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상급 (창15:1)
본문
1절의 “이후에.”라는 말은 14장의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소돔 왕으로부터 전리품 받기를 거절한 일과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려 제사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모든 일을 진행하고 계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소돔 땅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아브라함은 그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큰 것을 경험하였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길에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난 사건을 통해서 그 사실은 확인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소돔 임금이 방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상급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주셨고 하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혈육을 입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상급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은 큰 상급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히 상급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겠다는 상급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상급이요 방패라고 하신 것은 세상에서 잘되고 복을 누리는 그런 육체적인 복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도, 하나님 자신이 바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상급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피조물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있음입니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피조물의 생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요 상급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나님의 말씀(계시)을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인간세상에서의 부나 지위를 획득하는 그런 류의 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은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고 상급이 되시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땅에서 보면 전쟁에서 이긴 자요 그 땅에서 높임을 받을만 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것을 이어받아 상속할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지만 아브라함은 땅에서 자기를 이을 상속자가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아직 힘이 남아서 전쟁을 해도 싸워 이길만 하겠지만 장차 늙어지고 후사 마저 없다면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의미도 없이 상실될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 그러면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지금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제일 바라는 것은 일전에 약속해 주셨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혼자입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기업을 제게 주셨고 땅도 약속해 주셨는데 제가 후사가 없이 죽으면 어떻게 제게 주신 그 구세주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제 친척은 아니지만 제 집에서 기른 자 가운데 다메섹 출신인 엘리에셀이 그래도 성실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만 하게 보입니다. 그러니 엘리에셀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보존되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이러한 말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자를 보낼 것인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께 어떤 방식으로 구원자를 보내실 그 일을 이루실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한 표적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러했습니다. “너의 상속자는 다메섹에서 온 엘리에셀이 아니다. 앞으로 네 허리에서 태어날 너의 아들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아들의 약속으로 본격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터 이끌어 내시고 하란에서 부모를 작별하게 하시고, 이제 가나안에 와서 홀로 서게 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적인 어떠한 것도 의지할 것이 없게 만드시고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이제 아들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믿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씨를 주시겠다고 약속한 그 때는 사실 인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다 죽은 것처럼 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한편 기쁘기도 하였지만 한편 마음에 의아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하거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이 땅을 허락하셨는데 지금 이 땅은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약을 맺는 의식을 통해서 자기의 약속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약속에 대해서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도장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불신앙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확신을 갖기 위하여 증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도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증거를 요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확실한 증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헛되이 증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심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아하스 임금이 앗수르의 18만 5천 대군의 침공을 당하여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하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징조를 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때 아하스 임금이 하나님께서 징조를 구하라 하셨는데도 마치 어떤 징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인 것처럼 하여 자기가 믿음이 있는척 하고 오히려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한 징조를 주시는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메시야 탄생에 대한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은 아하스 왕 때문에 징조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하스 왕이 거느리고 있는 그 백성, 지금 앗수르의 18만 5천 대군 앞에 멸망의 위기에 처한 그 백성이 사실은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 그 아들 안에서 구원하시고 나라를 세우실 자기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 백성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지금 한 징조를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까닭은 온 땅을 구속할 메시야가 그 백성의 후손으로 오실 것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징조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 때문에 지금 교회가 세상에서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증거를 구하라고 하셨는데도 아하스 임금은 자기 신앙을 빙자해서 징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임금은 하나님의 징조를 믿었습니다. 이사야서 36-37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더욱 확증을 갖기 위한 증거를 요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증거에 대하여 불신하고 증거를 구하지 않는 태도나 혹은 전혀 다른 새로운 증거를 요구하는 태도는 잘못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그 주변에서는(고대 근동) 부족과 부족간에 계약을 맺는 일정한 형식이 있었음이 알려졌습니다. 