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가서 함께 경배한 부자 (창22:1-14)
본문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이 만난 저들의 생의 최고 절정은 모리아산에서 여호와이레를 체험했던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저들 부자가 체험한 기적이었습니다. 사실상 저들 부자는 믿음으로 신약의 갈보리를 여행했고, 거기서 세상 죄를 십자가에 짊어지고 대신 돌아가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자들입니다. I. 부자는 함께 영생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행복한 아브라함 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창세기 21장 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불렀다]고 하였다. 이 본문은 고달픈 나그네 여로를 계속하던 아브라함의 생애 중 참으로 조용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순간을 지냈던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곳 브엘세바는 헤브론 서남 45Km 지점 예루살렘 서남 7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도 ‘빌 에스 세바(Bir-es-seba)란 옛 이름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은 아브라함이 블레셋 사람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맹세를 하고, 우물을 안전하게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 우물’이란 뜻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일곱 우물 중에 다섯 우물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고 보면, 정말 사막에서 솟은 우물(샘)의 역사는 대단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거기 브엘세바의 맑은 샘물 곁에 ‘에셀 나무’(아프리카의 흔한 석류)를 심고, 그 그늘 아래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100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의 성장을 즐겼습니다. 그가 75세 때 고향과 아비와 친척을 떠났고, 25년간의 파란의 여로를 지나, 100세 때 하나님의 불변하신 약속대로 적자 ‘이삭’을 받은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한 가정의 불화도 조용해 졌고, 우물로 인하여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웃 부족간의 불화도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과 브엘세바의 맹세를 통하여 잔잔하여졌을 때였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은 거기 브엘세바의 우물가에 에셀나무의 짙은 그늘 아래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의 성장을 만끽하면서 부자가 함께 영생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행복의 나날을 꽃피웠습니다. 이렇게 저들 부자는 영생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부르면서 살았습니다.
Ⅱ. 부자는 함께 모리아 산경의 예배자가 되었습니다(22:1-10) 22장 1절에 [그 일 후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들 부자가 함께 브엘세바의 행복을 나눈 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큰 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거룩한 제사 곧 예배를 명했습니다. 이 제사의 중대한 내용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이 제사(예배)는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온 신적 계시에 기초하였습니다(22:1-2). 이것은 바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 자율주의에 기초한 이방종교예배와 정반대인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놓고, 인간 편에서 신을 찾아가는 예배나, 종교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어떻게 예배할 것을 계시하는 절대 타율주의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바로 오늘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령님에 기초함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 이 제사(예배)의 내용은 ‘번제’였습니다(22:2). ‘번제’란 구약시대에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하여 동물을 잡아 쪼개어 나무 위에 올려 놓고 불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엔 그 번제물이 바로 ‘짐승’이 아닌 그 아들 이삭이었습니다. 어떤 이삭인가
1 네 아들이었습니다.
2 네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3 독자였습니다.
4 이삭 곧 ‘웃음’이었습니다. 인간 아브라함에게는 뗄레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자식을 데리고 함께 예배하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셋째, 이 제사(예배)는 장소가 하나님에 의하여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장소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22:2)라고 하였습니다. 그 산은 ‘모리아’ 땅에 있는 산이라고 하였습니다(22:2 = 역대하3:1). 바로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 기초석 위에 ‘이슬람 회당인 황금의 둠’ 혹은 ‘반석의 둠’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 반석의 둠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들던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곳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이 지시한 장소, 하나님이 구별시킨 장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이 제사는 부자가 함께 하던 예배였습니다. 그 부자는
1 함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22:3).
2 함께 예배를 준비하였습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이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하였습니다(21:3). 불과 칼을 준비하였습니다(22:6). 오늘 우리들의 예배 행위가 이러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일찍이 깨워 예배 준비를 하게 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각종 예물을 준비하도록 해야합니다.
3 함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22:3). 부모와 함께 하나님이 지시하신 교회로 가야 합니다.
4 함께 3일 길을 부자가 함께 동행하였습니다(22:4).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 산이 보이는데 사흘길이 걸렸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그 지시하신 산경을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22:4).
