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 (창27:2)
본문
사순절 기간중 오늘은 세번째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순절 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스코트라는 사람은 "인간은 죽음을 숙고하는 유일한 동물이며 종말에 대하여 의심을 보여주는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람만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만,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수긍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반응하게 될 것 입니다.
첫째는 공포와 떨림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중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습 니까
그러므로 많은 정신질환자나 불안과 억압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원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죽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세종대왕 때 판중추부사 민대생이라는 사람이 90세를 맞이하여 새해 인사를 받게 되었는데 한 사람이 "건강하시고 100수를 하옵소서."했답니다. 그러자 그는 노발대발하면서 "내 나이 이제 90인데 100수를 하라면 앞 으로 10년만 더 살라는 말이냐!"하면서 쫓아내더랍니다. 이 말을 인사 차 오던 사람이 전해듣고 "100수를 두번 하시옵소서!" 했더니 "그렇지, 그렇게 인사를 해야지!" 하면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잘 차려 주더랍니다. 죽음은 두려울 것이기에 누구든 두려워하며 떨게 됩니다. 사실 죽음 이란 말처럼 두려운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
둘째는 죽으면 끝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버트란트 럿셀은 "지금 창밖에는 어두움이 깔렸는데, 내가 죽으면 그 흑암이 나를 그만 뒤덮겠지. 이제는 찬란한 빛, 인생의 장엄함도 모두 사 라진 짧은 한 순간의 무위와 공허만이 남고 말겠구나!" 탄식하며 세상을 떠났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바루네라는 사람은 무신론자로 유명한 사람인데 한번은 바다에 나갔다 가 기관이 고장을 일으켜 바다를 한없이 표류하다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 저를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더랍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육지에 나오게 되었을때 사람들은 "바루네의 무 신론은 땅에서는 통하지만 바다에서는 통하지 않는군!" 하는 말이 생겼 답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죽으면 끝이다 라는 잘못된 사람들의 생각을 지적해 주고 있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1758년 10월 3일 전쟁에서 방어하기가 매우 곤란한 지역에서 전쟁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그에게 대패를 가져다 주어 자신과 소수의 군사들만 생 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다가 그는 품속에 간직 했던 극약을 꺼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 것밖에 없지" 하더랍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거야' 라는 생각이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잠시 후에 설명이 되겠습니다만 죽으면 과연 끝이겠습 니까 1차 세계대전때 공군대위 바르틴이 천막 안 숙소에 있었는데, 친구 코 넬이 찾아왔답니다. 바르틴은 깜짝 놀라며 "아니 자네는 조금전에 비행 기 출동에 참여하지 않았었는가그래, 출동했었지. 오늘 참 나는 멋 있는 비행을 했었다네!" 하며 인사말을 남기고 떠나려 하더랍니다. 바 르틴은 잠시 들어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떠나게 되었는데, 공군 정복 차 림에 해군모자를 썼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만, 그 시간이 3시 25분 이었답니다.
그런데 잠시후 3시 30분경에 코넬이 전사 했다는 통신이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코넬은 죽음과 동시에 친구 바르틴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순복음 중앙교회 김상호 목사님은 자신이 죽어 천국과 지옥을 다 구경 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돌아왔을 때는 염도 끝났고 장례를 막 치루려고 하더랍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서 누구보다도 천국과 지옥을 열심히 전파하게 되었 답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셋째는 죽음 예찬론자들입니다. 즉, 죽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더이상 괴로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지요. 이러한 경우는 매우 드문 반응이지만 심한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이라 면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한때 미국에서는 이러한 죽음 예찬론자들로 인해 자살미학 사상이 번 져나가 청소년 세계에서 큰 문제가 되어 사회를 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죽어야만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내용이 자살로 이어져 수많은 미국 청년들이 아무 이유없이 자살소동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몇달전 우리나라도 10대나 20대 초반의 연예인들이 연속적으로 자살소 동을 벌여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살펴보면서 그러면 이제 성경에서는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교훈하고 있는지 역시 세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죽으면 끝이라든가 죽음예찬론의 허구성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 가운데 우편 양과 좌편 염소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요. 그들은 분명 이 땅에서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도 부자는 죽음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자는 지옥으로, 나사로는 천국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사실을 지혜롭게 깨달아 항상 죽음후의 심판을 생각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선을 행한자는 선한 것으로 악을 행한 자는 악한 것으로 갚아지는 최 후의 심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진지하게 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죽음을 쉰다는 것으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잠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것을 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때 주님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지만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잠잔다 하시면 서 깨우러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공동묘지중 초대교회 시대의 순교자들의 무덤에는 한결같이 "잠들다"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예수 안에서 잠들다", "한 아이가 예수 안에서 잠들다"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예수 안에서 잠 들다"라고 써 붙이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은 잠자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이스 가화집에는 "죽은 사람을 슬퍼하지 말라. 