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 2부 (창12:1)
본문
응답받은 성도의 가는 길은 이토록 남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살다보니 남과같이 생활할 수 없는 조건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듯이 인간이 지켜야 할 울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Whwekqhaus 그 울도 깨뜨리고 도리어 모든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다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사람들에게도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우리가 볼때 분명 우리는 하나님편에서 생각해야 할일도 사람편에서 바라볼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무엇이 든지 자기 눈으로 판단 하지 말아야 될것이지만 그렇치 않은 경우가 너무도 많은것을 봅니다 마치 자기것을 제일 옳다고 판단하고 그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은일들이 우리 주위에는 허다하단 말입니다 어찌보면 필자가 이 글을 쓰는것이 내가 잘해서 이런 글을 쓰는것이라 오해될 소지도 있을지 모르지만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표제아래 써가는 이 글을 함께 지켜 보시길을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것을 믿고사는 성도가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성도가 될줄 확실히 저는 알겠습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자세와 믿음은 너무도 확연하게 차이를 느낄수 있을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그 씨앗을 땅에 뿌려서 곡식을 많이 수확할수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땅에다가 뿌리는것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아무것이나 땅에 뿌린다고 다되는것이 아닌것과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생산적인 경험과 그 역사를 아는자가 할 수 있는일들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투기꾼들이 있는데 투기라는 것은 경제적인 원리에 바탕을 두고있기에 이 투기는 바람직할수도있습니다 시장성의 경제원리를 준수하는 투기는 건전한 아니 정상적인 성장의 요소가 될것이 확실합니다 모든것이 이 원리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모든것이 아름답고 정말 인생의 삶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축복의 바탕에도 이 원리가 적용되어 엄청난 부와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더 깊이 생각하면 주위를 보건데 생산적인 노동현장에서 땀흘린 댓가보다 투기성의 자본의 흐름을 우리는 볼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시간을 들이는지 아시겠지만 이 모두가 때로는 우리와 아무상관없게 일을 진행하는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것들이 우리의 경제와 사회와 신앙을 이끌고 갈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다보니 믿음의 모양은 너무도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것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은 우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믿음도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을때도 많은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저 통념상으로 흐를때가 얼마나 많은가요 교회의 부흥역시 스스로 교회생활하고 봉사하는 99마리의 귀중성이 분명하지 말썽많은 길잃은 한마리의 댓가는 흔적을 잃고말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한마리인지 잘모르긴 하지만 가부간의 가치기준은 우리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하고있는것은 사실입니다 성공의 기준 가치의 기준, 부흥의 기준 뭐, 이따위의 소리를 하면 핑계자의 하소연 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여하튼간에 우리의 목표의식과 가치기준은 너무도 딴판을 만들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모든것 자체가 믿음의 기준이요 축복의 기준이 되고 있으니, 목회자의 가르침과 복음적인 성향도 달라지는것입니다 설교역시 축복된 설교를 많이하면 성도들의 헌금이 많고 진리의 말씀을 강론하면 졸음내지 헌금이 줄어든다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너무도 어리둥절합니다 저의 짧은 목회생활도 많은것을 경험하게 한것입니다 저는 일찍보터 부흥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제게 주신은사가 하도많아 이것을 사용하리라 하고 신학을 시작하고 보니 너무도 많은 장벽에 부딛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은사와 신학과는 너무도 많은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대조를 이루는 이 은사는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이것은 아무쓸데없는 무용지물인가 생각한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가진자가 많치만 스스로 이 은사는 반환하는것을 보았습니다 신학의 교육이 하나님의 은사를 반환하게 한것입니다 분명 그 신학은 하나님말씀과 은사에 둘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지요 그러면 신학은 어디서 왔으며 은사는 어디서 왔는가 이 말입니다 분명 내가 그당시 알기는 은사는성령님의 것임이 분명 기록되어있고 또한 그 역사를 교회로 통하여 역사하고 있으며 그 성령님의 은사가 교회를 창조하고 있는것이 분명한데 신학의 우위성과 당위성이 그 앞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당위성은 인정될수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표현해도 상관이 없을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왜 기도해야 할까요 무슨기도를 해야 할까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와같은 자는 반역자의 소생인가요 아니면 호수의 백조. 