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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날을 복주사! (창1:31-2:3)

본문

기계는 쉼이 필요 없습니다. 쉼이 있다고 해도 단순합니다. 열 과 부하를 식히고 줄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쉼은 까다 롭습니다. 그냥 쉬어서는 안됩니다. 영화도 보고 취미생활도 즐 기고, 외식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노동계에서는 최저생계비에 문화생활비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쉼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습니다.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을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어느덧 산을 내 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각자 서로가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 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 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 나는 10분씩 쉴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당연히 이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끼날 무디어 지는 줄도 모 르고덮어 놓고 열심만 낸다고 되겠습니까 쉬는 시간은 도끼날 을 가는 시간입니다. 도끼날을 가는 시간이 나무를 베는 시간을 죄우합니다. 안식은 일을 결정하고, 주일은 한 주간의 삶을 결정 합니다. 예배는 한 주간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쉼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도끼날을 갈게 됩니다. 문제는 여유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 안에의 안식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늘 각성 되어 있습니다. 일에, 인간관계에, 걱정에 불안에, 성공에 각성되어 있습니다. 매일 꿈꾸듯 몽롱한 것도 문제지만, 매일 각성되어 있는 것 도 문제입니다. 끊임 없이 각성 시키면 돌아 버립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통화를 해야 장사가 되는 휴대폰 회사에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를 내 보냅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이 만 큼 쉼이 없습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쉼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쉬셨습니다. 왜 쉬어야 합니까 여러 이유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우리도 쉽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요 근거입니다. 쉬어야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 엿새를 일하시고 이레째 쉬 셨습니다. 물론 안식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인간들도 쉽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 안식의 모범이요, 규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일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 인간은 참으로 삭막하고 불안할 것입니다. 끊임 없이 우리에게 일 만 강요하는 하나님이라면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쉬시고 우리에게 쉼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쉬시는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십니다. 일없이 쉼이 없고, 쉼 없이 일이 없습니다. 일은 쉼을 만들어야 하며, 쉼은 또 일을 창조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 '안식(솨바트)'이란 말은 일에 지쳐 골아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을 마친 후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지 않고 잠시 휴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의 연장으로서의 쉼이요, 창조를 위한 쉼입니다. 사실 쉼은 창조의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쉼은 창조의 끝에 나오는 쉼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매일 쉬고 또 쉬는 쉼은 하나님의 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쉼은 엿세 일하고 그 일의 창조의 연장으로서 이레째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은 창조의 중 단이 아니라, 창조의 연장이요, 창조의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면 참된 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카다쉬) 하셨습니다. 이 날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니 거룩해진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그 날 자체가 거룩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을 생산 하십니다. 날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안식의 주체도 하나님입니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사람은 일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입니다. 마르다 보다는 마리아입니다. 쉼이 올바라야 일도 올바라집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것 무척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촛점, 중심, 질서도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쉼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하나님 안에 서의 안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 하는 것은, 체념이나 게 름하고는 다릅니다. 일하지 않고 쉬는 사람 중에도 불안은 있고, 분주하게 일에 몰입해 있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의 안식을 겸험하 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렇게 자연 속에 있는 휴양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잘 아시지요 다섯 남자의 편력에도 참 된 영혼의 쉼이 없어 방황하고 목말라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된 복음의 진리를 주셨 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은 영혼의 안식을 얻고 삶의 생기를 찾 았습니다. 물동이를 던져 버리고 마을로 뛰어 내려 갔습니다. 생 기 발랄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렀스니다. 참된 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쉼입니다. 육체가 편해서 쉼이 아닙니다. 정신이 안정되어서도 진정한 쉼은 아닙니다. 영혼이 평화를 누려 야 참된 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열심히 일해도 쉼입니다. 일곱째 날은 복주신 날입니다. 여섯째 날 까지는 단지 보시기에 좋은 날이지만, 일곱째 날은 복주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복주는 날입니다. 인간에게 축복된 날입니다. 인간을 위한 날입니다. 때문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일곱째 날-복주시는 날의 지대를 만들어 야 합니다. 일곱째 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끊임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복주시고 거룩게 하셨습니다. 거 룩하게 하신 것은 곧 구별된 지대를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자신에게 반문해 봐야 합니다. 나의 삶에서 구별의 지대는 있 었는지 나의 삶에서 거룩의 지대는 있었는지 기도하고 하나님 과 대면하는 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하나님과 연합하는 시간, 하나님과 화해하는 시간,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덛 입는 시간은 모두 거룩의 지대요, 참된 안식의 시간입니다. 영혼의 엔 돌핀이 막 나오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지대입니다. 이런 복된 거룩의 시간은 하루 사이에도 있어야 하고, 한 주간 사이에도 있어야 합니다. 한해의 사이에도 있어야 하지요. 주님 과의 대면을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은 쉼표가 없는 사람의 삶입니다. 참으로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삶이라 할 수 없지요.