죽음 저편엔 고통 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써 있습니다. 물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말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바라보면서 아직 쉴 때가 아닌 이때에 부지런하 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겠습니다. 쉴때가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절망 하거나 탄식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셋째 죽음 후에는 영원한 삶이 열린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영원한 삶은 천국이나 지옥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죽음으로 영원한 삶이 열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가 아닐 수 없 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죽음으로써만 열매가 되고 꽃이 피게 되기도 합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않고 그대로 있으면 아무런 형체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죽으면 영원한 세계가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육신의 삶을 청산하게 하고 영원한 영혼의 삶을 시작하게 만듭니다. 독일의 동화중에 잠자게 하는 천사와 죽음의 천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이 두 천사는 어느 마을 언덕에 자리를 잡고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저 멀리서 밤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잠자게 하는 천사는 언덕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가는 바람에 잠을 실어 집집마다 보냈습니다. 잠자게 하는 천사의 잠을 들이마신 사람마다 고요한 잠에 빠져듭니다.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할아버지, 요람에 누워있던 어린아이까지 하루 온종일 피곤하게 일했던 이들과, 근심과 걱정의 하루를 보냈던 사람들까 지 잠자는 천사는 소중한 잠을 선물하고 자리로 기쁜듯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는 잠자게 하는 천사를 매우 부러워하며 "너는 많은 사람 들에게 내일 아침이면 또 칭찬을 듣겠지" 하며 부러운 듯 말을 건넵니다. 그때 잠의 천사가 "아니야, 너는 예수님 안에서 죽어 잠자는 사람들이 깨어나서 죽음의 천사 너에게 영원히 감사하게 될 것이야" 하더라는 것 입니다. 여러분 이 뜻을 아시겠지요. 하룻밤 포근하게 잠 재워준 천사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처럼 이제 부활 의 찬란한 새벽을 맞이하는, 예수안에서 죽은, 잠자던 자들이 과연 그날 에 죽음의 천사에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삶은 죽음 후에 우리에게 틀림없이 열려지는 세계입니다. 마 치 씨앗이 죽어짐으로 새생명되어 피어나듯이. 이러므로 우리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 하거나 겁내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우리는 다음 몇가지의 교훈을 결론적으로 얻고자 합니다.
첫째는 최선을 다하자는 사실입니다. 죽음 후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쉼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선을 행하기에 최선을 다하시고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합시다. 하루를 최선을 다했을때 하룻밤을 평안히 잘 수 있다면 최선을 다 한 삶 속에서만이 영원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나이를 물을 때 몇살을 먹었느냐 묻지만 외국에서는 몇살 을 죽었느냐고 묻습니다. 외국에서 사용하는 표현이 더 논리에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든지 죽음은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준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노년을 준비하듯이 주님을 만날 준비를 잘 하도록 합시다.
셋째는 세월을 아껴야 겠습니다.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기에 머뭇거려서도 아니되고, 멈 추어서도 아니됩니다. 유수와 같이 시간은 계속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세상을 즐길 시간도, 주님을 떠나 방황할 시간도 없음을 꼭 기억하도록 합시다. '잠시 더 세상에 있다가 주님께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나 요 주님이 원치않는 삶을 계속 추구하고 있어 세월을 낭비하는 이는 없나 요 더이상 허송세월 하지말고 주님께 속히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대의 인생은 그리 길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 만날 날이 속히 임하 게 됩니다.
넷째는 욕심을 버려야 되겠습니다. 죽은 다음에 이 땅의 아무 것이라도 천국에 가져갈 것은 없습니다. 63빌딩이 내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죽음 후의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둔 사람마다 결코 이 땅의 것에 소망 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죽음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또 있을 까요 또한 그러한 사람이 진정 영원한 세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요 죽음은 모든 세상적인 것을 잃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아끼던 재물도, 명예와 인기 등 어느것 하나 빼앗아 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죽음 후의 영원한 세계는 욕심이 없는 자만 들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다섯째는 담대하자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의 의미를 성서적 견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 야 겠습니다. "죽음이 우리 자신의 능력 속에 있는 한 우리는 아무 재난도 감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다면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견딜 수 있다는 것 이지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중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하신 말씀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순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처럼 강하고 비장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다" 하더니 민족을 구원하는 큰 일을 해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성서적으로 해결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 게 인생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죽음이라도 결코 두렵게 할 수 없는 주님의 백성된 삶은 참으로 풍성 한 삶으로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스코트라는 사람은 "인간은 죽음을 숙고하는 유일한 동물이며 종말에 대하여 의심을 보여주는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람만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만,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수긍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반응하게 될 것 입니다.