그 유명한 사람일까요 건축자가 버린돌이 교회의 머릿돌이 되었다 던데 말입니다 저는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란 주제하에 글을 쓰면서 이땅에 많은 성도중에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성도가 많을 줄 믿고 이글을 올리게 된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눈물겹고 또 힘든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많은 성도들의 연합적인 힘과 당위성 아래 맹종과 굴복의 그늘에 자기의 야욕을 언젠가 펼처보겠다는 야심찬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단 말씀입니다 좀 극단적인 판단이라면 저를 용서하시고 이해가 가신분은 위로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은 때리면 울고, 굶게하면 굶는것이고 잘못했다하면 그저 잘못한것이고 남에게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게 되는것이 아니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그져 하나님앞에 잘못을 고백하랴 사람앞에 잘못을 고백하랴 이 눈치 저눈치 다 보게 되는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많은 사람들의 안목을 볼수밖에 없는것입니다 못살면 못산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고 또 잘살면 잘산다고 또 딴소리를 하더란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많은 응답을 받고 사는 사람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고통과 서러움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함께 더욱 피부로 느낀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응답을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은글을 쓰게 된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응답을 주시는 그 만큼 또한 고난도 따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1000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아무생각없이 드린것이 아닐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들로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것입니다 저의 신앙도 일찍부터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사실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된것입니다 그토록 어려운 것인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여러분 무엇이라 알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생명이 다할때까지 하는 기도 였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세상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구한다는것 너무도 어렵고 힘드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선 하기쉬운것 부터 기도해야 할것인데 너무 멀리보고 기도하니 이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었습니다 필자의 경우도 잘못된 경제원칙을 믿음에 토대위에 두고 살뻔 한것입니다 하나님은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세워진 자들에게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어려운 일만 있는것이 아니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심에 또한 감사를 드린것입니다 찬송가에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인도 하시는 내주안에 있는 나에게 그 긍휼 어찌 의심하리라고 했으며 믿음으로 사는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찬송할수있는것입니다 아멘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찬송이 아닐런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응답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이루어 나갈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것이 기본적으로 4가지입니다.
1.아브라함은 남다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아브라함은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3.아브라함은 남다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4.아브라함은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1.아브라함은 남다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남다른 확신을 할 수 있게 하신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 할때 어떤 확신에 차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천국까지 갈 수 있게 하실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통해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되게 하신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신것입니다 길이요 진리 생명 주님만이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볼때도 그에게 확신에 차있는 모습을 볼수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확신과 함께 언제나 변치말고 함께 이길을 걸어가야 할줄 믿습니다 첫믿음을 가질때도 이 확신이 없이 주님을 믿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낙오자가 되고 말것입니다 이 확신을 붕괴시키려 마귀는 온갖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는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멘과 할렐루야, 즉 믿고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것입니다 우리가 믿지않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일것입니다 아멘과 할렐루야의 전진은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분명합니다
2.아브라함은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신앙의 좌지우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볼 수 없는것입니다 그들은 좋은날을 볼 수 없습니다 고난과 역경과 환란속에서도 묵묵히 성장할 수 있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분명한 약속인 철학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주관이 뚜렷함으로 이런자를 하나님은 사용하신줄로 압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뚜렷한 개념이 없이 믿고있는것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자신도 아니고 믿음도 아닌것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기에 여간 힘드는것이 아닌것입니다 기본적인 틀이 없는 성도와 함께하다보니 하나님께로서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은혜를 받은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그렇치 