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창22:1-19)
본문
오늘은 참 좋은 어린이주일 입니다.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보람인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허락하신 복된 주일입니다. 오늘 제목은 아버지와 아들인데 어머니와 아들이라 할 수 있고, 부모와 아들이라 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의 지극한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자랄 특권이 있습니다만은 어느 때나 세상은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고 더구나 요즘 경제위기라 해서 신문마다 무너지는 가정이란 코너를 만들어 두 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흩어지고 무너지는 비참한 현실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습니다. 또 TV에 최근에 어린것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부 모에게 참혹한 학대와 고문을 받은 그런 끔찍한 모습을 TV에 방영됐는데 보셨는 줄 압니다. 이런 때에 맞이하는 어린이 주일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 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 새롭게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또 치유가 함께 하셔서 아무쪼록 지금은 문제가 있고 고통과 아 픔이 있지만은 이후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복되신 가정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어려운 명령을 그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물론 이삭을 실제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명령대로 이삭을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 됐다 그만하면 됐다. 내가 네 마음을 알려고 한 것이지 이삭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시고 양으로 대신 번제를 바치게 하신 다음에 엄청난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12절 16절과 18절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 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 아브라함의 조상입니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 의 자손이 됩니다. 로마서 4:16절 , 갈라디아서 3:7114절에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 아브라 함이 받은 축복을 우리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잘된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잘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아브라함과 이삭, 아버지와 아들이라 하는 초점에서 말씀을 살피 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서 모리아 산에 따라 갔습니다. 그냥 제사 드린 줄 알고 따라 나섰던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아 산에 올라가는데 까 지도 이삭이 궁금해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정작 있어야 할 제 물 어린양이 안보이니 어찌된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아브라함의 가슴이 얼마나 쓰라렸을까요! , "바로 너다"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 두셨을 것이다 가자! "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지점에 까지 와서 부자 지간에 단을 쌓고 가지고 온 나무를 그 위에 놓은 다음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아 이리고 오너 라! 왜요 글세 이리 오너라" 가까이 온 아들을 줄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벌려 놓은 나무에 뉘어 놓고 허리춤에 꽂은 시퍼런 칼을 들어서 사랑하는 아들을 찍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눈을 가리우지 않았겠느냐 봅니다.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사랑하는 아들 이 눈을 뜨고 보는데 어떻게 칼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눈을 가리우고 그 리고 칼을 들어 찍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삭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이때 이삭이 보았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 늙은 아버지의 주름살 투성이의 그 표 정! 그 숨소리! 그걸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참으로 사랑하는 아들인데, 그 사랑하는 아들을 칼로 찔러야 하는 아버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이 모습을.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아들을 죽여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그 안타까움, 슬픔, 이것을 이삭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때 받았던 그 충격과 아버지의 이미지, 모습을 이삭이 나중에 147세의 긴 나그 네의 삶을 사는동안 이삭의 가슴속에 불로 새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일생 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 모리아 산에서 보았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삭에게는 때로는 위로가 되었고, 때로는 힘이 되었고, 때로는 빛이 되었고, 때로는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이 이삭은 장차 아브라함처럼 그런 복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단 한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사실은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 아래에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모리아산 아래에서 날마다 날마 다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본 아브라함의 모습이 모리아산에서 본 아버지의 모습 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들에게 생명이 되고 축복이 된 것이지, 만일 에 그것이 분리가 되었더라면 모리아 산에 올라가더니 갑자기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아버지인데 모리아 산 아래서는 그렇지 않 았다. 난데없이 갑자기 아버지가 왜 이러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었다면 이거야 말로 아들 이삭에게는 살인적인 충격입니다. 축복이긴 커녕 그것은 무서운 저주 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모리아산에서 보는 아버지하고 가정에서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면 자녀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슬픔 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상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같다면, 이것은 참으로 자녀들 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그런 경건은 꾸민것일까요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런 경건 한 모습을 내 아들한테 보여줘야지. 사랑하는 아내 앞에 내가 믿음이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지. 종들 앞에서 내가 믿음이 좋은 것을 보여 주어야지. 하는 그런 일 부러 꾸민 경건이겠는가 그런 꾸민 경건이 며칠이나 갑니까 그리고 금방 드러 나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경건히 무엇입니까 이것은 꾸미기 위해서, 보여 주기 위한 경건히 아닙니다. 결코 과시용, 시위용, 장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러면 아브라함의 경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 삶 자체입니다. 살기 위 해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았고 그렇게 매달렸던가.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1). 아브라함 자신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못난 사람이거든요. 참 문제 많은 인간입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자 기 부인을 두 번이나 팔아먹습니까 아브라함이 압니다. 내가 참 못난 사람이구 나. 아내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남편 요새 말로 고개 숙인 남편입니다. 또 어린 아들 앞에서도 어디 완전한 아버지입니까 성질 많고, 옹졸하고, 부족한 아 버지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가 허물 많고 못난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이못난 자식 을 좀 붙잡아 주십시오".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건은 사명에 의한 처절한 삶의 몸부림이지 결코 여유 있는 자들의 경건 놀음이 아닙니다.
