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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창30:25-31-13)

본문

얼마 전 교통방송의 별난 기사, 별난 승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분이 수년 전에 택 시를 운전할 때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한 승객이 택시를 타고는 목포까지 가자고 하기에 요금을 합의한 후 출 발을 했다고 합니다. 고속도로 통행료도 나중에 한꺼번에 계산을 하자고 하기에 그러려니 하고는 그 기사 분이 먼저 지불을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승객이 행여나 지루해 할까 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 하면서 열심히 달리는 중에 광주를 다 온 어느 휴게소에서 볼일이 있으니 잠시 쉬자고 하기에 휴 게소에 차를 대고는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승객이 나타나지 않자 그 휴게소를 전부 다 뒤졌지만 그 승객은 없었다 고합니다. 아마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대판 야곱이 거기에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씁스레이 웃을 수밖에 없었 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야곱보다 더 뛰어난 라반을 만나서 곤욕을 치렀을 것이라고 자위를 해 보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야곱과 같은 인물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들을 발목을 잡고는 한 번 일어서 보려고 합니다. 물론 뜻대로 될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라반과 같은 인물을 만나서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속고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 진행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형의 발목을 잡고 태어나 형과 아버지를 속여 먹은 이 야곱, 그리고 그 야곱을 멋지게 속이면서 20년 동안 부려먹은 삼촌 라반,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본 문에서도 계속 진행이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야곱과 라반의 이야기는 라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상황은 좀 다릅니다. 서로 뒤질세라 눈을 번쩍이며 머리싸움을 시작합니다. 야곱은 야곱대로 라반은 라반대로 계략을 꾸미며 이 싸움에 임합니다. 서로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기를 위해서 말 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이 두 사람의 결전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함께 교훈 받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전제 저는 오늘 본문을 라반을 세상으로 야곱을 그리스도인으로 비교하면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라반은 야 곱을 어떻게 속이려는 지를 통해 세상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살펴 볼 것이며 또 이에 대해 반응하는 야곱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야곱의 흥정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야곱이 요셉을 낳을 때에 7라헬을 위해서 수고해야 하는 7년 이 다 찬 어느 날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즉, 이제자신의 계약기간이 끝났다는 것이죠. 그러니 돌아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라반은 저를 붙잡죠. 왜죠 그렇습니다. 쓸만하기 때문입니다.
27절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다.  무슨 이야기입니 까 예, 야곱으로 인해 재산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반은 어떻게 하든지 이 야곱을 더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이렇게 28절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은 이 이야 기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29-30절에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나의 수고를 인해 이렇게 거부가 되었는데 나는 빈 털털이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금까지 14년 동안 열심히 수고를 했지만 사실 이 수고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얻기 위한 수고 였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자신 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자신의 두 아내가 법적으로 자신의 아내가 되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야곱에게는 이미 몇 명의 아들과 또 몇 명의 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먹이고 입힐만한 아무것도 그는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는 큰 압박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여기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아무것도 안되겠다. 무슨 수를 내야만 한다 라고 생각 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에게 나는 어느 때에나 나의 집을 세우리이까 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반은 이런 야곱의 마음을 알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31절에  자 이이야기에 대해 서 야곱이 무엇이라 말하죠 3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앞으로 양 이나 염소가 아롱진 것이나 점있는 것이 나면 자신의 것으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은 라반의 입장에서 보면 수지맞는 제안이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양이나 염소가 이런 것을 낳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라반은 그 즉시로 대답을 하고 맙니다. 아마 어쩌면 라반은 자신이 지불하려고 했던 것 보다 더 적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주장을 하는 야곱을 어리석다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이 일에 동의를 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기에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왜 야곱이 이런 제안을 라반에게 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왜 야곱이 이런 제안을 야곱에게 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야곱이 어리석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어떻습니까 지금 까지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시면서 야곱이 어리석다 이렇게 느껴지는 일이 있었습니까 에서라면 몰라도 야곱에게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약삭빠르고 계산에 능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왜 야곱은 이렇게 손해보는 제안을 하게 되었을까요
11,12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어떤 꿈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교미를 하는 수양은 다 얼룩무늬가 있는 것, 점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바로 이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앞으로 자신을 이끄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삼촌 라반에게 어리석게도 이런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야곱이 이런 제안을 한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제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일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무엇이 뻔하죠 그렇습니다. 또 헛수고만 할 것이 뻔한 이치였습니다. 지난 14년에 못지않은 헛수고가 될 것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저는 양을 잘 키워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얼룩지고 아롱아롱한 것 이런 것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 것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얼마든지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삼촌 라반하고 이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린다 면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14년 동안 이루어 놓은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삼촌 라반은 이런 결과를 보고 만족해하면서 더 머물러 있으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삼촌 라반의 마음에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이 문제로 협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치 프로야구 선수들이 연 봉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협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라반이 이 협상에서 야곱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히든 카드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들어주지 않으면 나는 떠나가겠다. 하는 것이죠. 이 비장의 무기를 써서 협상을 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주가를 높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14년 동 안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것 까지 달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처지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게도 그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 아롱진 것, 점있는 것 이런 것들만 요구를 합니다. 