않단 말입니다 표면적인 은혜는 받은것 같지만 내적인 역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누가 기도를 더 많이 하는지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그보다 앞서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자 이제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들의 문제가 많아서 기도를 많이 하는 경우가 성립이되는데 그 많은 기도에 문제를 더욱 만들어 내고 있다는것을 여러분은 아실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를 많이하는 사람을 만나보면 원칙적인것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확신이 없는 기도를 더욱 많이 하는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역시 그들도 기도하기를 좋아했다는것입니다 길거리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은 결코 그런것과는 다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누가 일을 더 많이 하느냐의 방법입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를 공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기도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라고 하신것입니다 주님을 3년 따라다닐때도 귀신를 쪼ㅈ아내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가 오순절의 성령님으로 통해 앉은뱅이도 일으킨줄 믿습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은 이토록 확신에 차있는 모습의 신앙을 소유한 자로 그 기도의 능력과 역사가 따라올줄 믿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믿음이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땅에 있다보니 실망과 좌절뿐인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평안을 묻기가 겁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까요 우리의 믿음이 하늘을 소망하고 하나님께 두면 우리는 보다 모든것에 하늘을 소망하고 곧 확신을 얻을것입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은 하늘에 소망을 둔 믿음일 것입니다 그 믿음은 모든것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일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데 믿음의 철학이 없는자와 동행함에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곡예적인 믿음을 연출하다 땅에 떨어지고 말것입니다
3.아브라함은 남다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판단력이 없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자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자들은 헛된 은혜를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에 판단력을 흐리게 하다보니 우리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것입니다 모든것을 사람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편에서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메시야로 오셨지만 그를 아는자가 과연 몇명이나 되었던가 그를 환영한자가 얼마나 되던가요, 그의 오심을 알고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요 그의 오심에 대한 기록은 선지자로 통해서 기록했건만 우리는 소경과 같지 않았는가, 어두운 우리의 눈은 안약을 사서 바르고 너희 벌거벗은 믿음의 수치를 가리워 라고 하십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실수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바나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친 것입니다 어디 말이 되는소리입니까 이거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거 않됩니다 하실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것입니다 바람이 부는대로 물결이 흐른대로 흘러가는자들이 되고 마니 야고보 선생님은 이들을 향하여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잘못된 판단력이 우리의 귀중한 믿음을 빼앗아 가는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세상 다하는동안 그의 오판을 후회하고 있는것입니다 그의 아내의 꿈으로 통해 그의 결백을 알지 못하고 즉 하나님의 계시적인 사건을 무시한 채 오판한 그는 생애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모욕감에 살아간것입니다 우리의 성도님 우리의 잘못된 판단이 수많은 주의 종들의 길을 막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고 또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가게 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요 성도 여러분 고난중에도 주님의뜻을 이루려는 그 모든것들이 미약하나마 하나님 앞에 아름다울것 뿐입니다 그의 수고와 봉사도 그가 드리는 열정도 하나님께 드렸다면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복을 주실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이 사명 다하기에 온몸과 온 정성을 쏟고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셔야 할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의 일이 헛되게 보인다면 일평생은 그 믿음은 헛되게 되고 말것입니다 이 사명 다하기에 끝이없으리라 아멘
4.아브라함은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물의 관찰함에 그의 눈은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달려갈 푯대를 세웠습니다 그는 그것만 바라보고 쪼ㅈ아간다고 했습니다 푯대는 지도자가 가질 위상(位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적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셨는데 그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건데 가장 한국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이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자체는 세계적인데 우리가 믿고있는 방법은 후진성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우주적인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지전능 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전능하심에 우리는 