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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 눈과 영의 눈 (창13:8-15)

본문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롯 이라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기근으로 인해 약속의 땅-이스라엘을 등진 채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실수와 하나님의 보호라는 극히 대조적인 경험을 한 후에, 연약한 믿음과 무너진 제단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벧엘로 돌아왔을 때 직면했던 사건들이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많은 재산, 특히 많은 가축을 모아 가나안에 귀환했던 아브라함 일가는 그의 조카 롯과 분리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롯에게는 가축이 너무 많아 서로 분리하지 않으면 가축들이 먹어야 할 목초지가 없기 떄문에 서로 분리 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종들이나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는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경쟁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상호 협조적인 관계에서 분리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조카 롯에게 사해 연변을 따라 벧엘에서 소알까지 펼쳐져 있는 광활한 땅 뿐 아니라, 요단강 양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비옥한 평지를 가르키면서,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하며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롯에게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애굽에서의 실수를 교훈삼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결심한 상태였지만 막상 가족들의 장래가 걸린 주거지와 목초지를 선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히1:7)과, 풍요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임을 확신하고(12:16,20)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 한 채 목초지 선택의 우선권을 조카 롯에게 제공함으로써 더 이상의 분쟁의 소지를 제거하였습니다. 반면에 롯은 현실과 장래의 문제에 직면하여 선뜻 자신의 욕심을 앞세운 선택을 한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긍극적인 승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모든것을 양보했던 아브라함에게 돌아 간 것을 본문 14-18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을 바라며 이웃의 번영을 기원했던 아브라함에게 장래의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만족하고 욕심을 부렸던 롯에게는 그가 본 그 이상의 것은 허락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빚어지는 궁극적인 승리의 성패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인간은 두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육신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우리는 이 두 눈을 가지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고 삽니다.
그런데 어떤 눈으로 어떻게 바라 보느냐에 따라서 성공하게도 되며 실패하게도 됩니다. 어떤 눈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를 파멸시키기도 하고 살리게도 하는것 입니다. 예화:하와는 잘못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를 타락의 길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오직 잘못 바라본 결과가 선악과를 따먹게 하였고 하나님께 반역의 죄를 범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온 인류를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중대한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롯의 바라봄 오늘 본문말씀 10절에 보면,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판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했습니다. ‘눈을 들어 요단 들판을 바라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롯은 막연히 요단 들판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롯은 자기와 자기의 가족들이 요단 들판에 들어가서 살고있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의 눈은 영의 눈이 아니라, 탐심에 어두워진 육신의 눈이었습니다. 9절의 말씀처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아브라함의 양보의 말속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와 의리도 생각치 않은 채 자기의 앞날에 유익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롯은 영의 눈은 감고 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면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기고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세속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애굽의 정신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든, 영의 눈으로 바라보든 이 바라봄은 ‘행동’이라는 결과를 창출해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롯도 역시 요단들판을 바라보면서 그곳으로 모든 가족들과 재산을 이끌고 소돔까지 이르렀다고 12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물이 넉넉한 것은 보았으나 부패와 타락과 죄악이 관영한 그곳의 환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당시, 상업과 문화의 도시였던 소돔은 목축업을 하던 롯에게는 신기하고 매우 흥미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모든 환경과 여건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결단이 서게되면 다른 것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영의 눈은 감고 육신의 눈으로 바라본 결과, 롯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19:1-9절에 보면, 소돔이 침략을 받았을 때에 그는 포로 신세가 되었고 가족과 재산을 잃게 되었으며 딸과의 불륜 관계를 맺는 등., 모든 삶의 모습들이 좌절과 실패와 환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바라본 탐심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영의 눈을 어둡게 하는 도구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히면 그것이 우리의 전 인격을 지배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결국 그 사람은 실패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화:이것은 마치 꿀벌이 꿀을 나르기가 싫어서 꿀통에 앉아 먹기만 한다면 결국 날개에 꿀이 잔뜩 묻어서 날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무엇을 생각하거나 바라볼 때 영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결국은 실패의 잔을 마시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아브라함의 바라봄 오늘 본문말씀 14절 이하에 보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하고 외롭게 서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동서남북을 바라보면서 그 땅을 소유하고 누리는 놀라운 청사진을 그리며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워질 줄 굳게 믿었습니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 바라 볼 때에는 롯이 선택했던 소돔보다도 발전하지 못하였고 땅도 비옥하지 못하였으며 돌짝밭같이 형편없는 곳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놀라운 청사진을 마음판에 그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눈이 아닌 영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고 자신감과 기쁨이 충만해 있습니다. 