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창3:14-24,롬3:25)
본문
며칠 전 여자 화장실에서 비디오 카메라로 몰래 촬영했다는 이유로 한 남자가 구속된 기사가 있었습니다. 물론 카메라로 찍은 사건에 대한 것은 법률적인 적용이 어려워 그 사건 자체에 대하여 처벌하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행위에 대한 첫 번째 처벌이라 관심을 끄는 기사였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서울의 대형 백화점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 설치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백화점의 고객이었던 여성들의 분노는 적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대단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사단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들려고, 그리고 하나님의 권한에서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졸개로 만들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를 항상 만났을 뿐만 아니라 사단도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자신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존재인 사람은 사단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에 대한 지배권이 다름 아닌 사람에게 이미 주어졌으므로 사람을 자기의 수하로 만들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만물에 대한 지배권은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인간의 범죄와 그 증상에 대하여 조명해 보았습니다. 수치심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으며, 하나님의 부르는 소리를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돌이키기는커녕 변명하며 잘못을 전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아담과 그 아내가 에덴 동산에서 항상 듣던 음성이었지만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설정해 놓으신 모든 질서가 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도, 아담과 그 아내와의 독립적이지만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 깊은 사랑의 관계와, 사람에게 주어졌던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범죄의 당사자인 뱀과 하와, 그리고 아담에게 각각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범죄 후의 인간은 분명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과 다른 존재였습니다. 더 이상 순결한 몸이 아니어서, 에덴에 거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 밖으로 추방되었고(창 3:23), 필경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창 3:19).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타락한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가 상하리라 성경에서는 사단의 존재에 대하여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여러 부분을 종합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에스겔 28장의 내용이 사단에 대한 계시라고 동의합니다. 인간의 타락에 있어서 사단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가 인간을 유혹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우주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기 위한 작전이었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행위였습니다. 에스겔 28:13에서 사단은 옛적에 에덴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겔 28:17). 각종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고(겔 28:13), 지혜가 뛰어났습니다(겔 28:18).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있으므로 누리고 있는 영화와 아름다운 자태(姿態), 그리고 지혜로움으로, 오히려 교만하여졌고(겔 28:17), 지혜를 더럽혔으며(겔 28:17), 성소를 더럽혔습니다(겔 28:18). 그의 교만은 극치에 달해 이사야 14:13-14에 보면, 하늘에 올라 뭇 별 위에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 했고,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 하려 하고 끝내 하나님과 비기려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하고 지혜로우며 아름답고 영화를 누리던 사단이 인생을 유혹하고, 그에게 자신의 사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더구나 인생들을 자신의 권세 아래 머물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어느 한 분야에 특별한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될 때, 세상의 권세와 물질적인 부(富)로 인하여 영화로울 때,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에 교만이 싹틀수 있습니다. 사단은 인간의 교만스러운 본성을 자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것입니다. 스스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으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려했던 사단이 여자에게도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라고 하며, 자신의 교만을 인간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소홀이 여긴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고 남자에게 주어 같은 범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를 유혹한 사단에게 하나님은 가장 큰 저주를 내렸습니다(창 3:14).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최초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는 사단의 가장 귀한 신체 부위인 머리를 상하게 하여 도저히 회복 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습니다. 더 이상 그가 온 세상의 권세자로 있지 못하게 하고, 지금도 예수께서는 사단의 손에 넘어가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십니다. 남편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첫째 잉태의 고통을 더하셨습니다(창 3:16).
그러므로 여인에게 있어서 해산의 수고는 자신의 범죄가 얼마나 치욕스럽고 중차대한 것인지를 상기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범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심적 고통 또한 여인이 겪는 해산의 고통에 비견할 만한 것임을 모든 인생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남편을 사모하는 저주가 임했습니다. 창세기 1:27에서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는 본래 다른 개체로서, 독립적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뒤 1:28에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육, 번성, 충만, 땅의 정복과 생물을 다스리는 것은 남자와 여자에게 동일하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 이후에 여자는 남자를 사모해야 했습니다. 사모한다는 히브리어 (teshuqah,테슈카)는 실제적인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 '요구하다', '촉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아이를 출산하는데 따르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통한 성적인 만족을 바라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고, 또는 소유욕과 주도권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끊임없이 남편을 지배하고 주도하고 조종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는 욕망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심해질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남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입니다. 본래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 임한 세 번째 저주는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창 3:16). '다스리다'는 히브리어 (malak, 말라크)는 '통치하다', '왕 또는 여왕이 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돕는 배필로 지어진 여자가 이제는 타락으로 인하여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가 깨어지고, 예속된 여자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나님의 저주가 있은 다음에 지어주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지음으로 그 지배권이 그에게 있음을 선언하였듯이,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담이 하와를 다스리는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는 남편의 지배아래 아내가 있는 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생들에게 주신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조화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이러한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에베소서 5:22-25의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태도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과 같은 사랑을 아내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 그것은 남편이 머리가 되어야 하고,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희생이 따르는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가정의 화목과 조화는 그리스도가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하듯,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에게 복종과 사랑을 행하십시오. 그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질서입니다. 그 모습이 남편과 아내의 위치입니다. 종신토록 수고하라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담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이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에 대하여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담의 범죄는 자의적인 것이지 결코 여자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의 형벌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노동의 형벌과 죽음의 형벌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에게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창 3:17). 수고한다는 것은 '땀흘려 가며 일하는 노동'으로 '고생스러운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범죄 이전 에덴에서도 그에게 노동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의 노동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범죄 이전의 노동이 자기 성취감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복된 성격의 노동이었다면, 범죄 후의 노동은 생계의 수단의 노동으로 수고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은 이미 인간에게 주신 신성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생계 수단으로의 노동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써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어서 아우성입니다. 생계 유지를 위해 노동할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15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의 고통을 거두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이 백성에게 신성한 노동을 허락하소서! 고생스러운 노동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언약이 성취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있어야 했습니다(레 4:13-35). 동물을 잡아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것은 동물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들의 죄를 속해 생명을 연장시켜 주었습니다. 이는 또한 장차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 하고 있습니다. 후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제물을 삼으셨습니다(롬 3:25).
