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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투 (출34:14)

본문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이해가 될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질투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가운데서도 저질에 속하는 용업니다. 점수를 아무리 좋게 줄려고 해도 이 단어에는 점수를 줄 수 있는 요소가 없습니다. 보통은 도덕적으로 저질인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로 상식적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칠대죄악 중의 하나로 이 질투를 꼽습니다. 하나님이 질투라 그것도 명사로 자기 이름이 질투라는 것으로 표현하시지요. 그리고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형용사로 반복하시지요. 도무지 이해가 안가요. 왜 하나님을 왜 이렇게 까지 표현해야 하는지. 그래서 하나님을 질투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 보니까 에덴 동산의 사건이 생각이 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부각시켰는지 창세기 3장을 보면 우리가 알수 있지요. 야, 하나님이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아니야, 먹어!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지 아느냐 너 그 의중을 아니 그걸 먹고 나먼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하나님이 알거든. 그래서 질투가 나서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이지. 그걸 먹고 주는 것이 아니야 먹어라. 그래서 뱀은 하나님을 아주 고약한 질투의 존재로 부각 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거기에 도전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충분히 하나님을 이 단어에다가 놓고 보면 마귀가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 질 만큼 질투라는 단어는 좋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가운데서 가장 조화가 안되는 한 귀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성경 귀절을 읽으면서 초신자들이 당황을 합니다.그리고 가끔 질문을 해요. 이거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도무지 하나님이 어떻게 질투를 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분들은 성경을 참 많이 읽으시는 분들입니다. 적어도 건성으로 읽지는 않는 분들입니다. 주의 깊게 읽었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생각도 안하고 줄줄줄 읽어 내려 가지요. 저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따라야 된다고 늘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1서 4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볼까요. 하나님 = 사랑 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만 적용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리 인자하고 인품이 좋은 사람이라도 000는 사랑이라. 어울립니까 황대성이는 사랑이라! 그러면 웃기네. 그럴 겁니다. 안통해요 오직 하나님에게만 통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질투 라는 말을 하나님께 적용시키니까 어울리지를 않아요. 차라리 황대성이는 질투라 그러면-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받아 들일수 있습니다만.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질투라는 용어를 많이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질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그 의미가 나쁜의미의 질투가 아니라 좋은 의미의 질투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나쁜의미로 하나님을 표현할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해석에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 성령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시인이 자기 시를 쓸 때에 막 생각나는대로 쓰지를 않습니다. 단어 하나를 선정하느라고 한달 두달 몸부림을 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아름다운 글이 나오고 작가요, 시인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가르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 너무나 제한 되고 모순이 많은 용어를 전부 가져다 놓고 마치 활자를 하나하나 찾아 내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쓰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靈感인데 성령님이 이 질투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하실 때에 그 단어가 가지는 뉴앙스를 몰랐을 리가 없지요. 아무리 좋은 의미라고 할지라도 질투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좋은 이미지를 같지 못하는 단어라는 것을 성령님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미지를 손상 시킬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단어를 쓰도록 하셨을까 왜 한낱 변덕스러운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단어! 계집녀 변에 질병:화살에 맞은 상처와 같은 고통스럼움,계집녀 변에 돌석자!(嫉妬) 이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을 할 때는 그만한 위험부담을 각오하면서도 과감하게 쓰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단어가 아니면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단어를 쓰면 그 의미가 약화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본문을 볼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까지 써 가면서 설명 하시는군요. 어떤 분은 이것을 하나님의 표현의 성육신 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종이다.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卑下시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이 될수는 없지요. 그러나 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어린양이다. 예수는 어린양이 될수 없지요.
