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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6)

본문

할렐루야.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에 게 말씀을 증거해 드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이라는 그 이름 앞에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 야곱이라는 이름을 항상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스스로 조상 의 하나님이라 아브라함이라 이 이름이 꼭 이렇게 붙어 다니느 냐 아브라함의 하나님만 되시고 우리의 하나님은 되실 수 없느 냐 이삭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데 우리의 하나님은 될 수 없느 냐 야곱의 하나님은 될 수 있는데 나의 하나님은 될 수 없느냐 이런 의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를 쭉 보게되면 선진들의 역사를 보고 또한 하나님의 역사의 무한한 틀 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가히 왜 이 이름이 불려지는가를 우리 가 납득할 수 있는오늘 우리가 창세기를 배우면서 참으로 하나님 의 섭리의 무한한 틀, 그리고 하나님이 각자 사람을 어떻게 사용 하시는가, 어떠한 섭리로 이끄시는가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살펴 보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바로 내 하나님이구나, 이삭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로구나,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 오늘 발견하실 수 있을 거에요. 자 그러 면 성경의 이야기 속으로 여정을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 째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릴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누구의 하나님이라구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시냐 믿고 깨닫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믿는 자의 하나님이고 깨닫는 자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은 의지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아브 라함의 모습 속에서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깨달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갈 때도 그래요. 하나님이 '너는 본토 친적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에 이르러서 그 곳에 벧엘이라는 곳에 장막을 치고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랬어요. 그러면 그것은 교통과 동행을 얘기해주는 것이라 내가 저번에 말씀드렸어요. 그것은 또한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을 의지했다 라는 얘기입니다. 믿고 의지했다는 얘기죠. 자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습인데 갈대아 우르에서 그 가나안 땅으로 간 그 믿음의 자세 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도 믿음이 약 해질 때가 있었어요. 그도 인간인지라 잠시 위기가 닥쳐오니까 믿음을 저 버리고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여서 가나안에서 애굽으 로 갔다 그랬어요. 애굽으로 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환경 속에 서 부딛치면서 거짓말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 게 되고 정말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깨달 음을 얻게 됩니다. 내가 왜 정말 하나님의 섭리가 가나안 땅에 있는데 굳이 그 믿음을 버리고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는가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죠. 그러나 기적적으로 하나님은 사라를 그에게 돌려보내 주십니다. 바로에게 뺏긴 사라를 돌려보내 주셔요. 그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게 뭐냐 '야 하나님 이 나를 주시하고 계시는구나 나와 함께 계시구나. 내가 객지에 나와서 이렇게 있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구나. 주님 만 의지하면 나는 살겠구나'를 거기서 깨달은 거에요. 그러니까 가나안이라는 이 하나님의 섭리적 공간의 중요성을 그가 깨달았 고, 그리고 어떠한 위기속에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산다 라는 것 을 그가 깨달았어요. 그래서 애굽에서 뒤도 안돌아 보고 다시 가 나안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브 라함이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죠. 그 다음에 조카 롯과 분 가 할 때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이 태도를 보면 참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본 받을 점이 많습니다. 가나안 땅에 장막을 치고 있었을 때 땅이 그렇게 넓지 않고 물이 한정되어 있고 풀도 한정되어 있는데 가축들이 뜯을 풀이 한정되어 있는데 아브라함 의 가족이 워낙 대 가족이다 보니까 이 롯의 수하에 있는 목자들 과 아브라함의 수하에 있는 목자들과 자꾸 분쟁이 일어나요.
