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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생의 목표 (창14:1)

본문

14장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13장에 일어난 아브라함과 롯이 분리되는 사건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후에 소돔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로 세상의 대적과 어떻게 싸웠는가를 생각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해서 그 씨를 통하여 자기 구원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아브라함 가정에서 롯이 차지하고 있었던 위치로 봐서(롯은 아브라함과 동등한 족장으로서의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롯은 아브라함으로 부터 분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롯을 분리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 홀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위하여 선택한 족장이 둘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대표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자가 둘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은 롯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죄악이 관영한 도성 소돔을 선택하여 아브라함 곁을 떠나간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보다는 세상의 부와 평안함을 더 좋아한 때문이고 그 결국은 세상을 사랑한고로 소돔이 멸망할 때에 함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아내가 소돔에서 모은 소유를 뒤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의 종말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하심이 있어서 롯이 아브라함 곁을 떠나가긴 했지만 롯이 소돔을 선택한 것은 롯 자신의 결정이었고 그 책임 역시 그 자신이 져야 했습니다. 아마도 롯은 자기 삼촌을 따라다니다가는 자기 마누라도 빼앗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함께 갔던 롯은 그 애굽의 찬란한 문화와 부요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땅의 부요함에 생각이 애초부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왕에게 사라를 주었을 때 롯도 촌수로 따져서 사돈간이 되니까 바로에게서 상당한 재물을 선물로 받았을 것입니다. 롯도 분명히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신앙은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순결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아브라함과 함께 그 날을 바라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결탁한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롯은 소돔의 보호를 받고 소돔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출세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하나님을 겸해서 사랑하는 것은 성경의 표현대로 간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의 영광을 같이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의 영광은 그 본질에서 부터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록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길을 따라 고향을 떠나오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서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순종한 사람은 없고 예수님처럼 홀로 짐을 질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홀로 당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그 구원의 길은 아브라함 홀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롯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따라 그 길을 갈 수 있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롯은 아브라함이 받은 신앙의 약속을 따라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산 것이 아니라, 그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권세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의 보호를 받고 그 땅에서 많은 것을 얻음으로 그는 스스로 자기 평안을 찾으려는 신앙의 수준에서 살았습니다. 어떻든 롯이 떠난 후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그 땅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바라보게 했고 그 자손에게 그 땅을 주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 앞에 거기서 단을 쌓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생활한 모든 목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생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과 관계할 때에 누리는 생명의 관계, 그것이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관계인데 이런 관계를 가질 때에만 피조물이 참 생명의 질서 속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간에 둘이 밥먹고 산다고 부부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밥먹고 사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사는 것이고, 부부끼리 산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결합으로 사랑의 교제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부부를 특징짓는 관계입니다. “아, 저 사람들이 저렇게 사랑하는 관계를 가지고 사는구나!” 그래서 부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참생명으로 사는 것은, 그냥 숨쉬고 있으니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관계를 누리고 있으니까 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이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는 길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관계에서 자기 아내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여자답게 보일 때가 언제냐 하면 남편에게 순종할 때 입니다. 그리고 남자가 가장 남자답고, 가장 남편으로서 존경이 갈 때가 언제냐 하면 여자를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할 때 입니다. 그렇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거기에 참다운 인격의 완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관계이고 사람이 인격체로서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하에 있는 모든 보화를 다 가지고 살아도 부부끼리 신뢰하지 못하고 불안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역사하지 못하고 사망이 역사합니다. 그보다 더한 지옥이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등 돌리면 그보다 더한 남이 없어요. 둘은 생물학적으로 살고는 있지만, 함께 밥먹고 생활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인격적인 교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았다 할 것이 없고 서로에 대해서 죽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다 했을 때는 단순하게 코로 숨쉬니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함, 창세기 1장에 나오는대로 아담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상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을 순종함에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 피조물은 제 기능을 발휘하고 그렇게 피조물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그 존재가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다 했을 때는 그 죄짓는 사람이 현재 죽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치 바람난 여자가 남편을 미워하는 것처럼, 그리고 남편이 그런 아내를 미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살고 있는 그와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받아서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썩어질 우상을 섬기고 물건을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숨을 쉬지 않으니까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인격적인 교제를 이루고 있지 못하므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면 우리는 세상의 왕으로 나타날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 살면 우리는 물건의 종으로 전락합니다. 