첫째는 공포와 떨림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중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습 니까
그러므로 많은 정신질환자나 불안과 억압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원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죽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세종대왕 때 판중추부사 민대생이라는 사람이 90세를 맞이하여 새해 인사를 받게 되었는데 한 사람이 "건강하시고 100수를 하옵소서."했답니다. 그러자 그는 노발대발하면서 "내 나이 이제 90인데 100수를 하라면 앞 으로 10년만 더 살라는 말이냐!"하면서 쫓아내더랍니다. 이 말을 인사 차 오던 사람이 전해듣고 "100수를 두번 하시옵소서!" 했더니 "그렇지, 그렇게 인사를 해야지!" 하면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잘 차려 주더랍니다. 죽음은 두려울 것이기에 누구든 두려워하며 떨게 됩니다. 사실 죽음 이란 말처럼 두려운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
둘째는 죽으면 끝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버트란트 럿셀은 "지금 창밖에는 어두움이 깔렸는데, 내가 죽으면 그 흑암이 나를 그만 뒤덮겠지. 이제는 찬란한 빛, 인생의 장엄함도 모두 사 라진 짧은 한 순간의 무위와 공허만이 남고 말겠구나!" 탄식하며 세상을 떠났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바루네라는 사람은 무신론자로 유명한 사람인데 한번은 바다에 나갔다 가 기관이 고장을 일으켜 바다를 한없이 표류하다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 저를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더랍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육지에 나오게 되었을때 사람들은 "바루네의 무 신론은 땅에서는 통하지만 바다에서는 통하지 않는군!" 하는 말이 생겼 답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죽으면 끝이다 라는 잘못된 사람들의 생각을 지적해 주고 있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1758년 10월 3일 전쟁에서 방어하기가 매우 곤란한 지역에서 전쟁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그에게 대패를 가져다 주어 자신과 소수의 군사들만 생 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다가 그는 품속에 간직 했던 극약을 꺼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 것밖에 없지" 하더랍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거야' 라는 생각이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잠시 후에 설명이 되겠습니다만 죽으면 과연 끝이겠습 니까 1차 세계대전때 공군대위 바르틴이 천막 안 숙소에 있었는데, 친구 코 넬이 찾아왔답니다. 바르틴은 깜짝 놀라며 "아니 자네는 조금전에 비행 기 출동에 참여하지 않았었는가그래, 출동했었지. 오늘 참 나는 멋 있는 비행을 했었다네!" 하며 인사말을 남기고 떠나려 하더랍니다. 바 르틴은 잠시 들어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떠나게 되었는데, 공군 정복 차 림에 해군모자를 썼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만, 그 시간이 3시 25분 이었답니다.
그런데 잠시후 3시 30분경에 코넬이 전사 했다는 통신이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코넬은 죽음과 동시에 친구 바르틴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순복음 중앙교회 김상호 목사님은 자신이 죽어 천국과 지옥을 다 구경 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돌아왔을 때는 염도 끝났고 장례를 막 치루려고 하더랍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서 누구보다도 천국과 지옥을 열심히 전파하게 되었 답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셋째는 죽음 예찬론자들입니다. 즉, 죽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더이상 괴로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지요. 이러한 경우는 매우 드문 반응이지만 심한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이라 면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한때 미국에서는 이러한 죽음 예찬론자들로 인해 자살미학 사상이 번 져나가 청소년 세계에서 큰 문제가 되어 사회를 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죽어야만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내용이 자살로 이어져 수많은 미국 청년들이 아무 이유없이 자살소동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몇달전 우리나라도 10대나 20대 초반의 연예인들이 연속적으로 자살소 동을 벌여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살펴보면서 그러면 이제 성경에서는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교훈하고 있는지 역시 세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죽으면 끝이라든가 죽음예찬론의 허구성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 가운데 우편 양과 좌편 염소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요. 그들은 분명 이 땅에서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도 부자는 죽음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자는 지옥으로, 나사로는 천국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사실을 지혜롭게 깨달아 항상 죽음후의 심판을 생각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선을 행한자는 선한 것으로 악을 행한 자는 악한 것으로 갚아지는 최 후의 심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진지하게 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죽음을 쉰다는 것으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잠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것을 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때 주님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지만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잠잔다 하시면 서 깨우러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공동묘지중 초대교회 시대의 순교자들의 무덤에는 한결같이 "잠들다"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예수 안에서 잠들다", "한 아이가 예수 안에서 잠들다"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예수 안에서 잠 들다"라고 써 붙이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은 잠자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이스 가화집에는 "죽은 사람을 슬퍼하지 말라. 