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이냐? 구원신학이냐? (출3:1-8)
본문
앤드류 커크(J Andrew kirk)는 말허기를 '오늘날 신화과 혁명간의 관계가, 현대 기독교 사상 계에 크게 고조되어 가고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1970년대에 소위 혁명적 신학 사상이 제3세계의 교회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상황을 두고 한 말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저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하고 일어난 소위 해방신학은 그 증에 빼놓을 수 없는 신학적 혁명 사상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것이 이른바 혁명적 해방 운동의 신학입니다. I. 해방신학인가 해방신학은 저 남미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안의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해방 신학은 남미 지역의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빈곤을 제거하고,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의 복지를 도모하는 것 을 과제로 하여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러므로 해방 신학은 남미의 어려운 현실 상황에서 출발하는 상황 신학이었습니다 해방신학의 역사는
1바티칸 제 2공회(1962. 1965) 에서 만들어진 기쁨과 회망이라고 하는 문서 가 남미 카톨릭 신부들을 열광케 한데서 시작되었고
2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델린(Medellin)에서 열린 로마 카톨릭 주교단 제 2차 총회(CELAM)에서 억눌린 자들이 그들의 인간적인 발전을 저해 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 주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해방이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3 1922년 4월, 칠레의 산디아고에서 모인 제1차 남미 기독교인 사회주의 대회에서 부자들의 착취 행위에서 투쟁하므로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투쟁은사회주의적 입장에서 해방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 1972년 12월 29일-197S년 1월 12일에 모인 세계 기독교 협의회 방콕대회(W. C. C.)에서 해 방신학을 정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방콕대회에서 결의 된 해방신학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첫째 구원은 사람이 사랑을 착취하는 것을 반대하여 경제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데서 가능케 된다
둘째, 구원은 사람이 사람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것에 반대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는 데서 가능케 된다
셋째, 구원은 사람으로 부터 사람을 소외 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일체감을 위해 투쟁하는데서 가능케 된다
넷째. 구원은 개인의 생활에서 절망에 반대하여 회망을 위해 투쟁하는 데서 가능케 된다 (Bangkok Assembly 1973)라고 하였습니다. 방콕대회를 요약하면 경제적 정의. 정치적 자유,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요. 이것만이 세상을 해방시키는 요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방콕 대회를 계기로 하여 남미의 해방신학 이 세계적으로, 특히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제3세계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 소위 민증신학을 움트게 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해방신학의 성경적 주세가 바로 출애굽기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되었던 애굽에서의 해방운동은 바로 해방신학의 성경적 배경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되었넌 애굽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방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저들은 정치적으로 가난했고,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세 종교의 참 뜻도 아니고. 창세기의 축복 명령에 위배되는 일이고(창l .28).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의 인간상에 반대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이 죄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퇴치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세는 이스라엘의 해방전사로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해방 운동의 방법은 오직 투쟁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하므로 공산주의 혁명 철학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방신학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세계 교회 협의회(w. C.C) 등이 주체가 되어 남미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 상황에서 출발하며 맑스주의의 눈으로 성경 용어들을 빌려 신학 아닌 신학 차원으로 성화를 시킨 것입니다 그렇디면 소위 해방신학은 신학이 아니라 사회 복지 운동의 한 모습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것은 인본주의 운동입니다.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진행하다가 사람에게서 끝나버리는 인본주의 사회 운동입니다 그것은 신학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인도주의적 윤리 운동입니다.
Ⅱ. 구원신학인가! 영감의 기록인 출애굽기의 성경은 소위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는 해방 신학의 출처는 아닙니다 애굽에서의 해방은 이스라엘을 죄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의 구원 운동입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구월신학이란 어떤 것인가
1. 죄악의 애굽은 선민 양육의 무대였습니다. 일찍이 저들의 조상 요셉을 하나님이 애굽으로 미리 보냈습니다. 그리고 거기 애굽에서 총리대신 이 되게 하였습니다. 나증에 요셉은 자기가 왜 애굽으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는 가를 그의 형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9절 증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나타낸 말은 실로 구속사적이었습니다.
1하나님이 나를 애굽으로 보낸자라고 하였습니다.