살아가는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자꾸만 축소해서 그 하나님을 믿으려한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일 개인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키고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축복과 역사가 너무도 편협(偏狹)되어 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는 마치 자기들의 독선적인 하나님을 생각한 집단이 얼마나 많은지요 믿음의 스스로의 푯대도없이 그저 우왕좌왕하는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그길 예수님을 따라갑니까, 사람을 따라갑니까, 분명 우리는 예수님을 쪼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행하는것인데 우리는 왜 신앙이 흔들립니까 목자가 앞서면 양이 따라온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대로 주신것입니다 이 은혜대로 주신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다 탕진한 자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빼앗긴 성도를 의미합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신 주님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이끌것입니다 여러분 바다에 사는 큰 고기라고 하더라도 고래를 보십시오 육지에 살지않고 물에서 살수도 있는것을 우리는 앎니다 육신대로 살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그 은혜대로 살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었기에 육신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의 몸을 입은자로 성령님의 기름 부음 받은자 입니다 성령님의 사람은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볼줄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사람이 육의 사람같이 현재로는 행동한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렇치 못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판단력은 그냥 묵과하지 않고 언젠가 모든것을 하나님은 수포로 돌리고 말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시대에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판단하고 하나님의 종들의 하시는 일들을 바로 볼 수 있기를 부탁 드리는 바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목적을 알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좋아서 만나고 자기가 싫어서 헤어진다면 이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축복하신 자녀입니다 다시말씀 드리면 그의 기업을 곧 그의 유업을 이을자입니다 그렇치 않다면 애시당초에 만나지 말아야 할것이 아니더란 말입니까 내가 필요해서 예수믿고 내가 필요없으면 버리는 그런식이 아니라 냉정한 판단속에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할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허둥되고,또 물질의 풍요속에서는 감사의 조건도 많았으며 맡겨진 사명이 많아졌다가 형편이 달라질때 다르다면 그 믿음은 나중의 것을 생각지 않았다는 결론입니다 그때는 그토록 많은 은혜에 눈물을 흘리다가 감사하고 지금은 냉정히 돌아서 버린 변심한 자들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믿음도 아니요 교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가 오는곳인데 당신은 교인으로 있다면 목마름에 쉬 사라질 안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원성에 모든것을 맡기고 살아갑시다 우리의 믿음이 영원하다면 그의 믿음일것입니다 그렇치 않다면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이 아닙니다 그는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없으시다 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 약속은 영원불변할것입니다
우리의 냉철한 판단력이 우리의 모든것을 소유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가끔보면 너무 우유부단한 행동을 믿음이라 할때가 많습니다 믿음도 아닌것을 가지고 칭찬하고 떠들고 간증하고 또 높이 평가할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자기의 판단을 잃어 남의 믿음에 의존하는 우유부단한 믿음에 칭찬을 아끼지 았았던 저들의 처사에 우리들을 한번 더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그의 약속하심에 그의 사명과 함께 후회없는 하루의 삶이 우리 하나님 앞에 전체의 삶으로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믿음을 앞세워 나가지 말고 남의 판단에 자신이 흐려지지말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있는일이면 모든것을 주님께 맡기고 나가기를 원합니다 남의 믿음을 가지고 믿다 남이 넘어지면 함께 동반자살적인 믿음으로 흘러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스스로 할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괜히 믿음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닌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신의 것인양 살아가는 우리 속은 텅텅비어있는 빈강정같은 믿음의 인생, 당신들과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믿겠는가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결코 당신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면 모든것을 믿음으로 하는것 같이 보여도 자세히 그 내막을 살펴보면 진정한 믿음을 찾기가 힘든것입니다 바라건데 분명히 믿음으로 행하시오 그 믿음이 여러분에 평안과 위로와 희망을 주실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판단력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믿음조차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믿음이 경제학적인 이론의 바탕에 믿음을 두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한것입니다 그렇치 않고서야 어디 될 말입니까 그 휴지조각 들고 어디서 호소할것이요 당신의 믿음이 애초에 투기성과 결부시킨 믿음이 아니더란 말입니까 너무도 이런 믿음이 팽배해진 요즘에 함께 이길을 갔던 저들 말입니다 저들의 얄팍한 수단에 빠져 정녕 당신은 그 허구성에 놀아나고 말았다고 할수밖에 또 무슨 말로 설명 하겠습니까 이제 믿음의 근본적인 당위성을 확보하고, 차후에는 절대적으로 헛된일에 빠지지 않게 만만의 준비와 함께 잘 정리할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이 통찰력은 모든사물을 꾀뚫듯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도 