시며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을 이기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의 최종 목적은 믿음의 완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믿음의 완성!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기쁨이 있고 참된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고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이 믿음 안에서 살며 소망하며 견디며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이기는 믿음에로 이르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이 믿음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참으로 복됩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림이 하나님의 백성된 저와 여러분에게 합당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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