2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애굽으로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3이것은 하나님의 큰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4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후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창성하고 번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은 선민 양육의 잠정적인 무대였습니다. 존재하는 오늘의 이 세상 무대는 택자 구월을 위한 잠정적인 선교 무대입니다
2. 애굽에서의 구원은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3장 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3장 7-8절에 [내가.보고,.내가 듣고.내가 알닌.네가 내려와서.건져내고.그들을 그 땅에 서 인도하여. 이르려 하노라]고 하습니다 3장 10절에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장 12절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3장14절에 .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회에게 보내셨다하라]고 하였 습니다 , 3장17절에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회를 애굽의 고난 증에서 인도하억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 .올라가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장18절에 . .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임했다]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3장19절에 [내가 아노니. 3장20절에 [내가 내 손으로 들어] 애굽에 재앙을 내린 것이라 3장 21절에 [내가 애굽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구원은 하나님 자신이 구원의 주체입니다. 결코 모세가 아니고. 가난자의 해방이 주체가 아닙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앙은 것입니다(요나 2:9). 진정한 인간 해방 운동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3. 애굽에서의 구원은 언약적 구원입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25절에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 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녕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3장 15절에도 [조상의 하나넘 여호와]로 나타났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구월은 갑작스럽게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계획에 따라 인간 세계에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 해방 운동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계획을 따라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언약적 운동입니다.
4. 애굽에서의 구원은 할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임한 구원입니다. 저들은 애굽에서 고역과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출2:24, 3:7). 저들의 아들들은 죽임이 되고. 멸종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물질적 가난 정도의 고통이 아닙니다. 생사를 가름하는 사망의 고통에 이른 지경이 었습니다. 결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해방이 혁명이 나, 투쟁으로 성사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말하자면 할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임한 초자연적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해방신학은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그것을 이웃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가나 정도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죄와 죄의 결과인 영월한 사망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5. 애굽에서의 구원은 선택적 구원이었슴니다. 3장 10절에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언약의 후손들에게 임한 구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중요 한 구원의 진리 중에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회 죄에서 구월하시는 자라고 가르킵니다(마1:21. 요13:1. 요17:)
6. 애굽에서의 구원은 목적적 구원이었습니다. 그 목적 중에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온 천하에 알게 함에 있었습니다(출14:4. 신 4:35) 상천하지에 하나님만이 구원의 신이심을 알리기 위함이 그 목적 중에 또 하나는 하나님만을 섬기려 함에 있었습니다(출3.12)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자기 백성들의 해방을 요청한 이유는 꼭 한 가지를 계속해서 반복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러 간다는 것입니다. 결코 가난에서의 해방을 주장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경제적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정치적 이유는 말한 곳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왕 앞에 제의한 출애굽의 목적은 철두철미하게 영적이요, 신앙적이요, 종교적인 이유 였습니다. 정치라든가, 경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성취의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해방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리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이 사랑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신8;3) 해방 신학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으로서의 해방의 참뜻을 떠났습니나 해방신학은 타율주의적 구원관이 아니라. 자율주의적 구원관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난에서의 투쟁적 해방을 추구 하고 있습니다. 그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해방운동입니다.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의 문화 속에 들어 갈 때 마다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100년전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백성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땅에 사람들은 여러가지 미신과 무지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유를 맛보게 되었고, 온갖 불안의 사슬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 초기 선교사들은 대중과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놓에게 진정한 생명의 해방을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49년전, 8월 15일에 36년 간의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을 받은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억압에서의 해방이었습니나. 