그런데도 어린양이라고 비하 시켰습니다. 나는 질투다! 할 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체면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시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일수록 우리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주여,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런 용어까지 다 동원 하셔서 말씀하시나이까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겸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진지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세가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배경을 좀 설명 드리지요. 하나님께서 질투라는 말을 쓰실 때에는 그 배경에 독특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결혼서약이 맺어진 부부관계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관곕니다. 그래서 질투라는 것이라도 부부관계에서는 선하게 받아 들이는 것이 관롑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그래서 부인이 질투한다. 그것을 성경도 죄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는 질투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너와 나의 관계는 결혼관계야.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사야서 54장5절에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또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르켜서 요한복음 4:29절에 신부를 취하는 아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가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신명기 7:7-8절 같은데 보면 '나는 너만 사랑해!' 어떻습니까 연인들끼리 속삭이는 말 같지 않아요. 또 신약에 가면 '악한 자가 너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겠다' 아예 접근하지도 못하게 하는 관심!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이야지기요. 따라서 하나님에게 있어서 질투라는 것은 결국 칼빈이 말한 것처럼. 자기 것을 지키려는 강한 의집니다. 신부된 우리를 지키려고 하는 하나님 자신의 강한 표현입니다. 사랑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강한 결의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마음 속에 잘 담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언약의 관곕니다. 그저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 오냐! 하고 받으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사랑의 관곕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둘 중의 하나가 그 사랑을 배신하든지, 그 사랑을 떠나면 질투할 수 밖에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곕니다. 이 배경을 우리가 잘 이해 하시고 이 말씀을 이해해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질투로 표현하는 부분이 세곳 나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보고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경고 할 때. 오늘 말씀도 그렇지요.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 여러곳 나옵니다. 우상숭배를 경고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다가 다른 신을 앉혀 놓고 섬기는 것이지요. 또 그렇지는 않더라도 하나님과 다른 존재를 나란히 놓고 섬기는 것이니까 호세아 10장에 말씀한 대로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우상숭뱁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굉장히 싫어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 하는 죄가 우상숭뱁니다. 두 마음을 품는 생활! 따라서 우리 신교에서는 우상의 요소가 되는 것은 일체 금지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십자가를 세워 놓는 것까지도 금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두번째로 보면 절대로 너희를 위하여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리아 상을 다 깨트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지팡이니, 이상한 막대기니다 버려야 합니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위해서 순교를 한 사람이라할지라도 그 사람의 관에다가 입을 맞출 필요가 없는 겂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존재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나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우상숭배를 안합니다. 그렇지요! 절대로 안합니다. 이제는 가서 절하라고 해도 할수가 없지요 집안에 무엇을 갖다 놓고 모시라고 해도 이제는 안되지요. 그만큼 우리는 성령님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따라 하십시요!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로새 3:5-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입니다. 돈입니까 명옙니까 하나님보다도 , 아니면 하나님과 나란히 세워 놓고 같이 마음을 주는 것이 있습니까 이것은 벌써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질투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너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리니, 하나를 중히 여기면 하나를 경히 여기고,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를 미워하고, 너희 하나님과 맘몬신(돈의 신)을 같이 놓고 섬길수 없느니라. 하나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또 들으세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과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나하고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이야깁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순수한 사랑을 요구하시는지 아십니까 외고집적인 사랑을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목숨을 다하고,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가만히 들으면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말씀이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느냐고 항의를 할수 있는 문젭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무엇이냐하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외골수로 사랑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 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은 내가 전붑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 앞에 놓고 말해 보세요. 하나님은 나 밖에 모른다. 나는 하나님에게 전부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보고 계세요. 그런면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입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분이 이 황목사를 보고 황목사님은 나 밖에 몰라. 나만 사랑해! 그런다면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그렇게 100명도 안되는 교인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완전하게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니까 안되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그런면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황목사도 하나님은 나 밖에 몰라! 권사님도 나 밖에 몰라! 나만 사랑해!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1:1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외골수로 오직 순수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그렇게 요구하십니다. 외골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질투할 때는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를 너무너무 사랑하다가 하나님이 질투하셔서 그 자녀를 빼앗아 가는 경우를 저는 몇번 보았습니다. 하나님 만을 사랑해야할 목사! 하나님 만을 사랑해야 할 성도가 자녀에 너무 빠지면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해 보세요! 마음에 있는 우상을 깨뜨리기 전에는 그 기도를 하나님이 달갑게 듣지를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시간에 우리들의 마음 속에 우상 깨뜨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을 제일 먼저 사랑하고,그 다음에 아내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됩시다. 순서를 뒤 바꾸는 사람 되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제일주의의 확고한 질서가 무너져 버리면 내 자신이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질투하실 것이요, 너의 마음부터 우선 고치고 나의 앞에 와서 예배드리라! 분명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느냐 나는 너 밖에 몰라! 너는 나의 전부야!
그러므로 나는 내 아들까지 희생시켰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야!
