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씨름 (창32:21-32)
본문
어느 마을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김씨 문중과 박씨 문중이 서로 이권을 놓고 힘 겨루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중이 사는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냇물은 김씨 문중에서부터 시작을 하여 박씨 문중으로 흘렀습니다. 이 냇물은 두 문중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냇가에서 두 문중의 아낙네 들이 몰려 빨래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모여 물놀이도하였습니다. 물론 농본기가 되면 이 냇물은 논밭을 적시는 귀한 젖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가뭄이 심하게 들자 김씨 문중에서 냇물을 가로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박씨 문중은 더 이상 이 냇물의 혜택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였죠. 이렇게 되자 박씨 문중 사람들은 화가 치밀 어 올랐습니다. 박씨 문중 사람들은 모여서 이 일을 의논한 끝에 문중의 건장한 청년들을 모았습니다. 힘세고 건 장한 청년들이 200여명 모였습니다. 이 200여명의 청년들을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김씨 문중을 향해 쳐들어갔 습니다. 이 소식이 김씨 문중에 전해 졌습니다. 김씨 문중에서도 이에 질세라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00여명 정도의 사람밖에 모이질 않았습니다. 그것도 젊은이들은 출타를 하고 늙고 힘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김씨 문중의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에 손에 몽둥 이를 들고 쳐들어오는 저 박씨 문중과 싸워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눅 14:31-32)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 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 습니다. 미리 계산해 보고 되지 않는 싸움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의 승패가 이미 결정된 일이 기 때문입니다. 질 것을 뻔히 다 알고 싸우는 싸움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싸움은 이기기 위 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적수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해볼 만 한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계산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덤벼드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모한 일이죠.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좀 비슷해야 재미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월등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싱겁고 시시합니다. 왜요. 그렇습니다. 너무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나름대로 여러 번의 싸움들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싸움 중에 있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혹 목사님 우리들이 무슨 싸움꾼 인 줄 아세요 하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싸움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 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먹을 휘날리고 코피를 터뜨려 가면서 싸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 모양의 싸움이 있지 않습니까 있으시지요 그렇죠
그렇다면 한번 여쭈어 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승산이 있는 싸움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불을 보듯 뻔한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런 승산이 없는 무모한 싸움을 코피를 터뜨 려 가면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우리는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무 모한 싸움을 살펴보면서 혹 나도 이런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멈칫거리는 야곱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 자 여기서 말하는 예물은 누구에게 보내는 것입니 까 그렇습니다. 형 에서를 진정시기 위해서 보내는 예물입니다. 그 예물은 앞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일행 이 바로 뒤를 쫓아갑니까 아닙니다. 21절을 미루어 짐작을 해 보면 제법 시간을 두고 뒤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욀까요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야곱의 생각이었습니다. 예물을 받고난 다음 에서에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 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선물을 받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던가요 기분이 좋죠
그런데 선물을 원수에게 받았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원수 같이 여기던 사람이 와서 선물을 전해주면 처음 에는 자존심이 있어서 획 내팽개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받겠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그 사람이 가고 나면 선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죠. 그래서 뜯어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왜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선물을 했을까 화해의 제스처인가 이 선물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면 마음 이 서서히 풀어집니다. 야곱은 바로 이것을 노린 것입니다. 선물을 자기가 들고 바로 나타나면 에서가 자존심 때문에 혹시 그 선물을 받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산이 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입니다. 에 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들에게 선물을 먼저 보내고 그리고 그 선물을 받아들고 제법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야곱의 계략에 참 혀가 내둘립니다. 혼자 남은 야곱 아무튼 야곱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제 선물을 보내고 시간이 지난 후 자신들이 가족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24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여러분 야곱이 여기서 왜 혼자 남았을까요 그렇습니다. 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 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철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한 일이 어떤 것들 입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뇌물 공세를 펴는 일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여러 때로 나눠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또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두려움으로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기도까지 했는데 왜죠 그렇습니다. 그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 본 대로 그의 기도는 나무랄 데 없는 기도였 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의 이유
그렇다면 야곱의 이 두려움은 무엇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자신이 과거 형 에서에게 지은 죄 때문에 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이 밤 야곱을 홀로 있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만약 야곱이 하나님을 힘있기 의지했다면 여기 홀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야곱 이 형에서를 속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혼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야! 형이 나 를 맞이하기 위해서 400명이나 거느리고 오는 구나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형에게 달려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죄 때문에 그는 이렇게 이 밤 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우리들을 두렵게 만들고 고독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를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실 형 에서가 야곱을 혼내주기 위해서 오는지, 맞이하기 위해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야 곱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형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독해 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우리들도 때때로 삶의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또한 내가 지은 죄를 해 결하지 못했을 때 이런 고독함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마치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럴 때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고독함 인생이 두려움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 여러분들도 오늘 이런 고독함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그렇게 모두가 다 떠나버린 강가에서 고독과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문제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면 하나님을 