그래서 자유를 누리는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블행스럽게도 북한의 동포들은 맑스와 레닌주의의 공산치하에서 아직까지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해방 49년 동안에 남한은 온갖 고통 속에서도 이제는 엄청난 부를 누리는 선진국의 대열에까지 왔습니다. 이떤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요람에서 오늘 교회가 진정한 해방의 은총을 기억하고 있는가 죄에서의 해방,사망에서의 해방,영원한 사망과 진노에서의 해방을 간직하고 있는가 8.15 해방 49주년을 맞으면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해방신학 따위의 수준에서 놀아나고 있어야 하겠는가 인간 윤리 혁신의 은총이 결코 구원신학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방 종교에서도 널리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교회가 누리는 해방의 감격은 구속적 차원의 감격이어야 할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의 해방 구원 신학의 차원에서의 해방 영원한 생명의 해방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가난한 자들에게, 진정한 해방의 복음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찌 할 수 없는 절망의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해방, 곧 구원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눅4:16-18)
그러므로 해방 신학은 남미의 어려운 현실 상황에서 출발하는 상황 신학이었습니다 해방신학의 역사는
1바티칸 제 2공회(1962. 1965) 에서 만들어진 기쁨과 회망이라고 하는 문서 가 남미 카톨릭 신부들을 열광케 한데서 시작되었고
2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델린(Medellin)에서 열린 로마 카톨릭 주교단 제 2차 총회(CELAM)에서 억눌린 자들이 그들의 인간적인 발전을 저해 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 주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해방이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3 1922년 4월, 칠레의 산디아고에서 모인 제1차 남미 기독교인 사회주의 대회에서 부자들의 착취 행위에서 투쟁하므로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투쟁은사회주의적 입장에서 해방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 1972년 12월 29일-197S년 1월 12일에 모인 세계 기독교 협의회 방콕대회(W. C. C.)에서 해 방신학을 정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방콕대회에서 결의 된 해방신학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첫째 구원은 사람이 사랑을 착취하는 것을 반대하여 경제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데서 가능케 된다
둘째, 구원은 사람이 사람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것에 반대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는 데서 가능케 된다
셋째, 구원은 사람으로 부터 사람을 소외 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일체감을 위해 투쟁하는데서 가능케 된다
넷째. 구원은 개인의 생활에서 절망에 반대하여 회망을 위해 투쟁하는 데서 가능케 된다 (Bangkok Assembly 1973)라고 하였습니다. 방콕대회를 요약하면 경제적 정의. 정치적 자유,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요. 이것만이 세상을 해방시키는 요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방콕 대회를 계기로 하여 남미의 해방신학 이 세계적으로, 특히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제3세계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 소위 민증신학을 움트게 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해방신학의 성경적 주세가 바로 출애굽기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되었던 애굽에서의 해방운동은 바로 해방신학의 성경적 배경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되었넌 애굽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방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저들은 정치적으로 가난했고,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세 종교의 참 뜻도 아니고. 창세기의 축복 명령에 위배되는 일이고(창l .28).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의 인간상에 반대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이 죄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퇴치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세는 이스라엘의 해방전사로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해방 운동의 방법은 오직 투쟁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하므로 공산주의 혁명 철학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방신학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세계 교회 협의회(w. C.C) 등이 주체가 되어 남미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 상황에서 출발하며 맑스주의의 눈으로 성경 용어들을 빌려 신학 아닌 신학 차원으로 성화를 시킨 것입니다 그렇디면 소위 해방신학은 신학이 아니라 사회 복지 운동의 한 모습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것은 인본주의 운동입니다.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진행하다가 사람에게서 끝나버리는 인본주의 사회 운동입니다 그것은 신학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인도주의적 윤리 운동입니다.
Ⅱ. 구원신학인가! 영감의 기록인 출애굽기의 성경은 소위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는 해방 신학의 출처는 아닙니다 애굽에서의 해방은 이스라엘을 죄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의 구원 운동입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구월신학이란 어떤 것인가
1. 죄악의 애굽은 선민 양육의 무대였습니다. 일찍이 저들의 조상 요셉을 하나님이 애굽으로 미리 보냈습니다. 그리고 거기 애굽에서 총리대신 이 되게 하였습니다. 나증에 요셉은 자기가 왜 애굽으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는 가를 그의 형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9절 증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나타낸 말은 실로 구속사적이었습니다.
1하나님이 나를 애굽으로 보낸자라고 하였습니다.
