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사건 그 첫 번째 (출3:2-8)
본문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아니면 죄인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의인이라고 해도 맞고 죄인이라고 해도 맞는다. 여호와 하나님 시각에서 보면 의인이고, 현 주소를 보면 아직도 죄인이다. 의인으로 부름받은 죄인이다. 그래서 이것을 시제로 따질 때 세 가지를 말한다. “나는 구원 얻었다. 구원 얻고 있다. 그리고 구원 얻을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고 모세를 부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출애굽 사건은 모세를 통한 사건이기는 했으나 모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은 아니다. 성경에는 어떤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비로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꼭 인물을 들어 쓰신다. 한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 사건 전체를 가장 잘 상징화하는 인물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모세가 대표자로 인도함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모세라는 인물 자신이 출애굽 사건을 집약해서 산징화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자체가 메세지이다. 출애굽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세를 이해하여야 한다. 모세의 일생은 크게 셋으로 구분해서 나타난다. 40년 동안 바로궁에서의 생활, 40년의 광야생활,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40년이다. 80의 나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시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모세에게 가장 큰 상징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 내었기에 주어진 이름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원래대로였다면 ‘물에서 건져냄을 받았다.’라는 뜻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건져낼 자’라는 이름을 갖는다. 출애굽기
3,4장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얼마나 많은 변명들을 늘어 놓는지 모른다. 모세는 하나님께 항복할 수 없는 응어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권세와 영화를 다 버리고 하나님 편에 섰던 40년 전에는 가만 계시다가 80노인이 된 지금 왜 나타나셨습니까’하는 것이다. 모세의 항변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 서 계신다.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았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이것이다. “모세야, 네가 스스로를 태워서 일으킬 수 있는 불꽃이란 하루 밖에 지탱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너를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태우리라” 하나님의 불이 아닌 자기를 재료로, 자기가 근거로 되어서 하는 신앙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재고가 바닥이 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밖에 땔감이 없다. 이 문제가 출애굽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성경은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에서 이미 완벽하게 상징화시켜 놓고 출발한다.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애굽에서 꺼내는 것은 가나안 땅에 보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계획을 갖고 계시는 분이고, 그 계획을 이루어 내시고야마는 고집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들어가야 할 것과 들어가기 위해서 출발해야 될 것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가나안 입국의 경험을 가질 수도 있고 못 가질 수도 있는데, 출애굽의 경험은 누구나 가진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사람 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가 출애굽 사건을 들어가면서 확인할 것은 모든 출애굽 사건은 ‘출애굽=가나안입국’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출애굽-광야-가나안’으로 되어 있지 않다. 가나안은 천국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 우리가 들어가야 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생활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사탄의 권세 아래서 놓여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출애굽=가나안이라는 상징을 하나 보여준다. 가나안은 우리가 ‘들어가 있는 곳’이며 동시에 ‘들어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의인’이라고 떳떳하게 고함지르고 늘 ‘죄인’이라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매어달릴 수 밖에 없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십자가만큼 무서운 자리는 없다. 거기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서 인간의 죄를대속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불신자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그대로 드러낸 장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죄를 절대 그냥 용서하시지 않는다. 죄가 무엇인지를 십자가만큼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메세지도 없다. 예수님이 올라 갔어도 예외가 없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셨던 말씀이 불신자들이 하게 될 말이다. 출애굽 때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양을 잡아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우습게 여기며 설마 했던 애굽인들의 장자는 다 죽었다. 사람 수마다 하나씩이면 유월절 기간에 그곳은 피비린내로 진동했을 것이다. 11절을 보면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원래 식사를 비스듬히 누워서 취침 스타일로 한다.