힘있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손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 문제가 여러분들이 지은 죄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면 그것들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회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들의 그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위로를 누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씨름의 시작 야곱이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은 과거의 죄의 문제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이 상한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함께 24,25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죠 예, 그 유명한 얍복강가의 씨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씨름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사실 이 부분을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에게 전통적인 견해 하나를 소개해 드리도 록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해석 방법에 의하면 이 씨름은 야곱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한 내용이라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이 해석을 지지해 주는 것 같습니다. 한번 볼까요 따라서 야곱은 두 려움에 휩싸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기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야곱은 대단한 믿음 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할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펴 온 바에 의하면 야 곱이 이렇게 기도 할 만큼 성장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고독에 휩싸여 있다가 갑자 기 기도했다는 것은 너무 변화가 빠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야곱이 씨름을 시작한 것이 아 니라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먼저 씨름을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야곱이기도 한 것이라면 야곱이 씨름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에 대한 문제는 야곱이 이렇게 씨름을 할 정도로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을 하신 문제입니다. 지금 문제는 야곱이 이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지 하나님께서 안주겠다는 것이 아니죠. 이 씨름을 야곱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본다면 25절에서 그 사람이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마치 야곱에게 복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기죠. 어떻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던 분이 이렇게 야곱과 씨름 을 할 정도로 복을 주지 않으시려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놓고 그렇게 씨름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렇게 잘 못 가르쳤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도를 복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쓰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주시옵소서 외쳐 댑니다. 소나무 뿌 리를 뽑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 나를 순종시키는 것이 기도지 하나님 것을 빼앗는 것이 기도 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말 하지 않습니까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 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아들을 우리들 에게 주심으로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겠노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때를 쓰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안 주시겠다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기도는 때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순종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의 주관자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 안됩니다. 하나님 힘으로 이루어 가십시오. 하고 나를 고백하는 것이 기도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까요 자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야곱이 여기에 혼자 남기까지를 잠깐 살핍시다. 야곱이 형 에서가 온다는 말을 듣고 어떤 조치를 취하죠 그렇습니다. 선물공세를 취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여러 때의 선물을 앞서게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또 그는 하나님 앞에 나름대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취했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찾아오는 두 려움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남았던 것이죠. 왜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생각하기 위함입니다. 왜 자꾸 야곱이 이렇게 하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 다면 그는 무엇을 의지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자꾸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야곱의 특징 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루시기 위해서 20년 동안 야곱을 라반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는 잠시 멋지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즉,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일이 꼬이면 다시 자신의 머리를 의 지합니다. 바로 오늘 이 문제가 기록되는 이 순간에도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에서 400명이라는 위기 가 찾아오자 다시 옛 모습이 발동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20년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도 그래도 살아 움직이는 이 야곱의 자아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좀 색다른 방법을 쓰셨습니다. 직접 저에게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욀까요 예, 고래심줄처럼 질기디 질긴 야곱의 자아를 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이 시작이 되죠. 보십시오. 처음 이 싸움이 시작될 때 야곱 자신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어두컴컴한 상 황 속에서 자신이 누구와 싸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엄청난 힘 을 지닌 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예, 지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의 모습입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 나는 이겨야만 한다. 하는 것이 야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을 이겨야만 했고 아버지를 이겨야만 했습니다. 또 삼촌 라반도 이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를 이기려 합니까 예, 하나님을 이기려 합니다. 야곱이 이 싸움에서 처음에는 자신이 싸우고 있는 분이 누구 인 줄 몰랐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누구인 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렇습니다.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모습은 지금까지의 야곱의 인생의 단면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자아가 강한 야곱이 야곱을 하나님 께서는 꺾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양 저 모양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야곱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얼 마나 자아가 강합니까 그저 그 머리 속에는 이기는 일만 기억하고 있을 다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야곱을 훈련하시기 위해서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떻습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시지 않습니 까 자아를 굽힐지 모르는 이 야곱 바로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이 야곱의 모습을 보면 서 어쩌면 우리들과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정말 대단합니다. 그저 두 손들고 항복하면 될 터인데 항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겨 보려 합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게 여러분들이 대단하십니까 고집 피우 지 마십시오. 항복하세요. 이 씨름은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지게 될 것이에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항복하지 마시고 일찌감치 두 손을 드십시오. 저는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성도들을 많이 봅니다. 참 대단해요. 얼마나 자아가 강한지 도무지 하나님께 지려 고 하지 않아요. 그저 항복하고 자신을 내려놓으면 될 텐데 자신은 내려놓지 않고 기도하고 믿는다 말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믿음은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항복을 하는 것이에요. 여전히 자기 방법대로 자기 계획대로 인간 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면서 기도하면 다 되는 줄 아십니까 그렇 지 않습니다.