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과 피 (창22:1-19)
본문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과 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와 그리스도로서의 위치가 있고, 우리는 피조물과 종으로서의 나의 위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을 행하라는 명령과 -을 하지 말라는 금령입니다. 그의 지으신 피조물이요, 그의 백성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류는 하라는 명령은 하지않고 하지 말라는 금령은 범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고집해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행하라는 명령 앞에, 하지 말라는 금령 앞에 얼마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프랑스의 리오날드 우드 경이 어느날 왕과 더불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드 경은 국정을 이렇게 이끌어 가라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는 돌아갔습니다. 왕은 우드 경의 인격과 학식에 깊은 감동을 받고 다음날도 만나 고견을 듣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신하를 통해 전달했습니다. 신하의 연락을 받고 우드 경은 아무 말없이 그를 돌려 보냈습니다.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고 왕은 ‘그가 무슨 일이 있어 오지 못하는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저녁 무렵이 되어 우드 경이 다시 왕궁을 찾아 왔습니다. 깜짝 놀라 “아니 못올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요” 하고 물었습니다. “어제 왕께서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아무 말이 없었다기에 나는 못오는 줄 알았는데.” “폐하, 신하에게는 왕의 명령을 거절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신하에게는 왕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의무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들은 그분의 명령 앞에 복종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참으로 우직스럽게 복종한 사람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독자, 그것도 아브라함이 구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약속을 통해 기적적으로 주셨던 자식이었습니다. 어느날 그 아들을 하나님은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 하십니다. 여러가지로 하나님에게 불가함을 말할 수 있었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즉시에 순종합니다. 가나안에서 모리안 산까지는 72KM의 거리입니다. 하루에 24KM씩 사흘길을 걸어가서 명령에 따라 번제를 드리려 합니다. 모리아 산이 나무가 없는 돌산임을 알고 나무까지 미리 준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워 사환 둘과 함께 갔습니다.
드디어 모리아산에 도착했습니다. 5절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기록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We will come back again" 아들을 제물로 드리러 가면서도 아브라함은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말합니다. 이삭이 또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드디어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황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면서 제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시고 수양을 준비하사 대신 제사하게 하셨습니다. 이삭을 살리기 위해 수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오늘은 이삭을 대신하여 죽은 수양의 피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수양의 피는 은총의 피였습니다. 이삭을 죽을 뻔 했다가 돌단에서 2가지 은총을 통하여 부활했습니다. 영육의 아버지의 은총입니다. 영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활했습니다.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아산은 수양이 그날 그 시간에 거할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모리아산은 깍아지른 높은 돌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양은 눈이 어둡기 때문에 그런 곳까지 혼자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그날의 수양은 하나님께서 즉석에서 창조하신 수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하는 순간까지 없었던 양입니다. 그 양이 갑자기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 즉석에서 창조하신 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는데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그 시간에는 고기가 깊은 곳에는 모이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십니다. 순종했을 때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순종할 때 없어지는 것 같으나 넘치도록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이삭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수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삭을 바치러 가면서 “이삭과 함께 돌아오리라”는 부활의 신앙을 갖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이 없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부활의 신앙,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보고 그대로 갚아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축복은 아버지 다윗왕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이 생명을 얻은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 덕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을 자신을 인하여 가족과 후손이 복을 얻으시기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삭은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인하여 살았습니다.
2.수양의 피는 대속의 피였습니다. 번제로 드리는 짐승은 네가지 정결한 동물입니다. 소와 양과 염소와 비들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 양의 번제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야곱과 피에 관한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만 야곱은 아버지에게 축복을 얻고자 나갈 때 염소를 잡아 그 가죽을 뒤집어 쓰고 나갔습니다. 에서는 산으로 맹수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에서가 잡아가지고 온 짐승은 하나도 제사에 쓰일 수 없는 짐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을 통한 정성된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짐승을 잡아 그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화목제와 번제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화목제는 짐승을 단순하게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화목제에 비하여 많은 순서와 정성이 깃들여야 합니다. 번제의 제물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잡습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을 끌고 오면 제사장은 죄인과 함께 안수를 함으로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킵니다. 북쪽으로 끌고가 뉘여놓고 목을 찔러 피를 받습니다. 받아낸 피는 제단 동서남북에 뿌립니다. 다음 순서로 팔과 다리를 끊어 냅니다. 불의한 장소에 찾아갔던 발, 불의를 행했던 손이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죽을 벗깁니다. 하나님을 중심을 보십니다. 인간이 뒤집어 쓰고 있는 위선, 가식 등을 벗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내장을 갈라 긁어내고 물에 씻어서 태우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뼈와 살을 번제단으로 가지고 가서 불에 태워야 합니다. 뼈가 가루로 부서질 정도로 100% 완전하게 향기로 흠향되도록 불태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번제가 아닙니다. 사실 번제는 짐승에게 행해도 끔찍한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렇게 드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 위대한 신앙의 거장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신앙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도 역시 죄인이었고 이들 각자가 번제로 드려진 양처럼 비참한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을 이삭이 죽어야 하는데 수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비참한 만큼 우리의 죄가 크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컸던 만큼 그의 사랑이 컸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이삭은 수양의 대속의 피를 인하여 살 수 있었습니다.