그 계약을 맺는 형식을 살펴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언약을 맺는 양 당사자(부족의 왕)가 함께서고 그 앞에다 짐승(소나 양 등)을 둘로 똑같이 쪼개서 양편에 세워 놓습니다. 그리고 계약을 맺는 당사자끼리 그 쪼갠 짐승들 사이로 지나갑니다. 그것은 함께 계약을 맺는 둘 중에 아무라도 이 계약을 어길 경우에는 이 짐승들 처럼 쪼개져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죽음을 걸고 하는 맹세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의 계약체결의 방식대로 아브라함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17절에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는데, 그것은 하나님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셨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우리 인간은 도무지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홀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에 아브라함을 초대하셔서 그 약속대로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강한 의지가 표현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더라면 그 이후 계약에 대한 약속을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계약은 파기되고 하나님의 구속을 위한 계획은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홀로 계약의 책임을 감당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12절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우리에게 상당히 당혹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세상에서 잘되고 복받는 것 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있는데, 여기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복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이방 사람들을 섬길 것이고 400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니 도무지 우리의 생각과는 잘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던 데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며 인간을 위한 책도 아니고 인간으로 말미암은 책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책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이방 땅에 객이 되어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곳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 민족을 이루기에는 적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의 기름진 땅, 문화가 번성한 곳을 택하여 자기 백성을 기르시기로 하나님은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와 같은 조건을 충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세계문화의 중심지였고 식량이 풍성했던 애굽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양육할 장소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아무런 고난 없이 들어가 살게 된다면 하나님을 기억할 리가 만무했고 그리고 장래 구원을 이룰 일에 대한 모형으로 애굽에서의 삶은 계획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일은 마치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방 땅에서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 것은 그에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어갈 하나님의 그릇으로 선택되었어도 그릇 자체만 가지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14절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징치하시고 그리고 구속해 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어갈 그릇이어도 구속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애굽에서 탈출해 나오면서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많은 수의 민족으로 번창하게 하여 이루게 하신 구원지혜의 섭리가 애굽에서 이 백성을 기르시려는 뜻과 함께, 그렇게 선택받고 구원받은 것을 통해서 그들도 구원이 필요한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실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계획 아래서만 축복이 있음을 알게 하실려고 그렇게 큰 시련과 연단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에서 벌써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고난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실려고 그 큰일을 깨닫게 하실려고 그와 같은 시련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행로에도 어쩌면 이런 방식의 혹독한 고난과 연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당하는 시련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길목이 됩니다. 시련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성도가 고난 받음이 유익하다고 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성도들은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특성
1.아브라함의 계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고 하라고 하신 은혜의 계약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불러 택해주시고 그와 그의 후손을 부르시겠다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보다 의롭거나 부자이거나 용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만 하나님의 절대은총으로 택하셨고 그를 복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2.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계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강조해 주는 계획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4:19절에서 말한 그대로 아브라함도 사라도 그들의 몸이 거의 죽은 것과 같은 때에 그들의 몸에서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의 나그네였던 아브라함에게 가나안과 함께 유브라데스 강까지 그 큰 땅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에 의해 아브라함의 땅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행위는 참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실 때 아브라함이 믿고 그 말씀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절에서 이 때에 아브라함을 가리키기를 믿음으로 어디로 갈바를 알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이 떠나라고 한 명령을 좇아서 고향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22장에서 더욱 분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그를 시험하시기 위해 그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에 반항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순순히 따르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알았고 그 말씀에 동의하며 주님께 의지했습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결코 손해나 저주나 멸망이 있는것이 아니라 나에게 성장과 축복과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알고 확신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참 믿음이란 결코 단순한 지적인 믿음이 아님을 가리켜 줍니다. 