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해요. 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방법을 고수하는지. 어리석은 싸움입니다. 뻔한 싸움입니다.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들은 질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고 일찌감치 두 손 을 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환도뼈를 치심 질기디 질긴 야곱과의 싸움 이 싸움이 과연 어떻게 될 까요 2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십니다. 여기 환도뼈는 엉덩이뼈를 말합니다. 씨름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뼈가 강해야 한다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힘이 여기서 나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뼈가 손상을 당하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 뼈를 치신 것입니다. 더 이상 힘쓸 수 없 도록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야곱이 무릎을 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이렇게 위골이 되자 야곱의 자세가 바뀌어 집니다. 26절을 읽습니다.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제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두 손을 든 것이죠. 그도 그럴 것이 환도뼈가 위골이 된 이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얼마 후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야곱은 자신 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에서와 싸워야 하는 그런 경우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성하지 않습니다. 환도뼈가 위골이 되어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큰 위기를 남겨놓고 야곱은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죠.
그런데 보십 시오. 바로 이 순간에 야곱은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있는 것이죠. 도움에 대 한 확실한 확답을 받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 역시 온전한 믿음으로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미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 서 다시 믿음이 자라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기 시 작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일격을 당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서야 야곱은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자기 스스로 안됨을 알게 된 것이죠. 오늘 이런 야곱의 모습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닌 지요. 우리들도 이 야곱처럼 우리들의 환도뼈가 위 골이 되지 않으면 잘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아직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환도뼈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잘 꺾여지지 않는 환도뼈는 무엇입니까 만약 여러분들 이 꺾여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 환도뼈를 꺾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재능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지식일 수 있습니다. 물질일 수 있습니다. 잘 변하지 않는 인격일 수 있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의 환도뼈가 우리 들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환도 뼈를 하나님께서 치실 때까지 기다리시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 합니다. (고전 9:26,27)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애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애쓰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치는 일입니다. 야곱 속에 살아 꿈틀거리던 그 자아, 수많은 사람들 속에 꿈틀거리면서 하나님 앞에 다가가지 못하게 했던 그 자 아, 그것을 그는 쳐 복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께서 치실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보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이 자아를 쳐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 야곱이 이처럼 두 손을 들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고쳐 주십니다.
27,28절을 읽습니다. 어떻게 고쳐 주죠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로 고쳐 주십시다. 그리고는 무엇이라 말씀을 하십니까 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음이라 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선언이 언제 있어지는가를 잘 살 필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죠 그렇습니다. 야곱이 두 손을 들 때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실제로 야곱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습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싸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기셨 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무엇을 선언하시죠 그렇습니다. 야곱이 이기는 자가 되었다고요. 이 말은 야곱이 실제로 이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는 하나님께서 이기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죠 그렇습니다. 바로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어서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두 손을 든 그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이겼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기 이기려 하면 우리들의 이김이 선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가 항복을 하고 겸손히 무릎을 꿇으면 그 때 우리들의 이김이 선언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기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 까 진정 여러분들이 이기는 삶을 사리렵니까
그렇다면 두 손을 드십시오. 여러분들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기 이 전에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김을 선언하실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들이 이기려해서는 이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면 이깁니다. 바로 이런 이김이 여러분들에 게 넘쳐 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브 니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시고 떠나가십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무엇이라 짖습니까 그렇습니다. 브니엘이라 이름을 짖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예,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도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말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환도뼈만 위골이 된 것이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야곱을 처단 할 수 있었습니다. 질기디 질긴 야곱 처단 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환도뼈 하나 건드신 것이 고작이 었습니다. 물론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환도뼈가 상함으로 큰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감사 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요, 예,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에게도 넘치고 있습니다. 실은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처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환도며 하나 건드셔서 나를 돌이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환도 뼈를 건드시면 감사하십시오. 물론 그것으로 인해 아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참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그 순간 여러분들의 생명도 취할 수 있으셨지만 사랑하셔서 그 정도 해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치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31,32절을 봅니다. 어떤 모습이 연상이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해가 솟는 아침 다리를 절며 걸어가는 야곱의 모습을 봅니다. 여러분들은 이 뒷모습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혹 이 뒷모습이 여러분들의 뒷모습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00여명 정도의 사람밖에 모이질 않았습니다. 그것도 젊은이들은 출타를 하고 늙고 힘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김씨 문중의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에 손에 몽둥 이를 들고 쳐들어오는 저 박씨 문중과 싸워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눅 14:31-32)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 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 습니다. 미리 계산해 보고 되지 않는 싸움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의 승패가 이미 결정된 일이 기 때문입니다. 