에덴을 떠나라 하나님의 저주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인간이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곳을 떠난 인간은 더 이상 인간 스스로는 영생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로 인하여 육체적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인간이 에덴에 남아 생명나무 과실를 먹고 저주받은 육체로 영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벌(永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아담과 하와을 황급히 에덴 동산 밖으로 쫓아내신 것은 단순한 형벌의 의미로만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시킨 다음 새로운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들로 하여금 지금까지도 그 말씀대로 저주 가운데 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그 아내의 범죄와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를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에덴에서의 행복과 질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에 깨어지고 말았듯이, 오늘 우리 가정의 행복과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공동체 가족여러분, 여러분의 행복을 위협하거나 오랫동안 지켜온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주신 명령은 여러분들의 행복과 여러분 가정의 질서를 지키게 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최선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선별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선포되고 있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대상에 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늘 교인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예배를 비롯한 교회 행사에 대한 참여 문제, 십일조를 비롯한 감사헌금과 교회에 내야하는 연보 문제, 개인적인 기도생활 문제일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교인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신앙 생활에 적지 않은 장애요인으로 오랫동안 갈등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갈등을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 문제는 개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거짓없이 행할 때 그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평안과 하나님의 보호의 간구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신뢰와 그에 따르는 적극적인 반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가 우리의 망대이며, 우리의 보호처 입니다(잠 18:10).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의 절대적인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행복과 가정의 안녕을 지키는 최선책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의 범죄는 그후 태어나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했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는 더 이상 개체별 독립성이 존중되는 관계의 틀이 깨어져버리고, 갈등과 반목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생들이 범죄 후 잃어버린 가장 큰 손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그후 인생은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땀을 흘리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갈등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더욱 괴로운 일은 사단의 권세 아래에서 그들과의 끊임없는 전투를 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과정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가죽옷과 에덴에서의 추방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에 대한 지배권이 다름 아닌 사람에게 이미 주어졌으므로 사람을 자기의 수하로 만들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만물에 대한 지배권은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인간의 범죄와 그 증상에 대하여 조명해 보았습니다. 수치심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으며, 하나님의 부르는 소리를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돌이키기는커녕 변명하며 잘못을 전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아담과 그 아내가 에덴 동산에서 항상 듣던 음성이었지만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설정해 놓으신 모든 질서가 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도, 아담과 그 아내와의 독립적이지만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 깊은 사랑의 관계와, 사람에게 주어졌던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범죄의 당사자인 뱀과 하와, 그리고 아담에게 각각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범죄 후의 인간은 분명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과 다른 존재였습니다. 더 이상 순결한 몸이 아니어서, 에덴에 거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 밖으로 추방되었고(창 3:23), 필경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창 3:19).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타락한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가 상하리라 성경에서는 사단의 존재에 대하여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여러 부분을 종합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에스겔 28장의 내용이 사단에 대한 계시라고 동의합니다. 인간의 타락에 있어서 사단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가 인간을 유혹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우주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기 위한 작전이었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행위였습니다. 에스겔 28:13에서 사단은 옛적에 에덴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겔 28:17). 각종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고(겔 28:13), 지혜가 뛰어났습니다(겔 28:18).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있으므로 누리고 있는 영화와 아름다운 자태(姿態), 그리고 지혜로움으로, 오히려 교만하여졌고(겔 28:17), 지혜를 더럽혔으며(겔 28:17), 성소를 더럽혔습니다(겔 28:18). 그의 교만은 극치에 달해 이사야 14:13-14에 보면, 하늘에 올라 뭇 별 위에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 했고,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 하려 하고 끝내 하나님과 비기려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하고 지혜로우며 아름답고 영화를 누리던 사단이 인생을 유혹하고, 그에게 자신의 사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더구나 인생들을 자신의 권세 아래 머물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어느 한 분야에 특별한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될 때, 세상의 권세와 물질적인 부(富)로 인하여 영화로울 때,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에 교만이 싹틀수 있습니다. 사단은 인간의 교만스러운 본성을 자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것입니다. 스스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으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려했던 사단이 여자에게도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라고 하며, 자신의 교만을 인간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소홀이 여긴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고 남자에게 주어 같은 범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를 유혹한 사단에게 하나님은 가장 큰 저주를 내렸습니다(창 3:14).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최초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는 사단의 가장 귀한 신체 부위인 머리를 상하게 하여 도저히 회복 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습니다. 더 이상 그가 온 세상의 권세자로 있지 못하게 하고, 지금도 예수께서는 사단의 손에 넘어가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십니다. 남편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첫째 잉태의 고통을 더하셨습니다(창 3:16).