그 러니까 이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다가 '롯아 롯아' 하면서 불렀어 요. 불러서 하는 말이 '우리 사이에 이렇게 분쟁이 있어서 되겠 느냐 우리가 이렇게 혈육인데도 분쟁이 있어서 되겠느냐 우리 가정이 이렇게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하 신 축복의 길을 막는 거다. 그러니까 땅은 많으니까 너도 지혜롭 게 택해서 나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브라함은 그를 선한 쪽으 로 인도하기 위해서 분쟁을 선한 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런 쪽을 택한 거에요. 그러면 먼저 선택권을 준 아브라함, 참 우리 가 본 받을 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태도에서 욕심이 나타 나지 않다는 것이죠. 인간적 욕심이 없는 아브라함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먼저 롯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죠. '네가 먼저 좌 하 면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내가 좌 하니라'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욕심이 없이 하나님이 주신 섭리를 그는 이미 애굽에서 경험한 대로 깨달았기 때문에 그 곳에 그냥 롯은 소돔 땅을 택하고 아브 라함은 그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 자 이삭을 바칠 때도 그 렇습니다. 그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 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약속하신 것, '저 하늘의 별을 봐라 저 별과 같이 저 바다의 모래를 봐라 저 바다의 모래와 같 이, 네 후손을 통한 자손을 번성케 하겠다'고 말씀을 하셨지 않 습니까 그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고 있었어요. 이삭을 어떻게든 살리시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 질 것이라 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믿음을 가지고 이삭을 드릴 수가 있었 던 것이죠. 믿음의 아브라함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자 이렇듯 아브라함은 믿고 깨닫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 도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믿음을 저 버리고 애굽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말이 죠 인간에게 바라실 것이 있다면 인간에게 나올 것이 뭐가 있겠 습니까 아무 것도 없어요. 하나님 차원에서 우리를 보시면 인간 에게 나올 것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뭘 보시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진실을 보셔요. 그 진실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신 앙이 있고 정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그 안에서 정말 부딛치는 사건을 통해서 깨닫는 깨달음의 가능성을 보시면은 하나님은 인간이 부족해도 온전 한 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잡아 당겨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셔요.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믿고 깨닫는 가능성만 있으면, 온 전한 영역으로 잡아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에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가 롯에 대해서 집고 넘어 가지 않을 수 없죠. 저는 롯 얘기만 나오면 혈 압이 올라요. 아주 마음에 안들어요. 이 롯과 룻하고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입니다. 롯은 남자고 룻은 여자이지만 롯은 글자 상으로도 올라갔고 룻은 밑으로 팍 꺽어 졌어요. 이 롯이 룻 같았으면 절대 영적인 손해를 안 입어요. 이 룻이 얼마나 훌 륭한 며느리입니까. 시어머니한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가 가시는 곳 에 내가 갈 것이며 어머니 장사되는 곳에 내가 장사 될 것이다. 이런 순전한 신앙을 갖고 있어야 되는데 벌써 인간적인게 밑으로 팍 밑으로 꺽였다는 얘기죠.
그런데 요건 탁 솟아 올아 와서 요 건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요게 뭘 얘기하느냐 하면 롯의 교만을 얘기하는 것이고 롯의 욕심을 얘기하는 것이고 롯의 타락적 기질 을 얘기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분가시킬 때 '우리가 분쟁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막는 길이니까 우리 지혜롭게 하자 땅은 넓으니까 너도 네가 선택을 하면 네가 먼저 선택하면 내가 거기 에 따르겠다' 얼마나 아브라함의 지혜로운 태도입니까 롯이 만 약 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야 되느냐 하면 '삼촌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다 부족한 탓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 디 가겠습니까 지금까지 큰아버지가 저를 이끌어 주셨고 지금까 지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큰아버지 곁에 있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이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네가 먼저 택 해라' 그랬을 때 롯이 뭐라 그랬냐 하면 '잘 됐구나, 그래요.' 그러면서 갑자기 눈이 해태 눈이 되어 가지고 어디를 쳐다 봤냐 하면 요단 들을 봤다 이거에요. 딱 쳐다보더니만 저기가 내가 살 곳이구나 한거에요.
그런데 그 눈빛에 뭐가 들었냐 하면 롯의 교 만이 들어있고 욕심이 들어있고 타락적 기질이 들어 있어요. 이 롯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버려야 될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큰아 버지 그냥 여기 계십시오 이 물에서 놀아 봐야 나는 별로 얻을 게 없습니다. 나는 저기 찬란한 뭔가 할 수 있는 대로 가야겠고 그래서 소돔으로 간게 아닙니까 결국 거기 가서 영적으로 시험 은 시험대로 당하고 실족은 실족대로 당하고, 얻어터지기는 얼마 나 얻어 터졌어요. 그래서 영적인 손상을 받지않습니까 결과적 그렇게 된거에요. 폭싹 주저앉게 되는 거에요. 이 롯이 얼마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냐 하면 소돔 땅에 거할 때 그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 재산 다 뺏기고 롯 자신도 잡혀가서 죽을 뻔했는데 아 브라함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전부 그 재산을 찾아 주었어요. 그런데도 그 곳을 나오지 못해, 한 번 그렇게 디였으면 그 땅을 빨 리 나와야 되는데 그래도 거길 계속 주저앉아 있네. 언제까지, 소돔 땅이 멸망할 때까지. 그러면 롯이 거기에 있는데도 하나님 이 그 땅을 멸하시겠다 말씀하시는 것은 이 롯 자체도 의인이 아 니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롯을 불쌍히 여겨서 그 아들을 구원해 주신거에요. 이걸 알아야 돼요. 이미 거기의 죄악적 영향을 받았어요.
