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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사람 순종의 제단 (창22:1-19)

본문

이 세상에사는 모든 사람들은 항상 시험에 부딛치게 되고 그리고 시험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불행의 향방이 결정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매 순간 순간마다 결단을 잘하여 올바른 길 복된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뜩별히 믿는 사람에게는 두가지 시험이 항상 순간에 따라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란 놈은 항상 우리에게 달콤한 유혹을 하고 그것의 결과는 아름답고 즐거운 것으로 느끼게 하여 시험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그것의 값은 멸망으로 끝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창3장에서 마귀란 놈은 하와를 유혹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을 알게하는 실과를 먹지 말라 먹는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과는 반대로 너희가 그것을 먹을지라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면서도리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하였던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무자비하고 엄한 말씀만으로 비쳐지고 반대로 마귀는 인간의 편에 서서 사람을 두둔하는것 같이 생각이 됩니다. 마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게 되실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나서며 하는 말이 ‘안됩니다. 선생님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가장 위하는 것같이 막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 하시면서 책망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편하고 많은 사람이 가나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잡하여 가는자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이끄는 길은 넑고 편하고 재미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반하여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은 어렵고 힘이들고 희생을 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고난의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고 또 예수님보다 그무엇도 그 누구도 더 사랑하는 것은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것을 보게됩니다. 살고자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그리하여 참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오는 본문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험하시려고’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니사’는 시도하다 확증하다 라는 뜻이 있는 ‘나싸’의 강조형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시험하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가르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 이였기에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가 아브라함의 행적에 대해서 창세기는 여러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아브라함의 행적을 살펴, 오늘의 우리의 신앙의 길의 좌표를 삼는다면 이에서 더 큰 복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큰 복을 주실 사람에게는 큰 시험을 치루십니다. 고등학교 시험보다 대학 들어가는 시험이 더 어렵듯이, 커다란 시험은 커다란 축복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굉장한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예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한사람한사람 다 기억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개개인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부르시고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한 말은 아브라함은 순종의 자세를 볼수가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언제고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순종하겠나이다.라는 자세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부르실때에 ‘예 여기 있나이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모두가 아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개야 하고 부르시지를 않기 때문에 한번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하실 분이 계실런지 모르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브라함을 부르시듯이 부르시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시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만약 여러분이 아브라함처럼 순종하신다면 여러분도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 아브라함은 그저 명령만 내리십시요 곧 시행하겠습니다.할때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은 청천 벽력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둘중의 작은 아들인 이삭을 바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아들 그냥 아들도 아니라 네 사랑하는 독자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더욱 메어지게 하는듯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얻은 아들입니까 얼마나 사랑하는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의 희망 아브라함의 모든 存在의 意味를 송두리채 빼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소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것은 다 드릴 수 있어도 어찌 하나님이 주신 아들 정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 하십니까 라고 했을 법 한데, 아브라함은 아무런 말씀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을 하지 못했을까요 사실 기가 막힐 말씀입니다. 기절을 할 만한 말씀입니다. 이스마엘을 포기하라고 하셔서 그 아들도 포기 하면서 얻은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모두가 다 복을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의 본질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우리는 진짜 복을 알지 못하며 하늘의 신령한 복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가 복을 받으신 분이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복을 받으셨습니까 바로 신앙의 복을 받으셨습니다. 신앙이 바로 복인것입니다. 이 福은 하나님께 받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福안줄 믿으기시 바랍니다. 이 복은 하나님 앞에 손해를 보는 희생하는 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나의 마음을 드리고 나의 시간을 드리고 나의 물질을 드리고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데 이것을 바로 깨닫지 못할때 우리는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며 하나님으로 부터 진정한 복을 누리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 처럼 나를 드릴수 있는 신앙의 사람으로 성숙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 4가지 단계적인 시험을 주셨습니다.
1. 창세기 12장에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하시게 됩니다. 사실 이 말씀에 순종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닌것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삶의 안정된 기반이 되어 있는 곳입니다. 다정한 이웃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 환경을 포기하고 미지의 세계로 유랑을 떤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 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과감히 모든것을 털고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쫒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현재에 안주하여 하나님의 초청에 온전히 응답하여 순종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작은 자리에도 옮겨 앉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도 선듯 응답하여 나오지를 못합니다. 전도의 자리에 선듯 들어서지 못합니다. 봉사의 자리에 앉기를 거절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직장 관계 때문에 결단하지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런 저런 핑개로서 하나님의 명령앞에 선듯 나서지를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명령앞에 우리가 순종으로 따를수 있을까 한번 생각하여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를 평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이라면 우리는 언제고 아멘이 될때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릴수 있게되리라 믿습니다.
2. 두번째 시련은 롯과 헤어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와서 유일한 혈육으로 서로 의지하며 사는 처지인데, 헤어지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개인주의 삶을 즐기는 오늘의 세대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 겠습니다만, 옛날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웃집 개를 만나도 반갑다’고. 하나님께서 롯과 헤어지라는 이유는 롯이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악한줄 알면서도 그 속에 젖어사는 사람입니다.끈을것을 끈고 분명히 처신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아브라함을 분리 시키신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음을 믿으시고 우리 모두가 친구를 잘 사귀시고 구별된 사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세번째 단계는 아브라함이 얻은 첫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는 명령 이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바라고 삽니다. 그것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조급하여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하는데 실패를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약속이 더디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앞서 이룰려고 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익간적인 수단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룬다고 할지라고 그것은 곧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스마엘을 내어 보낸다는 것이 이삭을 바치라는 것만큼은 못할런지 모르나 그것도 자식과 헤어지는 아픔이기에 아브라함의 마음은 참으로 괴로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도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좆았던 것입니다.
4.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약속의씨로 주신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친히 손으로 잡아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앞에 절대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향한 의심을 품게 할 만한 그런 시험이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 밑둥으로 부터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명령을 내리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것 같습니까 아멘 하실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욥이라는 사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는 하나님앞 의롭게 살아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을 기둥같은 열 자식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온 전신에 병이 들어 아내도 친구도 자기를 버리는 자리에 들어 갔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이 친히 주셨던 선물일지라도 신앙에 의해서 도로 주신분께 반환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참다운 복은 하나님앞에서 내가 얼마나 복을 받았는가를 주판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앞에 바치는 손해 드리는 적자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비인도적인 명령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아비가 자식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일이며,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기에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약속은 파괴이기에 할수가 없는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얼마던지 거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단을 쌓았습니다.나무를 벌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결박하였습니다.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손수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바로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 갈보리 언덕에서 손발에 못을 박으시고 옆구리를 창으로 찍으시고 십자가에 6시간 동안을 메달아 물과피를 다 쏟으사 이렇게 죽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11:17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희생제사는 실로 위대한 신앙의 산물입니다. 그가 이삭을 끌고 모리아산으로 갔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행동 이전에 그의 마음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없는 핸동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모든 행동을 세밀히 살펴 볼 때에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 전폭을 드리는 사람이였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중심이 드려지지 않는다면 온전한 번제가 될수가 없을 것입니다. 창4장에 보면 가인도 제물을 드렸고 아벨도 제물을 드렸습니다만 아벨은 받으시고 가 인은 받지 않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같이 중심이 먼저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앞에 가장 소중한 것도 드릴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리아산의 희생제사를 요구 하시는 줄믿습니다.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복을 주시기 위함인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희생제사를 드린 모리아산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 졌던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이 이 제단에 드려진다면 우리 소망제단도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져 ,아브라함의 자손만대가 복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의 자손만대가 복을 받게 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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