(2). 다른 이유는 아브라함은 참 고달픈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고 일가 친 척을 떠나고 그 동안에 터를 잡은 삶의 터를 떠나서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객지 에 가서 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요새만 경제위기 입니까 경제위기 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아브라함은 이 경제위기 라고 하는 절박한 생활속에서 살았습니다. 배가 불러서 먹을 것 산더미같이 쌓아놓았으니까, 이제 시간도 있고 여유도 있으니까 하나님 믿어야지 그게 아니 였습니다. 저도 그걸 이해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살기가 어려우니까 매달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내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삽니까
성도 여러분! 경제위기시대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도전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 던지 하나님은 참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사람은 경제위기 열둘이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구 죽겠네" 왜 죽어요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껍데 기인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이때야말로 참으로 내 믿음의 실상을 들추어내는 기회고 도전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이 오늘의 경제위기의 위기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인지 다시 한번 검증해 볼 수 있잖아요. 아무도 안도와 주고 해결하지 못 하는 하나님을 뭐하러 믿어요 아브라함은 고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책임 질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뭐가 있어야죠. 없거든요. 하나님 매달렸 습니다. 믿고 싶어 믿고자 한 일은 아닙니다. 살고 싶어 그랬습니다. 그런 아 브라함을 어찌 하나님이 버립니까 절대로 안 버립니다. 되게 하십니다. 해보 세요. 정말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세요.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아들 이삭이 날 마다 본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참 부족한 아버지! 허물 많은 아버지야 어찌 보 면 우리만도 못해. 뭐 요즘 그럴 것 아닙니까 부모된 나는 대학도 못나왔고 너희들은 대학도 나왔고 너희들은 영어를 잘하지 나는 영어도 모르고 너희들은 컴 퓨터 딱딱 두드리지 나는 컴퓨터 '컴'자도 모른 부모 아닙니까 그럼 뭘 내놔야 될 것입니까 다만 한가지 " 이렇게 부족한 애비다. 허물 많은 애비다" 그러나 나는 내 하나님 의지하고 이렇게 산다는 거 그것 보여줘야. 또 그것을 보고자라는 자녀는 절대로 잘 됩니다.
둘째로 아들 이삭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 이것을 본문 1절에 시험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시험은 하나지만 둘입니다. 알고 보면 문항이 둘입니다.
(1). 하나는 아브라함 자신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신은 그 동안 받은 은혜도 많고 하니까 무슨 시험을 해도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아 너 가지고 있는 거 바쳐라예재 산도 바쳐라예네 몸도 바쳐라예네 생명도 바쳐라" 얼마든지 할 수 있 어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고 그건 별로 걱정 할거 아닙니다. 그런데 또 하나 문항이 있어요.