3.수양의 피는 시작의 피였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자녀가 이삭 밖에 없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갈과 함께 내어 쫓았습니다. 이삭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하나님은 이삭의 사건을 통하여 이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사역을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적의 문을 얻는다는 말씀은 마귀를 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니었어도 달리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통과함으로 자신의 혈통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있고 무엇이 있어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어도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절히 여러분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통하여 어떤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4.수양의 피는 축복의 피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인정하셨습니다. 시험을 통과함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은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삭이 복을 얻었는데 창세기 26:12에서 농사하여 100배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창세기 49:26에서 내가 받은 축복이 부여조(父璵祖)의 축복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작은 시험은 무시해 버리기 쉽습니다. 시험이 크면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통과하면 그를 통한 축복도 큰 것입니다. 도무지 순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까 인간적인 자아를 버리고 무조건 순종하십시오. 그 순종을 통하여 놀랍도록 하니님이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5.수양의 피는 준비의 피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모리아 산의 이름은 ‘여호와 이레’로 바뀌었습니다. 바치라 명령하실 때 하나님은 이미 수양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가혹한 하나님의 명령을 내리실 때에 하나님은 이미 축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 감동을 주시고 마음 속에 영감을 주실 때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위한 축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순종하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결단코 감당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또 시험당할 때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성도를 축복하기 위한 과정이요 성장을 위한 단계입니다. 순종하면 축복이요 순종치 아니하면 나는 언제나 주리고 가난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주의 명령에 순종할 때 경험되어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경험 이후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입으로만의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아니라 일마다 시간마다 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총체적으로 우리는 왜 이와 같은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습니다. 단지 시험을 통한 축복이라는 도식보다 더 큰 의미가 본문에는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흘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자식을 죽도록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의 아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독생자를 너희의 죄 때문에 죽여야 하는 내 아픔과 슬픔을, 그리고 사랑을 너희가 깨달아 알기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피맺힌 음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내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 달라.” 사랑하는 만큼 받고도 싶은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거짓된 사랑에 속고 내 사랑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그 아픔을 상상해 봅시다. 결국 아브라함을 통한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상징하고 있는 장엄한 서사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독생자를 죄인된 당신을 위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일마다 시간마다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행하라는 명령 앞에, 하지 말라는 금령 앞에 얼마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프랑스의 리오날드 우드 경이 어느날 왕과 더불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드 경은 국정을 이렇게 이끌어 가라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는 돌아갔습니다. 왕은 우드 경의 인격과 학식에 깊은 감동을 받고 다음날도 만나 고견을 듣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신하를 통해 전달했습니다. 신하의 연락을 받고 우드 경은 아무 말없이 그를 돌려 보냈습니다.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고 왕은 ‘그가 무슨 일이 있어 오지 못하는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저녁 무렵이 되어 우드 경이 다시 왕궁을 찾아 왔습니다. 깜짝 놀라 “아니 못올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요” 하고 물었습니다. “어제 왕께서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아무 말이 없었다기에 나는 못오는 줄 알았는데.” “폐하, 신하에게는 왕의 명령을 거절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신하에게는 왕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의무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들은 그분의 명령 앞에 복종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참으로 우직스럽게 복종한 사람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독자, 그것도 아브라함이 구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약속을 통해 기적적으로 주셨던 자식이었습니다. 어느날 그 아들을 하나님은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 하십니다. 여러가지로 하나님에게 불가함을 말할 수 있었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즉시에 순종합니다. 가나안에서 모리안 산까지는 72KM의 거리입니다. 하루에 24KM씩 사흘길을 걸어가서 명령에 따라 번제를 드리려 합니다. 모리아 산이 나무가 없는 돌산임을 알고 나무까지 미리 준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워 사환 둘과 함께 갔습니다.