실패나 환란이 와도 이내 극복하며 놀라운 성취의 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매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래서 실패와 절망만이 그 결과로 기다릴 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할수있다!’, ‘하면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예화:봄은 만물이 소생하여 좋고, 여름에는 만물이 푸르고 시원하여 좋고,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가 있어 좋으며, 겨울에는 온 천지가 눈으로 덮인 설경이 아름다워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라 봄은 쌀쌀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 싫고, 가을은 쓸쓸해서 싫으며, 겨울은 추워서 싫다고 말합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무슨 일을 시키기 전에 스스로 그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요, 부정적인 사람은 무엇을 시켜도 못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선택한 길은, 당장 잘 되는것 같아 보이고 당장은 좋으나, 결국은 실패하며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은 영의 눈들이 밝히 열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루 하루의 모든 일들을 영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크게 축복해 주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예화:눅 23:39-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때 한 강도는 육신의 눈으로 바라 보았으므로 예수님의 고통 당하시는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빈정대며,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강도는 영적인 안목으로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 그 사람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당연한 댓가를 받고 있지만 이분은 이러한 형벌을 받을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분” 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주옵소서!”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인간을 구원할 메시야 인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2명의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 보았으나 그들이 바라보는 눈이 어떤 눈이었느냐에 따라 한 강도는 버림을 당하였고, 또 다른 한 강도는 구원의 은총을 얻은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화:왕하 6:8절 이하에 보면, 영의 눈으로 모든 것을 통찰하는 엘리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람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데 번번히 싸움에서 져서 왕이 그 원인을 알아보니,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람왕은 정보가 누설되는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한 신하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나라에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는 왕이 침실에서 하는 이야기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이 전략을 세우며 군대 장관들에게 지시하는 모든 이야기를 미리 알고 대비하므로 전쟁에서 번번히 지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엘리사가 어디있느냐 내가 그를 사로잡으리라!” 하고서 군대를 총 동원하여 엘리사가 있는 도단성으로 가서 그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습니다. 엘리사 한 사람을 상대로 군대를 총동원한 아람왕의 처사는 군대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겠다는 심히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침 일찍 엘리사의 사환 하나가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기겁을 하며 엘리사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이제 꼭 죽게 되었습니다. 어찌하오리까 아람군데가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는데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나이다! ” 그때 엘리사 선지자는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보다 많으니라” 하면서 기도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시여! 원컨데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할 때에 사환의 영의 눈이 떠져서 바라보니 정말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엘리사의 사환은 육신의 눈으로 바라 보았으므로 아람군대를 보고 기겁하며 두려워 떨었지만, 엘리사는 심히 담대하였습니다. 엘리사의 담력은 그의 영안으로 하나님의 군대를 보는데서 생겨났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사람은 육신의 눈과 영의눈, 두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는 결국 실패와 절망과 사망의 결과를 얻지만,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는 현재는 실패하는것 같고 안되는것 같아 보이나 마지막에는 성공과 기쁨과 영광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주여! 나의 어두운 영의 눈을 밝히 열어 주옵소서!” 라고 간구야 할 것입니다. 모쪼록 오늘 이 4부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은 나라와 민족의 문제, 가정이나 교회의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 등등. 어떠한 문제들을 만나든지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으로 바라 보실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뜻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라며,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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