5 함께 제사에 필요한 기구들을 분담했습니다. 22장 6절에 아브라함은 제물을 잡을 칼과 불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사환들에게 맡겼던 번제할 나무를 그 아들 이삭에게 지웠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라고 하므로 부자간이 동맹하는 거룩한 신앙의 순종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나무를 어깨에 매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삭은 자기가 짊어진 그 나무 위에 쪼개어져서 불태움을 당할 것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예수께서 자기가 달려 돌아가실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시던 최후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니 이삭의 이 모습은 바로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올라가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룩한 예언의 그림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는 영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칼과 불을 가지지 못한 부자는 자식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말씀(검)과 성령님의 능력을 가진 부모만이 자식들에게 십자가를 지울 수 있습니다. 6 부자를 함께 ‘번제할 어린 양’을 생각하였습니다. 22장 7절로 8절은 저들 부자가 번제할 어린 양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비원의 대화입니다. 번제할 나무를 짊어지고, 하나님이 지시한 번제드릴 장소를 올라가던 이삭은 문득 번제할 양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비에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을 통하여 얼마나 신앙 교육이 잘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번제 제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가 자라면서 그 아버지를 통하여 잘 보았습니다. 번제의 생명은 ‘희생 제물’에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번제할 나무를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오를 정도이고, 번제할 어린양의 필요성과 중대성을 알고 있을 정도이고 보면 그의 육체는 청소년으로 성장했고, 그의 영은 이미 아버지의 영과 함께 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예배의 중심 요소가 무엇임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번제할 나무와 불’과 칼과 단을, 곧 ‘번제이 제물’을 드릴 수단일 뿐입니다. 그 제단 위에 ‘희생이 될 양’은 번제물의 중심 요소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예배의 중심 요소입니다. 바로 ‘대속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을 믿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 찬송 감사하고 예수 이름으로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사죄와 용서와 축복과 영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없는 예배는 예배일 수가 없습니다. 결코 예배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종교적 의식이 아닙니다.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수양(修養)이나 교양 훈련이 아닙니다. 이삭은 이렇게 그 번제의 중심 요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경건한 위장이 아니라, 하나님 계시에 의존한 확신의 발언입니다. 7 부자는 함께 제물이 되었습니다. 22장 9-10절을 보십시오. 이윽고 부자는 하나님이 지시한 곳에 이르렀습니다. 예배 드릴 장소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았습니다. 이 때 이삭이 함께 행동했음은 분명합니다. 그 순간 갑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은
1 아들 이삭을 결박하였습니다.
2 그리고 또 나무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3 그리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구약에 번제할 때 제물을 네 다리를 묶었습니다. 그것은 칼은 들어 쪼갤 때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칼을 정확하게 내려 바로 쪼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 신앙의 영웅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이었을까 결코 아브라함은 살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계시에 의한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1장 17절로 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제물이 된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믿음입니다. 그 아들 이삭을 보십시오. 죽기까지 순종한 믿음입니다. 그는 아비에게 반항한 음성이 들리지 아니합니다. 반항한 행동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정말 이러한 이삭의 모습을 죽기까지 완전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렇게 부자는 함께 완전 믿음, 완전 순종으로 제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의 제물 행위를 보여 주는 진리입니다. 자식을 말씀과 성경의 끈으로 결박을 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붉은 구속의 줄로 자식의 인격과 영혼을 결박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박한 자식을 제단 위에, 곧 십자가 위에, 교회 안에 올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자식을 하나님 앞에 말씀의 검으로 쪼갤 줄 알아야 합니다.그런 힘이 있어야 합니다.그런 부모가 바른 신앙인입니다. 부모가 믿음으로 자식을 결박하지 못하고 단에 올려 놓지 못하고 검을 가지고 쪼개지 못할 때는 벌써 부모일 수없고, 그 자식은 사단에게 묶여 끌려 가고 마는 것입니다. 부권 상실의 비극입니다. 자식은 말씀과 성령님의 줄에 결박을 당할 줄 알아야 되고, 제단에 올려놓음이 되어야 하고, 말씀의 검에 쪼개어 질 줄 알아야 진정한 웃음, 곧 이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 산 제사,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부자는 함께 예수를 만났습니다. 22장 1절로 14절을 보십시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급히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여기 ‘여호와의 사자’는 신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왜 나타났는가
1 이 부자의 제물에 응답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22:11-12). 이삭을 향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시 확증시켜 주었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살인의 아버지로 만들지 아니하십니다.