드디어 모리아산에 도착했습니다. 5절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기록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We will come back again" 아들을 제물로 드리러 가면서도 아브라함은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말합니다. 이삭이 또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드디어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황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면서 제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시고 수양을 준비하사 대신 제사하게 하셨습니다. 이삭을 살리기 위해 수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오늘은 이삭을 대신하여 죽은 수양의 피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수양의 피는 은총의 피였습니다. 이삭을 죽을 뻔 했다가 돌단에서 2가지 은총을 통하여 부활했습니다. 영육의 아버지의 은총입니다. 영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활했습니다.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아산은 수양이 그날 그 시간에 거할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모리아산은 깍아지른 높은 돌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양은 눈이 어둡기 때문에 그런 곳까지 혼자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그날의 수양은 하나님께서 즉석에서 창조하신 수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하는 순간까지 없었던 양입니다. 그 양이 갑자기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 즉석에서 창조하신 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는데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그 시간에는 고기가 깊은 곳에는 모이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십니다. 순종했을 때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순종할 때 없어지는 것 같으나 넘치도록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이삭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수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삭을 바치러 가면서 “이삭과 함께 돌아오리라”는 부활의 신앙을 갖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이 없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부활의 신앙,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보고 그대로 갚아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축복은 아버지 다윗왕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이 생명을 얻은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 덕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을 자신을 인하여 가족과 후손이 복을 얻으시기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삭은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인하여 살았습니다.
2.수양의 피는 대속의 피였습니다. 번제로 드리는 짐승은 네가지 정결한 동물입니다. 소와 양과 염소와 비들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 양의 번제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야곱과 피에 관한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만 야곱은 아버지에게 축복을 얻고자 나갈 때 염소를 잡아 그 가죽을 뒤집어 쓰고 나갔습니다. 에서는 산으로 맹수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에서가 잡아가지고 온 짐승은 하나도 제사에 쓰일 수 없는 짐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을 통한 정성된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짐승을 잡아 그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화목제와 번제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화목제는 짐승을 단순하게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화목제에 비하여 많은 순서와 정성이 깃들여야 합니다. 번제의 제물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잡습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을 끌고 오면 제사장은 죄인과 함께 안수를 함으로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킵니다. 북쪽으로 끌고가 뉘여놓고 목을 찔러 피를 받습니다. 받아낸 피는 제단 동서남북에 뿌립니다. 다음 순서로 팔과 다리를 끊어 냅니다. 불의한 장소에 찾아갔던 발, 불의를 행했던 손이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죽을 벗깁니다. 하나님을 중심을 보십니다. 인간이 뒤집어 쓰고 있는 위선, 가식 등을 벗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내장을 갈라 긁어내고 물에 씻어서 태우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뼈와 살을 번제단으로 가지고 가서 불에 태워야 합니다. 뼈가 가루로 부서질 정도로 100% 완전하게 향기로 흠향되도록 불태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번제가 아닙니다. 사실 번제는 짐승에게 행해도 끔찍한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렇게 드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 위대한 신앙의 거장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신앙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도 역시 죄인이었고 이들 각자가 번제로 드려진 양처럼 비참한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을 이삭이 죽어야 하는데 수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비참한 만큼 우리의 죄가 크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 컸던 만큼 그의 사랑이 컸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이삭은 수양의 대속의 피를 인하여 살 수 있었습니다.
3.수양의 피는 시작의 피였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자녀가 이삭 밖에 없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갈과 함께 내어 쫓았습니다. 이삭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하나님은 이삭의 사건을 통하여 이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사역을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적의 문을 얻는다는 말씀은 마귀를 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니었어도 달리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통과함으로 자신의 혈통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있고 무엇이 있어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어도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절히 여러분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통하여 어떤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4.수양의 피는 축복의 피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인정하셨습니다. 시험을 통과함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은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삭이 복을 얻었는데 창세기 26:12에서 농사하여 100배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창세기 49:26에서 내가 받은 축복이 부여조(父璵祖)의 축복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작은 시험은 무시해 버리기 쉽습니다. 시험이 크면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통과하면 그를 통한 축복도 큰 것입니다. 도무지 순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까 인간적인 자아를 버리고 무조건 순종하십시오. 그 순종을 통하여 놀랍도록 하니님이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5.수양의 피는 준비의 피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모리아 산의 이름은 ‘여호와 이레’로 바뀌었습니다. 바치라 명령하실 때 하나님은 이미 수양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가혹한 하나님의 명령을 내리실 때에 하나님은 이미 축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 감동을 주시고 마음 속에 영감을 주실 때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위한 축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순종하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결단코 감당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또 시험당할 때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성도를 축복하기 위한 과정이요 성장을 위한 단계입니다. 순종하면 축복이요 순종치 아니하면 나는 언제나 주리고 가난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주의 명령에 순종할 때 경험되어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경험 이후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입으로만의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아니라 일마다 시간마다 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총체적으로 우리는 왜 이와 같은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습니다. 단지 시험을 통한 축복이라는 도식보다 더 큰 의미가 본문에는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흘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자식을 죽도록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의 아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독생자를 너희의 죄 때문에 죽여야 하는 내 아픔과 슬픔을, 그리고 사랑을 너희가 깨달아 알기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피맺힌 음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내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 달라.” 사랑하는 만큼 받고도 싶은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거짓된 사랑에 속고 내 사랑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그 아픔을 상상해 봅시다. 결국 아브라함을 통한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상징하고 있는 장엄한 서사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독생자를 죄인된 당신을 위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일마다 시간마다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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