질 것을 뻔히 다 알고 싸우는 싸움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싸움은 이기기 위 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적수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해볼 만 한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계산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덤벼드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모한 일이죠.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좀 비슷해야 재미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월등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싱겁고 시시합니다. 왜요. 그렇습니다. 너무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나름대로 여러 번의 싸움들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싸움 중에 있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혹 목사님 우리들이 무슨 싸움꾼 인 줄 아세요 하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싸움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 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먹을 휘날리고 코피를 터뜨려 가면서 싸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 모양의 싸움이 있지 않습니까 있으시지요 그렇죠
그렇다면 한번 여쭈어 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승산이 있는 싸움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불을 보듯 뻔한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런 승산이 없는 무모한 싸움을 코피를 터뜨 려 가면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우리는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무 모한 싸움을 살펴보면서 혹 나도 이런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멈칫거리는 야곱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 자 여기서 말하는 예물은 누구에게 보내는 것입니 까 그렇습니다. 형 에서를 진정시기 위해서 보내는 예물입니다. 그 예물은 앞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일행 이 바로 뒤를 쫓아갑니까 아닙니다. 21절을 미루어 짐작을 해 보면 제법 시간을 두고 뒤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욀까요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야곱의 생각이었습니다. 예물을 받고난 다음 에서에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 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선물을 받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던가요 기분이 좋죠
그런데 선물을 원수에게 받았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원수 같이 여기던 사람이 와서 선물을 전해주면 처음 에는 자존심이 있어서 획 내팽개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받겠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그 사람이 가고 나면 선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죠. 그래서 뜯어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왜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선물을 했을까 화해의 제스처인가 이 선물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면 마음 이 서서히 풀어집니다. 야곱은 바로 이것을 노린 것입니다. 선물을 자기가 들고 바로 나타나면 에서가 자존심 때문에 혹시 그 선물을 받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산이 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입니다. 에 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들에게 선물을 먼저 보내고 그리고 그 선물을 받아들고 제법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야곱의 계략에 참 혀가 내둘립니다. 혼자 남은 야곱 아무튼 야곱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제 선물을 보내고 시간이 지난 후 자신들이 가족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24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여러분 야곱이 여기서 왜 혼자 남았을까요 그렇습니다. 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 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철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한 일이 어떤 것들 입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뇌물 공세를 펴는 일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여러 때로 나눠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또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두려움으로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기도까지 했는데 왜죠 그렇습니다. 그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 본 대로 그의 기도는 나무랄 데 없는 기도였 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의 이유
그렇다면 야곱의 이 두려움은 무엇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자신이 과거 형 에서에게 지은 죄 때문에 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이 밤 야곱을 홀로 있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만약 야곱이 하나님을 힘있기 의지했다면 여기 홀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야곱 이 형에서를 속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혼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야! 형이 나 를 맞이하기 위해서 400명이나 거느리고 오는 구나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형에게 달려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죄 때문에 그는 이렇게 이 밤 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우리들을 두렵게 만들고 고독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를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실 형 에서가 야곱을 혼내주기 위해서 오는지, 맞이하기 위해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야 곱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형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독해 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우리들도 때때로 삶의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또한 내가 지은 죄를 해 결하지 못했을 때 이런 고독함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마치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럴 때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고독함 인생이 두려움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 여러분들도 오늘 이런 고독함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그렇게 모두가 다 떠나버린 강가에서 고독과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문제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면 하나님을 힘있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손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 문제가 여러분들이 지은 죄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면 그것들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회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들의 그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위로를 누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씨름의 시작 야곱이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은 과거의 죄의 문제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이 상한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함께 24,25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죠 예, 그 유명한 얍복강가의 씨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씨름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사실 이 부분을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에게 전통적인 견해 하나를 소개해 드리도 록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해석 방법에 의하면 이 씨름은 야곱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한 내용이라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이 해석을 지지해 주는 것 같습니다. 한번 볼까요 따라서 야곱은 두 려움에 휩싸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기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야곱은 대단한 믿음 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할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펴 온 바에 의하면 야 곱이 이렇게 기도 할 만큼 성장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고독에 휩싸여 있다가 갑자 기 기도했다는 것은 너무 변화가 빠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야곱이 씨름을 시작한 것이 아 니라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먼저 씨름을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야곱이기도 한 것이라면 야곱이 씨름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에 대한 문제는 야곱이 이렇게 씨름을 할 정도로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을 하신 문제입니다. 