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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얻는 길 (창2:16-17,창3:1-19)

본문

이번 어린이 여름성경학교의 주제는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처음 믿는 어린이에게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생명을 얻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 믿은 어린이는 복음을 다시 확인시키고 생명의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준비하며 교제를 쓰면서 우리 교회 믿음의 가족들은 과연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생명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한 달에 한번씩 복음이 무엇이며, 왜 믿어야 하는지,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어린이 여름성경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알고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이 말씀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정의하기를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신 일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고전15:1-4). 그리스도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이 왜 복음(기쁜 소식)이 되는지, 왜 이 사건이 있어야 했는지를 신자라면 항상 확인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생활의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고, 또한 이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문제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 것을 성경은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생명은 성경에서 구원, 영생, 하나님 나라, 천국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마19:16-26). 이 생명을 얻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배경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진리를 논의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는 최초의 인간의 상태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두 번째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 세 번째로는 관계가 단절된 이유, 네 번째로는 다시금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 즉 생명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는 성경에 계시해 준 내용 외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어디에서 왔는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항상 살아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니까 믿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을 알 수 있게 하시고 그 존재를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많이 알려진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설명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습니다. 특히 철학의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쓴 책들 가운데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결론은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고 항상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가운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한 두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4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교제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만드실 때 이러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창조된 것을 "하나님의 형상대로"(in God's image)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습과 같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똑같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은 동물들이나 새들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이해하고, 말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어떤 것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전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창세기 1:26에 잘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이 동산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만드신 사람을 살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에덴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곳에 두시고 에덴동산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그는 "동산을 다스리며 지켜야"(창2:15)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좋은 것들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세상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1:4, 10, 12, 18, 21, 25, 31). 그래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은 부족하거나 흠이 전혀 없는 완전한 상태였습니다. 역시 사람도 완전하고, 인격적인 존재였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이곳에서 하나님과 이야기하며 교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는 고통도 없었고, 눈물도 없고, 시기와 질투, 미움, 질병과 죽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2.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을까요 그 교제의 수단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창세기 2:16-17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우리 교회는 인간의 순종을 조건으로 맺은 계약이기 때문에 행위언약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명의 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할 때 서로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인간은 그 약속을 지킨다는 조건에서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거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돌보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의 사랑과 봉사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러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본래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은혜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교제하시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7장 1항). 하나님께서 인간과 이러한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존재로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언약을 지킬 수만 있었다면 이 언약의 말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관계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언약을 이행한다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자유는 우리를 통제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참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어떤 질서와 권위 아래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규칙, 특히 창조 시에는 행위언약의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살 때는 모든 좋은 것을 다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지킬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인간을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것은 분명한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셨다는 것과 하나님과 인간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랑하는 방편으로 두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악과를 본다면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이 존재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3. 관계가 단절된 이유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단절이 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결정적인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 사건의 개요와 결과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논의한 바가 있습니다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과 교제할 수 있는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볼 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게 되고, 동시에 그것을 따먹지 않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뱀은 간교하게도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질문하며 하와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창3:5)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고 하신 말씀보다는, 뱀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이 뱀의 정체는 마귀입니다(요8:44).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능력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하여 자기 생각대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사탄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범죄함으로 타락한 결과 어떤 변화들이 오게 되었을까요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관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게 됨으로 인간의 상태나 만물들의 상태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사탄의 도구가 된 뱀은 그 형체가 변하여 기어다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와는 잉태의 고통과 함께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고,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땅의 환경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생명나무 과일이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죄의 결과들을 볼 때 인간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다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된 것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이 불완전하게 지음을 받았거나, 주변의 환경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하셨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환경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불완전하게 창조함을 받았다거나,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4.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생명을 얻는 길 본래 인간의 지위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말씀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책임은 죽음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과 여러 가지 고통이 찾아오게 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어긴 일에 있습니다. 세상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들, 예를 들면 시기, 질투, 미움, 거짓말, 살인, 전쟁 등은 모두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환경문제도 죄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하나님께 나아가서 교제할 수 없고 완전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 가운데 누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이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죄를 대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이유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5:8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을 때 인간이 범죄하여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지 않았다면 이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바로 그 순간부터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생명을 경험하는 것은 여전히 부분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처음에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완전한 생명과 함께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있는 복된 환경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창세기 3:22-24과 요한계시록 22:1-5을 서로 비교해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주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가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치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22:1-5)
여러분! 이 대조를 보셨습니까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완전하게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이 일은 단순한 환상이거나 사람들이 고안해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분명한 역사적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미래는 항상 우리 현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바꾸는 위대한 힘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복음주의 저널인 Christianity Today 의 객원 편집장인 필립 얀시가 얼마 전에 기고한 글에 아주 흥미있는 글을 적었습니다. 그 논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전파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을 비판하였습니다. 그 글에서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은 도덕이 아니라 은혜다."라고 전제한 후에 "교회의 목적은 도덕을 퍼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인간을 사랑하시며, 가치없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개인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 교회의 이번 어린이 여름성경학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에게 이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참여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신경을 쓰십시오. 국민일보 시사만화가인 조대현 화백이 쓴 자존심이냐 주(主)존심이냐 라는 재미있는 만평책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피아노, 영어, 수영, 속셈, 발레, 태권도, 미술, 글짓기 과외는 있는데 왜 성경 과외는 없을까 구원받고 변화된 삶을 살게 해 줄 텐데… 대학가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안되기 때문일까"라는 예수님의 탄식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우리도 학원 하나를 끊고 성경과외 하고 싶어요."라고 응답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
그런데 왜 안해"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을까요 "부모님이 관심이 없어서요." 부모된 자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가르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생명을 얻는 길, 이 문제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부모들이 먼저 이 중요성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경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녀에게 무엇을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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