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약속의 믿음과 큰 상급 (창15:1-7)

본문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고 축복을 받는 약속 의 종교입니다. 구약성경은 옛 약속으로서,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사사들, 그리고 선 지자들에게 하신 은혜의 약속의 말씀이라면, 신약성경을 새로운 언약 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은 피차에 이행을 하여야 그 효력이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이 이 행을 하지 아니하면 그 약속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 보면 약속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고 따른 사람입니다. 그는 그 자신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축복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하늘의 무수 한 별들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영하리라는 약속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는 이미 나이 많아서 아이를 낳으리라는 것이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조상이 되었고 온 민족의 아버지가 되 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했습니다. 미래의 바라는 것을 실상처럼 믿으며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약속은 많이 하지만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좌절과 혼란과 다툼이 일어나고 권위의 상실로 불신사회가 되고 나라와 날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 사회에서는 문서보다 말한 마디가 더 중요한 약속으로 간 주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젼을 보여주실 때에 한 마디로 질문 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가라는 대로 믿고 순종하며 모험적 으로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라고 창세기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 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건실한 신앙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지극히 큰 상급을 주셨고 의롭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근거한 믿음 인간은 관계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 형제와의 관계,물질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바고 맺 고 살아갈 때에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민감했습니다. 감수성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우선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그 말씀을 믿고 따랐 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는 곳마다 천막을 치고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험의 신앙을 가지고 의심 없이 따랐던 것 입니다. 야곱의 신앙을 거래적인 신앙이라 한다면 아브라함의 신앙은 "명령하 시매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하는 순종의 신앙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상처는 관계성의 파괴입니다. 사람, 물질, 자연과 의 관계성이 파괴되어 우리는 환경 오염 문제가 발생하고 인격의 손상 과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손실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관계성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현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내 할아버지,할머니를 본 일은 없지만 그 분들의 존재를 믿는 것처 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하는 것은 의심이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심없이 따름으로 써 우리는 상급을 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신앙의 시련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갔을 때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애굽으로 갔습니다. 애굽 의 바로 임금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를 취하 려고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비겁하게도 사라가 자기 아내가 아니 라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사라를 취하려 다가 하나님의 큰 재앙을 받게 되자 그는 깜짝 놀라서 아브라함이 거 짓말한 것을 알고 그를 책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이방 왕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뿐 아니 라 남으로부터 수모와 무시를 당하기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과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생리적으로 가망이 없어 보이니까 아브 라함에게 애굽에서 데려온 하갈이라는 여종을 취하면 후손을 볼 수 있 을 것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해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것은 그의 실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그의 참된 후손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100세 때에 사라 의 몸에서 낳은 이삭이 약속의 참된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합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면 이해로 끝납니다. 그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웃었 던 것처럼, 웃을 수밖에 없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 인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과실을 맺을 수 없 다는 말씀은 관계성의 확인입니다.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 내가 항상 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어 있는 가지인지,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 지 확인해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왔지만 또 다시 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불만에 떨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가, 네 울타리가 되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약속에 순종하며 기도하는 자에게는 지극히 큰 상급을 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관계성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축복해 주신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가졌던 위대한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2. 미래의 희망에 근거한 신앙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창12:2) 믿음이란 언제나 미래의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사랑가야 할 75세나 된 노인을 하나님께서는 머나면 가나안 땅으로 이민을 보냈습니다. 그곳에 땅 한평 없는 아브 라함에게 "이것이 다 너의 땅이라"고 할 때에 그는 믿어지질 않았습니다. 자식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어떤 징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희망을 가지고 살다가 마침내 이삭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미래에 속해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믿고 따르는 것이 지극히 큰 상급을 받는 신 앙입니다. 18년전, 제가 광림교회에 처음 왔을 때에 아들 하나를 키우며 혼자 어렵게 살아가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리 기도를 해 도 응답이 없는 것 같다면 탄식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 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희망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무려 25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팩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의욕과 취미 를 가지고 노력하는 환자는 쉽게 병이 나을 수가 있지만 아무런 취미 도 의욕도 관심도 없는 환자는 점점 병이 악화된다고 했습니다. 희망과 믿음을 가질 때에 질병이 낫는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내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미래의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꿈을 잃어버린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질병입니다. 또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이들에게 내일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 비행기가 런던 시가를 폭력하여 불바다가 되 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성 앤드류 교회의 마당에 엎드려 '하나님, 우리에게 희망이 어디 있습니까우리의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영국의 위대한 유산들이 불타고 있습니다.' 하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 며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한참 동안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 눈앞에 자욱했던 연기가 바람에 걷히면서 성 바울 성당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 때 이 노인은 '하나님, 알겠습니다. 저것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늘 도무지 어떤 것이 올바른 가치의 세계인지 알 수가 없이 악의 세력이 범람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내일이 약속된 사람인 까닭에, 공의와 사랑의 주님이 함께 계신 까락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현실을 극복해 나아가는 위대한 신앙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모두 위임하는 신앙 내일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 에 약속한 대로 이루어 주시는 까닭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위임하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말씀이 있었고, 비젼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의 심없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라갔더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아브라함의 신앙보다도 더욱 분명합니다. 구약에서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오늘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더욱 분명 한 신앙을 가지고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광림수도원에서 개최되었던 동아시아 기독장교 대회에 참석 한 군 장성들이 어떻게 이런 훌륭한 수도원을 허락받았느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광림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순수하게 믿고 따릅니다.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고 순종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선물을 주셨습니다."그들은 광림교회가 축복받은 교회라고 칭찬했습니다. 저는 그 집회의 폐회 설교 때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감리교의 부흥사 가운데 E.S.존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매해 새 해가 되면 미국 국방성에서 신년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예수님 앞에 항복하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모인 장성들 은 군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항복이란 말인데 목사님 설교 말씀 이 듣기 거북하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존스는 "여러분, 절대자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예수님 앞에 항복할 때에 비로소 여러분은 사람과 원수 앞에서 참된 승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내어맡기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복할 때 에 우리는 승자가 된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걱정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다 내어맡기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곳으로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이번에 동유럽에서 제일 잘 사는 동독인들이 자유를 찾아서 서독으로 넘어갔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저의 둘째아들이 소식을 전해 왔는데, 방학 동안에 자기가 서독으로 넘어온 동독 피난민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도 없이 컨테이너와 같은 보잘것 없는 곳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새우면서도 자유를 얻은 기쁨과 감격 때문에 불평 한 마디 없는 그들의 신사적인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도, 아무리 자신이 어렵다 할지라도 자유를 얻은 기쁨에 참고 나아가는 그들의 인격적인 모습을 보고 자기는 큰 교훈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자유, 이 귀중한 자유를 주신 것을 감사 하며, 우리의 미래를 모두 하나님께 위임하고 오늘이 비록 어렵고 불 편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일의 위대한 소망을 바라보면서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 업을 이을 자니라"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78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