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거짓말과 약속된 후손의 보호 (창20:1)
본문
소돔의 멸망을 지켜본 아브라함은 세상의 죄악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더욱 두려움으로 떨렸을 것이고 반면에 자신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더욱 우러 나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하였을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삭이 사라의 태에 잉태되었을 무렵 아브라함은 남방으로 내려가 브엘세바의 서쪽 도시인 그랄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축을 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보다 나은 목초지를 찾아서 가다가 그 곳에 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근 20년 간이나 살던 마므레를 떠나 불레셋 땅으로 이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생각하기를 그 곳 불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방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악하고 잔인해서 불법을 행하여 자신과 같은 이방의 나그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하였습니다. 더구나 자기의 아내 사라는 누가 보더라도 고결한 자태를 지니고 있어서 탐을 낼 만한 여인이었으므로 자기 아내 때문에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적에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때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므로 큰 위기를 모면하였고 오히려 그 곳에서 많은 재산을 얻어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아브라함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수치였고 불신앙의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애굽에서의 경험 이후 25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은 또한번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즉, 이방 불레셋 족속의 그랄 왕 아비멜렉의 땅에서 다시 한번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말한 것입니다. 아직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의 장막에 임하여 오셔서 아들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을 반복하셨고 소돔 멸망에 대한 말씀을 주시면서 자기 아내 사라의 믿음을 북돋아 주셨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신변에 닥친 위험에 그만 넘어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시고 자신의 씨를 통해서 세상 구속주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니,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러한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아야 했고
그러므로 이방 왕의 권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런 일이 다른 누구의 경험이 아니라 실은 우리 자신의 경험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백성 삼아 주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건만 우리의 믿음은 넘어짐의 연속입니다. 아브라함의 연약함은 바로 우리 자신의 연약함 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와의 신성한 결혼 약속도 신변의 위험 앞에서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쳤습니다. 부부간의 결혼언약 만큼 신성한 것이 없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기의 생명을 보존코자 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은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 없는 태도일 뿐 아니라 부부간의 신성한 언약도 저버리는 파렴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의 시대상황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 떠돌이 나그네의 수중에 있는 정실 아내라 할지라도 한 지역의 통치자의 운에 들면 빼앗아서 첩으로 삼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면 만이라도 보존하면 다행으로 여길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취한 아브라함의 행동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은 천지를 주관하는 창조주요, 세상을 구속하실 하나님이십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세상 구속에 대한 언약을 주셨는데 아브라함은 신앙인으로서의 태도로서는 미흡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당연한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약속된 씨의 조상으로서는 합당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의 후손에게서 세상의 구주가 출생되리라는 이 숭고한 약속을 그가 믿었다면 오늘 이러한 행동은 너무도 연약한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연합하심으로 세상에 자신의 거룩한 빛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지금 아브라함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육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임마누엘의 약속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그렇게 큰 권세를 지금 아브라함 안에 새기시고 나타내시는대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그에 합당한 믿음의 자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레셋 족속의 한 지역인 그랄 땅의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려다가 자기의 첩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자기의 왕궁에 데려다 놓기는 했어도 그날 밤으로 일을 벌리지는 안했습니다. 왕의 첩으로서의 어떤 일정한 절차를 거치기 위하여 몇 날을 보내며 준비하는 중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려다 놓은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하여 친히 개입하셨습니다. 만일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그날 밤으로 취했다면 그리스도를 출생해야 할 조상이 더럽혀졌을 것이고 사라가 잉태하고 있는 아이도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하갈을 통해서 얻은 이스마엘도 육의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어서 끊어 냈는데 이제 또 다시 육의 방법이 하나님의 세상 구원 경륜에 큰 방해를 하고 막아 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남의 아내를 취하는 일이 사망에 해당되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남의 아내를 절대로 만지지 말라는 금지명령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생애 가운데 결혼 보다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 사이에 맺어진 결혼언약의 신성함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신성한 결혼언약을 지키지 않고 파렴치한 행동으로 간음을 범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하고 계십니다. 비록 그들이 간음죄를 범하고도 당장에 벌을 받지 않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혼을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틀림 없이 그들에게 보복을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므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답하기를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십니까 아브라함이 나더러 그 여인을 자기의 누이라고 하였고 그 여인도 아브라함을 자기의 오라비라고 했기에 내가 그녀를 데려왔는데 그게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아비멜렉의 항의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의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그가 부지중에 잘못을 행했다 하더라도 회개하기 전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그 집을 질병으로 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결국 사라를 자기 아내로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아비멜렉과 그 집 사람들이 병에 걸린 것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시자 아비멜렉은 그 사실을 모르고 했노라고 변명하였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아비멜렉을 살려두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려보낼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선지자니 그의 기도로 사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세상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증거됨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더욱 풍성한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면 아비멜렉의 병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만일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임의대로 행하려 했다면 그는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신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셨습니다. 세상 구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변함이 없으셨고 오늘날에도 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왕국이 큰 영광 중에 임할 때까지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시고 이 언약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므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자태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아비멜렉은 종들에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다 말하였습니다. 그들도 아비멜렉 처럼 두려워 하였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에게는 지금처럼 여호와의 위엄이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확실한 구원의 약속을 지키시려는 목적 때문에 이방 불레셋에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실수로 야기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로 인하여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해명을 요구하였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뻔 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9,10절)