잘 해결해 나가는 믿음으로 승화 될 것입니다 응답받은 기도표상의 주재아래 이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가운데 모든것이 아름답게 이루어져 나갈것을 선언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부도난 수표와 휴지조각이 된 약속어음을 손에 쥐고 정치적인 행각의 믿음의 자세를 고취(鼓吹)하고 있던 저들이 하나님의 주신 이 통찰력으로 모든사물을 꾀뚫듯이 이제 저들이 올바른 신앙의 자아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더욱 영웅적인 삶에 찬사를 보낼수 있기를 기원하며 영원무궁한 내세적인 믿음을 지향하고, 언제나 주님을 모시는 가정의 행복이 깃들기를 소원하는 간절한 마음에 이 글이 전달되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자세와 믿음은 너무도 확연하게 차이를 느낄수 있을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그 씨앗을 땅에 뿌려서 곡식을 많이 수확할수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땅에다가 뿌리는것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아무것이나 땅에 뿌린다고 다되는것이 아닌것과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생산적인 경험과 그 역사를 아는자가 할 수 있는일들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투기꾼들이 있는데 투기라는 것은 경제적인 원리에 바탕을 두고있기에 이 투기는 바람직할수도있습니다 시장성의 경제원리를 준수하는 투기는 건전한 아니 정상적인 성장의 요소가 될것이 확실합니다 모든것이 이 원리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모든것이 아름답고 정말 인생의 삶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축복의 바탕에도 이 원리가 적용되어 엄청난 부와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더 깊이 생각하면 주위를 보건데 생산적인 노동현장에서 땀흘린 댓가보다 투기성의 자본의 흐름을 우리는 볼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시간을 들이는지 아시겠지만 이 모두가 때로는 우리와 아무상관없게 일을 진행하는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것들이 우리의 경제와 사회와 신앙을 이끌고 갈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다보니 믿음의 모양은 너무도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것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은 우리,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믿음도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을때도 많은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저 통념상으로 흐를때가 얼마나 많은가요 교회의 부흥역시 스스로 교회생활하고 봉사하는 99마리의 귀중성이 분명하지 말썽많은 길잃은 한마리의 댓가는 흔적을 잃고말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한마리인지 잘모르긴 하지만 가부간의 가치기준은 우리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하고있는것은 사실입니다 성공의 기준 가치의 기준, 부흥의 기준 뭐, 이따위의 소리를 하면 핑계자의 하소연 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여하튼간에 우리의 목표의식과 가치기준은 너무도 딴판을 만들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모든것 자체가 믿음의 기준이요 축복의 기준이 되고 있으니, 목회자의 가르침과 복음적인 성향도 달라지는것입니다 설교역시 축복된 설교를 많이하면 성도들의 헌금이 많고 진리의 말씀을 강론하면 졸음내지 헌금이 줄어든다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너무도 어리둥절합니다 저의 짧은 목회생활도 많은것을 경험하게 한것입니다 저는 일찍보터 부흥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제게 주신은사가 하도많아 이것을 사용하리라 하고 신학을 시작하고 보니 너무도 많은 장벽에 부딛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은사와 신학과는 너무도 많은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대조를 이루는 이 은사는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이것은 아무쓸데없는 무용지물인가 생각한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가진자가 많치만 스스로 이 은사는 반환하는것을 보았습니다 신학의 교육이 하나님의 은사를 반환하게 한것입니다 분명 그 신학은 하나님말씀과 은사에 둘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지요 그러면 신학은 어디서 왔으며 은사는 어디서 왔는가 이 말입니다 분명 내가 그당시 알기는 은사는성령님의 것임이 분명 기록되어있고 또한 그 역사를 교회로 통하여 역사하고 있으며 그 성령님의 은사가 교회를 창조하고 있는것이 분명한데 신학의 우위성과 당위성이 그 앞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당위성은 인정될수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표현해도 상관이 없을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왜 기도해야 할까요 무슨기도를 해야 할까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와같은 자는 반역자의 소생인가요 아니면 호수의 백조. 그 유명한 사람일까요 건축자가 버린돌이 교회의 머릿돌이 되었다 던데 말입니다 저는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란 주제하에 글을 쓰면서 이땅에 많은 성도중에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성도가 많을 줄 믿고 이글을 올리게 된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눈물겹고 또 힘든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많은 성도들의 연합적인 힘과 당위성 아래 맹종과 굴복의 그늘에 자기의 야욕을 언젠가 펼처보겠다는 야심찬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단 말씀입니다 좀 극단적인 판단이라면 저를 용서하시고 이해가 가신분은 위로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은 때리면 울고, 굶게하면 굶는것이고 잘못했다하면 그저 잘못한것이고 남에게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게 되는것이 아니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그져 하나님앞에 잘못을 고백하랴 사람앞에 잘못을 고백하랴 이 눈치 저눈치 다 보게 되는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많은 사람들의 안목을 볼수밖에 없는것입니다 못살면 못산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고 또 잘살면 잘산다고 또 딴소리를 