(2). 두 번째는 하나님이 뭐라고 시험을 하셨는가하면 "아브라함아 너를 바치라 한게 아니고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쳐라 " 했으니 이건 아브라함 혼자만의 시험이 아니라 이삭이 관련된 시험입니다. 나는 할 수 있는데, 이게 아들 이삭이 따라 주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이때 이미 이삭은 번제할 나무를 지고 산에 올라갈 정도입니다. 6절에 보면 나이가 상당히 든, 철이든 나이가 아마 열 여덟 쯤 안 됐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아들이 따라 주겠나 여러분 저는 이 말씀 묵상 하면서 가슴이 좀 떨린게 그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저도 마찬가지죠 나야 뭐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뭐든지 하 겠는데, 주일날 얼마든지 교회 가는데 "야 너 애들 데리고 가라" 애들이 따라오 겠나. 교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보자. 그 동안 네가 아들을 사랑했고 교육을 시켰는데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교육 시켰는지 한 번 보자!" 하신 것입니다. 이게 몇 점이나 되겠습니까 천만 다행스럽게 도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합격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사랑했고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까지 됐습니다. 그게 하루 이틀에 되었겠습니까 그저 날이 새면 눈떠 서 일하고 밥먹고, 자고, 깨고, 그러니까 아들이 그냥 저절로 이렇게 됐겠습니까 아닙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고, 심은대로 거두는 것인데 우리 다 압니다. 내 자녀이지만 키운다는게 얼마나 힘들 다는 걸 우리 다 알고 있지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렇게 키우기까지 아브라함이 그냥 했겠습니 까 똑같은 죄인인데 얼마나 많은 날을 가슴을 치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얼 마나 많이 울고 탄식했겠습니까 그런 눈물과 땀과 피가 없이 자녀들이 되는 거 아닙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어떻게 할까요!. 이제 저는 나이가 들었거든 요. 자식 가진 사람들 큰소리 못 친다고 그러잖아요. 이제자기가 자랐어요. 그 러니까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단 말입니다. 네 가지 꼭 할 일이 있습니다. 이보 다 더 쉬운 길도 없고,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첫째는 , 나의 자녀를 보는 눈이 분명해야 됩니다.(자녀관) 그게 뭡니까 지금 내자녀는 실망스럽습니다. 삐뚤어 졌습니다.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부모가 그러죠 "야! 너 틀렸다." 그러면 그 자식이 죽습니다. 부모가 짤라 버리면 죽어요. 아! 부모가 짤라 버린 자식 누가 붙잡아 줍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보느냐! 자녀들 모습 보지마시고, 말씀으로 보세요. 시편127편 3절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다" 그 말씀 안에서 보면 "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과 상급 이 말씀대로 될 줄 믿습니다."라고 자꾸 해야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너 틀렸다. 안된다." 이러니 그게 될 리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심난하고 안되보이죠 그래도 말씀 붙잡고 말씀대로 될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꾸 이래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자녀가 되야될 겁니까 다른 거 없습니다. 공부 잘하고 1둥하는거요. 물론 좋습니다만, 여러분 세상 적으로 1등만 하고 성공하면 그건 망합니다. 절대적으로 망합니다. 왜요 교만해지닌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거든요. "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자녀가 되야겠다" 라고 해야 합니다.
둘째는,하나님의 손을 통해 해야됩니다. 부모된 우리가 내 몸에서 난 자녀를 사랑하는 건 두말할 것 없죠. 그건 짐승도 하는건데.
그런데 내 자식이지만 내가 이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지 만 그러나 그건 한계가 있잖습니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만 다 사랑 할수 없구요. 저들을 어떻게 지킵니까 저들을 어떻게 위로해 줍니까 저들을 어떻게 인도합니까 오히려 부모가 상처만 안 줘도 다행이지. 감당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래서 짧은 부모의 손으로 사랑할 수 없으니, 도와 줄수 없으니,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 해야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 제 아들을 지켜 주소서.제 아들을 위로해 주소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자녀들을 위로할 수고, 싸맬 수 있고,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 자녀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 아닙니까 자식을 사랑한다 하면서 정말로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까 여러분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한거 아닙니다.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 줍니까 내 부모요 아니잖아요. 우리도 그런 걸 알잖아요. 세상을 살 동안에 누가 나의 힘이 됐습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우리 자식도 똑같아요. 하나님만이 우리 자녀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셋째는, 부모의 삶. 자체의 모습입니다. 아까도 말했죠 자식한테 폼잡으 려고 한 것 아닙니다. 제가 목사니까. 뭐 목사니까 경건해야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 소용없어요. 폼잡은 다고 살려 준답니까 폼잡은 다고 해서 뭐 나오나 요 아니에요. 날마다 날마다 부족한 아빠가, 부족한 남편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 의지하고 매달리는 모습 그걸 보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참 고약한 아버 지요. 그래도 저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을 보니까 그게 자녀들에게 생명이 되고 축복이 됩니다." 세상 계급장 자녀들 앞에 과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거 아무소용없어요.
