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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이 하시는 일 (창28:10-22)

본문

오늘은 세계 교회가 지키는 성령님 강림 주일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성령님께서 계속 제자들과 친히 함께 하셔서 교회를 확장시키고 복음을 전파하여 전세계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는 성령님의 시대가 열리면서 오늘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시작점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 오순절 성령님 강림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은 이 놀라운 성령님의 강림하심을 기념하면서 성령님 강림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성자 예수의 사역과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시는 사역을 먼저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낭떠러지 절벽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야만 하는데 그 사이에는 깊은 낭떠러지가 놓여 있어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이쪽에서 저쪽 편까지는 약 10미터쯤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고자 힘껏 뛰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4미터밖에 뛰지를 못해서 결국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더 힘껏 뛰었습니다. 그는 5미터를 뛰어서 앞서 뛴 사람보다 1미터를 더 멀리 뛰었으나 그도 결국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더욱 온 힘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놀랍게도 8미터나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그 절벽을 건너 뛰기에는 못 미쳐서 그만 똑같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떨어져 버리기는 4미터를 뛴 사람이나 5미터를 뛴 사람이나 8미터를 뛴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자의적 구원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4미터, 5미터 뛸 때 나는 8미터를 뛰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10미터에는 도달하지 못해서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구원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자기의 의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에 인간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의인입니다. 열심히 자기가 의를 행하면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착한 일을 행하면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인 10미터에는 모두가 다 못 미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저 영생의 나라 저 건너편 언덕에 이르는 방법이란 단 하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놓여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저쪽으로 건너갈 수가 없으니 누군가 사닥다리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 사닥다리, 연결 다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의 경우를 먼저 살펴봅시다. 아버지께 죄를 짓고서 그는 이제 이제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어 혼자 외로이 쓸쓸히 광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심히 답답하고도 처량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과연 목표하는 아버지 집으로 갈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합니다. 마치 우리 인간이 영원히 영생하는 그러한 길은 없는 것처럼 막막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며 살기를 소원하나 내 힘으로 안되어 답답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야곱은 대표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한적한 곳에서 돌을 베개로 삼고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꿈을 꾸게 되었는데 한쪽 끝은 땅에 닿았고 한쪽 끝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그리고 그 사닥다리 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복된 음성까지 들렸던 것입니다. 그 꿈을 꾸고서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야곱은 일어나서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막막한 야곱에게 하늘까지 연결되어 있는 소망의 사닥다리 환상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놀라운 희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놀라운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놀라운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깜깜한 흑암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 것입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소망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내일의 하늘로 열린 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도무지 갈 수 없는 아버지 집을 향해 자포자기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희망의 가능성의 한 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닥다리였습니다. 야곱이 본 그것은 땅에서 하늘로 닿아 있는 사닥다리인데 신약 시대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닥다리가 예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이 땅이 맞닿아 연결되는 사닥다리. 이것은 바로 구원의 길이요 구원의 다리인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저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한 길인 것입니다.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사람의 힘으로서는 아무리 공로가 많고 의로운 사람이라 할 지라도 도저히 저 건너편으로 건너뛰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사닥다리가 필요한 것인데 하나님 편에서 사닥다리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육체로 길을 만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닥다리도 여전히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사닥다리가 놓여졌다고 해서 아무나 누워서 그 길을 건너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찾는 이가 적고 길이 좁고 협착하여서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사닥다리가 놓여져 이제 우리 인간이 구원받아 하나님 아버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그러나 그 길을 찾는 이가 적고 그 길을 걸어가기도 좁고 협착하여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닥다리를 발견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신앙 생활하는 것이 그렇게 수월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목사도 신앙 생활 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이 사닥다리를 찾기도 힘이 듭니다. 혼자 건너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놓여진 구원의 사닥다리를 찾아오도록 우리에게 상담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닥다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닥다리를 발견케 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사닥다리가 저 건너편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친히 사닥다리에 오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닥다리를 타고 가는 길에서 동행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 길을 갈 때에 피곤치 않도록 붙잡아주시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사닥다리를 타고 건널 때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서 담대함을 주어서 뒤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사닥다리 타고 건널 때에 불어오는 세찬 강한 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서 그 사닥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닥다리 건널 때에 밑을 보지 않게 해주고 앞만 보게 독려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닥다리를 건널 때에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다리를 타고 오라고 전도의 소리를 지르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사닥다리 타고 든든하게 건너가게 손잡아 주셔서 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십니다.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 하시는 모든 일입니다. 구원의 다리가 놓였지만 나 혼자 그 구원의 다리인 예수님께 꼭 붙어서 신앙의 길을 잘 가기란 이처럼 보통 일이 아닙니다.