타락적 기질이 있는 겁니다. 아직도 세상이 좋아서 거 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는 다 타락적 기질 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지금 우리가 매스콤을 통해서 TV 방송을 통해서 얼마나 현란한 것들을 많이 봅니까 그러나 그것들이 물 론 다 나쁘지는 않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이 세상 적인 것, 하나님 앞에 덕스럽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 이끌 리고 거기에 대한 마음이 쏠려 있으면 그것도 타락적 기질이 내 안에 있는 거에요. 어느 날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까 내 얼 굴이 너무 허전해 보여 그러니까 귓구멍에 구멍을 펑 뚫어야 되 고 그 다음에 보니까 또 허전해 보이니까 콧구멍에 구멍을 뚫더 니만 그것도 안되니까 이제 고리를 연결해서 체인을 거는 겁니다. 요새 세태가 그래요. 다 그런 모습들이 좋아 보이고 거기에 마음이 쏠리고 거기에 마음이 뺏긴다는 자체가 벌써 타락적 기질 이 거기서 나타나는 것이죠. 삼손이 왜 주저앉았습니까 계속 그 타락적 기질을 벗지 못했기 때문에, 딤나 여인과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가사의 창녀와 그리고 들릴라와 그래서, 결과적으로 쫄 딱 망한 거에요. 그 멀쩡한 다윗도 궁궐을 다니다가 목욕하는 여 자를 보고 눈이 뒤집어져가지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닙니 까. 다 그렇게 흘러가요. 솔로몬도 어떻게 끝에 변하는지 아십니 까 다 그냥 여자들이 많으니까 밑에서 '자기 우리 신도 좋아 좀 섬겨봐' 그러니까 '응 그래 어디 한 번 데려와 봐라' 우상을 가 지고 와서 전부 우상 밭을 만들어 놨어요. 하나님만 섬기던 사람 이 이 타락적 기질을 잠재우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넘어지는 겁니다. 할렐루야. 요것을 꺾어야 돼요. 교만을 꺾어야 돼요. 욕심을 꺾어야 돼요. 타락적 기질을 잠 재워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것 자체가 좋아 보인다는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내가 좋게 여긴다, 그것이 우리의 타락적 기질이 아니겠어요. 하나님은 싫어하시는데 나는 그게 좋게 보인 다 이것이에요. 우리가 다 그렇거든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적 인 타격을 입는 것보다, 미리미리 깨닫는게 좋은 거에요. 롯은 첫 번째로 선택에 있어서 되질 않았고 두 번째로 소돔에 눌러 앉 은 실수가 큰 겁니다. 거기서 빨리 빠져 나왔어야 되는데 참 잘 못한 거에요. 어쨌든, 다시 아브라함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믿고 깨닫는 가능성 있으면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당 겨 주시는 하나님, 온전한 계속 당겨주시는 하나님,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 냐 순전한 자의 하나님입니다. 순전한 자의 하나님, 이삭은 순 전한 사람이에요. 제가 이삭을 실제적으로 사실적으로 표현하자 면 순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조금 덧 붙이자면 둔한 사람 입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성경을 읽어보면 그걸 우리가 너무너무 확연히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삭이 순전한 사람인 이 유는 이삭이 제물로 드려질 때 얼마나 순전한 모습을 보여 주었 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드릴 때 얼마나 순전한 모습을 보 여 주었어요. 그리고 이삭이 축복 받을 수 있는 결정적 이유는 그 하나님이 그 대 선지인 아브라함을 시험하심으로서 하나님이 대 역사의 장을 펼치신 그 확증의 장소에서 그가 제물로 올려졌 었다는 그 위대한 사건, 그 축복 때문에 이삭은 평생 동안 축복 이 끊이지 않았어요. 평생이 순탄했던 사람이에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시험하시고 그 믿음의 대 역사를 확증하는 그 제물의 이삭, 주님의 제단에 올려졌던 그 제물이기 때문에 축복을 아니 받을 수 없어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인간적으 로 순하지만 조금 둔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래요. 그러면 제가 조금 모자란다고 표현을 하는데 이 모자란다는 표현이 정신 적으로 모자란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 곱과 같은 사람에 비하면 조금 처신에 있어서 또 생활력에 있어 서 조금 빠진다는 얘기에요. 그러나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무 슨 문제이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부족해도 순전한 신앙만 가지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다 지혜로운 사람만 삽니까 똑똑한 사람만 살아요 그게 아니 잖습니까 무슨 이권이나 있으면 잽싸게 튀어 났다가 손해볼 것 같으면 잽싸게 들어가는 쥐같이 약은 사람만 사는게 아니잖습니까 쑥맥 같고 멍청해도 제단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주여' 하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사람도 복을 받는 거에요. 사랑을 받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부족해도 그건 문제 될 것 없어 요. 순전한 신앙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다 똑똑한 사람만 살고 있겠네, 절 대로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앞에 순전한 신앙을 갖고 있 냐 갖고 있지 못하느냐가 관건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삭의 모 습을 보면 참 그래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 모리아 산으로 이삭을 데리고 올라가면서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 까'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실 것이다.' 그러면서 산으로 올라가요. 얼마나 속으로 괴 롭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올라가서 단을 만들어 놓고 나무를 다 쌓아 놓고 이삭을 묶기 시작하니까 '어 이게 아닌데' 이삭이 속 으로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묶거든요, 그리고 눕혀놓더니 이제 옆에서 칼을 갈고 있어요. '어 이게 아닌데' 아무리 효도도 좋고 순종도 좋지만 자기가 살고 봐야지. 지금 예전 같지 않은 아버지 야, 정상이 아니야. 