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 (창22:1-19)
본문
아브라함은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 즉 후손들에게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의 논쟁에서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요 8:32),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요 8:39) 하는 사실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마태는 복음서를 쓸 때 유대인들의 이런 생각을 알기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라고 시작하고 있지 않는가 그 뿐 아니라 아브라함은 믿는 자의 조상(롬 4:11), 즉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성도라면 누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러워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으려 한다. 또한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나의 벗’(사 41:8)이라 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야고보가 말한 대로 아브라함은 “그의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것이다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렇게 유대인들로부터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인정받고, 또한 하나님까지 인정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인정받게 되었을까 믿음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이 시험에서 이긴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고 모든 후손은 그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내용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어떤 믿음을 인정받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았다. 아브라함은 175세로 죽을 때까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한 번도 ‘아니오’ 하거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하고 항의한 일이 없다. 언제나 ‘예’ 했다. 쉬운 일뿐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에도 ‘예’ 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는 시험을 받은 것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행 7:2-3).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 정착하고 말았다(창 11:31).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었을 때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집을 떠날 것을 강조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아브라함은 아비 집을 떠났다. 물론 아버지는 이미 죽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은 형 나홀을 하란에 남겨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출발했다. 그 후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 하였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 하신 약속을 믿지 못하고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가다가 애굽까지 내려갔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더 믿고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였다(창 16:15). 이런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은 사건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이 시험이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인지는 하나님도 알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도저히 순종하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면 그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가 열이 나고 끙끙 앓게 되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 하고 걱정한다. 이 아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아이인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이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무슨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어진 믿음이 아니다. 처음에 하란에서 떠날 때부터 아브라함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창 12:4).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실패를 통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길러 왔기 때문에 시험에 이길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심을 약속 하셨다.
1 약속의 땅을 얻게 됨(신 1: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을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2 여러 가지 복을 받게 됨(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재앙을 면하게 됨(렘 26:13)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4 성령님을 받게 됨(행 5:32)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님도 그러하니라. 5 의의 종이 됨(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 온전하게 됨(히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7 거룩하여짐(벧전 1: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거룩한 자처럼 행하라
2.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인정받았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까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차례나 후손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늘의 뭇 별과 같이, 바닷가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 하셨다. 이 후손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이며(15:4),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주실 것이라(17:16)고 하셨다. 그 때는 명년 이맘 때(17:21)이며 그 아이의 이름은 이삭(17:19)이라 지으라고 까지 자세히 알려 주셨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한 약속이라서 믿지 못했지만 100세의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고 나자 믿음이 생겼다.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심을 믿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이 아들 이삭이 분명히 약속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이삭을 통해 자손의 복을 주리라 하셨는데 아직 이삭이 결혼하여 손자를 낳기 전에 죽이라 하시니 무슨 뜻일까, 내가 죽여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진 것이다. 이런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8-19).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에 올라갈 때 사환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였다. 우리말 성경에는(개역) 여기서 누가 돌아오는지 분명히 표현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동사의 주어가 1인칭 복수, 즉 ‘우리’로 되어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서 경배하고 우리가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인정받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들을 죽여도 이 아이는 약속받은 아이니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는 믿음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자식의 생명을 걸고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 중국에 송전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송전도는 본명이 아니라 신앙이 참 좋고 전도를 잘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러나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 젊은 나이에 3남매를 남겨 놓고 죽었다. 모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모순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후에 그의 자녀들이 축복을 받아 큰 딸 송경령은 중국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손문의 아내가 되었고, 아들 송자명은 하버드, 콜롬비아 두 대학을 나와 중국의 재정 장관이 되었고, 막내 딸 송미령은 장개석 총통의 아내가 되어 한 때 그 삼남매가 전 중국을 다스릴 때가 있었다. 성도는 축복 대신 손실이 올 때 모순을 느낀다.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망하고 손실을 볼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믿고, 회의에 빠져선 안된다. 성경은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좁은 인간의 생각과 기대에 어긋난다고 해서 모순을 느끼고 불신앙에 빠져선 안된다. 십일조를 하고 복받을 일을 했는데, 손해가 올 때는 다음에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흔들어 보시는 것으로 믿고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인정받았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신앙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다.(창22:12끝) 이렇게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은 소돔 성을 위하여 간구하는 그의 기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소돔 성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27), “내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18:30), “내가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31),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18:32) 하고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따지듯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큰 소리로 싸우는 사람도 있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이 모두가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믿음이 좋아 보여도 이런 사람은 인정받을 수 없다. 수제자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어도 잡지 못하고 허탕치고 돌아왔을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불합리한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이 잡히는 기적을 체험했다. 밤에도 안잡혔는데 대낮에 어느 정도 얕아야지 고기가 잘 잡히고 그물질하기도 쉬운 법인데 자기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까지 제 생각과 이성에 맞는 말씀만 믿고, 그렇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모순 속에서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불란서의 마르땡이란 사람은 ‘믿음이란 자기의 전 생명을 완전히 부속시키는 것이다’고 말했으며, 카프카는 ‘믿음은 단두대의 칼’이라 했으며, 마틴 부버란 위대한 철학자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신을 바치기로 맹세하는 것’이라고 했다. 참다운 신앙의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요, 이런 모순 속에서 신앙을 지킬 때, 병고침도 축복도 기적도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믿을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것까지 믿고 따르는 것이다. 내 생각과 계산대로 안되는 것을 믿는 것이요, 내 기도한 것과는 반대 현상이 나타나도 끝까지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모순 속에서도 믿는 신앙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자. 믿음을 인정받는 신자는 복스러운 신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한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창 22:16-18). 여러분 어떤자를 인정하여 주십니까 말씀에 순종하고, 약속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것이다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렇게 유대인들로부터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인정받고, 또한 하나님까지 인정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인정받게 되었을까 믿음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이 시험에서 이긴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고 모든 후손은 그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내용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어떤 믿음을 인정받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았다. 아브라함은 175세로 죽을 때까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한 번도 ‘아니오’ 하거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하고 항의한 일이 없다. 언제나 ‘예’ 했다. 쉬운 일뿐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에도 ‘예’ 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는 시험을 받은 것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행 7:2-3).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 정착하고 말았다(창 11:31).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었을 때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집을 떠날 것을 강조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아브라함은 아비 집을 떠났다. 물론 아버지는 이미 죽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은 형 나홀을 하란에 남겨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출발했다. 그 후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 하였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 하신 약속을 믿지 못하고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가다가 애굽까지 내려갔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더 믿고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였다(창 16:15). 이런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은 사건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이 시험이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인지는 하나님도 알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도저히 순종하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면 그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가 열이 나고 끙끙 앓게 되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 하고 걱정한다. 이 아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아이인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이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무슨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어진 믿음이 아니다. 처음에 하란에서 떠날 때부터 아브라함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창 12:4).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실패를 통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길러 왔기 때문에 시험에 이길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심을 약속 하셨다.