살아있다는 생물학적 가치에 있어서는 이렇게 숨쉬고 있으니까 다 같은 것 같지요. 그러나 숨쉬고 있다고 다 같은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존재가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거룩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 우상의 종으로 정욕의 종으로 그렇게 거꾸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동물의 형상을 따라, 지옥의 형상을 나타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여기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았더라 하는 것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단을 쌓은 모든 생애의 목표는 자신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런 백성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래에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의 길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집이 되는 것 즉,세상이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섬김을 받으시는 처소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목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구별되이 하나님을 섬기므로 그 땅을 성별해서 하나님께 바쳐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아브라함 때문에 그 땅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거룩한 땅으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그 숱한 역경들 속에서도 하나님 만을 바라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장래에 주님이 오셔서 땅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참다운 제물로 드림을 통해서 땅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되게 하실 것인데 아브라함은 그 때를 바라보고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고 하나님 앞에 날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땅을 거룩하게 구별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왕노릇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래에 하나님이 친히 그 장막을 사람들에게 가져오시고 사람들 안에서 친히 다스리시는 그런 나라를 이루실 그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 생의 목표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여겼고 그 전체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아브라함처럼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소나 양을 모으는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것이 롯의 생애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썩어질 양식이나 세상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살면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롯이 따라간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생물학적으로 코로 숨을 쉬고 있으니까 살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고 있는 것이 참 생명이라고 알고 그렇게 전 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하며 살면 그것은 정말로 훌륭한 인생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왕권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따라다니며 살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고 거기에는 참평화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의 평안과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생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부패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브라함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어떻게 하며 사는 것이 참생명의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순종하는 백성을 생산하시기 위하여 일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순종하면 내게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살다가는 자기 아내도 지키지 못하고 세상에서 땅 한평도 갖지 못하고 나그네로 그렇게 떠돌아 다니며 살텐데 아이고, 소돔 땅을 보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과도 같으니 거기 가서 평안하게 좀 살자!” 그래서 롯이 아브라함 곁을 떠나서 소돔으로 간 것입니다. 롯은 자기의 육체적인 안목으로 소돔을 바라보았고 그것이 좋게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세상을 살 때 예수 믿고 살면서 당하는 손해날 일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살면서 남들은 다 그럭저럭 잘 사는데 신앙 지킨다고 어려움 당하면 누가 뭐 잘 봐주겠느냐 하고 세상의 악을 부러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롯이 소돔을 바라본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평가만 기대하고 사람의 다스리는 방식으로 “내 영혼아 평안해라” 그런 식으로 살면 롯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까지 순종한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신다면 우리 생의 목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함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림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진정한 가치이고 생명입니다.
14장에 보면 롯이 들어간 소돔 땅에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시날 왕 아므라벨(이 왕은 아마도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대왕일 것이다.)과 그 동맹국인 엘람 왕 그돌라오멜, 그리고 엘라살 왕 아리옥, 고임 왕 디달은 자기들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정복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고 당시 소돔 지역도 이들에게 속국으로서 공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돔 지역의 다섯 왕들이 이들의 지배를 벗어나 더이상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하여 연합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시날 왕 아므라벨을 비롯한 네 나라의 연합군이 이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5대 4의 이 전쟁에서 소돔지역의 다섯 왕들이 대패하고 네 나라 왕들이 전쟁을 통해서 많은 포로들을 잡아 가지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소돔에 살고 있었던 롯도 자기 가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 치열한 전쟁에서 도망나온 어떤 사람이 이 급보를 아브라함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밤에 단까지 쫓아가서 기습을 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고 롯을 무사히 구출하여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두 왕이 나타났습니다.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 입니다. 이렇게 두 왕이 나타나서 소돔 왕은 소돔의 모든 재물을 아브라함더러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내용은첫째, 왜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었으며,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아브라함에게(혹은 자기 백성에게) 당신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그 시대에 소돔 땅에 일어난 전쟁은 보통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 땅에서 아무 힘도 없는 나그네로 살던 아브라함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서 애굽에 내려갔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애굽 왕 바로를 치셨고 거기서 아브라함은 많은 은금과 재물과 함께 종들도 얻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 종들이 바로 아브라함 집안을 지키는 군대였습니다.