그런데 지금은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들고 서서 먹으라 하신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유월절은 ‘고울 인(결승점)’이 아니라 ‘스타트(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시작이다. 성경에는 전도하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만큼 “네가 처음에 가졌던 복음을 놓치지 말아라, 인내하라, 주님이 곧 오신다.”등의 말씀이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면 시작해서 와성에 있지 않고 와성의 길을 향하여 지금 닦여가고 있는 과정을 사는 것이 신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고의 사명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내가 얼마나 닦여졌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헌금과 기도와 성경공부와 전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자의 바른 신앙은 내가 부대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이것을 인정받지 못하면 교회와 그리스도가 욕을 먹는다. 유월절 사건이 출발로서 상징되어졌다면 그 다음에 구원에 관한 또 하나의 사건은 홍해이다. 홍해를 건넌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기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서 시나이 반도를 건너서 시내산에 내려 왔다가 가나안 정탐꾼 열두명을 보낼 때 가데스바네아에서 보낸다. 가데스바네아가 있고 사해와 갈릴리 바다가 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 사이에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바네아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가데스바네아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요단강이 없다. 40년이 지나 그들은 요단강을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요단강은 홍해의 재판이다. 이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홍해를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모세도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홍해를 건넌 이상에는 중간지대 없이 가나안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신자의 구원얻은 신분의 즉각성을 더 분명히 하려는 데 있다. 그런 의미로 요단강은 홍해와 마찬가지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구원의 의미로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초대받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서 제일 곁길로 빠지는 자리가 어디인가 하면 애굽을 벗어나서 가나안에 안가고 중간에서 미아가 된다는 사실이다. ‘너희를 부른 것은 가나안에 두기 위함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우리는 광야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12:25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유월절 예식을 ‘가나안’에 가서 행하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가기보다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불평하고 헤매이기만 하였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것을 경험하고 계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침에도 만나, 점심에도 만나, 저녁에도 만나, 드디어 화가 난 것이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재미를 못 갖는 이유는 ‘이럴 바에야 뭣하러 출애굽을 했느냐’하는 비교 때문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 뭐 나은 것이 있어야지 먹는 게 만나요, 보이는 건 사막이니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물론 구름기둥도 있고 불기둥도 있다.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도 있고, 발도 부르트지 않고 입을 옷도 있다. 그러나 애굽과 비교하면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선지자가 매일 삶을 살아가면서 비교해야 핳 곳은 과거 불신앙 생활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천국이다. 여러분은 가나안에 들어와 있는가 그곳을 바라보며가슴 설레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가나안은 신자 누구나 들어가야 할 장소이다. 그러나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현주소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아야 한다.
제 2 강 출애굽 사건, 그 둘째 (고전 10: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에 있어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 사이에 ‘광야’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출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직접 들어간 것이 아니라 ‘광야 40년’이 있었다. 모세의 오해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신의 불길을 유지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다 타버리져 더이상 불길을 연장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생애의 상징성이다. 하나님의 불은 타 오르는데 꺼지지 않는다. 이 메세지야말로 출애굽 사건 전체의 상징이다. 이것은 출애굽을 해놓고 가나안에 입국하지 않고 사는 신자들을 향하여 들이대는 꾸짖음이 모세의 생애이고, 떨기나무 불꽃이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죽은 사건이다. 우리가 구원의 즉각성을 살피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출애굽은 곧 가나안 입국을 의도하신 것이었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출 3:8)’하셨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중간에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아 죽이는 희생과 댓가를 치루고라도 계획했던 일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시다. 유월절은 그 출발에 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신앙의 출발이지 완성은 아니다. 부활까지 모두 이르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광야에서 불신앙하므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광야에서 죽고 그의 후손들만이 들어갔다. 홍해를 건넌 그들은 처음에는 가데스바네아로 진행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려 했으나 불신앙으로 실패했다. 40년 후에 그들은 요단강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간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은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세례라고 성경은 풀이하고 있다. 세례는 일시적으로 죽음이다. 죽었으면 가나안이고 천국에서 살아야 한다.
