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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장막의 잔치와 소돔성의 심판 (창18:1)

본문

18장은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사라를 통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다시 하여 주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장막을 떠나시면서 소돔성을 심판한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심인데, 아브라함의 장막에 오셨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교제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소돔성을 찾아가시는 것은 심판을 하실려고 찾아가고 있습니다.
1.여호와의 사자 일행이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언약을 받은 표로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마도 할례를 행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장막을 치고 머물고 있었는데, 햇볕이 너무 뜨거워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쉴려고 장막 문 앞에 앉았을 때에 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하여 늘 하던 습관대로 그들을 맞아 일어섰습니다. 가까이 온 세 사람의 행색을 보고서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 중에 둘은 천사였고 한분은 전에도 늘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오셔서 언약을 베풀어 주셨던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그들 일행을 보고 아브라함은 서둘러 허리를 굽히고 말하였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의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부름으로 철저한 섬김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물로 발을 씻는 것은, 그 지방의 환경과 생활풍속에 의한 것입니다. 그곳은(중동) 비가 집중적으로 많이 내리는 계절(우기)과 전혀 비가 오지 않는(건기) 두 계절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는 땅이 항상 말라있었고 먼지가 푸석푸석한 거리를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슬리퍼와 같은 종류의 신발을 신은 발은 항상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귀한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발을 물로 씻어주는 것이 큰 대접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먼 길을 여행했다면 몹시 지쳐있을 것이기 때문에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쉴 것을 말한 것은 당연한 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발을 씻고 서늘한 그늘에서 쉬면서 떡을 먹음으로 지친 몸을 회복하여 상쾌한 마음으로 다시 여행을 계속하도록 하시라고 권하는 것은 나그네에 대한 다뜻한 배려를 하는 평소의 아브라함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따뜻한 호의를 받으면 마음이 저절로 훈훈해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 일행은 쾌히 아브라함의 호의를 받기로 허락하였고 아브라함은 서둘러서 사라에게 떡을 만들게 하고 종에게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떡을 만들고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하는동안 아브라함은 직접 신선한 우유와 치즈를 가지고 와서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고운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분량은 상당히 많은 것이었습니다. 세 스아면 대략 한말 다섯 되(약 32리터)나 되었으니까, 아브라함 얼마나 큰 호의를 베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는 것도 보통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최상의 접대를 준비하는 것으로 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사자 일행을 영접하는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하셔서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이 베푸는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사랑과 믿음의 순종을 즐거이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척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달을 때 더 큰 기쁨으로 믿음의 순종을 바쳐드릴 수 있습니다.
2.사라에게 믿음을 주심 세 사람이 식사를 하면서 사라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가정을 방문한 목적 가운데 하나인 사라에게 믿음을 북돋아 주기 위하여 사라를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아내 사라가 말년에 아이를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라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따라가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했고 그 약속대로 아들을 가질 것이라면 그 약속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만 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일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은 오직 믿음의 길로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믿음이 연약한 것을 아시고 그 믿음 없는 것을 나무라거나 책망하기에 앞서 먼저 그 믿음을 북돋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 일행이 장막 앞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사라는 그 바로 뒤의 장막 안에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가 들을 수 있는 분명한 목소리로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반복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다시 너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내년 봄에 올 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장막 문 곁에서 이 말을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라는 큰 기쁨으로 확실한 믿음을 나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사라는 자기의 육신적인 처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육신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면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그만한 믿음의 길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남편 아브라함과 자기는 늙었고 자기의 경수는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이제 도무지 아이를 가질 소망은 없었습니다. 그런 소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라가 왜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르면 내가 너에게 다시 올텐데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라의 불신앙을 책망하시고 확실한 믿음의 순종을 바쳐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책망을 들음으로 사라는 크게 깨달았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라는 이 믿음을 통해서 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네가 왜 웃었느냐”하는 여호와의 추궁에 사라는 자기의 믿음 없는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당황한 나머지 그만 자기가 웃지 않았노라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겉으로는 웃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웃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속으로 웃었어도 그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더이상의 변명을 해서 하와가 범죄했던 것처럼 범죄하지 않도록 하실려고 사라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이 말에는 사라가 더 이상의 변명을 할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믿음을 나타내는 길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죄를 가리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너는 범죄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라에게 말씀하신 것은 곧바로 돌이켜서 믿음의 순종을 하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순종을 요청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라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크게 뉘우치고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훗날 사라는 믿음의 길에 설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자손을 잉태하고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된 일이었습니다(히 11:11).