1 약속의 땅을 얻게 됨(신 1: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을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2 여러 가지 복을 받게 됨(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재앙을 면하게 됨(렘 26:13)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4 성령님을 받게 됨(행 5:32)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님도 그러하니라. 5 의의 종이 됨(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 온전하게 됨(히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7 거룩하여짐(벧전 1: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거룩한 자처럼 행하라
2.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인정받았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까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차례나 후손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늘의 뭇 별과 같이, 바닷가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 하셨다. 이 후손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이며(15:4),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주실 것이라(17:16)고 하셨다. 그 때는 명년 이맘 때(17:21)이며 그 아이의 이름은 이삭(17:19)이라 지으라고 까지 자세히 알려 주셨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한 약속이라서 믿지 못했지만 100세의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고 나자 믿음이 생겼다.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심을 믿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이 아들 이삭이 분명히 약속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이삭을 통해 자손의 복을 주리라 하셨는데 아직 이삭이 결혼하여 손자를 낳기 전에 죽이라 하시니 무슨 뜻일까, 내가 죽여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진 것이다. 이런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8-19).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에 올라갈 때 사환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였다. 우리말 성경에는(개역) 여기서 누가 돌아오는지 분명히 표현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동사의 주어가 1인칭 복수, 즉 ‘우리’로 되어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서 경배하고 우리가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인정받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들을 죽여도 이 아이는 약속받은 아이니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는 믿음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자식의 생명을 걸고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 중국에 송전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송전도는 본명이 아니라 신앙이 참 좋고 전도를 잘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러나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 젊은 나이에 3남매를 남겨 놓고 죽었다. 모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모순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후에 그의 자녀들이 축복을 받아 큰 딸 송경령은 중국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손문의 아내가 되었고, 아들 송자명은 하버드, 콜롬비아 두 대학을 나와 중국의 재정 장관이 되었고, 막내 딸 송미령은 장개석 총통의 아내가 되어 한 때 그 삼남매가 전 중국을 다스릴 때가 있었다. 성도는 축복 대신 손실이 올 때 모순을 느낀다.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망하고 손실을 볼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믿고, 회의에 빠져선 안된다. 성경은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좁은 인간의 생각과 기대에 어긋난다고 해서 모순을 느끼고 불신앙에 빠져선 안된다. 십일조를 하고 복받을 일을 했는데, 손해가 올 때는 다음에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흔들어 보시는 것으로 믿고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인정받았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신앙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다.(창22:12끝) 이렇게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은 소돔 성을 위하여 간구하는 그의 기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소돔 성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27), “내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18:30), “내가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31),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18:32) 하고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따지듯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큰 소리로 싸우는 사람도 있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이 모두가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믿음이 좋아 보여도 이런 사람은 인정받을 수 없다. 수제자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어도 잡지 못하고 허탕치고 돌아왔을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불합리한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이 잡히는 기적을 체험했다. 밤에도 안잡혔는데 대낮에 어느 정도 얕아야지 고기가 잘 잡히고 그물질하기도 쉬운 법인데 자기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까지 제 생각과 이성에 맞는 말씀만 믿고, 그렇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모순 속에서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불란서의 마르땡이란 사람은 ‘믿음이란 자기의 전 생명을 완전히 부속시키는 것이다’고 말했으며, 카프카는 ‘믿음은 단두대의 칼’이라 했으며, 마틴 부버란 위대한 철학자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신을 바치기로 맹세하는 것’이라고 했다. 참다운 신앙의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요, 이런 모순 속에서 신앙을 지킬 때, 병고침도 축복도 기적도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믿을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것까지 믿고 따르는 것이다. 내 생각과 계산대로 안되는 것을 믿는 것이요, 내 기도한 것과는 반대 현상이 나타나도 끝까지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모순 속에서도 믿는 신앙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자. 믿음을 인정받는 신자는 복스러운 신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한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창 22:16-18). 여러분 어떤자를 인정하여 주십니까 말씀에 순종하고, 약속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인정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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