민 20:7-12을 보면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는 사건이 나온다. 모세는 하나님이 반석을 명하여 물이 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경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 큰 문제처럼 여겨지는 것은 이상하게 그냥 넘어간다. 이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무너져서는 안되는 일관성을 가진 어떤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가나안을 못들어가는 데는 단 하나의 이유 밖에 없다.홍해 사건이 무엇인지 모르면 못들어간다. 가나안은 따로 들어가느 자리가 아니라 애굽을 나오면 바로 들어가야 할 장소이다. 모세가 가나안에 못들어가는 것은 것은 그도 홍해를 건넌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한번 밖에 없다. 반석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반석을 치라 말씀하시고 두번째는 ‘명하라’ 하셨다. 그 이유는 처음 출애굽기 17장에서의 신광야 르비딤에서의 호렙산 반석을 지팡이로 친 것은 수난이고, 두번째는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모든 자에게 넘치도록 모든 것을 주시는 내주하심이다. 민 20장에서 모세는 백성의 패역을 인하여 반석을 쳐서 물이 솟게 한다. 수난은 한번으로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내주와 부활사건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두번째 반석을 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 수난으로 인간의 완전한 대속의 길이 열렸음을 부정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언제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이야기할 때 수난이라고 한다. 수난 뒤에는 언제나 부활이 불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언제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이야기할 때 수난이라고 한다. 수난 뒤에는 언제나 부활이 붙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인 동시에 제사장이다. 그가 열납된 것은 그가 살아나온 것으로 증명된다. 구약의 속죄제에 있어 제사를 드리러 들어간 제사장이 죽어 나오면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의미였다. 우리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들어가신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그가 드린 제사가 완벽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는 한번 죽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요로운 삶이다. 이것이 얼마나 취소될 수 없는 일인가 결코 취소될 수 없다. 애굽으로 돌아가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오면 곧 가나안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실수하는 그 배역을 모세를 시키신다. 모세는 120세였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신 34:7).“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네가 이 백성을 데리고 들어가라(수 1:2)”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죽어야 하는 사람이 모세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신다. 나오면 곧 가나안이다.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고전 10장에서 반석은 그리스도라 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님의 전이다. 성령님이 그 안에 와 있는 것이다(고전 6:19). 출 12:25에 하나님은 유월절을 가나안 땅에서 지키라고 명렬하셨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유월절을 지키는 데는 양뿐만 아니라 무교병이 필요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은 일년 이상을 버틸 수 없다. 여호수아 5:10 이하에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켰는데 가나안 땅의 소산으로 지켰다. 유월절을 여호수아 5장에서 지켰는데 그 곡식은 어디서 구했을까 아직 여리고성은 정복되지 않았고, 씨앗은 뿌리지 않았는데 성경은 그들이 가나안의 소산을 먹고 무교병을 먹으며, 유월절을 지켰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가나안 땅에 오니까 있더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약점이 있다면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여호수아 1장에서 ‘네가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너희에게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광야와 흡사한가 우리에겐 기억할 가나안은 없다. 그곳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되는 애굽은 많다. ‘우리가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이다. 그래서 지금이 광야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애굽이 가소롭다.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애굽은 추억의 대상이다. 거기는 어떻게 들어가는가 새삼스럽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
당연히 그 안에서 살아야 할 우리임으로 하나님께 새삼스런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늬 소원은 애굽으로는 돌아가지 않더라도 한달쯤 애굽에서 휴가를 즐기겠다는 생각 밖에 없다. 우리가 가나안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또 어떤가 광야에서 살 때는 자꾸만 애굽에서의 추억을 되씹더니 가나안에 들어오자 이제는 쫓아내야 할 민족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 사사기는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가장 처참하고 가장 실패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이있는 책이다. 신자가 자기 안에서 몰아내야 할 육체를 몰아내지 않고 육체와 더불어 살기를 좋아해서 ‘비빔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자의 생활을 그린 것이 사사기이다. 광야 생활은 피곤하다. 우리만큼 피곤에 대하여 절실한 사람은 없다. 이제 그만 집을 짓고 내 땅을 가지고 내 가정을 꾸리는 그리스도인만의 생활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주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간절하게 하나님께 구해야 할 우리 모두의 기도제목이다. 제 3강 출애굽 사건, 그 세째(롬 3:19-28) 출애굽 사건에서 우리는 구원의 두가지 측면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된 구원에 대한 확인과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롬 3:19-28을 가지고 풀어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이 다루어 있는 것이 어떤 내용을 사실상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행위로 구원얻지 않고 믿음으로 얻기 때문에 성경은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자랑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은혜라고 한다. 구원은 삯이 아니요 은혜이다.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구원을 얻거나 못 얻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삯이다. 믿음의 주체가 무엇인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면 믿음이라는 이 단어가 명사인지 동사인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가 아니다. 행위 개념에서 행위를 이해시키기 위한 단어로 성경이 등장시키는 것이 ‘자랑과 삯’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과율이라고 한다. 성겨은 이것을 행위라고 한다. 내가 한 것이변 ‘삯’이고 내가 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가 있으면 ‘선물’이다. 