2 아들 이삭을 대신할 그 수양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22:13).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할 때 하나님은 수풀에 한 수양을 결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급히 아들 이삭을 결박한 줄을 풀었고, 부자가 함께 그 수양을 다시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을 올렸던 단 위에 이삭을 대신해서 그 수양을 쪼개어 번제로 드렸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은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희생양이 되신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3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22:14).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이레’ 곧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중대합니다. 우리가 함께 교회에 나아와 완전 믿음, 완전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겐 언제든지 나를 대신하여,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내 대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을 못 만나면 그 예배는 헛것입니다. 예수를 만나야 믿음이 생기고, 겸손이 더하여 지고 감사와 충성과 헌신의 사명이 새로와 지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만난 사람은
1 큰 복을 받게 되고(22:17),
2 자손이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고(22:17),
3 그 자손이 대적의 문을 얻게 됩니다(22:17),
4 그리고 천하 민족에게 복의 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22:18). 이것은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웅변적으로, 역사의 한 가운데서 증명하고 있는 결과론적인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기 가서 함께 경배한 부자(父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십자가의 샘인 브엘세바에, 십가가의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신 하나님을 부릅시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오늘의 모리아 산인 교회에서 예배합시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 함께 ‘예수’를 만나고,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만이 체험하는 20세기 역사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기적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거기 브엘세바의 맑은 샘물 곁에 ‘에셀 나무’(아프리카의 흔한 석류)를 심고, 그 그늘 아래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100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의 성장을 즐겼습니다. 그가 75세 때 고향과 아비와 친척을 떠났고, 25년간의 파란의 여로를 지나, 100세 때 하나님의 불변하신 약속대로 적자 ‘이삭’을 받은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한 가정의 불화도 조용해 졌고, 우물로 인하여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웃 부족간의 불화도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과 브엘세바의 맹세를 통하여 잔잔하여졌을 때였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은 거기 브엘세바의 우물가에 에셀나무의 짙은 그늘 아래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의 성장을 만끽하면서 부자가 함께 영생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행복의 나날을 꽃피웠습니다. 이렇게 저들 부자는 영생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부르면서 살았습니다.
Ⅱ. 부자는 함께 모리아 산경의 예배자가 되었습니다(22:1-10) 22장 1절에 [그 일 후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들 부자가 함께 브엘세바의 행복을 나눈 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큰 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거룩한 제사 곧 예배를 명했습니다. 이 제사의 중대한 내용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이 제사(예배)는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온 신적 계시에 기초하였습니다(22:1-2). 이것은 바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 자율주의에 기초한 이방종교예배와 정반대인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놓고, 인간 편에서 신을 찾아가는 예배나, 종교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어떻게 예배할 것을 계시하는 절대 타율주의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바로 오늘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령님에 기초함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 이 제사(예배)의 내용은 ‘번제’였습니다(22:2). ‘번제’란 구약시대에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하여 동물을 잡아 쪼개어 나무 위에 올려 놓고 불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엔 그 번제물이 바로 ‘짐승’이 아닌 그 아들 이삭이었습니다. 어떤 이삭인가
1 네 아들이었습니다.
2 네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3 독자였습니다.
4 이삭 곧 ‘웃음’이었습니다. 인간 아브라함에게는 뗄레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자식을 데리고 함께 예배하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셋째, 이 제사(예배)는 장소가 하나님에 의하여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장소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22:2)라고 하였습니다. 그 산은 ‘모리아’ 땅에 있는 산이라고 하였습니다(22:2 = 역대하3:1). 바로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 기초석 위에 ‘이슬람 회당인 황금의 둠’ 혹은 ‘반석의 둠’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 반석의 둠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들던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곳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이 지시한 장소, 하나님이 구별시킨 장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이 제사는 부자가 함께 하던 예배였습니다. 그 부자는
1 함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22:3).
2 함께 예배를 준비하였습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이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하였습니다(21:3). 불과 칼을 준비하였습니다(22:6). 오늘 우리들의 예배 행위가 이러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일찍이 깨워 예배 준비를 하게 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각종 예물을 준비하도록 해야합니다.
3 함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22:3). 부모와 함께 하나님이 지시하신 교회로 가야 합니다.
4 함께 3일 길을 부자가 함께 동행하였습니다(22:4).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 산이 보이는데 사흘길이 걸렸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그 지시하신 산경을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22:4).