야곱의 믿음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야곱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틀 림없이 자신에게 보여 주신대로 자신을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가졌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종종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교회에 착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내가 세워놓은 계획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세워놓은 계획하고 믿음하고 전 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을 쫓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종종 이 부분에 혼동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도 않고 그저 불도저를 탑니다. 왜요 밀어붙 이기 위해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이것을 살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보여지면 그 때 불도저를 타야 합니다. 그 일이 나에게 손해를 보게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큰 아픔을 요구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뜻 이라면 불도저를 타고 힘있게 밀어 붙여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봐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아파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밀어붙이십시오. 앞뒤 따지지 말고요.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일을 잘못하는 것 같습니다. 밀어 붙이지 말아야 할 시점에서 밀어붙여버립니다. 앞뒤 살피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앞뒤를 살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런 삶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이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자주 세상 사람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여러 가지 일들을 논의 할 것입니다.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자주 따지고 살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 생각대로 그 일들을 경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믿음 의 자세는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그것을 잘 살핀 연후에야 그 일들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입니다. 종종 어떤 일을 시작하기 이 전이나 협상태이불이 앉기 이전에는 기도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을 진행 할 때는 전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그런 방법을 쓸 때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일들이 아닙니다.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속임수에 능한 세상과 벌여야 하는 협 상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세상의 방법을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원치 않습니다. 라반의 반응
그렇다면 이런 야곱의 제안에 대해서 라반은 어떻게 일들을 처리 할 까요
34-36절을 읽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잘 살펴야 오늘 본문을 좀 더 사실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라반이 어떻게 하죠 35절에 있는 말씀을 보니까 그렇습니다. 수 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을 가 려 냅니다. 그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려 냅니다. 또 양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 이 기록에서 어떤 것이 느껴지십니까 라반이 대충대충 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히 세세하게 살핀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예, 이것들을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였 습니다. 누구의 아들입니까 예, 라반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예, 야곱과 자기와 사흘 길을 뜨 게 합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나는 이런 양들이 앞으로 새끼를 낳을 때 영향을 주어서 역시 아롱지고 점있고 얼룩얼룩한 양과 염소를 낳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이미 태 어나 있는 이런 양들이 앞으로 태어날 양들과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야곱을 완전히 믿 지 못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야곱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부화가 치밀어 올라 왔 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저 같았으면 삼촌이 이러고 있을 때 이상한 짖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 저 돌멩이를 발로 차든지, 소리를 냅다 지르든지, 아니면 이런 일을 하는 라반을 도우면서 양들을 냅다 집어던졌 을 것입니다. 글쎄요, 야곱이 그랬다는 기록은 없지만 아무튼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야곱,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우리는 이 라반의 모습에서 세상의 한 단면을 봅니다.
자 27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얼마나라반이 부드럽습니까 낮 간지러울 정입니다. 예, 야 곱아 네가 나를 사랑하니
그렇다면 여기 머물러 잊으렴 아마 이 이야기를 하면서 코 멩멩이 소리도 좀 내지 않 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만큼 이 구절의 분위기는 부드럽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야곱이 필요하기 때 문입니다. 그러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잡아야죠. 그래서 이렇게 아부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보십시오. 34절 이 후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찬바람이 붑니다. 얼마나 냉정하고 냉혹한 지요. 정말 썰렁합니다. 여러분 왜 라반이 이렇게 갑자기 돌변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야곱은 있기로 결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저에게 아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라반은 무우 자르듯이 짤라 버리고 맙니다.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필요할 때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빼어 줄 것 같습니다. 정말 간이라도 빼어줄 듯이 살랑댑니다. 그러나 그 필요한 것을 얻고 나면 아니 이 사람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여겨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안 면을 바꾸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만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할 그리스도인들도 그러는 것 같아요. 자기가 좋 을 때는 그저 다 내어 줄 것 같습니다. 마치 혀와 같이 부드럽고 잘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수틀리면 언제 그랬느 냐는 듯이 돌아서 버립니다. 벌써 표정에 나타납니다. 찬바람이 휙휙 불어요.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차갑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야 이럴 때 술로 푼다지만 우리들은 어떻게 풀죠. 참 막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믿음 없음 자
그렇다면 이런 삼촌 라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곱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37-42절의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예, 야곱 나름대로 묘수를 짜내고 있습니다. 어떤 묘수입니까 그렇습니다.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가지를 벗겨서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나무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 천의 물 구유에 세워서 양떼에게 향하게 합니다. 그랬더니 새끼를 배는데 얼룩진 것이나 아롱진 것이 태어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무가지에 어떤 신기한 능력이 있기에 이렇게 되는지.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 을 할 때 그 이견이 분분합니다. 그 이견 중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미신적인 행위이다라고 단정을 짖는 것과 그렇지 않다. 꼭 그런 것은 아닐 지라도 야곱은 오랜 양치기 생활에 양을 놀 때 영향을 줄 수 있는 민간요 법을 알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견은 이 나무들이 새끼가 잉태를 할 때 아롱지도록 혹은 얼룩이 지도록 영향을 주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니다. 이 나무들은 양들이나 염소들이 발정을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지들을 개천에 두면 양들을 발정을 하게 되어 새끼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어떤 의견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이것들이 발정을 하게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튼튼한 양은 자주 발정을 하게 해서 새끼를 자꾸 낳게 했던 것이 죠. 