하더란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많은 응답을 받고 사는 사람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고통과 서러움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함께 더욱 피부로 느낀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응답을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은글을 쓰게 된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응답을 주시는 그 만큼 또한 고난도 따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1000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아무생각없이 드린것이 아닐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들로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것입니다 저의 신앙도 일찍부터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사실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된것입니다 그토록 어려운 것인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여러분 무엇이라 알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생명이 다할때까지 하는 기도 였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세상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구한다는것 너무도 어렵고 힘드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선 하기쉬운것 부터 기도해야 할것인데 너무 멀리보고 기도하니 이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었습니다 필자의 경우도 잘못된 경제원칙을 믿음에 토대위에 두고 살뻔 한것입니다 하나님은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세워진 자들에게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어려운 일만 있는것이 아니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심에 또한 감사를 드린것입니다 찬송가에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인도 하시는 내주안에 있는 나에게 그 긍휼 어찌 의심하리라고 했으며 믿음으로 사는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찬송할수있는것입니다 아멘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의 찬송이 아닐런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응답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이루어 나갈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것이 기본적으로 4가지입니다.
1.아브라함은 남다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아브라함은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3.아브라함은 남다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4.아브라함은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1.아브라함은 남다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남다른 확신을 할 수 있게 하신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 할때 어떤 확신에 차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천국까지 갈 수 있게 하실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통해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되게 하신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신것입니다 길이요 진리 생명 주님만이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볼때도 그에게 확신에 차있는 모습을 볼수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확신과 함께 언제나 변치말고 함께 이길을 걸어가야 할줄 믿습니다 첫믿음을 가질때도 이 확신이 없이 주님을 믿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낙오자가 되고 말것입니다 이 확신을 붕괴시키려 마귀는 온갖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는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멘과 할렐루야, 즉 믿고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것입니다 우리가 믿지않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일것입니다 아멘과 할렐루야의 전진은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이 분명합니다
2.아브라함은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신앙의 좌지우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볼 수 없는것입니다 그들은 좋은날을 볼 수 없습니다 고난과 역경과 환란속에서도 묵묵히 성장할 수 있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분명한 약속인 철학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주관이 뚜렷함으로 이런자를 하나님은 사용하신줄로 압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뚜렷한 개념이 없이 믿고있는것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자신도 아니고 믿음도 아닌것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기에 여간 힘드는것이 아닌것입니다 기본적인 틀이 없는 성도와 함께하다보니 하나님께로서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은혜를 받은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그렇치 않단 말입니다 표면적인 은혜는 받은것 같지만 내적인 역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누가 기도를 더 많이 하는지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그보다 앞서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자 이제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들의 문제가 많아서 기도를 많이 하는 경우가 성립이되는데 그 많은 기도에 문제를 더욱 만들어 내고 있다는것을 여러분은 아실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를 많이하는 사람을 만나보면 원칙적인것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확신이 없는 기도를 더욱 많이 하는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역시 