넷째는, 실제적으로 관심과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할 수 있는데 까지 어려 서부터 손잡고 교회 나와야 합니다. 앞세우고 교회로 끌고와야 합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부모가 훈련시켜야 합니다. 교회 가는지, 가서 예배를 들이는지, 준 헌금으로 헌금을 제대로 바치는지, 가다가 빵사 먹어 버리는지, 확인해야 돼요. 이제 직장에 들어가면 십일조를 하는지, 무엇보 다도 저들 나름대로 문제가 있을 때 저들 나름대로 무릎꿇고 기도하는지, "애야! 너 그때 뭐했니엄마 기도 했어요됐다" 그럼 무슨 훈련시킵니까 어려 서부터 저희들 나름대로 앞으로 먼 길을 갈텐데 하나님 의지할 줄 아는거 그걸 자꾸 그걸 넣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좌절을 겪을 때, 병이나다든지, 성적이 떨어진다든지, 대학입학에서 떨어진다든지 그럴 때 입니다. 결혼에 실패할 수도 있어요. 우리 자녀들이 그럴 때 부모가 어떻게 해주냐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런면 큰일 납니다. 싸매 줘야 합니다. 위로해 줘 야 됩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또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내 자녀가 좌절을 겪고 그것이 내 자녀들의 삶에 유익하다는 것을 말해 줘야 합니다. 항상 성공만 이 축복이 아닙니다. 인생을 알려면 또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좌절을 많이 당해 봐야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알고, 겸손할 줄 알고, 그리고 삶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애야! 너 대학에 떨어지는 거 괜찮다. 잠시는 기 분 나쁘겠지만, 그것이 너에게는 유익인 것이다." 그리고 유익합니다. 겪어 보 니까 내 자식들 대학에 잘 들어간 자식도 있고 대학에 뚝 떨어진 자식도 있는데 요. 좋아요. 성도 여러분! 아직 늦지 않습니다. 아이구! 내자식은 다 커버렸는데 아니요. 하나님 앞에 서는 늦은 법이 없습니다. 서른살 먹은 자식들도 이제라도 하나님은 되게 해 주 십니다. 아무쪼록 복된 가정, 복된 자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 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 새롭게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또 치유가 함께 하셔서 아무쪼록 지금은 문제가 있고 고통과 아 픔이 있지만은 이후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복되신 가정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어려운 명령을 그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물론 이삭을 실제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명령대로 이삭을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 됐다 그만하면 됐다. 내가 네 마음을 알려고 한 것이지 이삭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시고 양으로 대신 번제를 바치게 하신 다음에 엄청난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12절 16절과 18절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 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 아브라함의 조상입니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 의 자손이 됩니다. 로마서 4:16절 , 갈라디아서 3:7114절에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 아브라 함이 받은 축복을 우리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잘된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잘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아브라함과 이삭, 아버지와 아들이라 하는 초점에서 말씀을 살피 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서 모리아 산에 따라 갔습니다. 그냥 제사 드린 줄 알고 따라 나섰던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아 산에 올라가는데 까 지도 이삭이 궁금해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정작 있어야 할 제 물 어린양이 안보이니 어찌된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아브라함의 가슴이 얼마나 쓰라렸을까요! , "바로 너다"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 두셨을 것이다 가자! "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지점에 까지 와서 부자 지간에 단을 쌓고 가지고 온 나무를 그 위에 놓은 다음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아 이리고 오너 라! 왜요 글세 이리 오너라" 가까이 온 아들을 줄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벌려 놓은 나무에 뉘어 놓고 허리춤에 꽂은 시퍼런 칼을 들어서 사랑하는 아들을 찍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눈을 가리우지 않았겠느냐 봅니다.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사랑하는 아들 이 눈을 뜨고 보는데 어떻게 칼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눈을 가리우고 그 리고 칼을 들어 찍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삭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이때 이삭이 보았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 늙은 아버지의 주름살 투성이의 그 표 정! 그 숨소리! 그걸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참으로 사랑하는 아들인데, 그 사랑하는 아들을 칼로 찔러야 하는 아버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이 모습을.