이 말씀은 거짓과 불신앙의 행동을 한 신자가 이방인(불신자)의 책망을 듣는 것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단지 자기 죄를 고백하였더라면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놀라운 기사를 증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죄를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도 자기에게 쏟아지는 질책 이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언약과 함께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만 보고 그의 무한하신 은혜와 용서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아브라함의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힘써 변명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이런 변명은 참으로 무익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아브라함이 이러한 기회에 하나님의 구원에 간해서는 한마디도 증거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한 말이라고는 ‘아버지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종종 세상으로 부터 해명을 요구 당합니다. 왜 우리는 그런 수많은 기회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지 못할까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솔직히 고백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면 자비가 크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우리의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을 통해 지난 밤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비춰 보면 아브라함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셨다는 사실과 아브라함은 약속을 저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시느이 언약을 붙드셨음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또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자기 영토 내의 아무 곳에서라도 가축을 기르며 거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도 말하기를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의 집에 내리셨던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이방인의 입을 통하여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흔들리면 불신자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셔서 확실한 구원에 대하여 신뢰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의 모든 생애 가운데 충만하게 미치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믿고 그 믿음 안에서 기뻐하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시 만날 수 있었고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믿음으로 기다렸던 아들의 출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비멜렉을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았을 때 다시 믿음으로 그 언약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패역한 것같이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세상을 버리시지 않고 아들을 통한 구원의 언약을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영광 중에 임하여 오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어떠한 위험에도 우리는 담대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있게 됩니다. 아멘.
그런데 아브라함이 생각하기를 그 곳 불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방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악하고 잔인해서 불법을 행하여 자신과 같은 이방의 나그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하였습니다. 더구나 자기의 아내 사라는 누가 보더라도 고결한 자태를 지니고 있어서 탐을 낼 만한 여인이었으므로 자기 아내 때문에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적에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때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므로 큰 위기를 모면하였고 오히려 그 곳에서 많은 재산을 얻어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아브라함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수치였고 불신앙의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애굽에서의 경험 이후 25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은 또한번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즉, 이방 불레셋 족속의 그랄 왕 아비멜렉의 땅에서 다시 한번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말한 것입니다. 아직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의 장막에 임하여 오셔서 아들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을 반복하셨고 소돔 멸망에 대한 말씀을 주시면서 자기 아내 사라의 믿음을 북돋아 주셨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신변에 닥친 위험에 그만 넘어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시고 자신의 씨를 통해서 세상 구속주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니,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러한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아야 했고
그러므로 이방 왕의 권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런 일이 다른 누구의 경험이 아니라 실은 우리 자신의 경험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백성 삼아 주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건만 우리의 믿음은 넘어짐의 연속입니다. 아브라함의 연약함은 바로 우리 자신의 연약함 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와의 신성한 결혼 약속도 신변의 위험 앞에서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쳤습니다. 부부간의 결혼언약 만큼 신성한 것이 없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기의 생명을 보존코자 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은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 없는 태도일 뿐 아니라 부부간의 신성한 언약도 저버리는 파렴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의 시대상황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 떠돌이 나그네의 수중에 있는 정실 아내라 할지라도 한 지역의 통치자의 운에 들면 빼앗아서 첩으로 삼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면 만이라도 보존하면 다행으로 여길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취한 아브라함의 행동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은 천지를 주관하는 창조주요, 세상을 구속하실 하나님이십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세상 구속에 대한 언약을 주셨는데 아브라함은 신앙인으로서의 태도로서는 미흡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당연한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약속된 씨의 조상으로서는 합당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의 후손에게서 세상의 구주가 출생되리라는 이 숭고한 약속을 그가 믿었다면 오늘 이러한 행동은 너무도 연약한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연합하심으로 세상에 자신의 거룩한 빛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지금 아브라함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육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임마누엘의 약속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그렇게 큰 권세를 지금 아브라함 안에 새기시고 나타내시는대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그에 합당한 믿음의 자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레셋 족속의 한 지역인 그랄 땅의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려다가 자기의 첩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자기의 왕궁에 데려다 놓기는 했어도 그날 밤으로 일을 벌리지는 안했습니다. 