그들도 기도하기를 좋아했다는것입니다 길거리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은 결코 그런것과는 다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누가 일을 더 많이 하느냐의 방법입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를 공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기도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라고 하신것입니다 주님을 3년 따라다닐때도 귀신를 쪼ㅈ아내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가 오순절의 성령님으로 통해 앉은뱅이도 일으킨줄 믿습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은 이토록 확신에 차있는 모습의 신앙을 소유한 자로 그 기도의 능력과 역사가 따라올줄 믿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믿음이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땅에 있다보니 실망과 좌절뿐인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평안을 묻기가 겁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까요 우리의 믿음이 하늘을 소망하고 하나님께 두면 우리는 보다 모든것에 하늘을 소망하고 곧 확신을 얻을것입니다 응답받은 성도의 기도표상은 하늘에 소망을 둔 믿음일 것입니다 그 믿음은 모든것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일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데 믿음의 철학이 없는자와 동행함에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곡예적인 믿음을 연출하다 땅에 떨어지고 말것입니다
3.아브라함은 남다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판단력이 없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자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자들은 헛된 은혜를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에 판단력을 흐리게 하다보니 우리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것입니다 모든것을 사람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편에서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메시야로 오셨지만 그를 아는자가 과연 몇명이나 되었던가 그를 환영한자가 얼마나 되던가요, 그의 오심을 알고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요 그의 오심에 대한 기록은 선지자로 통해서 기록했건만 우리는 소경과 같지 않았는가, 어두운 우리의 눈은 안약을 사서 바르고 너희 벌거벗은 믿음의 수치를 가리워 라고 하십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실수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바나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친 것입니다 어디 말이 되는소리입니까 이거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거 않됩니다 하실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것입니다 바람이 부는대로 물결이 흐른대로 흘러가는자들이 되고 마니 야고보 선생님은 이들을 향하여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잘못된 판단력이 우리의 귀중한 믿음을 빼앗아 가는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세상 다하는동안 그의 오판을 후회하고 있는것입니다 그의 아내의 꿈으로 통해 그의 결백을 알지 못하고 즉 하나님의 계시적인 사건을 무시한 채 오판한 그는 생애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모욕감에 살아간것입니다 우리의 성도님 우리의 잘못된 판단이 수많은 주의 종들의 길을 막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고 또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가게 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요 성도 여러분 고난중에도 주님의뜻을 이루려는 그 모든것들이 미약하나마 하나님 앞에 아름다울것 뿐입니다 그의 수고와 봉사도 그가 드리는 열정도 하나님께 드렸다면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복을 주실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이 사명 다하기에 온몸과 온 정성을 쏟고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셔야 할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의 일이 헛되게 보인다면 일평생은 그 믿음은 헛되게 되고 말것입니다 이 사명 다하기에 끝이없으리라 아멘
4.아브라함은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물의 관찰함에 그의 눈은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달려갈 푯대를 세웠습니다 그는 그것만 바라보고 쪼ㅈ아간다고 했습니다 푯대는 지도자가 가질 위상(位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적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셨는데 그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건데 가장 한국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이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 자체는 세계적인데 우리가 믿고있는 방법은 후진성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우주적인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지전능 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전능하심에 우리는 살아가는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자꾸만 축소해서 그 하나님을 믿으려한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일 개인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키고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축복과 역사가 너무도 편협(偏狹)되어 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는 마치 자기들의 독선적인 하나님을 생각한 집단이 얼마나 많은지요 믿음의 스스로의 푯대도없이 그저 우왕좌왕하는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그길 예수님을 따라갑니까, 사람을 따라갑니까, 분명 우리는 예수님을 쪼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행하는것인데 우리는 왜 신앙이 흔들립니까 목자가 앞서면 양이 