아들 놓고 옆에서 칼을 갈고 있고 나중에는 칼로 그냥 목을 따겠다고 내리 칠려고 그러는데 아무리 순전하다 고 해도 멀뚱멀뚱하게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는 그 이삭을 상상을 해보시라 이겁니다. 이게 좋은 말로 절대적인 순종을 했다 이렇 게 표현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모자라게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를 향해 칼을 갈고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도 정 상이 아니지만 멀쩡히 목 따십시오 하고 누워있는 아들도 정상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렇게 순한 아이였어요. 순둥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을 때 물론 아브라함이 아내를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사라의 장례를 했고 맡았고 그리고 그 장지를 또 아브라함이 다 구했지만 이삭이 몇 살인데 도대체 그런 면에 있어서 아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지를 않아요. 그걸 보면 하나밖 에 없는 아들이라 봤을 때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우물을 팔 때도 마찬가지에요. 이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사람 은 훌륭한 협상가요 또 전략적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난관을 헤쳐나가는데 아주 뛰어 나지만 이삭이라는 하는 사람은 당시 우 물이라는 것은 재산 목록 일호입니다. 물이 얼마나 귀한데, 우물 을 파 놓으면 우물을 계속 개척해 나가지를 않았어요.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누가 메꾸어 놓으면 그 우물을 또 파, 팠던 우물을 또 파요. 그래가지고 누가 또 메꿔 놓으면 다른 우물을 판다고 팠는데 다른 깡패 같은 사람이 와 가지고 야 이것 내거야 하면은 이삭은 그래요 하면서 다른데 가서 우물을 팝니다. 거기서 또 다 툼이 일어나면 또 다른데 가서 우물을 파요.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으면 반드시 해결책을 찾았을텐데. 생활력의 측면에서는 조금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곱에 비해서는 조금 우리가 빠진 면 을 볼 수가 있죠. 또 결혼 할 때도 그래요. 아들이 얼마나 똑똑 하지 못하면 아들을 믿을 수가 없어요. 물론 당시의 풍습이 그렇 다 할지라도 자기 늙은 엘리에셀을 불러다가 내 아들을 위해서 며느리를 구해와라. 고향 땅으로 가서. 부탁을 하지 않습니까 아들이 아무 것도 모르니까, 100세에 낳은 아이니까 얼마나 애지 중지 했겠어요. 그러니까 아무 여자나 붙잡혀서 살까봐 그랬는 지, 어쨌든 아브라함이 자기 늙은 종을 불러다가 며느리를 구하 더라 이것이죠. 그것만 봐도 이삭이라는 사람이 혼자 내놓기에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 로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하게 되는 게 야 곱과 에서의 분별 문제입니다. 이 야곱이라는 사람이 형의 장자 권을 훔치기 위해서 형 흉내를 내려고 전부 털이 시커멓게 났으 니까 털이 없는 야곱이 흉내를 내려고 염소 털을 두루고 아버지 가 좋아하시는 형이 끓여주는 양고기 국을 끓여서 텐트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장막 안에서 이삭이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누구냐, 그러니까 아버지 저 형 에서입니다 그랬어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양고기를 끓여 왔으니까 드시고 저를 축복해 주십시 오. 가까이 와라 가까이 와라 그러더니만 팔은 에서인데 어떻게 목소리는 야곱이다. 도대체 이해가 안가요.
왜냐하면 일생 동안 가축을 다루었던 사람일텐데 사람털하고 염소털하고 구별을 못한 다는게 말이 안되는 거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고 아무리 눈 이 멀고 귀가 멀어도 그렇지 자기 큰 아들하고 작은 아들도 구별 못한다는 것은 이삭이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더라구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축복을 하시는데 어떻게 축복을 하시느냐 하면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사람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환경을 주 시면은 이 만큼의 환경을 주시면 이것을 축복된 환경 속에서 자 신이 믿음과 깨달음을 통해서 전부 이것을 능히 취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삭 같은 사람은 축복의 환경을 주셔도 자기 자신이 파고들면서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면 그 런 경우는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야 할텐데 어떻게 주시느냐 하나님이 막대기를 쓰신다고 했을 때 길이보다 조금 모자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시는 길이 보다 요만큼이 필 요한데 요정도 밖에 안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느냐 붙여서 쓰십니다. 이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이삭 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너무 짧으니까 붙였어요. 어떻게 붙였느냐 위로는 훌 륭한 아버지를 붙여줬고 밑으로는 훌륭한 아들을 붙여줬어요. 에 서나 야곱 같은 아들을 붙여 줬어요. 옆으로는 누굴 붙여줬느냐 리브가 같은 훌륭한 아내를 붙여줬습니다. 그러면 이삭같이 아주 순한 사람이 그리고 가장 중요한게 종들입니다. 종도 참 잘 붙여 줬어요. 자기 주인 머리 꼭대기에 앉아 가지고 자기주인 등쳐먹는 종들만 있으면 이삭은 재산 다 날려 먹고 아무 것도 없을 거 에요. 왜 자기 자신이 그렇게 꾀가 많은 사람이 아니니까. 다스 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종도 절대 순종하는 종 을 붙여줬어요. 야곱은 얼마나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반대로 에 서는 얼마나 야성적인 사람입니까, 밖에만 돌아다니면서 사냥하 면서 그렇게 밖에서 뭘 잘 줏어 오는 사람이고 야곱은 집안 살림 잘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부족한 게 없는 거에요. 순탄하게 모든 것이 이끌어 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붙여서 인도해 주시더 라. 여러분이 부족하면 붙여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에요.