믿음이란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생긴 것이다.미듬은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원인 없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잉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롬 3:24)”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가에 대한 설명의 말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 생각하기를 지렁이가 메니큐어 생각하듯 한다.” 생각을 안하는데 구원의 조건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에게서 구원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신다. 그럼으로 능력이고 지혜이다.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만들고 결과는 우리에게 다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원인은 나에게 있지 않고 몽땅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도 예수, 살아도 예수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혼동을 일으킬 수 없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다. 구원 얻지 않은 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마저 갖지 않는다. 구원얻은 자만이 죄와 하나님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겠다’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기에 꺼내는 것이지 꺼내 놓고 내 백성을 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의 경험 속에서 예수를 알지 못할 그때에 이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은혜란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얼마나 뿌리 깊이 우리의 구원을 얻는데 대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자랑으로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6-18)” 여기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번 나온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우리가 보통 쓰는 믿음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셔서 우리에게 결과로 말미암아 뜨게 해준 눈을 말한다. 지금부터는 우리에게 무슨 요구가 하나님 앞에서부터 내렸는가 하면 두번째 믿음이 떨어진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는 책망을 제자들이 자주 듣는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설득한 것을 말한다. 너무나 확실히 설득당한 일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만지게 하시고, 보이신 사실들이다. 내가 그 안에 설득당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찌니라(신12:8)”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한 유언이다. 여기는 광야이고, 거기는 가나안이다. 지금 성겨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두가지 비유 중에 그 첫 비유인 구원의 즉각성, 곧 우리가 구원을 얻으면 성령님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소유 아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한 바보같은 신앙생활을 광야생활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10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셨고, 성령님을 상징한 만나도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단코 기 쁘지 않다는 것으로 그 심각성이 나타난다. 광야생활을 애굽과 비교하면 오히려 애굽이 더 재미있었다. 여호수아 5장 13절로 15절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를 막아선다. 그곳이 가나안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주인노릇하러 오신 것이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거룩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신을 신으면 돌아다니는 것인데 벗으라는 것은 이제 너는 꼼짝 말라는 것이다. 가나안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와서 이제부터의 모든 행로를 그가 인도하고 지시할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는 구름기둥이 있고 불기둥도 있지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들고 싸워 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는 싸움을 하느냐 안하느냐로 압축되어야 한다. 매일의 싸움은 내가 구원을 얻었느냐 못얻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느냐 안 맡기느냐의 싸움이어야 한다. 성령님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일을 안하고, 육체를 좇아 살면 성령님의 일을 못한다. 우리에게 있는 싸움은 이 싸움이어야 한다. 매일 이 싸움이 있는 것이지 큰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에 무릎을 꿇는 오늘 하루의 생애를 그가 요구하시는대로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의 싸움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구별해내느 영적 안목이 훨씬 날카로와야 하고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자이다. 발을 내딛어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와 부딪히고자 하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신자로서 부딪혀야 한다. 물론 실수가 대부분일 것이다. 모두가 싸우면 질 것이다. 그러나 진 싸움이어야 한다. 그것이 있어야 다시는 그것을 안하는 것이다. 싸우면 지고 실패할 때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빨리 실수하고 실패하여 더 이상은 실수하거나 실패할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끝에 남는 것은 승리 뿐이다. 제 4 강 출애굽 사건 그 네번째(삼상 15:1-3) 신자는 구원얻는 즉시 그의 신분이 고정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더 이상 보완할 것도 없는 운명이 된다. 그러나 수준의 문제는 다르다. 살아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훈련되면서 동시에 나의 훈련이 하나님께서 제 삼자에게 보이고 싶으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은혜스러우심의 간증이요, 증거요, 살아있는 메세지이다. 분명히 출애굽하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의도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는 광야가 필수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출 17:14-17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했다. 여기서 아말렉은 한 종족의 이름으로 등장을 하면서 동시에 영적인 의미에서 사탄을 의미하고 있다. 이 전쟁은, 이 전투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간 그 대장인 여호수아에게 그 전쟁의 승부가 걸려 있지 않고 누구의 손에 걸려 있는가 모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아론과 훌이 팔을 들어 올려 이긴 것으로 나타나는 이 전쟁은 힘과 전략으로 이길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영에 관한 싸움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다. 출애굽을 해서 홍해를 건넜더니 그들을 맞이한 것은 가나안이 아니요 여호와의 군대장관도 아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나타났다. 출애굽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육신이더라’는 것이다. 