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선악과 (창2:8-17)
본문
목회를 하다보면 참으로 곤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왜 사단을 만드셨는가 또 믿는 사람에게 완전히 망할 정도의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적장히 어려움을 주셔도 잘못을 깨달을텐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선악과에 대한 문제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의도가 무엇인가 선악과가 아니었으면 인간이 범죄할 이유도, 따라서 고통과 죽음도 없었을텐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인가 그렇습니다. 인류의 모든 아픔은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로부터 왔습니다. 만약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인류의 모든 고통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사망과 고통의 그림자인 선악과가 왜 하필이면 에덴동산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에덴과 죽음의 선악과 이 두 단어만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어디에 살게 할까 고민하신 흔적이 역력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꼭 에덴동산이 아니더라도 어느 곳 하나 좋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맑은 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세계, 그것만으로도 복된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 세상 중에서도 동방의 에덴에 특별히 구획을 정하여 아담과 하와가 살아갈 특별구를 설치하셨습니다. 본문의 동산이라는 히브리어 “간”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안전한 장소를 뜻합니다. 허술한 싸리 울타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보호받는 완벽한 보호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안전지대 속에 사람의 처음 거쳐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 안에는 아름다운 네 줄기의 강이 동산을 두루 적시며 흘렀고 정금과 각종 보석드이 즐비했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가득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땀흘리는 수고가 필요 없는, 말 그대로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문제의 나무도 있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영생하는 나무요, 선악과는 죽게되는 나무였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의문이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에덴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나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덴과 생명나무는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그 좋은 에덴에 먹으면 죽는 나무가 왠 말이란 말입니까 선악과가 왜 거기에 있어야 합니까 그래서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이런 아쉬움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예 선악과를 만드시지 않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떤 사람드은 좀 심하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은 따먹으라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니냐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먹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느냐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만드셔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해 놓으셨으냐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는 왜 에덴에 선악과를 만들어 두셨습니까 사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만드셨을까요 아니면 정녕 따먹고 죽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선악과에 담겨있는 영적인 비밀을 캐내어 보려합니다. 함께 은혜를 나누십시다.
1. 선악과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알게 하는 시험액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사람의 목전에 탐스런 열매를 미끼로 놓아두고 “먹으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은 후에 침이나 흘리게 만들어 놓고는 결국은 먹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시려는 야비한 계획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런 치졸하신 분이 아니요, 다만 원칙이 있으신 분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하나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가를 가름하는 시약으로 만들어 두신 것입니다.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알려드립니다. 유리잔 두 개를 준비하여 물을 가득 붓고 한쪽엔 설탕을 다른 한쪽엔 식초를 아주 적은 양을 섞어 놓습니다. 둘 다 맑은 생이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아서는 구분이 되지를 않습니다. 냄새나 맛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적은 양을 섞었기 때문에 냄새나 맛으로도 전혀 분간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구별해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구분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보라색 양배추를 한 잎 떼어서 주전자에 넣고 끓입니다. 양배추의 보라색이 우러나와 끊인 물은 보랏빛이 됩니다. 이제 그 물을 설탕물과 식초물이 담긴 각각의 유리 잔에 부어봅시다. 그러면 설탕물은 보라색 그대로 변함이 없지만 식초물은 보랏빛이 분홍색으로 변합니다. 이 실험에서 양배추 물은 시약입니다. 알칼리성인 설탕물과 산성인 식초물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양배추물이 들어가서 분홍빛이 되었기 때문에 식초물이 아니던 것이 갑자기 식초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양배추물로 증명하지 않았어도 식초물은 본래 식초물이었습니다. 다만 양배추를 끊인 물이 이것이 식초물이다라고 드러내 증명한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선악과가 바로 이 시약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는가 아닌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 죽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향하여 손을 들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있었다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본문의 다음 부분인 3장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묻습니다. “(창3:1)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으로 가장한 사단이 이미 하와의 마음이 하나님으로터 멀어져 있는 것을 알고 그 틈을 노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으로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단은 선악과의 맛과 향을 가지고 하와를 유혹했을 것입니다. 하와의 영적인 상태는 이렇게 사단이 보기에 단순한 선악과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불만을 터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였을 정도로 이미 하나님을 떠나있었습니다. 이제 하와가 대답합니다. “(창3:3)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 하와의 이 대답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한마디가 더 붙어있습니다. 바로 만지지도 말라는 대목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먹지말라하셨지 언제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말의 뉘앙스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얼핏 들으면 하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리 말한 것같이 들리지만, 좀더 깊이 드어 가보면 이 말에는 하나님을 향한 하와의 불만의 목소리가 배어있습니다. 아마도 동산의 다른 과실을 다 맛본 하와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선악과를 볼 때마다 도대체 왜 저것만 먹지 말라고 하신거야 그냥 먹게 하시면 어때서. 저 과실에는 무슨 비밀이 있길래 하며 의문과 불만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그런 하와에게 사단의 말은 도화선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읽어보면 하와의 말투의 뉘앙스는 더 잘 들어맞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만 하셨는줄 알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먹으면 죽는대나 어쩐대나.” 하와의 심리를 확실하게 파악한 사단이 말합니다.“(창3:4)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이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니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와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죄악의 모험을 시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는 사람을 죽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산물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시약인 것입니다. 선악과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수순을 밟게 되어 있었습니다.