지금 문제는 야곱이 이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지 하나님께서 안주겠다는 것이 아니죠. 이 씨름을 야곱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본다면 25절에서 그 사람이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마치 야곱에게 복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기죠. 어떻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던 분이 이렇게 야곱과 씨름 을 할 정도로 복을 주지 않으시려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놓고 그렇게 씨름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렇게 잘 못 가르쳤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도를 복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쓰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주시옵소서 외쳐 댑니다. 소나무 뿌 리를 뽑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 나를 순종시키는 것이 기도지 하나님 것을 빼앗는 것이 기도 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말 하지 않습니까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 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아들을 우리들 에게 주심으로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겠노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때를 쓰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안 주시겠다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기도는 때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순종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의 주관자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 안됩니다. 하나님 힘으로 이루어 가십시오. 하고 나를 고백하는 것이 기도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까요 자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야곱이 여기에 혼자 남기까지를 잠깐 살핍시다. 야곱이 형 에서가 온다는 말을 듣고 어떤 조치를 취하죠 그렇습니다. 선물공세를 취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여러 때의 선물을 앞서게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또 그는 하나님 앞에 나름대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취했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찾아오는 두 려움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남았던 것이죠. 왜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생각하기 위함입니다. 왜 자꾸 야곱이 이렇게 하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 다면 그는 무엇을 의지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자꾸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야곱의 특징 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루시기 위해서 20년 동안 야곱을 라반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는 잠시 멋지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즉,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일이 꼬이면 다시 자신의 머리를 의 지합니다. 바로 오늘 이 문제가 기록되는 이 순간에도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에서 400명이라는 위기 가 찾아오자 다시 옛 모습이 발동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20년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도 그래도 살아 움직이는 이 야곱의 자아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좀 색다른 방법을 쓰셨습니다. 직접 저에게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욀까요 예, 고래심줄처럼 질기디 질긴 야곱의 자아를 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이 시작이 되죠. 보십시오. 처음 이 싸움이 시작될 때 야곱 자신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어두컴컴한 상 황 속에서 자신이 누구와 싸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엄청난 힘 을 지닌 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예, 지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의 모습입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 나는 이겨야만 한다. 하는 것이 야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을 이겨야만 했고 아버지를 이겨야만 했습니다. 또 삼촌 라반도 이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를 이기려 합니까 예, 하나님을 이기려 합니다. 야곱이 이 싸움에서 처음에는 자신이 싸우고 있는 분이 누구 인 줄 몰랐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누구인 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렇습니다.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모습은 지금까지의 야곱의 인생의 단면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자아가 강한 야곱이 야곱을 하나님 께서는 꺾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양 저 모양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야곱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얼 마나 자아가 강합니까 그저 그 머리 속에는 이기는 일만 기억하고 있을 다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야곱을 훈련하시기 위해서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떻습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시지 않습니 까 자아를 굽힐지 모르는 이 야곱 바로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이 야곱의 모습을 보면 서 어쩌면 우리들과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정말 대단합니다. 그저 두 손들고 항복하면 될 터인데 항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겨 보려 합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게 여러분들이 대단하십니까 고집 피우 지 마십시오. 항복하세요. 이 씨름은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지게 될 것이에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항복하지 마시고 일찌감치 두 손을 드십시오. 저는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성도들을 많이 봅니다. 참 대단해요. 얼마나 자아가 강한지 도무지 하나님께 지려 고 하지 않아요. 그저 항복하고 자신을 내려놓으면 될 텐데 자신은 내려놓지 않고 기도하고 믿는다 말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믿음은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항복을 하는 것이에요. 여전히 자기 방법대로 자기 계획대로 인간 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면서 기도하면 다 되는 줄 아십니까 그렇 지 않습니다.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해요. 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방법을 고수하는지. 어리석은 싸움입니다. 뻔한 싸움입니다.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들은 질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고 일찌감치 두 손 을 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환도뼈를 치심 질기디 질긴 야곱과의 싸움 이 싸움이 과연 어떻게 될 까요 2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십니다. 여기 환도뼈는 엉덩이뼈를 말합니다. 씨름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뼈가 강해야 한다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힘이 여기서 나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뼈가 손상을 당하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 뼈를 치신 것입니다. 더 이상 힘쓸 수 없 도록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야곱이 무릎을 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이렇게 위골이 되자 야곱의 자세가 바뀌어 집니다. 26절을 읽습니다.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제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두 손을 든 것이죠. 그도 그럴 것이 환도뼈가 위골이 된 이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얼마 후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야곱은 자신 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에서와 싸워야 하는 그런 경우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성하지 않습니다. 환도뼈가 위골이 되어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큰 위기를 남겨놓고 야곱은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죠.