쉴새없이 험한 사단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밑을 내려다보면 무섭습니다. 앞은 깜깜하게 잘 안보입니다. 뒤에서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앞으로만 바라보고 건너편만 바라보고 가야 하는데 자꾸 돌아다보며 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바른 길을 찾았으나 그 찾은 길을 잘 걸어가려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지켜 주심과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먹여 주심과 입혀 주심이 아직도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 보혜사 상담자 성령님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다시 확인하십시다. 절망 가운데 있던 야곱은 자기 앞의 소망의 길 구원의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보았으면 바로 출발을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의 다음 행동이 이상합니다. 그는 이제 일어나서 갑자기 자기가 베개 하였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던 찬송 364장에도 이런 가사가 있지요 “내 고생 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게 베고 잠 같습니다.” 길쭉한 돌을 옆으로 뉘어 놓고 그것을 베고 잤습니다.
그런데 사닥다리 환상을 본 후에 그는 일어나서 갑자기 그 돌을 기둥으로 세워 놓았다고 했습니다. 18절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이상한 행동입니까 그리고는 그 돌에다가 기름을 부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그 돌이 무엇이기에 야곱이 이렇게 행동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의미를 이 시간 한 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서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넌 후 열두 지파의 수효대로 열두 돌을 가져다 세워 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한돌 한 돌들은 바로 이스라엘 한지파 한지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열두지파를 이렇게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사무엘상 7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돌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고 했습니다. 돌은 바로 우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로 돌은 이처럼 개인이나 단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제단을 쌓을 때에 그 제단을 쌓는 돌은 정이나 끌로 다듬거나 쪼지 말라고 했습니다. 돌을 있는 그대로 쌓아 제단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응답이 그 제단 위에 임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제단을 쌓는 돌도 우리 자신을 가리킵니다. 위선이나 가식으로 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 오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그대로 오거나 내가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리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돌은 인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야곱이 돌을 가져다 옆으로 뉘어 놓고 잤습니다. 야곱도 누워 있고 돌도 누워 있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이 꿈에 사닥다리를 본 후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눕혀 있던 돌도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돌에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은 바로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을 발견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름을 부어 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여러 가지 서원을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나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본 희망을 향하여 가는데 혼자 가면 될 터인데 야곱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함께 해 달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야곱은 이제자기가 가는 소망의 길에서 자기를 지켜 달라고 합니다. 능력으로 보호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달라고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길을 갈 때는 필수적으로 먹을 것을 싸가지고 간답니다. 지금처럼 길 가다가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점도 없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양식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그 양식이 다 떨어지면 그는 결국 길을 계속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식은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그리고 입는 옷은 겉옷을 말합니다.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겉옷은 아주 유용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당 물을 잡을 때도 밤이 될 때까지는 전당 물에 옷을 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옷은 저녁에 추위를 견디며 밤에는 이불로 사용을 할 수 있는 길 가는데 필수품입니다. 네 번째로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끝까지 길을 지켜 달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였던 그 소망의 길을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결국은 목적지에 도달케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목적지는 하란을 거쳐서 고향땅 아버지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항상 우리가 가는 천국으로 비유됩니다. 천국갈 수 있는 소망의 길을 보았는데 이제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또한 지켜 주시며 힘이 되는 먹을 양식과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입을 옷을 주셔서 결국 목적지까지 잘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전폭적인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약 시대의 예수 믿는 신앙의 길을 가는 성도들에게는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닥다리 길 구원의 길이 예수님을 통해서 놓여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알고 믿고 구원받았으니 하나님께 기름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께 함께 하여 주시기를 자꾸 기도합니다. 야곱도 함께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신앙의 어려운 길가는 동안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야곱도 길을 지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힘을 잃지 않도록 날마다 영적 힘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야곱도 길가는 동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어려운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능력으로 입혀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야곱도 길가는 동안 옷을 입혀 달라고 하였습니다.
