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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이긴 사람 (창32:21-32)

본문

지난 주일에 이어서 계속해서 야곱의 이야기를 한번 더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本文에서 우리는 어쩌면 아이들 童話 같은 이야기의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더불어 밤을 새워 씨름을 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24절에 기록하고 있지요 '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 록 야곱과 씨름을 하다가….' ━ 여기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 바로 이 '어떤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마지 막 32절까지 본문을 다 읽어보면, 이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만, 누굽니까-바로 하나님이셨지요 28절을 보세요.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이셨음을 분명히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야곱이 씨름하여 이겼다고 하는, 승리의 선언도 야곱이 한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네가 나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 니라. 그러니 이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면 우선, 야곱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다시 改名 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던가-하나님은 왜 야곱을 만나고, 그와 씨름을 하신 후 에, 또 그에게 씨름하여 지시고난 후에는, 먼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 로 다시 바꾸어 주셨던 것일까-그 점도 우선 우리에게는 궁금한 일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 그 이유는 바로 이렇습니다. '야곱'이라고 하는 그 이름에 새겨진 뜻을 풀이하면, 참 좋지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사기꾼, 도적놈, 속 이는 자라고 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결코 아름답지 못한 汚名의 뜻을 '야 곱'이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이름이 야곱의 신분과 그의 인격에는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 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렇지요 이미 잘 아시는 대로, 그는 형 에서에게 장자권 을 빼앗기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던 간교한 인물이었으며, 또한 그의 祝福權을 빼앗기 위해서도 역시 교활한 수단과 모든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파렵치하고 뻔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야비하게도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아버 지 이삭까지 감쪽깥이 속였던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요 도적놈이 아니었습니까
━ 고로 사기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야곱이라고 그의 이름은 어쩌면 그의 인 격과 인물됨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 그러던 것 이 오늘 그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결코 영광스럽지 못한 그의 이름을 180 도로 다 르게, 극도로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다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네 이름을 이제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바 꾸어지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고, 또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힘을 겨루어 이겼다고 하는 기가 막힌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그래서 그 후로 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야 곱의 이름은 야곱 한 개인의 영광스러운 새로운 이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이 되는 오늘날의 저 이스라엘 나라의 영광스러운 국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곧 오늘의 이스라엘 나라는 바로 그들의 조상 야곱의 이 이름-곧 이스라엘에서 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장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로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실로 歷史的인 중요한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건 그 렇고, 야곱이라고 하는 사람은 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우리는 다시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히 인간으로서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과 힘을 겨루어 이기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다소 동화 같은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모습을 띄고 오셨다고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문제는-연약한 한 인간 야곱과 씨름하여, 하나님께서 오히려 지 셨다고 하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전혀 있을 법한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요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약 한 한 인간과 힘을 겨루어 지실 수가 있습니까
━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을 약간 다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결론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설사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나 사자였다 할지라도, 혹은 성자 예수님이셨다 할지 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神的인 모든 권능을 다 갖춘 분이셨음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시 후에 그분이 하나님이셨음을 알아차린, 야곱은 그분에 대하여 어떻 게 표현하고 있습니까-30절에 부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본문에 기록 된 대로-인간이 하나님과 對面하였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대체로 구약의 전통 사상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뵈오면 반드시 죽고 살지 못한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오늘 하나님을 뵈었다고 하 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브니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 말은 그가 틀림없는 하나님이셨 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고 할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길래 감히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와 힘을 겨루어서 이길 수가 있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 이 부분을 우리는 깊이 잘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부분에 대해서 결코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야 곱이 얼마나 힘이 셌으면, 하나님을 이겼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있 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고로 이 이야기를 자칫 아이들 동화처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잘 묵상해 보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 을 새로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결코 이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 을 말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인간인 야곱과 씨름을 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셨다고 하는 사실 그대 로 믿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는냐고요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 하나님이 져 주신 것입니다. 진 것이 아니라 일부러 져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처 음부터 인간이 하나님께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하면, 이 이야기는 동화에 불과합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밖에 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 주셨다고 할 때, 그것은 얼마든지 동화가 아닌 사실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요 그래서 져 주신 것입니다.
※ 理解를 돕기 위해 한가지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간혹 2-3살난 손자가 할아 버지나 할머니에게 씨름을 하자고 덤벼듭니다. 그러면 그 때 그 씨름에서는 대개 누가 이깁니까 손자입니까 할머니 할아바지입니까 100프로 손자가 이깁니다. 씨름을 하면서, 정말 손자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기려고 덤비며 애를 씁니다.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적당한 때에, 벌렁 넘어져 주지요. 그래서 결국 손자 가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이겼다'고 치켜세워 주면, 손자는 정말 자기가 이긴 줄로 알고, 아주 기고만장하며 신나하고 좋아합니다.