그런데 너의 마음은 이중으로 갈려 있구나! 너의 마음에 있는 더러운 것을 청소하라! 너는 丹 마음으로 사랑을 바치라. 그러면 나는 네 기도 들어 주마. 그럴 때에 내가 너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오늘의 크리스챤들이 마음에 우상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1계명,2계명을 마음대로 범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질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 백성이 고난이 빠져 있을 때 질투하십니다. 에스겔 39장 25절에 보면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여, 야곱을 사로잡힌 데서 돌아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땝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열심을 내겠다고 했는데 이 열심 이라는 단어가 질투라는 단어 하고 꼭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서는 열심이라고 썼는지는 모르지만,질투로 읽어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쉬지를 못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까 두 사람이 사랑해서 결혼 했어요! 한 사람이 어려움에 빠졌어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어려움에서 건지기 까지는 쉬지를 못합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지요. 내 사랑하는 자녀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습니다. 생명이 위독합니다. 그러면 그 가족들은 공부도,집도, 직장도 다 관심 밖입니다. 그 자녀가 살아 나기 까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중환자실 밖의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서 지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관계기 때문입니다. 한사람이 고난에 빠지면 다른 사람은 쉬지 못합니다. 부인이 아무 소식이 없이 안들어 온다면 남편이 가만이 있겠습니까 온 사방에 다니면서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서 찾아 내기까지는 가만히 안 있습니다. 이 것이 부부 사이의 관곈데, 이런 경우에는 하나 밖에 모르는 질투처럼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합시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에 하나님은 초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 분의 아내기 때문에, 나는 그 분의 신부기 때문에 내가 고난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허덕일 때, 주님은 절대로 쉬지 못합니다. 믿습니까 주무시지도 않고,졸지도 않고, 나를 그 고난에서 끌어 낼 때까지,건져 내실 때까지 그 분은 모든 정려과 힘을 다할 것입니다. 이것 생각하면 어려움 속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세번째는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에 대해서 질투하십니다. 에스겔서 36:5절에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인과 에돔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맹렬한 투기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의 불과 같은 무서운 진노로 자기 백성! 하나님의 신부를 괴롭히는 모든 원수에 대해서 하나님이 질투하시고, 그 질투가 진노로 바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결혼관계에서 잘 압니다. 모든 죄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있는데, 가정을 깨뜨린 대상에 대해서는 용서를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고,성경도 그것을 정당하게 봅니다.예를 들어서 자기 남편을 유혹해서 자기 가정을 파괴한 여자가 있다면 그 부인은 절대로 용서를 안할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人之常情이에요. 야곱은 첩이 셋이지요. 그 중에서도 빌하라고 하는 첩이 젊고 예뻤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는 11아들이 있었습니다. 제일 장자가 루우벤입니다. 나이가 많지요.
그런데 야곱의 첩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빌하가 루우벤에게는 서모가 되는데, 두사람이 정을 통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들은 야곱이 가타부타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부모자식 간이니까 세월이 지나면서 용서가 된 줄 알았는데,드디어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자녀를 축복하는 기회가 왔습니다. 야곱이 12아들을 불렀습니다. 창세기 49에 보면 차례로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해 줍니다. 먼저 르우벤을 축복합니다. 가만히 보세요. 네가 탁월치 못하리라.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니라.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그리고는 축복은 아무것도 안해 주고
둘째 아들로 넘어 갑니다. 두번이나 아들이 자기 침상을 더럽혔다. 자기 부부관계를 깨뜨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이지만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 잊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 침상을 더럽혔던 놈이다. 그래서 축복은 커녕,저주만 받고 장자권은 네번째 아들인 유다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해치는 대상이 바로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그 대상에 대해서는 아무도 용서하지 아니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요. 하나님 자신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는 원수가 누굽니까 하나님이 그 원수에게 진노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서 끌고 갈려고 하는 자가 누굽니까 그것이 육체의 정욕이든지,마귀든지,세상이든지 사람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대상에 대해서 진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어떤 어려움과 시험을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 무섭게 우리를 간섭하신다는 것을 잊어 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질투가 심한 남편이 있지요. 부인이 조금만 안보여도 못 견디는 남편이 있어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남자에게서 전화만 와도 야단 납니다. 집안이 뒤집어져요. 굉장하지요. 질투=사랑이라고 해석해 두지요.(조금 문제는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와같은 모순이 없어요. 우리를 무섭게 간섭합니다. 그만큼 세밀하게 간섭하셔서 악한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하게 간섭합니다.그리고 만약에 그 누가 와서 우리의 마음을 뺏앗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들려고 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질투가 그를 향해서 진노하시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대로 외롭다고 생각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철저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이런의미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일생동안 이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일생동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여러분이 잘못 오해 해 가지고,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특별한 관계를 우리가 맺고 있습니다. 결혼의 관곕니다. 이것을 깨뜨리면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어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존재를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질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에 빠져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우리를 그 고난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열심을 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는 어떤 원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원수에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순결! 열심! 진노! 이 세가지가 하나님의 소위, 질투라는 것을 나타내는 단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고 삽니다. 그 분을 잊어 버리지 맙시다. 그 분만을 사랑합시다. 그 분에게 내 자신을 전심으로 바칩시다. 그럴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맙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아니하십니다. 겉으로 하나님이 속고 계시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오직 한 사랑! 한 마음! 가지고 자기를 부르는 자, 하나님이 제일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나도 사랑하리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에게 이와같은 아름다운 축복이 남은 생애에 계속해서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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