그러므로 여인에게 있어서 해산의 수고는 자신의 범죄가 얼마나 치욕스럽고 중차대한 것인지를 상기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범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심적 고통 또한 여인이 겪는 해산의 고통에 비견할 만한 것임을 모든 인생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남편을 사모하는 저주가 임했습니다. 창세기 1:27에서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는 본래 다른 개체로서, 독립적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뒤 1:28에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육, 번성, 충만, 땅의 정복과 생물을 다스리는 것은 남자와 여자에게 동일하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 이후에 여자는 남자를 사모해야 했습니다. 사모한다는 히브리어 (teshuqah,테슈카)는 실제적인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 '요구하다', '촉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아이를 출산하는데 따르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통한 성적인 만족을 바라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고, 또는 소유욕과 주도권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끊임없이 남편을 지배하고 주도하고 조종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는 욕망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심해질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남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입니다. 본래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 임한 세 번째 저주는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창 3:16). '다스리다'는 히브리어 (malak, 말라크)는 '통치하다', '왕 또는 여왕이 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돕는 배필로 지어진 여자가 이제는 타락으로 인하여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가 깨어지고, 예속된 여자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나님의 저주가 있은 다음에 지어주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지음으로 그 지배권이 그에게 있음을 선언하였듯이,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담이 하와를 다스리는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는 남편의 지배아래 아내가 있는 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생들에게 주신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조화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이러한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에베소서 5:22-25의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태도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과 같은 사랑을 아내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 그것은 남편이 머리가 되어야 하고,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희생이 따르는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가정의 화목과 조화는 그리스도가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하듯,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에게 복종과 사랑을 행하십시오. 그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질서입니다. 그 모습이 남편과 아내의 위치입니다. 종신토록 수고하라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담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이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에 대하여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담의 범죄는 자의적인 것이지 결코 여자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의 형벌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노동의 형벌과 죽음의 형벌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에게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창 3:17). 수고한다는 것은 '땀흘려 가며 일하는 노동'으로 '고생스러운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범죄 이전 에덴에서도 그에게 노동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의 노동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범죄 이전의 노동이 자기 성취감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복된 성격의 노동이었다면, 범죄 후의 노동은 생계의 수단의 노동으로 수고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은 이미 인간에게 주신 신성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생계 수단으로의 노동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써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어서 아우성입니다. 생계 유지를 위해 노동할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15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의 고통을 거두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이 백성에게 신성한 노동을 허락하소서! 고생스러운 노동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언약이 성취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있어야 했습니다(레 4:13-35). 동물을 잡아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것은 동물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들의 죄를 속해 생명을 연장시켜 주었습니다. 이는 또한 장차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 하고 있습니다. 후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제물을 삼으셨습니다(롬 3:25).
에덴을 떠나라 하나님의 저주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인간이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곳을 떠난 인간은 더 이상 인간 스스로는 영생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로 인하여 육체적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인간이 에덴에 남아 생명나무 과실를 먹고 저주받은 육체로 영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벌(永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아담과 하와을 황급히 에덴 동산 밖으로 쫓아내신 것은 단순한 형벌의 의미로만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시킨 다음 새로운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들로 하여금 지금까지도 그 말씀대로 저주 가운데 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그 아내의 범죄와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를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에덴에서의 행복과 질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에 깨어지고 말았듯이, 오늘 우리 가정의 행복과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공동체 가족여러분, 여러분의 행복을 위협하거나 오랫동안 지켜온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주신 명령은 여러분들의 행복과 여러분 가정의 질서를 지키게 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최선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선별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선포되고 있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대상에 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늘 교인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예배를 비롯한 교회 행사에 대한 참여 문제, 십일조를 비롯한 감사헌금과 교회에 내야하는 연보 문제, 개인적인 기도생활 문제일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교인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신앙 생활에 적지 않은 장애요인으로 오랫동안 갈등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갈등을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 문제는 개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거짓없이 행할 때 그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평안과 하나님의 보호의 간구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신뢰와 그에 따르는 적극적인 반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가 우리의 망대이며, 우리의 보호처 입니다(잠 18:10).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의 절대적인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행복과 가정의 안녕을 지키는 최선책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의 범죄는 그후 태어나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했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는 더 이상 개체별 독립성이 존중되는 관계의 틀이 깨어져버리고, 갈등과 반목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생들이 범죄 후 잃어버린 가장 큰 손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그후 인생은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땀을 흘리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갈등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더욱 괴로운 일은 사단의 권세 아래에서 그들과의 끊임없는 전투를 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과정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가죽옷과 에덴에서의 추방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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