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아들을 죽여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그 안타까움, 슬픔, 이것을 이삭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때 받았던 그 충격과 아버지의 이미지, 모습을 이삭이 나중에 147세의 긴 나그 네의 삶을 사는동안 이삭의 가슴속에 불로 새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일생 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 모리아 산에서 보았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삭에게는 때로는 위로가 되었고, 때로는 힘이 되었고, 때로는 빛이 되었고, 때로는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이 이삭은 장차 아브라함처럼 그런 복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단 한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사실은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 아래에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모리아산 아래에서 날마다 날마 다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본 아브라함의 모습이 모리아산에서 본 아버지의 모습 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들에게 생명이 되고 축복이 된 것이지, 만일 에 그것이 분리가 되었더라면 모리아 산에 올라가더니 갑자기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아버지인데 모리아 산 아래서는 그렇지 않 았다. 난데없이 갑자기 아버지가 왜 이러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었다면 이거야 말로 아들 이삭에게는 살인적인 충격입니다. 축복이긴 커녕 그것은 무서운 저주 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모리아산에서 보는 아버지하고 가정에서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면 자녀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슬픔 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상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같다면, 이것은 참으로 자녀들 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그런 경건은 꾸민것일까요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런 경건 한 모습을 내 아들한테 보여줘야지. 사랑하는 아내 앞에 내가 믿음이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지. 종들 앞에서 내가 믿음이 좋은 것을 보여 주어야지. 하는 그런 일 부러 꾸민 경건이겠는가 그런 꾸민 경건이 며칠이나 갑니까 그리고 금방 드러 나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경건히 무엇입니까 이것은 꾸미기 위해서, 보여 주기 위한 경건히 아닙니다. 결코 과시용, 시위용, 장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러면 아브라함의 경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 삶 자체입니다. 살기 위 해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았고 그렇게 매달렸던가.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1). 아브라함 자신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못난 사람이거든요. 참 문제 많은 인간입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자 기 부인을 두 번이나 팔아먹습니까 아브라함이 압니다. 내가 참 못난 사람이구 나. 아내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남편 요새 말로 고개 숙인 남편입니다. 또 어린 아들 앞에서도 어디 완전한 아버지입니까 성질 많고, 옹졸하고, 부족한 아 버지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가 허물 많고 못난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이못난 자식 을 좀 붙잡아 주십시오".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건은 사명에 의한 처절한 삶의 몸부림이지 결코 여유 있는 자들의 경건 놀음이 아닙니다.
(2). 다른 이유는 아브라함은 참 고달픈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고 일가 친 척을 떠나고 그 동안에 터를 잡은 삶의 터를 떠나서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객지 에 가서 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요새만 경제위기 입니까 경제위기 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아브라함은 이 경제위기 라고 하는 절박한 생활속에서 살았습니다. 배가 불러서 먹을 것 산더미같이 쌓아놓았으니까, 이제 시간도 있고 여유도 있으니까 하나님 믿어야지 그게 아니 였습니다. 저도 그걸 이해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살기가 어려우니까 매달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내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삽니까
성도 여러분! 경제위기시대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도전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 던지 하나님은 참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사람은 경제위기 열둘이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구 죽겠네" 왜 죽어요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껍데 기인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이때야말로 참으로 내 믿음의 실상을 들추어내는 기회고 도전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이 오늘의 경제위기의 위기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인지 다시 한번 검증해 볼 수 있잖아요. 아무도 안도와 주고 해결하지 못 하는 하나님을 뭐하러 믿어요 아브라함은 고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책임 질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뭐가 있어야죠. 없거든요. 하나님 매달렸 습니다. 믿고 싶어 믿고자 한 일은 아닙니다. 살고 싶어 그랬습니다. 그런 아 브라함을 어찌 하나님이 버립니까 절대로 안 버립니다. 되게 하십니다. 해보 세요. 정말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세요.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아들 이삭이 날 마다 본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참 부족한 아버지! 허물 많은 아버지야 어찌 보 면 우리만도 못해. 뭐 요즘 그럴 것 아닙니까 부모된 나는 대학도 못나왔고 너희들은 대학도 나왔고 너희들은 영어를 잘하지 나는 영어도 모르고 너희들은 컴 퓨터 딱딱 두드리지 나는 컴퓨터 '컴'자도 모른 부모 아닙니까 그럼 뭘 내놔야 될 것입니까 다만 한가지 " 이렇게 부족한 애비다. 허물 많은 애비다" 그러나 나는 내 하나님 의지하고 이렇게 산다는 거 그것 보여줘야. 또 그것을 보고자라는 자녀는 절대로 잘 됩니다.