따라온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대로 주신것입니다 이 은혜대로 주신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다 탕진한 자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빼앗긴 성도를 의미합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신 주님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이끌것입니다 여러분 바다에 사는 큰 고기라고 하더라도 고래를 보십시오 육지에 살지않고 물에서 살수도 있는것을 우리는 앎니다 육신대로 살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그 은혜대로 살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었기에 육신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의 몸을 입은자로 성령님의 기름 부음 받은자 입니다 성령님의 사람은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볼줄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사람이 육의 사람같이 현재로는 행동한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렇치 못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판단력은 그냥 묵과하지 않고 언젠가 모든것을 하나님은 수포로 돌리고 말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시대에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판단하고 하나님의 종들의 하시는 일들을 바로 볼 수 있기를 부탁 드리는 바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목적을 알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좋아서 만나고 자기가 싫어서 헤어진다면 이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축복하신 자녀입니다 다시말씀 드리면 그의 기업을 곧 그의 유업을 이을자입니다 그렇치 않다면 애시당초에 만나지 말아야 할것이 아니더란 말입니까 내가 필요해서 예수믿고 내가 필요없으면 버리는 그런식이 아니라 냉정한 판단속에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할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허둥되고,또 물질의 풍요속에서는 감사의 조건도 많았으며 맡겨진 사명이 많아졌다가 형편이 달라질때 다르다면 그 믿음은 나중의 것을 생각지 않았다는 결론입니다 그때는 그토록 많은 은혜에 눈물을 흘리다가 감사하고 지금은 냉정히 돌아서 버린 변심한 자들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믿음도 아니요 교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가 오는곳인데 당신은 교인으로 있다면 목마름에 쉬 사라질 안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원성에 모든것을 맡기고 살아갑시다 우리의 믿음이 영원하다면 그의 믿음일것입니다 그렇치 않다면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이 아닙니다 그는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없으시다 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 약속은 영원불변할것입니다
우리의 냉철한 판단력이 우리의 모든것을 소유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가끔보면 너무 우유부단한 행동을 믿음이라 할때가 많습니다 믿음도 아닌것을 가지고 칭찬하고 떠들고 간증하고 또 높이 평가할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자기의 판단을 잃어 남의 믿음에 의존하는 우유부단한 믿음에 칭찬을 아끼지 았았던 저들의 처사에 우리들을 한번 더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그의 약속하심에 그의 사명과 함께 후회없는 하루의 삶이 우리 하나님 앞에 전체의 삶으로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믿음을 앞세워 나가지 말고 남의 판단에 자신이 흐려지지말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있는일이면 모든것을 주님께 맡기고 나가기를 원합니다 남의 믿음을 가지고 믿다 남이 넘어지면 함께 동반자살적인 믿음으로 흘러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스스로 할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괜히 믿음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닌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신의 것인양 살아가는 우리 속은 텅텅비어있는 빈강정같은 믿음의 인생, 당신들과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믿겠는가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결코 당신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면 모든것을 믿음으로 하는것 같이 보여도 자세히 그 내막을 살펴보면 진정한 믿음을 찾기가 힘든것입니다 바라건데 분명히 믿음으로 행하시오 그 믿음이 여러분에 평안과 위로와 희망을 주실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판단력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믿음조차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믿음이 경제학적인 이론의 바탕에 믿음을 두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한것입니다 그렇치 않고서야 어디 될 말입니까 그 휴지조각 들고 어디서 호소할것이요 당신의 믿음이 애초에 투기성과 결부시킨 믿음이 아니더란 말입니까 너무도 이런 믿음이 팽배해진 요즘에 함께 이길을 갔던 저들 말입니다 저들의 얄팍한 수단에 빠져 정녕 당신은 그 허구성에 놀아나고 말았다고 할수밖에 또 무슨 말로 설명 하겠습니까 이제 믿음의 근본적인 당위성을 확보하고, 차후에는 절대적으로 헛된일에 빠지지 않게 만만의 준비와 함께 잘 정리할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이 통찰력은 모든사물을 꾀뚫듯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도 잘 해결해 나가는 믿음으로 승화 될 것입니다 응답받은 기도표상의 주재아래 이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가운데 모든것이 아름답게 이루어져 나갈것을 선언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부도난 수표와 휴지조각이 된 약속어음을 손에 쥐고 정치적인 행각의 믿음의 자세를 고취(鼓吹)하고 있던 저들이 하나님의 주신 이 통찰력으로 모든사물을 꾀뚫듯이 이제 저들이 올바른 신앙의 자아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더욱 영웅적인 삶에 찬사를 보낼수 있기를 기원하며 영원무궁한 내세적인 믿음을 지향하고, 언제나 주님을 모시는 가정의 행복이 깃들기를 소원하는 간절한 마음에 이 글이 전달되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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