2. 사람이 죽게 된 것은 선악과의 독성 때문이 아니요, 생명줄인 하나님을 떠난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가 아닌 독살과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면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이 바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선악과를 먹고도 아담과 하와는 구백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창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5:5)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다시 말해서, 사람이 죽게 된 것은 선악과 안에 독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젖줄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이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이 한계를 가지게 된 결과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일부러 하나님께서 죽게 하시지 않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잃어버리면 죽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발전소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전등은 끊임없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전지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전등은 시간이 되어 전력이 떨어지면 꺼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와의 착각은 하나님이 아니시더라도 선악과를 따먹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똑같아지면 스스로의 힘으로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자기만의 생각일 뿐, 착각이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의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발전하면 암도 정복하고 에이즈 치료제도 개발될 것이고, 거기에 더하여 사람의 노화도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려 늙지 않고 살수도 있는 세상이 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두렵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세상은 본능과 욕망을 의지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철칙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천재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란, 소돔과 고모라와 같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짊어지고 나갈 것인지, 예수의 사람들은 심각하게 고민하여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과학을 의지하십니까 의술을 의지하십니까 지식과 정보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미래가 올 것이라고 믿습니까 단언하건대 점괘와 굿판이 우상이 아니요, 앞으로 가장 무서운 우상이 바로 이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사는 기적은 있어도 하나님을 떠난 생명은 살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죄악이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는 생각이요, 내가 무엇인가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과학이 발달될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사십시오. 의술이 발달할수록 병고침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과 정보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도 우리의 살길은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확신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삶 속에 하나님이 참된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사망과 고통의 그림자인 선악과가 왜 하필이면 에덴동산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에덴과 죽음의 선악과 이 두 단어만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어디에 살게 할까 고민하신 흔적이 역력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꼭 에덴동산이 아니더라도 어느 곳 하나 좋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맑은 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세계, 그것만으로도 복된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 세상 중에서도 동방의 에덴에 특별히 구획을 정하여 아담과 하와가 살아갈 특별구를 설치하셨습니다. 본문의 동산이라는 히브리어 “간”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안전한 장소를 뜻합니다. 허술한 싸리 울타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보호받는 완벽한 보호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안전지대 속에 사람의 처음 거쳐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 안에는 아름다운 네 줄기의 강이 동산을 두루 적시며 흘렀고 정금과 각종 보석드이 즐비했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가득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땀흘리는 수고가 필요 없는, 말 그대로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문제의 나무도 있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영생하는 나무요, 선악과는 죽게되는 나무였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의문이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에덴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나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덴과 생명나무는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그 좋은 에덴에 먹으면 죽는 나무가 왠 말이란 말입니까 선악과가 왜 거기에 있어야 합니까 그래서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이런 아쉬움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예 선악과를 만드시지 않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떤 사람드은 좀 심하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은 따먹으라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니냐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먹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느냐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만드셔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해 놓으셨으냐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는 왜 에덴에 선악과를 만들어 두셨습니까 사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만드셨을까요 아니면 정녕 따먹고 죽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선악과에 담겨있는 영적인 비밀을 캐내어 보려합니다. 함께 은혜를 나누십시다.