5 함께 제사에 필요한 기구들을 분담했습니다. 22장 6절에 아브라함은 제물을 잡을 칼과 불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사환들에게 맡겼던 번제할 나무를 그 아들 이삭에게 지웠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라고 하므로 부자간이 동맹하는 거룩한 신앙의 순종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나무를 어깨에 매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삭은 자기가 짊어진 그 나무 위에 쪼개어져서 불태움을 당할 것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예수께서 자기가 달려 돌아가실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시던 최후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니 이삭의 이 모습은 바로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올라가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룩한 예언의 그림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는 영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칼과 불을 가지지 못한 부자는 자식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말씀(검)과 성령님의 능력을 가진 부모만이 자식들에게 십자가를 지울 수 있습니다. 6 부자를 함께 ‘번제할 어린 양’을 생각하였습니다. 22장 7절로 8절은 저들 부자가 번제할 어린 양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비원의 대화입니다. 번제할 나무를 짊어지고, 하나님이 지시한 번제드릴 장소를 올라가던 이삭은 문득 번제할 양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비에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을 통하여 얼마나 신앙 교육이 잘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번제 제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가 자라면서 그 아버지를 통하여 잘 보았습니다. 번제의 생명은 ‘희생 제물’에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번제할 나무를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오를 정도이고, 번제할 어린양의 필요성과 중대성을 알고 있을 정도이고 보면 그의 육체는 청소년으로 성장했고, 그의 영은 이미 아버지의 영과 함께 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예배의 중심 요소가 무엇임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번제할 나무와 불’과 칼과 단을, 곧 ‘번제이 제물’을 드릴 수단일 뿐입니다. 그 제단 위에 ‘희생이 될 양’은 번제물의 중심 요소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예배의 중심 요소입니다. 바로 ‘대속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을 믿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 찬송 감사하고 예수 이름으로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사죄와 용서와 축복과 영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없는 예배는 예배일 수가 없습니다. 결코 예배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종교적 의식이 아닙니다.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수양(修養)이나 교양 훈련이 아닙니다. 이삭은 이렇게 그 번제의 중심 요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경건한 위장이 아니라, 하나님 계시에 의존한 확신의 발언입니다. 7 부자는 함께 제물이 되었습니다. 22장 9-10절을 보십시오. 이윽고 부자는 하나님이 지시한 곳에 이르렀습니다. 예배 드릴 장소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았습니다. 이 때 이삭이 함께 행동했음은 분명합니다. 그 순간 갑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은
1 아들 이삭을 결박하였습니다.
2 그리고 또 나무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3 그리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구약에 번제할 때 제물을 네 다리를 묶었습니다. 그것은 칼은 들어 쪼갤 때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칼을 정확하게 내려 바로 쪼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 신앙의 영웅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이었을까 결코 아브라함은 살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계시에 의한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1장 17절로 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제물이 된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믿음입니다. 그 아들 이삭을 보십시오. 죽기까지 순종한 믿음입니다. 그는 아비에게 반항한 음성이 들리지 아니합니다. 반항한 행동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정말 이러한 이삭의 모습을 죽기까지 완전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렇게 부자는 함께 완전 믿음, 완전 순종으로 제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의 제물 행위를 보여 주는 진리입니다. 자식을 말씀과 성경의 끈으로 결박을 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붉은 구속의 줄로 자식의 인격과 영혼을 결박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박한 자식을 제단 위에, 곧 십자가 위에, 교회 안에 올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자식을 하나님 앞에 말씀의 검으로 쪼갤 줄 알아야 합니다.그런 힘이 있어야 합니다.그런 부모가 바른 신앙인입니다. 부모가 믿음으로 자식을 결박하지 못하고 단에 올려 놓지 못하고 검을 가지고 쪼개지 못할 때는 벌써 부모일 수없고, 그 자식은 사단에게 묶여 끌려 가고 마는 것입니다. 부권 상실의 비극입니다. 자식은 말씀과 성령님의 줄에 결박을 당할 줄 알아야 되고, 제단에 올려놓음이 되어야 하고, 말씀의 검에 쪼개어 질 줄 알아야 진정한 웃음, 곧 이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 산 제사,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부자는 함께 예수를 만났습니다. 22장 1절로 14절을 보십시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급히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여기 ‘여호와의 사자’는 신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왜 나타났는가
1 이 부자의 제물에 응답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22:11-12). 이삭을 향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시 확증시켜 주었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살인의 아버지로 만들지 아니하십니다.
2 아들 이삭을 대신할 그 수양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22:13).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할 때 하나님은 수풀에 한 수양을 결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급히 아들 이삭을 결박한 줄을 풀었고, 부자가 함께 그 수양을 다시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을 올렸던 단 위에 이삭을 대신해서 그 수양을 쪼개어 번제로 드렸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은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희생양이 되신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3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22:14).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이레’ 곧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중대합니다. 우리가 함께 교회에 나아와 완전 믿음, 완전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겐 언제든지 나를 대신하여,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내 대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을 못 만나면 그 예배는 헛것입니다. 예수를 만나야 믿음이 생기고, 겸손이 더하여 지고 감사와 충성과 헌신의 사명이 새로와 지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만난 사람은
1 큰 복을 받게 되고(22:17),
2 자손이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고(22:17),
3 그 자손이 대적의 문을 얻게 됩니다(22:17),
4 그리고 천하 민족에게 복의 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22:18). 이것은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웅변적으로, 역사의 한 가운데서 증명하고 있는 결과론적인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기 가서 함께 경배한 부자(父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십자가의 샘인 브엘세바에, 십가가의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신 하나님을 부릅시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오늘의 모리아 산인 교회에서 예배합시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 함께 ‘예수’를 만나고,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만이 체험하는 20세기 역사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기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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