2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애굽으로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3이것은 하나님의 큰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4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후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창성하고 번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은 선민 양육의 잠정적인 무대였습니다. 존재하는 오늘의 이 세상 무대는 택자 구월을 위한 잠정적인 선교 무대입니다
2. 애굽에서의 구원은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3장 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3장 7-8절에 [내가.보고,.내가 듣고.내가 알닌.네가 내려와서.건져내고.그들을 그 땅에 서 인도하여. 이르려 하노라]고 하습니다 3장 10절에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장 12절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3장14절에 .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회에게 보내셨다하라]고 하였 습니다 , 3장17절에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회를 애굽의 고난 증에서 인도하억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 .올라가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장18절에 . .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임했다]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3장19절에 [내가 아노니. 3장20절에 [내가 내 손으로 들어] 애굽에 재앙을 내린 것이라 3장 21절에 [내가 애굽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구원은 하나님 자신이 구원의 주체입니다. 결코 모세가 아니고. 가난자의 해방이 주체가 아닙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앙은 것입니다(요나 2:9). 진정한 인간 해방 운동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3. 애굽에서의 구원은 언약적 구원입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25절에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 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녕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3장 15절에도 [조상의 하나넘 여호와]로 나타났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구월은 갑작스럽게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계획에 따라 인간 세계에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 해방 운동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계획을 따라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언약적 운동입니다.
4. 애굽에서의 구원은 할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임한 구원입니다. 저들은 애굽에서 고역과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출2:24, 3:7). 저들의 아들들은 죽임이 되고. 멸종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물질적 가난 정도의 고통이 아닙니다. 생사를 가름하는 사망의 고통에 이른 지경이 었습니다. 결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해방이 혁명이 나, 투쟁으로 성사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말하자면 할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임한 초자연적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해방신학은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그것을 이웃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가나 정도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죄와 죄의 결과인 영월한 사망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5. 애굽에서의 구원은 선택적 구원이었슴니다. 3장 10절에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언약의 후손들에게 임한 구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중요 한 구원의 진리 중에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회 죄에서 구월하시는 자라고 가르킵니다(마1:21. 요13:1. 요17:)
6. 애굽에서의 구원은 목적적 구원이었습니다. 그 목적 중에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온 천하에 알게 함에 있었습니다(출14:4. 신 4:35) 상천하지에 하나님만이 구원의 신이심을 알리기 위함이 그 목적 중에 또 하나는 하나님만을 섬기려 함에 있었습니다(출3.12)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자기 백성들의 해방을 요청한 이유는 꼭 한 가지를 계속해서 반복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러 간다는 것입니다. 결코 가난에서의 해방을 주장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경제적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정치적 이유는 말한 곳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왕 앞에 제의한 출애굽의 목적은 철두철미하게 영적이요, 신앙적이요, 종교적인 이유 였습니다. 정치라든가, 경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성취의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해방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리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이 사랑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신8;3) 해방 신학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으로서의 해방의 참뜻을 떠났습니나 해방신학은 타율주의적 구원관이 아니라. 자율주의적 구원관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난에서의 투쟁적 해방을 추구 하고 있습니다. 그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해방운동입니다.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의 문화 속에 들어 갈 때 마다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100년전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백성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땅에 사람들은 여러가지 미신과 무지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유를 맛보게 되었고, 온갖 불안의 사슬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 초기 선교사들은 대중과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놓에게 진정한 생명의 해방을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49년전, 8월 15일에 36년 간의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을 받은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억압에서의 해방이었습니나. 그래서 자유를 누리는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블행스럽게도 북한의 동포들은 맑스와 레닌주의의 공산치하에서 아직까지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해방 49년 동안에 남한은 온갖 고통 속에서도 이제는 엄청난 부를 누리는 선진국의 대열에까지 왔습니다. 이떤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요람에서 오늘 교회가 진정한 해방의 은총을 기억하고 있는가 죄에서의 해방,사망에서의 해방,영원한 사망과 진노에서의 해방을 간직하고 있는가 8.15 해방 49주년을 맞으면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해방신학 따위의 수준에서 놀아나고 있어야 하겠는가 인간 윤리 혁신의 은총이 결코 구원신학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방 종교에서도 널리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교회가 누리는 해방의 감격은 구속적 차원의 감격이어야 할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의 해방 구원 신학의 차원에서의 해방 영원한 생명의 해방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가난한 자들에게, 진정한 해방의 복음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찌 할 수 없는 절망의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해방, 곧 구원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눅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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