죽음 저편엔 고통 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써 있습니다. 물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말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바라보면서 아직 쉴 때가 아닌 이때에 부지런하 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겠습니다. 쉴때가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절망 하거나 탄식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셋째 죽음 후에는 영원한 삶이 열린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영원한 삶은 천국이나 지옥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죽음으로 영원한 삶이 열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가 아닐 수 없 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죽음으로써만 열매가 되고 꽃이 피게 되기도 합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않고 그대로 있으면 아무런 형체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죽으면 영원한 세계가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육신의 삶을 청산하게 하고 영원한 영혼의 삶을 시작하게 만듭니다. 독일의 동화중에 잠자게 하는 천사와 죽음의 천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이 두 천사는 어느 마을 언덕에 자리를 잡고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저 멀리서 밤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잠자게 하는 천사는 언덕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가는 바람에 잠을 실어 집집마다 보냈습니다. 잠자게 하는 천사의 잠을 들이마신 사람마다 고요한 잠에 빠져듭니다.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할아버지, 요람에 누워있던 어린아이까지 하루 온종일 피곤하게 일했던 이들과, 근심과 걱정의 하루를 보냈던 사람들까 지 잠자는 천사는 소중한 잠을 선물하고 자리로 기쁜듯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는 잠자게 하는 천사를 매우 부러워하며 "너는 많은 사람 들에게 내일 아침이면 또 칭찬을 듣겠지" 하며 부러운 듯 말을 건넵니다. 그때 잠의 천사가 "아니야, 너는 예수님 안에서 죽어 잠자는 사람들이 깨어나서 죽음의 천사 너에게 영원히 감사하게 될 것이야" 하더라는 것 입니다. 여러분 이 뜻을 아시겠지요. 하룻밤 포근하게 잠 재워준 천사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처럼 이제 부활 의 찬란한 새벽을 맞이하는, 예수안에서 죽은, 잠자던 자들이 과연 그날 에 죽음의 천사에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삶은 죽음 후에 우리에게 틀림없이 열려지는 세계입니다. 마 치 씨앗이 죽어짐으로 새생명되어 피어나듯이. 이러므로 우리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 하거나 겁내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우리는 다음 몇가지의 교훈을 결론적으로 얻고자 합니다.
첫째는 최선을 다하자는 사실입니다. 죽음 후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쉼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선을 행하기에 최선을 다하시고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합시다. 하루를 최선을 다했을때 하룻밤을 평안히 잘 수 있다면 최선을 다 한 삶 속에서만이 영원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나이를 물을 때 몇살을 먹었느냐 묻지만 외국에서는 몇살 을 죽었느냐고 묻습니다. 외국에서 사용하는 표현이 더 논리에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든지 죽음은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준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노년을 준비하듯이 주님을 만날 준비를 잘 하도록 합시다.
셋째는 세월을 아껴야 겠습니다.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기에 머뭇거려서도 아니되고, 멈 추어서도 아니됩니다. 유수와 같이 시간은 계속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세상을 즐길 시간도, 주님을 떠나 방황할 시간도 없음을 꼭 기억하도록 합시다. '잠시 더 세상에 있다가 주님께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나 요 주님이 원치않는 삶을 계속 추구하고 있어 세월을 낭비하는 이는 없나 요 더이상 허송세월 하지말고 주님께 속히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대의 인생은 그리 길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 만날 날이 속히 임하 게 됩니다.
넷째는 욕심을 버려야 되겠습니다. 죽은 다음에 이 땅의 아무 것이라도 천국에 가져갈 것은 없습니다. 63빌딩이 내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죽음 후의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둔 사람마다 결코 이 땅의 것에 소망 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죽음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또 있을 까요 또한 그러한 사람이 진정 영원한 세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요 죽음은 모든 세상적인 것을 잃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아끼던 재물도, 명예와 인기 등 어느것 하나 빼앗아 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죽음 후의 영원한 세계는 욕심이 없는 자만 들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다섯째는 담대하자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의 의미를 성서적 견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 야 겠습니다. "죽음이 우리 자신의 능력 속에 있는 한 우리는 아무 재난도 감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다면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견딜 수 있다는 것 이지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중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하신 말씀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순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처럼 강하고 비장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다" 하더니 민족을 구원하는 큰 일을 해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성서적으로 해결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 게 인생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죽음이라도 결코 두렵게 할 수 없는 주님의 백성된 삶은 참으로 풍성 한 삶으로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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