사실 참된 쉼은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쥐는 것이 아니라, 놓는 것입니다. 투쟁, 긴장, 염려, 성급함, 조급증, 과 잉책임감, 소유욕, 다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손에 무엇을 움켜 쥐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 평온, 온전함, 안식은 버리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손에 무엇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손엣 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버림은 쉼이요, 이것 이 복입니다. 여러분 여기 불영계곡 깊은 곳, 통고산 자연 휴양림에 오셨을 때, 좋-타 소리가 절로 났지요 이것이 창조입니다. 보기에 좋은 것은 좋-타입니다. 하나님이 하루 하루의 창조 끝에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전수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안식(쉼)은 그 좋-타를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을 아십니까 만들기만 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결핍하고 빈곤한 처지에 있지만 누릴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복있는 사람입니다. 왜요 누리는 만큼 자기의 것이 되니까요. 어떤 중학생이 미국에 있는 친구와 팬팔을 하는 데 자신의 집을 찍은 사진을 한장 보내 왔더랍니다. 보니까, 수영장도 있고 넓은 정원에 그림 같은 집이더랍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초라 한 판자집을 찍어 보낼 수가 없어서 경복궁 앞에 가서 바지를 걷 어 부치고 양치질을 하는 사진을 찍어서는 밑에다 "My House" 라고 써서 보냈더랍니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전부 내것일 수 있지요. 푸른 금오산 도, 굽이치는 낙동강도 그 자연을 정말 아끼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집에 살지만 금오산을 우리 정원 의 뒷배경으로 하고 낙동강을 정원의 앞 배경으로 생각하고 넉 넉하게 이용하고 살면 되지요. 자연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이니까요. 예술회관은 우리 집의 문화관 쯤으로 넉넉히 생각하 고, 시립도서관은 나의 서재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언제나 이용 할 수 있으니까요.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집의 정원은 몇 백 만평 이 되고요, 우리집의 서재는 장서가 몇 만권이나 되고요, 우리집 의 문화관은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것이 되지요. 문제는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자고 치면 전부 내것이요, 누리지 못하고 소유 하는 대만 집착하면 전하는 가져도 항상 불만족이요 결핍입니다. 누리지 못하는 것은 내것이 아닙니다. 누리는 만큼 내 것이 됩니다. 이 심오한 진리를 한 번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이면 오후에 꼭 나들이를 갑니다. 무슨 수련회 나 특별한 시간 이 필요하면, 무주 리조트든, 자연 휴양림이든 갑니다. 이것 다 우리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소유하고 있는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러나 빌려서라도 참으로 잘 누리면 누리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요, 다 우리 누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여기서 물질로 부터의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다 나의 재 산이예요. 꼭 쌓아 두지 않아도 됩니다. 뭐 든지 동원해 보세요. 선포해 보세요. 나의 것이 됩니다. 크고 거창한 것, 조건이 맞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골프는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경기 규칙이 까다롭고, 경기 진행 하는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의 조건도 까다롭 습니다. 18홀이면 축구장 90개를 만들 수 있는 면적입니다. 이 렇게 많은 조건을 갖춰서 경기를 해야 한 두 사람의 행복을 보장 해 줍니다. 그러나 진짜 삶을 누릴줄 아는 사람은 커피 한잔에 들꽂잎 하나에도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고급 양식이나 풀빵 하나나 누리는 사람에 따라 효용가치는 같거나 풀빵이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축복입니다.
마약, 마리화나로도 행복의 자극 이 적어 허덕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격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누림입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지금 조건을 최대한 동원하 세요. 최대한 누리세요. 이것이 안식이요, 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여섯째 날의 창조물을 누리세요. 여러분의 엿새 동안의 창조물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습니다. 거창할 수도 있고 하찮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여섯째 날의 창조물은 어떤 것 입니까 어떤 것이든 일곱ㅉ 날의 누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계속 창조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누림이 없 어요. 불만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안식과 쉼을 누릴 줄 아는 사람 은, 자신의 여섯째날의 창조물이 은총이요,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요, 은혜입니다. 만족입니다. 누림입니다. 닻이 없는 배를 한 반 상상해 보세요. 파도에 지치고, 에너지는 떨어지고 그래도 정착할 곳이 없어 험한 바다를 떠 돌아야 하는 배를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내릴 닻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정박할 항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한 주일에 한 번 영혼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정박을 합니다. 세파에 지친 영혼을 달래고, 수리하고 재충전하고 평화를 가득 채웁니다. 그대의 배에는 닻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대의 배는 정박을 잘 하고 있습니까 그대는 복을 잘 누리고 있습니까 그대는 거룩합 니까 '기도문' 주님, 관리하고 통제하고 일하는 것은 배웠으나 참으로 안식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여 서투르고 어색합니다. 주님, 일하며 안식하고, 안식하며 일하게 하소서. 주님 저희의 엿새 동 안의 창조물을 참으로 넉넉하게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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