━ 자 그러나 여러분, 이 씨름에서 진정한 승자는 누굽니까 사실 처음부터 힘 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씨름이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에게 일부러 져 주신 것입니다. 이와 똑 같은 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이 말입니다. 처 음부터 게임이 안되는 씨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씨름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겼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져 주셨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그 렇지요 손자에게 벌렁 나 자빠져서 져 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말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바로 그랬습니다. 자,
그런데 바로 여기에 실로 매우 깊은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고, 꼭 찾아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 설교의 핵심 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져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도,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저들이 부모를 향한 그 사랑보다 10배 100배 더 큰사랑을 부모는 가졌기에, 자식 들에게 항상 양보하고 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꼭 그러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해 늘 베풀어주 시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져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 제로 저 주시기도 하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믿어집니까 져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치를 말입니다. 꼭 이해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꼭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깊이 그것을 느끼면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 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고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저 와 여러분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이보다 더 중요한 이치가 또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씨름하여 져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때입니다. 여러분, 그 때가 언제 일 것같습니까-놀랍게도 그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때는, 우리 가 最惡의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곤고하고, 피곤하고 고독하 고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스럽고 또한 위태롭기 이를 때가 없는 환난의 때입니다. 야곱을 잘 보세요. 항상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가 가 장 곤고할 때 였습니다.-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살기 등등한 兄의 에서의 손길을 피하여, 멀리 外三寸 라반의 집으로 도망갈 때, 한 밤중에 들에서 돌 베개를 하고 잠을 자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사실 야곱에게 있어서는 가장 외롭고 쓸쓸하고, 고 독하고, 곤고한 때였지 않았겠습니까
 ━ 그러나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무한한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새 힘을 불어넣 어 주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과 꿈을 또한 심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그렇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생애 최악의 상황/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형 에서가 지금 4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이리로 쫓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에게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면, 죄가 없었다면, 그게 무슨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만은, 그러나 20년 전에 그가 형에게 지은 죄를 생각하면 사정이 전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틀림없이 형 에서는 지금 살기를 품고 자기를 죽이려 고 쫓아온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야곱의 지금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저 마음이 녹아지는 것같 았을 것입니다. 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을 일단 압복강 나루를 먼저 건너게 한 후에, 그 자신은 뒤에 혼자 남아 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만나러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인 순간 입니까 여러분, 혹 살다 보면 원치 않게, 큰 환난을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최고 의 위기라고 생각 때가 분명 누구에게나 생애 중에 몇 번씩은 꼭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곤고하고 힘이 들어,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다 라고 느낄 만큼, 지 칠 때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때는,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50:15절은 말씀합니다. ' 환란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 리라.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또 시편 91:15절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너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 여 저를 건지고, 저를 영화롭게 하리라' 아멘 여러분, 이 믿음/ 이 신앙을 꼭 가지지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위기와 환 난의 날에는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큰 축복을 받는 사람 꼭 되시기 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씨름에 져 주시는 것일 까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대답은 역시 오늘 야곱에게서 분명히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릴 때입니다. 아주 결사적이어야 합니다. 정말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다 하는 결심으로 기도하며 매달려야만 합니다. 그러한 간절함이 있는가 그런 결사적인 신앙적인 태도가 있는가를 하나님께서 먼저 살피십니다.
또 그것을 시험해 보십니다. 야곱과 씨름하시다가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야곱을 아주 병신으 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바로 야곱의 의지와 결심이 어떠한 가를 보시려고, 야곱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과연 네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결사적이고 태도가 있는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가 그것을 확인코자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신 것이란 말입니다. ' 주시려면 주시고, 마시려면 마십시오.' 이런 태도로는 10년 100년을 기도해도 여러분, 응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환도 뼈는 생식기 를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뼈로서 그것을 다쳤다 하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치 명적인 상처가 됩니다. 그 정도라고 할 때, 보통 사람 같으면 금방 나가 떨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안되겠구나' 하고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죽기 살기로 더 결사적으로 덤벼들었습니다. 이제 제발 나를 놓아라. 날이 새니 가야겠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정을 했지만, 야곱은 끝내 놓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가히 결사적이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태도를 하나님께서 보시고 자 야곱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주려면 주시고 말라면 마십시오' 이런 미지뜨끄한 태도로 한 두번 기도해 보고 그만두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 르치고 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빌어 보기나 하자꾸나' 하는 태도도 역 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태도의 기도로서는 절대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 하되, 다만 죽기 살기로 구하며 기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으면, 내가 놓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이런 야곱과 같은 진지한 태도로, 아주 결사 적인 태도로, 죽음을 무릅쓰는 진지한 자세로 기도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에게 일부러 져 주시며, 또한 우리의 소원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것 입니다. 이 기도의 이치를 여러분, 오늘 꼭 깨닫고 마음에 샛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이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33장으로 내려가서 보면, 죽이려 고 쫓아 왔던 형 에서의 마음이 180도로 변해서, 오히려 형제가 20년동안 만나지 못한 정과 그리움과 情 때문에 서로 얼싸 안고, 반가워서 우는 감격적인 장면으로 바꾸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퍅한 에서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응답은 이렇게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곧 환난을 형통으로, 역경을 순경 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슬픔으로 기쁨으로, 고난을 형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 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야곱에게서 우리는 꼭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환난의 날은, 오히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뵈올 수 있는 큰 축복의 날이 될 수 있다 고 하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만나면, 어떠한 우리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도, 다 시원하게 해결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까지는,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매달리며 놓지를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이치를/ 믿음의 이치를 꼭 깨닫고, 마음에 깊이 새겨서, 우리의 환난 의 날을, 오히려 축복으로 형통한 날로 바꿔 가는 귀한 축복의 역사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祝願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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