그 러면 이삭의 하나님은 뭡니까 순전한 자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짧으면 붙여서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세 번째로 야곱의 하나님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섭리 안에 있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이라고 하는 사람은 말이죠 일생동안 져 본적이 없는 사람이 에요. 태어날 때부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얼마나 태어 나는게 기가 막힌지, 이 리브가가 아이를 배었는데 안에서 막 치 고 박고난리가 났어요. 배가 보통 요동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 러니까 리브가가 내 뱃속에서 왜 그렇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 복중에 두 국민이 있구나,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겠고 작은 자는 큰 자를 다스리겠구나' 속에서 먼저 빠져 나 오려고난리가 난 거에요. 에서가 나갈려니까 절대로 그렇게 못 하지 그러면서 야곱이 뒤에서 끌어당기고 막 서로 하다보니까 결 과적으로 에서가 먼저 딱 나왔어요. 나왔는데, 절대 그렇게 못나 가지 그러면서 어딜 잡았느냐 하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어요. 그래서 쑥 빠져 나왔는데 보니까 지독하게도 그 발뒤꿈치를 잡고 서 어떻게든 먼저 나가려고 야곱이 그랬다 이것이에요. 벌써 태 어날 때부터 알아본 사람이에요. 그러더니 이 장자권에 대한 열 망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형한 테 아주 슬그머니 그것도 말로 교묘하게 사기 치고 그리고 아버 지한테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사기 쳤어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이게 뭐냐 형을 이긴 겁니다. 형의 장자권을 뺏었으니까 그리고 텐트로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사기 쳤으니, 아버지를 이겼어요. 그리고 광야로 가서 거기서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삼촌을 이겼 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얍복강 가에서 형을 만나기 전에 누구를 이겼느냐 하나님을 이겼어요. 져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형 이겼죠, 아버지 이겼죠, 삼촌 이겼죠, 하나님 이겼죠, 다 이겼어 요. 야곱이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어요. 그래서 야곱이 형을 속이고 장자 권을 뺏었고 또 아버지를 속여 장자 권을 뺏었어요. 그래가지고 광야로 나가서 보니까 참 가정적으로 파탄에 쪼개진 게 아닙니까 형이 자기를 얼마나 욕하고 화내시겠습니까 그러 니까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야. 그러니까 그냥 빈털털이로 해 가지고 거지꼴이 돼 가지고 광야에 앉았어요. 그래가지고 삼 촌 집으로 가는데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 겠다 다시 돌아 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렇게 말씀 하셨거든요. 야곱이 확실히 믿고 주인 보다 더 부자가 되어서 나 왔어요. 나와서 이제 얍복강 가에서 형을 만나야 할 입장이에요. 그러니까 가슴이 얼마나 뛰겠어요. 너무너무 괴로워요. 그리고 본인의 뒤의 일생을 바라보니까 자기가 정당한 게 하나도 없어.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고 했지만 장자의 당위성을 어느 누구 에게도 찾을 수가 없더라 이겁니다.