3.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목적 그러면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오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들에 대한 약속을 더욱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때가 되면 혈육을 입으시고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서 오실 그 분이 그 당시 아브라함의 장막을 그렇게 방문합니다. 그 분은 아브라함의 주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무엇하려고 오셨습니까 아브라함에게 그 씨의 출생을 말하실려고 찾아 오셨습니다. 이 앞에서는 말씀으로만 하셨는데 이제 친히 찾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친히 아브라함과 함께 교제를 나누시기 위하여 찾아 오십니다. 그 교제는 친구의 교제를 뜻합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 친히 혈육으로 오셔서 아브라함과 교제하시는 그 분 바로 그 분이 때가 되면 아브라함의 씨로 오실 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하는 구원의 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혈육으로 오심,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느 누구에게 자기를 그렇게 나타내신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씨로 오셔서 그렇게 자기 백성과 혈육의 교제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라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집에서 잔치하고 있습니다. 소돔성을 심판하러 가는데 아브라함의 집에서 잔치하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잔치하고 있습니까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안에서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와서 그냥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이삭을 주리라,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 하는 그 약속 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셨고 교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친구와 가지는 교제입니다. 같이 먹고 마시는 것은 친구와 가지는 교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혈육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죄인의 친구가 되셔서 함께 우리와 먹고 마셨고 주님은 죽으실 때에 떡과 포도주를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내 살이니 이는 내 피니다시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임하기 전까지는 다시 포도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먹지 아니하리라”하셔서 그가 영원히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교제할 것을 그것을 통해서 나타내고 계십니다. 아들의 약속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아들이 사람을 입으심으로 죄인 중에 거하셔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알아 보았는가는 잘 모릅니다. 그 때 세 명이 나타났는데 둘은 일반천사요 하나는 여호와의 사자라,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기 전에 구약 역사 안에서 그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에게 임재하셨습니다. 그런 성육신의 가능성을 거기서 그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영원히 사망의 몸을 입으셨고 지금도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참 사람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계시고 그렇게 하므로 임마누엘이 되셔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땅에 계셨을 때도 자기 백성과 교제를 나누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는 내 살이요 피니”하는 자기 방식으로 자기 몸을 주시고 생명의 교통을 통해서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에 그렇게 찾아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구원자가 오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약속 안에서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나그네를 대접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그네를 대접하는 하나의 표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가고 세상을 심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씨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임재가 있고 그 하나님의 아들의 씨가 없는, 씨의 약속이 없는 소돔 땅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또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약속이 있는 울타리 안에 거하지를 못하고 믿음을 지키지를 못하고 타락해서 소돔 장막에 있는 롯이 소돔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소돔성에 있는 롯도 함께 심판을 받습니다. 씨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나그네로 사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오신 하나님의 교제하는 방식과 그 씨에 대한 약속을 떠나서 살고있는 집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자기 구원을 통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거절한 자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 저주가 나타나고 있어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그를 거역하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장막에 가서 교제한 그 교제는 그 당시에는 그런 교제가 끝났지마는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즉 아들 안에서 영원한 교제가 곧 우리의 생명이고, 그리고 소돔성은 영원히 불타버린 것처럼 아들의 약속을 거절하고 따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진노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돔 심판을 마지막 심판의 표상으로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그것이 천사였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지중에 그렇게 대접했는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알고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길을 걸어갔는데 처음에는 제자들이 알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주님께서 친히 자신이심을 알리셔서 제자들이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깨닫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의 장막에 오셔서 자기를 친구 삼으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식탁교제를 나누시므로 자신의 몸에서 나올 씨의 후손을 통하여 주시는 구원의 약속을 받고 더욱 큰 즐거움으로 잔치를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가 말한대로 성도가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 배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강조점은 그것에 있지 않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복을 받았다는 말은 성도가 이 땅에서 살 때에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 열심히 선을 쌓으라는 것으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장막에 오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당신과 교제함이 생명을 누리는 근본이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됨이 영원한 사망이요 심판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장에 언약의 표로 할례를 주시고 있습니다. 단순한 표가 아니라 그것은 영원한 교제의 표인 것입니다. 그 언약을 떠나면 영원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교제하시면서 이삭을 낳을 것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소돔성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생명의 기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 심판을 동시에 바라보는 그런 교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영을 통해서 오늘 우리와 생명의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이 생명의 교제는 영원토록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피로 값주시고 사셔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4.소돔성 멸망에 대한 계시 세 사람(천사와 여호와의 사자)은 식탁에서 일어나 소돔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려고 함께 따라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여호와의 사자 일행을 따라 소돔성이 바라다 보이는 곳까지 거의 1시간 이상을 따라 나왔을 것입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될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은 자기의 씨를 통해서 태어날 구세주를 통하여 나의 영광스러운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앞으로 내가 그 왕국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것을 아는 것도 당연하다. 이제 내가 너와 네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너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이 복은 물질적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복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백성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후손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백성됨이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여호와의 백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도 그 민족 자체가 이 땅에서 잘되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사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를 지켜서 의와 공도를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순전히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혜의 돌보심을 위해서 이루어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그렇게 택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시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임을 거듭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계속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런 식으로 사람의 죄악에 대하여 행동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벨을 쳐죽인 가인의 죄악을 땅이 호소함으로 피값을 요구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창 4:10). 로마서 8:22에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말함으로 죄악으로 인한 땅의 수고로움에 대한 탄식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죄악이 쉬지 않고 자행되므로 그리고 땅에 내린 저주로 인한 고통으로 호소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죄악의 탄식과 부르짖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구원을 베푸시기로 하셨고 그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 구원의 일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죄악에 대한 엄한 징계도 계획 중에 있었는데 그 일을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부터 얼마나 큰 신임을 받고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모든 믿음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와 똑같은 태도를 취하고 계십니다. 소돔성의 죄악 때문에 소돔성을 멸할 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것처럼, 오늘 믿음의 백성들에게도 이 땅의 죄악 때문에 온 땅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와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써 함께 하시고 세상의 역사가 어찌 진행될 것인지를 밝히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돔 땅에는 아브라함의 혈육인 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친척 아브라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롯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혈육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세우실려고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은혜라고 해서 하나님의 죄악에 대한 심판도 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죄악에 대한 철저한 심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역사가 강하면 죄에 대한 심판도 그만큼 큽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던 오순절 성령님강림 직후에 성령님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주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은혜가 크게 임했지만 아브라함의 혈육이라고 해서 그저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혈육이 하나님의 구원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게 보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도성에 살았지만 롯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환란이 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내 가족이 신앙생활을 잘하니까 그저 나는 아무렇게 해도 괜찮은 것으로 알면 안됩니다. 우리나라가 교회가 많다고 해서 한국 민족 전부가 저절로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구원받는 증거를 나타내는 길입니다. 내가 구원받았음을 늘 증명하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말씀대로 선을 행함으로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로 덕을 볼려고 하면 안됩니다.