그런데 보십 시오. 바로 이 순간에 야곱은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있는 것이죠. 도움에 대 한 확실한 확답을 받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 역시 온전한 믿음으로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미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 서 다시 믿음이 자라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기 시 작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일격을 당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서야 야곱은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자기 스스로 안됨을 알게 된 것이죠. 오늘 이런 야곱의 모습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닌 지요. 우리들도 이 야곱처럼 우리들의 환도뼈가 위 골이 되지 않으면 잘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아직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환도뼈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잘 꺾여지지 않는 환도뼈는 무엇입니까 만약 여러분들 이 꺾여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 환도뼈를 꺾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재능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지식일 수 있습니다. 물질일 수 있습니다. 잘 변하지 않는 인격일 수 있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의 환도뼈가 우리 들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환도 뼈를 하나님께서 치실 때까지 기다리시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 합니다. (고전 9:26,27)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애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애쓰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치는 일입니다. 야곱 속에 살아 꿈틀거리던 그 자아, 수많은 사람들 속에 꿈틀거리면서 하나님 앞에 다가가지 못하게 했던 그 자 아, 그것을 그는 쳐 복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께서 치실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보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이 자아를 쳐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 야곱이 이처럼 두 손을 들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고쳐 주십니다.
27,28절을 읽습니다. 어떻게 고쳐 주죠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로 고쳐 주십시다. 그리고는 무엇이라 말씀을 하십니까 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음이라 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선언이 언제 있어지는가를 잘 살 필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죠 그렇습니다. 야곱이 두 손을 들 때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실제로 야곱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습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싸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기셨 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무엇을 선언하시죠 그렇습니다. 야곱이 이기는 자가 되었다고요. 이 말은 야곱이 실제로 이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는 하나님께서 이기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죠 그렇습니다. 바로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어서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두 손을 든 그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이겼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기 이기려 하면 우리들의 이김이 선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가 항복을 하고 겸손히 무릎을 꿇으면 그 때 우리들의 이김이 선언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기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 까 진정 여러분들이 이기는 삶을 사리렵니까
그렇다면 두 손을 드십시오. 여러분들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기 이 전에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김을 선언하실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들이 이기려해서는 이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면 이깁니다. 바로 이런 이김이 여러분들에 게 넘쳐 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브 니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시고 떠나가십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무엇이라 짖습니까 그렇습니다. 브니엘이라 이름을 짖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예,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도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말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환도뼈만 위골이 된 것이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야곱을 처단 할 수 있었습니다. 질기디 질긴 야곱 처단 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환도뼈 하나 건드신 것이 고작이 었습니다. 물론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환도뼈가 상함으로 큰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감사 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요, 예,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에게도 넘치고 있습니다. 실은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처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환도며 하나 건드셔서 나를 돌이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환도 뼈를 건드시면 감사하십시오. 물론 그것으로 인해 아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참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그 순간 여러분들의 생명도 취할 수 있으셨지만 사랑하셔서 그 정도 해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치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31,32절을 봅니다. 어떤 모습이 연상이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해가 솟는 아침 다리를 절며 걸어가는 야곱의 모습을 봅니다. 여러분들은 이 뒷모습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혹 이 뒷모습이 여러분들의 뒷모습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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