자기가 남은 건 없고 형한테 미움받고 삼촌한테 미움받고 전부 자기는 흔적이 그래요. 불완전 한 사람이에요. 거기서 야곱이 하나님과 최후의 대결을 벌리는데 그 대결은 야곱이 축복이 궁해서 대결을 벌인게 아닙니다. 있는 것 많은데 뭐가 더 바래가지고 양을 더 얻으려고 그러겠어요. 그 게 아니에요. 자기 뒤를 돌아보니 자기 꼴이 너무 한심해. 여러분 이 방원이 이 성계한테 그렇게 인정을 못 받아서 나중에 결국 에 아버지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러듯이 똑같은 거에요. 이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오직 장자의 당위성을 찾을 곳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아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하나님과 씨름을 벌 인거에요. 참 이게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여러분 어떠한 이름을 받느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아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 하는 역사,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보면 우리가 야곱의 씨름이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이 결코 축복이 궁해서 한 씨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왜 이스라엘이라는 나중에 나라 가 되어서 결국 나라가 생기니까 그러면 그 어디서 이어졌느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디서 시작되었느냐 야곱으로부터 시작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장자의 축복권을 놓고 이 씨름을 했다는 말이 맞는 거에요. 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확증되었기 때문에, 역으로 올라가면은 그렇게 풀린다는 거에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의 모습도 다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어요. 구원의 대 파노라마의 역사를 야곱 의 인생 속에 정리가 다 되어있는 겁니다. 여러분 야곱은 정당치 못한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가 아무리 아버지한테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속임수는 지울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가 광야에 나와서 삼촌 집에 가서 얻을 것 다 얻고 나와서 도 이 사라지지 않는 뭔가의 영적인 갈증이 있었어요. 그게 뭐 냐 장자의 당위성입니다. 그걸 놓고 한탄을 했던 거죠. 그리고 나서 자기가 형을 앞에 놓고 자기 인생 뒤를 다시 돌아보니까 내 가 지금껏 의인인 줄 알고 달려 왔는데 장자권을 하나만을 붙잡 고 내가 얻을 것 다 얻었어요. 왜냐 형도 자기가 팔아서 가진 것이고 아버지도 축복을 해줘서 축복을 받은거야. 그러나 자기 행위가 정당치 못하고 아무리 봐도 자기는 그 영적인 갈급함과 갈증이 가시지를 않아요. 얼마나 이게 괴로운 겁니까.
그러니까 마지막 하나님 앞에 때를 쓰기 시작하는 거죠. 여러분 정당치 못 한 야곱이 탄식과 회개를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받듯이 장자의 축복을 받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껏 의인인 줄 알았는데 내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내가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진정으 로 장자의 당위성을 내가 장자권의 당위성을 취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진정한 축복을 주시옵소서. 나에게 진정한 축복, 나에게 진정한 장자의 권리를 인정해 주십시오. 그래 이스라엘이 다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여러분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야곱은 갑니다. 그러나 형이 속아넘어가고 아버지가 그를 축복해 준 것 도 뭐냐 인간을 초월한 차원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의 섭리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를 불의하다 불공평하다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어요. 이건 절대적인 겁니다. 선한 역사에요. 인간은 불완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야곱에게 있으매 야곱의 길이 선 한 겁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완전할 수가 없 어요. 그렇게 따지면 인간이 쓰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그러한 불완전 속에서 야곱을 이 끌어 가시다가 탄식과 회개를 통해서 그 영적인 갈급한 위치에 하나님이 서게 만들어요. 다 주십니다. 형을 통하여 장자 권을 얻게 해주시고 아버지로 하여금 축복을 받게 해주시고 삼촌을 통 하여 거부가 되게 해 주셔요. 그러나 그의 마음이 왜 또 궁하였 느냐 야곱이 갈급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하나님은 몰아 넣으시 기 위해서 주실 것 다 주셨어요. 그러면 마지막에 가서 야곱이 뭘 했느냐 탄식을 했어요. 회개를 했습니다. 진정한 몸부림을 쳤어요. 그래서 결국 여기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장자권의 당위성을 얻게 되는 겁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구원의 역사도 불완전한 인간으로 타락으 로 말미암아 불완전으로 떨어져 버렸어요 인간이. 그렇죠. 그 때 하나님은 절망적인 인간에게 뭘 주셨느냐 율법을 주셨어요. 율 법 밑에 인간은 뭡니까 선한 하나님의 법이에요. 이 법 자체는 불완전한 법이 아닙니다. 율법 자체에서는 완전한 의를 취할 수 없어요. 죄를 알게 하는 법이에요. 판단 기준의 잣대에 지나지 않는 법입니다. 의를 완전히 바라볼 수 없었어, 성막이 가려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었던 존재였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오심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만남으로 인해서 이 불완전했던 위치에서 완전한 위치로, 여기서 뭘 얻게 됩니까 야 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같이 우리는 뭘 얻게 되 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었어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우리가 장자권을 받은 것 아닙니 까 하나님의 친자라 인정을 받은 것 아니에요. 야곱에게 이 긴 세월을 주신 이유는 마지막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야곱의 자세를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도 다 같은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메시야를 갈망케 하는 정말 인간 이 율법 밑에서 비극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 시면서 하나님이 결국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진정한 구원자가 오 셔야 됩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라는 가치가 탄생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거에요.