318명의 군대는 늘 아브라함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자기 아내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보호하시기로 하시고 그에게 그 땅에서 어느정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방패로서 종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아브라함을 손대지 못하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약속의 씨를 보내시려고 준비하셨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히브리서 7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설명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이 멜기세덱이 나타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전쟁에 아브라함이 끼어들도록 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올 때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말하기를 “사람은 내게 돌리고 모든 전리품은 네가 다 가지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소돔 임금이 나로 부자되게 하는 그 말은 결단코 허락하지 않겠다” 하고서 모든 것을 다 돌려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세상과 연합해서 세상 사람으로 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복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상급이요 복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이 이방 세계에 잡혀갔을 때,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빼앗기는 것을 아브라함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전쟁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었고 쫓아가서 승리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을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이해할 때, 아브라함의 언약에 속한 모든 사람은 어느 하나라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에게 만유를 다 주셨기 때문에 만유보다 크신 분이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아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에 함께한 사람들을 한명이라도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롯의 가족들을 건져낸 것입니다. 그 때 평화의 왕,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타나서 그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고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시요 또 모든 대적을 아브라함 손에 붙였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살렘 임금이 나타낸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천지의 주재시요 모든 만왕의 왕이시라 곧 그분을 아브라함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바로 그분을 의뢰하고 그 전쟁에 담대하게 뛰어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권세로 자기 힘 때문에 땅에서 이기고 자기 힘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렘 임금의 손을 통해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손을 통해서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모든 대적을 파괴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땅에서 아브라함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대적들을 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생명을 누리며 살았고 아브라함에게 속한 조카 롯도 건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살고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권세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신 아들이 친히 만왕의 왕이 되셔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들을 이길 만한 세상의 권세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록 사망이 우리를 삼키는 것 같아도 그 사망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를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 참여했고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로도 세상의 권세있는 임금과 연합해서 그의 성으로 들어가서 그의 보호를 받고 거기서 유력한 사람으로 살지 않고 소돔 임금이 그런 것을 다 줬을 때도 그 모든 것을 거절한 것은, 시날 땅에 있었던 소돔 임금의 대적만 아브라함의 대적인 것이 아니라 소돔 왕 까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 완전히 교제가 단절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소돔 왕에 대해서도 분리됨을 표방했고 함께 친교를 나누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그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소돔 땅에서 아주 은인으로 대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돔의 모든 백성들을 다 건져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구걸하듯이 이방 땅을 떠도는 나그네로서 애굽에 내려갔다가 자기 아내를 빼앗기는 수치가 있었고 그래서 세상에서 부끄러운 존재로 살았을지 모르지만, 이 전쟁 이후로는 아브라함이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활동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다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세력에 연합하는 것도 완전히 거절하였고 홀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섬기는 한 왕을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섬겼던 진정한 왕이 누굽니까 바로 살렘 왕 멜기세덱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셨던 천지의 주재시요 만왕의 왕이셔서 모든 대적을 소멸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 전쟁을 했고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을 때에도 그가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 왕이 친히 나타나셔서 그의 교제를 아브라함에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세상의 유혹에서 쉽게 이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면서도 자기 백성이 괴로움을 당하고 빼앗기게 되었을 때 두려움 없이 쫓아가서 찾아왔습니다. 그 전쟁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대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전쟁에 참여했고 그 백성을 건져냈습니다. 그래놓고도 그는 세상의 권세와 연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세상 권세를 의뢰해서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의뢰하고 있는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찾아오셨던 그분 천지의 주재시요 모든 대적을 소멸시킨 그 분 이십니다. 그 분이 친히 그의 왕으로 그와 함께 사심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는 이 멜기세덱을 곧 그리스도와 일치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이 살렘 왕은 곧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그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더라 그의 인격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고 그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분의 손에서 아브라함이 떡과 포도주를 받았습니다. 전쟁에서 피로해서 돌아온 자기 백성을 바로 이런 것으로 먹였습니다. 친히 그분이 찾아오셔서 자기 백성의 신앙을 새롭게 해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소돔 임금이 너를 지킨 것이 아니라 나다! 네 능력으로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고 또 소돔 임금이 너를 구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지키고 인도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이 살 것임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표상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바로 그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렇게 세상의 권세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그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라! 이제 그가 친히 재림하시면 이 땅에 참다운 의가 나타날 것이고 그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은 소멸될 것이고 원수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한명도 잃지 않고 다 찾으셔서 그 땅에서 참 평화를 주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 때 참 평화가 우주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시기 전에는 우리들이 땅에서 그런 완전한 평화를 찾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땅에 이렇게 살고 있을지라도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 만왕의 왕이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있는 분으로 믿고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오신 그분의 교제안에서 살 때 우리들이 세상의 권세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그분과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그 때는 아브라함 한명을 분리시켰는데 왜 그렇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가나안 땅에 있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 한명을 분리시켰다는 말은 아브라함만 믿고 나머지는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분리시켰고 이방 백성에게는 자기 구원의 빛을 더이상 주지 아니하셨고 각기 제길로 가도록 방치하셨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계속적으로 자기 교제의 빛을 나타내셨습니다. 성경에는 한 인물을 말할 때는 항상 그가 언제 출생하였고 몇살을 살다가 아들 딸을 낳고 죽었다 하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족보가 없습니다. 도대체가 아무 근거없이 돌연히 출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또 아무 언급도 없이 사라집니다. 아브라함과 만난 이후로 멜기세덱이 출현하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히브리서에 이 멜기세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 멜기세덱을 그리스도 자신이었다고 말합니다. 멜기세덱이 시작을 말하지 않았으니 시작이 없고 죽음을 말하지 않았으니 끝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의 족보법에 따르면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신데 그분과 방불하게 시작과 끝을 말하지 않으니 바로 이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완전한 의를 이룰 때 땅에 안전한 평화가 나타날 것이고 그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에 나타나셔서 그가 얻으신 의로 그의 평화를 자기 백성에게 선물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 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제사장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지요 이처럼 우리의 능력은 곧 하나님과 교제함이요,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나서 다른 것을 의뢰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우상입니다. 우리의 힘은 누가 나를 얼마만큼 알아주는가 하는 식의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친히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버리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처럼 그에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에게 생명이 넘쳐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던 생명의 교제입니다. 이와 같은 생명의 교제가 항상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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