왕의 첩으로서의 어떤 일정한 절차를 거치기 위하여 몇 날을 보내며 준비하는 중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려다 놓은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하여 친히 개입하셨습니다. 만일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그날 밤으로 취했다면 그리스도를 출생해야 할 조상이 더럽혀졌을 것이고 사라가 잉태하고 있는 아이도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하갈을 통해서 얻은 이스마엘도 육의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어서 끊어 냈는데 이제 또 다시 육의 방법이 하나님의 세상 구원 경륜에 큰 방해를 하고 막아 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남의 아내를 취하는 일이 사망에 해당되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남의 아내를 절대로 만지지 말라는 금지명령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생애 가운데 결혼 보다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 사이에 맺어진 결혼언약의 신성함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신성한 결혼언약을 지키지 않고 파렴치한 행동으로 간음을 범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하고 계십니다. 비록 그들이 간음죄를 범하고도 당장에 벌을 받지 않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혼을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틀림 없이 그들에게 보복을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므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답하기를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십니까 아브라함이 나더러 그 여인을 자기의 누이라고 하였고 그 여인도 아브라함을 자기의 오라비라고 했기에 내가 그녀를 데려왔는데 그게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아비멜렉의 항의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의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그가 부지중에 잘못을 행했다 하더라도 회개하기 전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그 집을 질병으로 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결국 사라를 자기 아내로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아비멜렉과 그 집 사람들이 병에 걸린 것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시자 아비멜렉은 그 사실을 모르고 했노라고 변명하였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아비멜렉을 살려두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려보낼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선지자니 그의 기도로 사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세상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증거됨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더욱 풍성한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면 아비멜렉의 병은 떠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만일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임의대로 행하려 했다면 그는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신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셨습니다. 세상 구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변함이 없으셨고 오늘날에도 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왕국이 큰 영광 중에 임할 때까지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시고 이 언약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므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자태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아비멜렉은 종들에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다 말하였습니다. 그들도 아비멜렉 처럼 두려워 하였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에게는 지금처럼 여호와의 위엄이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확실한 구원의 약속을 지키시려는 목적 때문에 이방 불레셋에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실수로 야기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로 인하여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해명을 요구하였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뻔 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9,10절)
이 말씀은 거짓과 불신앙의 행동을 한 신자가 이방인(불신자)의 책망을 듣는 것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단지 자기 죄를 고백하였더라면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놀라운 기사를 증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죄를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도 자기에게 쏟아지는 질책 이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언약과 함께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만 보고 그의 무한하신 은혜와 용서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아브라함의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힘써 변명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이런 변명은 참으로 무익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아브라함이 이러한 기회에 하나님의 구원에 간해서는 한마디도 증거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한 말이라고는 ‘아버지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종종 세상으로 부터 해명을 요구 당합니다. 왜 우리는 그런 수많은 기회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지 못할까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솔직히 고백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면 자비가 크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우리의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을 통해 지난 밤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비춰 보면 아브라함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셨다는 사실과 아브라함은 약속을 저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시느이 언약을 붙드셨음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또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자기 영토 내의 아무 곳에서라도 가축을 기르며 거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도 말하기를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의 집에 내리셨던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이방인의 입을 통하여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흔들리면 불신자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셔서 확실한 구원에 대하여 신뢰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의 모든 생애 가운데 충만하게 미치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믿고 그 믿음 안에서 기뻐하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시 만날 수 있었고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믿음으로 기다렸던 아들의 출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비멜렉을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았을 때 다시 믿음으로 그 언약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패역한 것같이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세상을 버리시지 않고 아들을 통한 구원의 언약을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영광 중에 임하여 오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어떠한 위험에도 우리는 담대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있게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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