그러나 율법은 불완전한게 아닙니다. 그 밑에 인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완전했다 이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불완전해도 하나님의 섭리는 완전해요. 야곱을 아무리 사기친 것 이지만 뭐 그 때는 등록할 필요가 없어요. 장자권을 등록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축복해 주시면 그것으로 끝이야. 말 한마 디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비중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대 구원의 역사의 파노라마를 여 기서 볼 수가 있어요. 야곱을 하나님이 그런 처지로 몰아 넣으신 것은 마지막 하나님과 씨름에서의 자세를 만들기 위함이다. 진정 한 축복의 당위성을 그가 찾기 위해서 탄식과 회개의 몸부림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듯이 인간이 불완전해서 율법의 환경을 주셨 어요. 그 안에서 인간은 몸부림치면서 나의 죄가 뭔지 알았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요 나의 죄가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통해서 인간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요. 주 여 이래가지고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의 긍휼과 사랑 없이는 나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 때 누가 오셨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이 장자의 축복을 주셨 다 이거에요. 좀 이해가 가십니까 자 그러면 우리는 불완전해도 우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섭리가 선하면 그 길은 선한 길이에요. 야곱은 누가 뭐래도 사기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뭐래도 온전한 장자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형 이 팔아먹었다 해도 이삭의 축복을 받았다 해도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고 계시며 하나님이 그에게 장자의 축복을 그에게 주려 하시매 그 모든 길이 선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할 렐루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복음의 섭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들이에요. 이걸 잘 알아 야 돼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할 때 우리는 그 길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의 재림을 향한 가치를 위해서 예비 된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이 재림에 대한 열망과 소망 을 빼면 우리는 허전해서 살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왜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재림의 극적인 가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알맹이 쏙 빼놓으면 허전해서 살수가 없어요. 마치 야곱이 지금까지 얻은 것은 많고 지나온 길 중에 자기는 다 평탄했다 해도 얻은 것은 많다고 해도 자기 안에 꺼지지 않은 갈증이 있었죠. 그게 뭡니 까 장자의 당위성에 대한 갈증이었어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율법 아래서 꺼지지 않는 갈증이 뭐였어요 메시야에 대한 갈망 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속에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기성 모든 지금 기존의 보편성 있는 신앙 가지고 우리가 그 안에서 꺼지지 않는 갈증이 일어납니까 그 안 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가치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복음에 더한 가치를 갖게 되는 거에요. 믿으 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재림을 향해서 예비 된 사람들이다. 마치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뒤를 돌아보니 가진 것은 많지만 진정한 장자 우리도 이제 재림을 향한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갈증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갈증이 있어야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보존 되고 이어질 수가 있는 겁니다. 이 갈증이 끊이지 않아요.
여러분 안에서는. 왜 여러분은 이 세상에 소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요 알맹 이가 이것인데 요걸 빼놓고 뭘 말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시간이 있어요. 이건 뭐냐 하나님과 씨름해야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씨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거에요. 우리의 씨름은 뭐냐 여러분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 가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자면 뭐 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기는 길 입니다. 하나님 섭리를 이루는 게 바로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기는 거에요. 다른 말이 필요 없어요. 야곱이 왜 하나님한테 이길 수 있었느냐 그가 하나님에 속한 섭리를 이루었기 때문에, 믿으 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씨름이 뭐냐 우리는 어떤 씨 름을 해야 되는가 여러분 야곱이 하나님과 그 씨름에서 흘린 그 탄식의 눈물, 여러분 우리는 뭘 가지고 있습니까 죽은 나사로의 소망, 예수님의 눈물이에요. 이 가치를 우리는 표출시키지 않으 면 안돼요. 이게 뭡니까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진정으로 우리는 주님을 원합니다.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 하늘의 가치만을 원합니다. 주여 어서 오 시옵소서' 그 가운데서 그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어떠한 눈물을 흘렸느냐 나사로를 보면서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을 흘려야 돼 요. 그 눈물을 흘리게 되면 우리는 이 섭리를 이루면 예수님의 눈물의 섭리를 이루면 하나님과 씨름에서 이기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야 정말 너는 이 마지막 때 너희를 위해서 예비 된 새 예루살렘의 백성임이 분명하구나 네가 바로 이스라엘이구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겠느냐 이거에요. 새 예루살렘의 백성들, 하나님의 아들들, 말씀하시지 않겠느냐 이거 에요. 그러면 우리가 야곱의 섭리 가운데 볼 때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되는 사람들인데 우리도, 이 마지막 때, 왜 지금 우리는 평 안하다 안전하다 많은 사람들이 종말론을 외면하는 이 시대에 왜 우리가 극단적인 종말론은 아니지만 우리가 정말 그날이 언제인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 고 있느냐, 그 이유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떨어뜨리 기 위해서 그래요. 여러분 우리는 하늘을 보고 눈물을 흘려야 되 고 땅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 눈물이 흘려져야 되기 때문에 이 눈물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눈물의 가치를 표출시키기 위해서 야곱과 같이 전부 몰아 넣 으신 거에요. 그러나 우리가 뒤를 돌아보니 이건 이 세상 사람들 이 일반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그러나 야곱과 같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위에 하나님이 우리 섭리를 가지고 계셔요.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약속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인간적으로는 비록 부족해, 아무리 봐도 인정해 줄 사람 아무도 없어.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뭘 찾느냐 물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난 그 하나님, 광야에서 만난 그 하나님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은 그런 사람 이에요. 여러분 인간적으로 부족합니다. 일반 사람은 이해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에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깨달 아야 됩니다. 더 눈물을 흘려라. 더 값진 눈물을 흘려라 라는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시간에 와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 정말 나의 위치가 예수님의 눈물을 흘려야하는 위 치라면 내가 진정으로 이 땅의 가치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가치를 바라보면서 정말 이 땅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되겠구 나.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필요성을 탄생시키는 눈물 을 흘려야 되겠구나.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할렐루 야. 여러분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완전해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야곱의 하나님은 뭐냐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 해서 뭘 하나님 앞에 얻어 맞냐 환도 뼈를 얻어맞습니다.