둘째로 아들 이삭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 이것을 본문 1절에 시험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시험은 하나지만 둘입니다. 알고 보면 문항이 둘입니다.
(1). 하나는 아브라함 자신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신은 그 동안 받은 은혜도 많고 하니까 무슨 시험을 해도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아 너 가지고 있는 거 바쳐라예재 산도 바쳐라예네 몸도 바쳐라예네 생명도 바쳐라" 얼마든지 할 수 있 어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고 그건 별로 걱정 할거 아닙니다. 그런데 또 하나 문항이 있어요.
(2). 두 번째는 하나님이 뭐라고 시험을 하셨는가하면 "아브라함아 너를 바치라 한게 아니고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쳐라 " 했으니 이건 아브라함 혼자만의 시험이 아니라 이삭이 관련된 시험입니다. 나는 할 수 있는데, 이게 아들 이삭이 따라 주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이때 이미 이삭은 번제할 나무를 지고 산에 올라갈 정도입니다. 6절에 보면 나이가 상당히 든, 철이든 나이가 아마 열 여덟 쯤 안 됐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아들이 따라 주겠나 여러분 저는 이 말씀 묵상 하면서 가슴이 좀 떨린게 그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저도 마찬가지죠 나야 뭐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뭐든지 하 겠는데, 주일날 얼마든지 교회 가는데 "야 너 애들 데리고 가라" 애들이 따라오 겠나. 교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보자. 그 동안 네가 아들을 사랑했고 교육을 시켰는데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교육 시켰는지 한 번 보자!" 하신 것입니다. 이게 몇 점이나 되겠습니까 천만 다행스럽게 도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합격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사랑했고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까지 됐습니다. 그게 하루 이틀에 되었겠습니까 그저 날이 새면 눈떠 서 일하고 밥먹고, 자고, 깨고, 그러니까 아들이 그냥 저절로 이렇게 됐겠습니까 아닙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고, 심은대로 거두는 것인데 우리 다 압니다. 내 자녀이지만 키운다는게 얼마나 힘들 다는 걸 우리 다 알고 있지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렇게 키우기까지 아브라함이 그냥 했겠습니 까 똑같은 죄인인데 얼마나 많은 날을 가슴을 치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얼 마나 많이 울고 탄식했겠습니까 그런 눈물과 땀과 피가 없이 자녀들이 되는 거 아닙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어떻게 할까요!. 이제 저는 나이가 들었거든 요. 자식 가진 사람들 큰소리 못 친다고 그러잖아요. 이제자기가 자랐어요. 그 러니까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단 말입니다. 네 가지 꼭 할 일이 있습니다. 이보 다 더 쉬운 길도 없고,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첫째는 , 나의 자녀를 보는 눈이 분명해야 됩니다.(자녀관) 그게 뭡니까 지금 내자녀는 실망스럽습니다. 삐뚤어 졌습니다.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부모가 그러죠 "야! 너 틀렸다." 그러면 그 자식이 죽습니다. 부모가 짤라 버리면 죽어요. 아! 부모가 짤라 버린 자식 누가 붙잡아 줍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보느냐! 자녀들 모습 보지마시고, 말씀으로 보세요. 시편127편 3절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다" 그 말씀 안에서 보면 "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과 상급 이 말씀대로 될 줄 믿습니다."라고 자꾸 해야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너 틀렸다. 안된다." 이러니 그게 될 리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심난하고 안되보이죠 그래도 말씀 붙잡고 말씀대로 될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꾸 이래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자녀가 되야될 겁니까 다른 거 없습니다. 공부 잘하고 1둥하는거요. 물론 좋습니다만, 여러분 세상 적으로 1등만 하고 성공하면 그건 망합니다. 절대적으로 망합니다. 왜요 교만해지닌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거든요. "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자녀가 되야겠다" 라고 해야 합니다.