마귀 사탄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말할 뿐 아니라 그 믿음의 내용을 동의하며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믿음은 지식, 찬동, 의지 세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살도록 요구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로 돌이켜 의와 공도로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 은혜로 택했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의 행위의 공로나 어떤 선행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가 택함 받은 후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17:1절에서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늘 아브라함의 뒤를 따르며 감독한 것처럼 곧 내 앞에서 완전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높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구원백성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빅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죄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말하므로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의 행로를 살피면서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참 믿음의 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이 섬겼던 믿음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상급이요 방패라고 하신 것은 세상에서 잘되고 복을 누리는 그런 육체적인 복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도, 하나님 자신이 바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상급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피조물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있음입니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피조물의 생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요 상급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나님의 말씀(계시)을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인간세상에서의 부나 지위를 획득하는 그런 류의 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은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고 상급이 되시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땅에서 보면 전쟁에서 이긴 자요 그 땅에서 높임을 받을만 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것을 이어받아 상속할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지만 아브라함은 땅에서 자기를 이을 상속자가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아직 힘이 남아서 전쟁을 해도 싸워 이길만 하겠지만 장차 늙어지고 후사 마저 없다면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의미도 없이 상실될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 그러면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지금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제일 바라는 것은 일전에 약속해 주셨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혼자입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기업을 제게 주셨고 땅도 약속해 주셨는데 제가 후사가 없이 죽으면 어떻게 제게 주신 그 구세주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제 친척은 아니지만 제 집에서 기른 자 가운데 다메섹 출신인 엘리에셀이 그래도 성실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만 하게 보입니다. 그러니 엘리에셀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보존되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이러한 말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자를 보낼 것인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께 어떤 방식으로 구원자를 보내실 그 일을 이루실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한 표적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러했습니다. “너의 상속자는 다메섹에서 온 엘리에셀이 아니다. 앞으로 네 허리에서 태어날 너의 아들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아들의 약속으로 본격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터 이끌어 내시고 하란에서 부모를 작별하게 하시고, 이제 가나안에 와서 홀로 서게 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적인 어떠한 것도 의지할 것이 없게 만드시고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이제 아들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믿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씨를 주시겠다고 약속한 그 때는 사실 인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다 죽은 것처럼 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한편 기쁘기도 하였지만 한편 마음에 의아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하거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이 땅을 허락하셨는데 지금 이 땅은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약을 맺는 의식을 통해서 자기의 약속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약속에 대해서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도장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불신앙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확신을 갖기 위하여 증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도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증거를 요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확실한 증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헛되이 증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심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아하스 임금이 앗수르의 18만 5천 대군의 침공을 당하여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하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징조를 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때 아하스 임금이 하나님께서 징조를 구하라 하셨는데도 마치 어떤 징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인 것처럼 하여 자기가 믿음이 있는척 하고 오히려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한 징조를 주시는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메시야 탄생에 대한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은 아하스 왕 때문에 징조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하스 왕이 거느리고 있는 그 백성, 지금 앗수르의 18만 5천 대군 앞에 멸망의 위기에 처한 그 백성이 사실은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 그 아들 안에서 구원하시고 나라를 세우실 자기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 백성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지금 한 징조를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까닭은 온 땅을 구속할 메시야가 그 백성의 후손으로 오실 것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징조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 때문에 지금 교회가 세상에서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증거를 구하라고 하셨는데도 아하스 임금은 자기 신앙을 빙자해서 징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임금은 하나님의 징조를 믿었습니다. 이사야서 36-37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더욱 확증을 갖기 위한 증거를 요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증거에 대하여 불신하고 증거를 구하지 않는 태도나 혹은 전혀 다른 새로운 증거를 요구하는 태도는 잘못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그 주변에서는(고대 근동) 부족과 부족간에 계약을 맺는 일정한 형식이 있었음이 알려졌습니다. 그 계약을 맺는 형식을 살펴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언약을 맺는 양 당사자(부족의 왕)가 함께서고 그 앞에다 짐승(소나 양 등)을 둘로 똑같이 쪼개서 양편에 세워 놓습니다. 그리고 계약을 맺는 당사자끼리 그 쪼갠 짐승들 사이로 지나갑니다. 