5.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두 천사는 소돔을 향하여 계속 갔지만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도 아브라함 앞에 그냥 머물러 계셨습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여호와의 태도는 아브라함에게 어떤 행동(중보기도)을 취할 것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할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즉, 소돔성의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훗날 모세도 자기 백성의 죄악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중보적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 주님께서 온 세상의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로 기도하신 것을 예표해 주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하기를 “주께서는 결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그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들 때문에 그 성을 용서하시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를 드렸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의로움에다 호소하였습니다. “의인이 악인의 사회에서 같이 징계를 받을 수는 있지만 같이 멸망하지는 않는다”(칼빈)는 것을 아브라함은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은 기도를 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우신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만일에 소돔성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50명이 있으면 내가 심판하지 않겠다. 그러면 45명이 있으면 어떡하시렵니까 한번만 더 들어주십시오. 30명, 그 다음에는 10명이면 어찌하시렵니까 그래도 심판하지 않겠다. 여기서 10은 단위수로서 의인의 충만한 수를 뜻합니다. 단순한 갯수로서의 수가 아니라 소돔성에 증거할 수 있는 의인의 단위로서의 완전한 수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신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파괴된 시대로서 의인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 성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수 있는 단위로서의 의인의 수, 10명이 있으면 어찌하시렵니까 그리고는 그 이상은 못내려갑니다. 그러나 소돔에는 의인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심판은 불가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를 살피러 떠났던 두 천사에게로 가셨고 아브라함도 자기 처소로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중보기도를 드린 것은 소돔 땅에 자기의 혈육인 롯이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별하여 부르시고 여호와의 도를 행하여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실려고 하셨음을 아브라함은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세상의 죄악에 대한 사명을 요청하는 중보적인 역활을 감당할 것을 요청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 세상에 선포하는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하였고, 세상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참아 기다리시고(아들 중보자가 오셔서 세상 죄를 해결하시기까지) 용서하실 것을 요청하는 기도를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브라함이 소돔 성에 대한 기도를 이해한다면 좁은 의미로 자기 혈육인 조카 롯을 위해서만 간구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믿음의 백성인 우리가 해야될 일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으로 알게 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즉각적인 심판을 행하심 보다는 오래 참으심으로 자비로써 한 생명이라도 더 돌이키게 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해 달라는 중보의 역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사신들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던 것처럼, 예수 안에 한 생명으로 부름받은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그리스도의 중보역활을 행하도록 부름받았음을 명심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이 그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서 여호와의 의로 행하며 중보기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므로 나중에 소돔성이 불탈 때 롯을 불가운데서 건져내셨습니다. 19장 29절에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꼭 아브라함의 공로 때문에 롯을 건져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아브라함 개인의 공로에 의해서 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에 “나 때문에 내 친척 롯을 잘 봐주십시요”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이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이 가합니까”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롯이 의인입니까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의인 롯이 소돔성에 살면서 그 마음이 심히 상했다고, 소돔성의 죄악을 보고 그 의로운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롯은 완전한 의인이 아닙니다. 그는 소돔성 사람처럼 살았고 자기 딸들도 소돔성 사람과 연합해서 이방 혼인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도망칠 때도 살림살이가 아까워서 발걸음이 무거웠어요. 그 내용은 다음 시간에 자세히 더 살필 것입니다만, 어쨌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을 나타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와 같은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땅의 나그네 생을 사는 성도들은 이 땅의 죄악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세상을 향하여 선포해야 하며 또한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우리와 함께 혈육으로 거하시기 위하여 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의와 공도를 시행하십니다. 모든 성도는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들로 부름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하는 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섬김과 봉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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