둘째는,하나님의 손을 통해 해야됩니다. 부모된 우리가 내 몸에서 난 자녀를 사랑하는 건 두말할 것 없죠. 그건 짐승도 하는건데.
그런데 내 자식이지만 내가 이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지 만 그러나 그건 한계가 있잖습니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만 다 사랑 할수 없구요. 저들을 어떻게 지킵니까 저들을 어떻게 위로해 줍니까 저들을 어떻게 인도합니까 오히려 부모가 상처만 안 줘도 다행이지. 감당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래서 짧은 부모의 손으로 사랑할 수 없으니, 도와 줄수 없으니,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 해야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 제 아들을 지켜 주소서.제 아들을 위로해 주소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자녀들을 위로할 수고, 싸맬 수 있고,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 자녀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 아닙니까 자식을 사랑한다 하면서 정말로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까 여러분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한거 아닙니다.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 줍니까 내 부모요 아니잖아요. 우리도 그런 걸 알잖아요. 세상을 살 동안에 누가 나의 힘이 됐습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우리 자식도 똑같아요. 하나님만이 우리 자녀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셋째는, 부모의 삶. 자체의 모습입니다. 아까도 말했죠 자식한테 폼잡으 려고 한 것 아닙니다. 제가 목사니까. 뭐 목사니까 경건해야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 소용없어요. 폼잡은 다고 살려 준답니까 폼잡은 다고 해서 뭐 나오나 요 아니에요. 날마다 날마다 부족한 아빠가, 부족한 남편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 의지하고 매달리는 모습 그걸 보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참 고약한 아버 지요. 그래도 저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을 보니까 그게 자녀들에게 생명이 되고 축복이 됩니다." 세상 계급장 자녀들 앞에 과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거 아무소용없어요.
넷째는, 실제적으로 관심과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할 수 있는데 까지 어려 서부터 손잡고 교회 나와야 합니다. 앞세우고 교회로 끌고와야 합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부모가 훈련시켜야 합니다. 교회 가는지, 가서 예배를 들이는지, 준 헌금으로 헌금을 제대로 바치는지, 가다가 빵사 먹어 버리는지, 확인해야 돼요. 이제 직장에 들어가면 십일조를 하는지, 무엇보 다도 저들 나름대로 문제가 있을 때 저들 나름대로 무릎꿇고 기도하는지, "애야! 너 그때 뭐했니엄마 기도 했어요됐다" 그럼 무슨 훈련시킵니까 어려 서부터 저희들 나름대로 앞으로 먼 길을 갈텐데 하나님 의지할 줄 아는거 그걸 자꾸 그걸 넣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좌절을 겪을 때, 병이나다든지, 성적이 떨어진다든지, 대학입학에서 떨어진다든지 그럴 때 입니다. 결혼에 실패할 수도 있어요. 우리 자녀들이 그럴 때 부모가 어떻게 해주냐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런면 큰일 납니다. 싸매 줘야 합니다. 위로해 줘 야 됩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또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내 자녀가 좌절을 겪고 그것이 내 자녀들의 삶에 유익하다는 것을 말해 줘야 합니다. 항상 성공만 이 축복이 아닙니다. 인생을 알려면 또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좌절을 많이 당해 봐야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알고, 겸손할 줄 알고, 그리고 삶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애야! 너 대학에 떨어지는 거 괜찮다. 잠시는 기 분 나쁘겠지만, 그것이 너에게는 유익인 것이다." 그리고 유익합니다. 겪어 보 니까 내 자식들 대학에 잘 들어간 자식도 있고 대학에 뚝 떨어진 자식도 있는데 요. 좋아요. 성도 여러분! 아직 늦지 않습니다. 아이구! 내자식은 다 커버렸는데 아니요. 하나님 앞에 서는 늦은 법이 없습니다. 서른살 먹은 자식들도 이제라도 하나님은 되게 해 주 십니다. 아무쪼록 복된 가정, 복된 자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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