물론 어떤 것이냐 분명치 않기 때문에 이것이다 저것이다 주장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야 곱이 왜 이렇게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왜 야곱이 이렇게 해야만 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욀 까요 답을 미리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촌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오기도 났을 것입니다. 어디 두고 바라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삼촌의 그 냉혹한 모습을 보 면서 화도 나고 불안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촌 라반이 이렇게 반응하자 기분도 나빠졌을 뿐만 아니라 금방 불안해 지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인간적인 방법을 쓰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을 통해서 번식 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커트라인 바로 여기에 야곱의 문제가 있습니다. 삼촌이 어떻게 반응을 하던지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했 습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나는 내 믿음을 지키련다하는 자세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냉혹한 모습을 보고는 그만 믿음을 상실해 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야곱의 모습,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종 종 취하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은 잘 시작을 합니다. 상대가 어떠하 든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일들을 진행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자신이 뜻하지 않는 대로 반응을 하면 금방 태도를 돌변합니다. 그래서 야곱과 같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봅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커트라인을 설정해 두는 것 같습니다. 어떤 커트라인인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살아야 할 커 트라인입니다. 손해 보는 것은 이 정도까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이 정도까지 나름대로 이러저러하게 정해 놓고 그 이내는 믿음으로 잘 견딥니다. 그래서 이 커트라인을 넘어서지 않는 한은 멋진 신앙 인으로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어쩌다 이 커트라인을 넘어서 버리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드디어 자신이 지켰던 믿음을 내동뎅이 치고는 세상 사람의 방법으로 대처하기를 시작합니다. 바로 야곱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일들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이 생각을 했던 커트라인을 넘어버리자 그만 믿음 을 잃어버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다시 야곱의 육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지 내가 어떤 손해를 입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상황에도 그는 믿음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 이런 커트라인이 있다면 다 허물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을 지키 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부가 된 야곱
그렇다면 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43절의 말씀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되죠 그렇습니다. 심히 풍부해 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어에서는 이 말이 좀더 실감이 납니다. 원어의 의미는 심히 풍부해졌다는 말을 그 사람이 심히 크게 터졌더라 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야곱이 거부가 된 것 입니다. 31:1,2절 말씀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큰 부자가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드디어 야곱이 부자가 됨으로 라반과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만큼 야곱이 거부가 된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이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 줄 아십니까 어떻게 야곱 이 부자가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야곱이 이렇게 부자가 되었을까요 야곱의 방법이 주효했기 때문입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버드나무나 살구나무 또는 신풍나무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 도 야곱은 얼마든지 거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 기서 야곱이 쓴 방법이 주효했다고 말한다면 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일도 정당 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속임수로 돈을 번다 부정한 방법으로 거부가 된다 야곱을 봐라 야곱 도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가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야곱의 고백 이것은 야곱의 고백을 보면 분명해 집니다.
30:30절에 있는 말씀을 한 번 보죠.  특히 이 구절 중에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자칫 잘못이해를 하면 마 치 야곱이 자신의 공력으로 모든 것을 착각을 한 것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문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내 발에 축복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호와께서 내가 가는 곳마다 축복을 따르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지난 14년 동안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평가한 이야기입니다. 또 보실 까요 31:5절입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되어진 일들을 평가하면서 자신의 아내에게 한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너희들의 아버지가 그러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6,7절을 보십시다.  무엇이라 이야기하죠 그렇습니다. 20년 동안 너희들의 아버지를 섬기는 동안 아버지가 10번이나 약속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복을 자녀를 얻는 것과 물질을 얻는 것으로 평 가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미 야곱은 몇 명의 아들을 얻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이미 11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터졌다고 표현이 될 만큼 거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 일 이겠습니까 야비하고 냉혹한 라반의 아래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사실 이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일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런 자신의 인생을 평가해 보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신 것이라고요. 또 9절을 볼까요  예, 역 시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속임수로 이렇게 능하게 되었다. 그 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라반과 같은 사람을 섬겼을지라도 야곱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은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이 일이 가능한 일입니다. 결코 이 일은 야곱의 탁월함으로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그것이 아니면 이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을 이처럼 선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야곱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치던 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약속을 하셨죠 다시 창 28:13-15절을 읽겠습니다.  바로 이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 해서 저를 이처럼 선대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이런 복을 받을 만 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아무런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는 속이는데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 하나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야곱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저와 맺은 언약은 변치 않으시고 신실하게 이 끌어 가십니다. 보십시오. 이 말씀이 너무나 멋지게 이루어져 가고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분이 저와 여러분들 의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야곱이 라반에게 붙들려 있었을 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런 하나님께서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뭔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닐 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자녀 삼으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을 인해 위로를 얻으시는 여러분들 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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