1. 선악과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알게 하는 시험액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사람의 목전에 탐스런 열매를 미끼로 놓아두고 “먹으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은 후에 침이나 흘리게 만들어 놓고는 결국은 먹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시려는 야비한 계획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런 치졸하신 분이 아니요, 다만 원칙이 있으신 분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하나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가를 가름하는 시약으로 만들어 두신 것입니다.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알려드립니다. 유리잔 두 개를 준비하여 물을 가득 붓고 한쪽엔 설탕을 다른 한쪽엔 식초를 아주 적은 양을 섞어 놓습니다. 둘 다 맑은 생이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아서는 구분이 되지를 않습니다. 냄새나 맛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적은 양을 섞었기 때문에 냄새나 맛으로도 전혀 분간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구별해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구분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보라색 양배추를 한 잎 떼어서 주전자에 넣고 끓입니다. 양배추의 보라색이 우러나와 끊인 물은 보랏빛이 됩니다. 이제 그 물을 설탕물과 식초물이 담긴 각각의 유리 잔에 부어봅시다. 그러면 설탕물은 보라색 그대로 변함이 없지만 식초물은 보랏빛이 분홍색으로 변합니다. 이 실험에서 양배추 물은 시약입니다. 알칼리성인 설탕물과 산성인 식초물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양배추물이 들어가서 분홍빛이 되었기 때문에 식초물이 아니던 것이 갑자기 식초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양배추물로 증명하지 않았어도 식초물은 본래 식초물이었습니다. 다만 양배추를 끊인 물이 이것이 식초물이다라고 드러내 증명한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선악과가 바로 이 시약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는가 아닌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 죽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향하여 손을 들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있었다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본문의 다음 부분인 3장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묻습니다. “(창3:1)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으로 가장한 사단이 이미 하와의 마음이 하나님으로터 멀어져 있는 것을 알고 그 틈을 노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으로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단은 선악과의 맛과 향을 가지고 하와를 유혹했을 것입니다. 하와의 영적인 상태는 이렇게 사단이 보기에 단순한 선악과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불만을 터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였을 정도로 이미 하나님을 떠나있었습니다. 이제 하와가 대답합니다. “(창3:3)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 하와의 이 대답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한마디가 더 붙어있습니다. 바로 만지지도 말라는 대목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먹지말라하셨지 언제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말의 뉘앙스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얼핏 들으면 하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리 말한 것같이 들리지만, 좀더 깊이 드어 가보면 이 말에는 하나님을 향한 하와의 불만의 목소리가 배어있습니다. 아마도 동산의 다른 과실을 다 맛본 하와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선악과를 볼 때마다 도대체 왜 저것만 먹지 말라고 하신거야 그냥 먹게 하시면 어때서. 저 과실에는 무슨 비밀이 있길래 하며 의문과 불만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그런 하와에게 사단의 말은 도화선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읽어보면 하와의 말투의 뉘앙스는 더 잘 들어맞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만 하셨는줄 알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먹으면 죽는대나 어쩐대나.” 하와의 심리를 확실하게 파악한 사단이 말합니다.“(창3:4)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이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니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와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죄악의 모험을 시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는 사람을 죽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산물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시약인 것입니다. 선악과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수순을 밟게 되어 있었습니다.
2. 사람이 죽게 된 것은 선악과의 독성 때문이 아니요, 생명줄인 하나님을 떠난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가 아닌 독살과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면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이 바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선악과를 먹고도 아담과 하와는 구백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창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5:5)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다시 말해서, 사람이 죽게 된 것은 선악과 안에 독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젖줄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이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이 한계를 가지게 된 결과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일부러 하나님께서 죽게 하시지 않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잃어버리면 죽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발전소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전등은 끊임없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전지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전등은 시간이 되어 전력이 떨어지면 꺼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와의 착각은 하나님이 아니시더라도 선악과를 따먹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똑같아지면 스스로의 힘으로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자기만의 생각일 뿐, 착각이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의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발전하면 암도 정복하고 에이즈 치료제도 개발될 것이고, 거기에 더하여 사람의 노화도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려 늙지 않고 살수도 있는 세상이 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두렵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세상은 본능과 욕망을 의지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철칙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천재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란, 소돔과 고모라와 같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짊어지고 나갈 것인지, 예수의 사람들은 심각하게 고민하여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과학을 의지하십니까 의술을 의지하십니까 지식과 정보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미래가 올 것이라고 믿습니까 단언하건대 점괘와 굿판이 우상이 아니요, 앞으로 가장 무서운 우상이 바로 이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사는 기적은 있어도 하나님을 떠난 생명은 살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죄악이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는 생각이요, 내가 무엇인가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과학이 발달될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사십시오. 의술이 발달할수록 병고침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과 정보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도 우리의 살길은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확신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삶 속에 하나님이 참된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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