그것은 함께 계약을 맺는 둘 중에 아무라도 이 계약을 어길 경우에는 이 짐승들 처럼 쪼개져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죽음을 걸고 하는 맹세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의 계약체결의 방식대로 아브라함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17절에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는데, 그것은 하나님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셨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우리 인간은 도무지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홀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에 아브라함을 초대하셔서 그 약속대로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강한 의지가 표현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더라면 그 이후 계약에 대한 약속을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계약은 파기되고 하나님의 구속을 위한 계획은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홀로 계약의 책임을 감당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12절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우리에게 상당히 당혹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세상에서 잘되고 복받는 것 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있는데, 여기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복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이방 사람들을 섬길 것이고 400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니 도무지 우리의 생각과는 잘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던 데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며 인간을 위한 책도 아니고 인간으로 말미암은 책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책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이방 땅에 객이 되어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곳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 민족을 이루기에는 적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의 기름진 땅, 문화가 번성한 곳을 택하여 자기 백성을 기르시기로 하나님은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와 같은 조건을 충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세계문화의 중심지였고 식량이 풍성했던 애굽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양육할 장소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아무런 고난 없이 들어가 살게 된다면 하나님을 기억할 리가 만무했고 그리고 장래 구원을 이룰 일에 대한 모형으로 애굽에서의 삶은 계획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일은 마치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방 땅에서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 것은 그에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어갈 하나님의 그릇으로 선택되었어도 그릇 자체만 가지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14절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징치하시고 그리고 구속해 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어갈 그릇이어도 구속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애굽에서 탈출해 나오면서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많은 수의 민족으로 번창하게 하여 이루게 하신 구원지혜의 섭리가 애굽에서 이 백성을 기르시려는 뜻과 함께, 그렇게 선택받고 구원받은 것을 통해서 그들도 구원이 필요한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실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계획 아래서만 축복이 있음을 알게 하실려고 그렇게 큰 시련과 연단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에서 벌써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고난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실려고 그 큰일을 깨닫게 하실려고 그와 같은 시련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행로에도 어쩌면 이런 방식의 혹독한 고난과 연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당하는 시련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길목이 됩니다. 시련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성도가 고난 받음이 유익하다고 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성도들은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특성
1.아브라함의 계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고 하라고 하신 은혜의 계약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불러 택해주시고 그와 그의 후손을 부르시겠다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보다 의롭거나 부자이거나 용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만 하나님의 절대은총으로 택하셨고 그를 복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2.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계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강조해 주는 계획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4:19절에서 말한 그대로 아브라함도 사라도 그들의 몸이 거의 죽은 것과 같은 때에 그들의 몸에서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의 나그네였던 아브라함에게 가나안과 함께 유브라데스 강까지 그 큰 땅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에 의해 아브라함의 땅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행위는 참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실 때 아브라함이 믿고 그 말씀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절에서 이 때에 아브라함을 가리키기를 믿음으로 어디로 갈바를 알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이 떠나라고 한 명령을 좇아서 고향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22장에서 더욱 분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그를 시험하시기 위해 그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에 반항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순순히 따르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알았고 그 말씀에 동의하며 주님께 의지했습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결코 손해나 저주나 멸망이 있는것이 아니라 나에게 성장과 축복과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알고 확신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참 믿음이란 결코 단순한 지적인 믿음이 아님을 가리켜 줍니다. 마귀 사탄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말할 뿐 아니라 그 믿음의 내용을 동의하며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믿음은 지식, 찬동, 의지 세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살도록 요구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로 돌이켜 의와 공도로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 은혜로 택했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의 행위의 공로나 어떤 선행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가 택함 받은 후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17:1절에서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늘 아브라함의 뒤를 따르며 감독한 것처럼 곧 내 앞에서 완전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높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구원백성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빅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죄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말하므로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의 행로를 살피면서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참 믿음의 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이 섬겼던 믿음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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