여기를 맞는 이것의 의미적인 것이 뭐냐 아까 이삭 같은 경우는 짧 으니까 하나님이 이어서 쓰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야곱 같은 사람은 생활력이 보통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꾀가 너 무 많아요. 꾀도 많고 생활력이 보통 독한 사람이 아닙니다. 삼 촌 집에 가서도 거부가 되어서 나오고 혼자 그렇게 물론 어머니 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 장자권을 취하기 위 해서 자기를 얻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죠. 그러면 하나님 보 시기에 이건 너무 긴 막대기이네, 막대기가 너무 길어요. 이런 경우는 좀 곤란해, 하나님이 축복의 환경을 주시는데 이건 그것 필요 이상으로 너무 길어.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하시느냐, 하나님 이 툭 꺾어서 잘라서 쓰시는 역사가 일어나요. 그러니까 너무 똑똑하고 너무 인간의 수단에서 빠릇빠릇 하는 사람 하나님한테 한번 얻어터지는 역사가 일어나요. 하나님이 적당히 꺾어서 쓰신 다 이거에요. 짧으면 하나님이 붙여서 쓰시지만 너무 길면 하나님 앞에 얻어맞아요.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좋아요. 적당히 해 서 믿고 깨닫는 사람이 좋은 거죠.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갖가지 모양으로 쓰신다 이 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깨닫는 신앙을 보여줘야 되고 이삭과 같이 우리는 순전한 모습을 보여 줘야 돼요. 이 세상에서 약았다는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순전한 모습, 그리고 야 곱과 같이 섭리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이게 중요합니다. 섭리 안에서 벗어나면 아무 소용없어요. 아무리 혼자 날고 기어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없으면 안돼. 사기를 치고 야곱 과 같이 불완전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 에게 계셨고 그가 떠날 때부터 내가 너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만 받으면 되는 거에요. 우리는 이 세상 바라볼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주위에 시각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우리 과거를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주 안에서 죽어지면 되는 것이고 여러분에게 속한 섭리의 깊이를 깨달아야 돼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야 돼요. 인간은 불완전해 도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가 뭡니까 메시야를 갈망하게 하는 하나님이 위치를 만들기 위해서, 그 갈 급한 위치를 만들기 위해서 한거에요. 율법사들을 그것을 깨닫기 못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못한 것이고 세례 요한 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왠 천국이냐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을 것이에요. 이제야 말로 메시야가 돌아옴으로 진정한 천 국이 온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례 요한의 그 음성, 지금 이 시대에 왜 평안하다 안전하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배부르다고 살고 있을 때 이 세상에 소망이 없고 오직 하 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자 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섭리로 몰아 넣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안 하시면 우리 안에 이런 가치가 탄생될 수 없어요. 장자 권을 빼놓으면 야 곱은 허전해서 살수가 없는 사람이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빠뜨리면 정말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내 자신에 속한 섭리가 무엇인지 여러분이 직감을 할 수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지금껏 나를 이끌어 오신 길이구나. 우리가 야곱과 같은 이스라엘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껏 이렇게 이끌어 오셨구나.
여러분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지금껏 이렇게 이끌어 오신 거에요. 새 예루살렘에 입주시키기 위해서, 장자의 축복,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들으신 말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믿고 깨닫는 가능성이 있으면 끝까지 잡아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이삭의 하나님은 순전한 자의 하나님이다. 부족하면 하나님이 붙여서라도 쓰신다. 세 번째로 야곱은 섭리 안에 있는 자의 하나님이다. 야곱은 불완전해도 그러나 야곱은 마지막 인간나의 죽음에 대한 표시로 하나님이 환도 뼈를 치시는 역사가 일어나요.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여러분 우리는 진실의 절대구도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축복을 받는 이 진실의 절대구도의 장에서 우리는 인간나가 죽어지지 않으면 안돼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금 환도 뼈를 치시는 과정에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마치 환도 뼈를 쳐서 불완전해서 절뚝절뚝거리는 야곱의 모습처럼 여러분은 지금 절뚝절뚝거리는 모습이에요. 그 모습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모습이란 걸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으십시오. 바로 야곱의 인생 속에 우리의 인생이 담겨져 있고, 바로 이 선진들의 모습 속에 우리는 부족해도 쓰신다는 약속의 하나님, 끝까지 의지하고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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