똑 같습니다. 성경은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그 다음에 야곱은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야만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닥다리도 놓아 주실 뿐 아니라 그 사닥다리를 잘 갈 수 있도록 이와 같이 모든 도움을 또한 주셔야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고서는 “너희들이 오려면 오고 말라면 말라 ” 이렇게 내버려두신다면 정말 사랑의 아버지이겠습니까 구원의 길도 제시하시고 그 길로 우리 인간이 잘 갈 수 있도록 친히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길을 가도록 힘을 공급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외부의 추위를 이기도록 입혀기까지 해주셔야 정말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강림은 이래서 정말로 당연히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의 당위성이라고 합니다. 어떤 소년이 배움의 길을 가는데 자기 혼자 힘으로 학비를 조달하면서 가기는 무척 힘듭니다. 부모가 없으면 자기 혼자 힘으로 고학을 하면서 배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활도 해야 하고 학비도 마련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고학을 하면서 또한두해 휴학도 해야 합니다. 부모가 없으면 자기 혼자서 배움의 길도 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있는 소년이라면 또한 그 부모가 능력이 충분히 있는 분이라면 배움의 길을 가는데 그 소년을 혼자 어렵게 가도록 내버려 둘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반드시 부모가 학비를 대 주시면서 지원해 주시면서 배움의 길을 잘 가도록 온갖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진짜 부모라면 또 능력이 있는 부모라면 자기 자식에게 오려면 오고 말라면 말라고 내버려둘 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주님도 “너희를 고와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구원의 길을 가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성령님 보내 주지 않으시고 아무 도움이 오지를 않겠으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므로 이 험한 좁은 길, 신앙의 길을 가는데 도움을 주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식들이 신앙의 길을 가는데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는 성령님을 부어 주십니다. 이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경에 보이는 하나님의 원리는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상의 이치와 어긋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님 하면 좀 거부감이 들고 이상하게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당연한 것이요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아버지시기에 당연히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율법 시대에 우리의 힘으로 저 건너편으로 갈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닥다리를 보내 주셨는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제사닥다리의 험한 신앙 길을 가는데 성령님 보내 주심은 당연할진대 이상하게 사람들이 예수는 믿는데 성령님은 싫다고 자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며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 한분 의지하고 저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우리 아닙니까 그러나 내 힘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기에는 힘이 들고 어렵지 않습니까 순전히 내힘으로 늘 찬송 생활하기도 힘이 듭니다. 내힘으로 기도 생활도 사실 힘이 듭니다. 내힘으로 봉사 생활도 힘이 듭니다.
내힘으로 전도 생활도 힘이 듭니다. 내힘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기기도 힘이 듭니다. 내힘으로 남을 사랑하기도 힘듭니다. 내힘으로 믿음 든든히 지키기도 힘듭니다. 이럴 때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성령님으로 기도하라. 성령님으로 찬송하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전도하라. 성령님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기라. 성령님의 은사 사랑의 은사를 받아서 이웃을 사랑하라. 믿음의 은사를 받으라. 이것은 모두다 우리 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 아닙니까 성령님은 놀라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도움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늘 인정하고 오히려 감사하며 사모하여서 성령님이 우리를 시시로 도와주시는 가운데 신앙생활 잘 승리하셔서 저 건너편에 넉넉히 도달하시는 은혜 충만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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