출애굽을 하지 않았으면 아말렉과의 싸움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아말렉은 신광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굽의 종이 되어 있는 한 아말렉과의 전투는 필요없다. 출애굽을 하자마자 싸우는 것이 아말렉과의 싸움이다. 지금껏 우리가 죄 안에서 살 때에는 나와 나의 본성이 사탄과 도무지 충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자리와 원리를 바꾸었을 때 충돌이 일어난다. 예수 영접 후 맨 처음 부디치는 현실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갈등과 회의이다. 출애굽기 15장에서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 이스라엘은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 찬송은 합창이었으며 세상 유사 이래로 가장 위대한 합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장에서 아말렉과 싸움이 벌어진다. 우리의 신앙현실도 이와 똑같다. 분명히 홍해를 건넜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내 자신이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이다. 맨 처음 우리가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내 앞에 둘이 메고 올 포도송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말렉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사실에 혼비백산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뀐 생을 살기로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본성 안에서 튀어 나오는 죄 때문에 놀라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구워이란 넓은 의미로 일회적이지 않다. 시간에 걸친 완성이다. 우리는 모든 죄가 밖에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죄의 구속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들어갔다’라는 뜻이다. 심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차원에서 우리를 붙잡으셨다. 죄는 습관이 붙는다. 나쁜 일을 반복하면 양심이 점점 무디어 진다. 왜 성경이 ‘경건을 연습할’고 했는가 하면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이 내적 원리 이상으로 습관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습관이 될만큼 생활에 배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해져 있는 것일까 몹시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순간에 완벽하려는 습관이 있다. 실수는 있다. 그 실수를 한번으로 그치려는 생각 속에 어제의 잘못을 오늘로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한 것이다. 삼상 15:1-3을 보면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으시고 첫번째로 주신 계명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3절에 “아말렉을 치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까지 죽이라” 하신다. 이것은 육체에 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짐승을 취하고 왕과 일족을 살려 두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 육체를 이겨낼 싸움이 우리에게 주어진 신자의 삶에서의 유일한 싸움이다. 우리의 눈에는 제법 쓸만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 말씀하시며 몰아내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사울의 실수는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삼하 1:1-10을 보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10절을 보자.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음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 왔나이다”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못하자 아말렉이 사울의 면류과을 빼앗아 갔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쫓아내지 못하고 육체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육체가 우리를 거꾸로 정복할 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몰아내야 할 싸움, 곧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원리들, 죄의 습성들을 몰아내는데 참으로 심각하게 싸우지 않으면 거꾸로 면류관을 빼앗기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믿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세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 구원은 취소되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구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님을 좇지 않으면 육체를 좇을 수 밖에 없다.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아직도 내 안에 너무나 많이 있다. 그것을 몰아내기 위해 훈련을 해야한다. 마태복음 7장에 반석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비유 속에는 집이 같다는데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기초가 틀린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인격과 인격으로 부딪혀야 되는 그 풍성한 생명의 깊음들을 나누지 못하고 법조문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의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시는 그 손길을 통한 감격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 광야는 살기 힘든 곳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이 있고, 마나가 있고,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샘이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곳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변하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음미하려고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하나님은 이 사건을 지금 어떻게 보실 것인가’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제 5 강 출애굽 사건, 그 다섯번째(신 8:1-20)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보다 더욱 간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는 광야를 걷게 하시고 우리에게도 어려움을 만나게 하신다. 왜일까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16절을 보면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광야를 하심이었느니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시험하신다는 말씀은 TEST 하신다는 것이다. 참과 거짓을, 옳고 그름을 분별하시기 위함이다. 여기에는 합격과 불합격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라(롬 7:6)” 율법과 복음, 행위와 믿음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어떤 행위, 곧 일을 하는 것을 성경은 ‘행위’라고 하거나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원인이 있고 누구에게 결과가 있느냐 하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성경이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오늘은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설명함으로 광야 40년 생활이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낮추시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율법은 ‘ㅙ 필요했는냐, 은혜가 온 다음에도 율법은 그 가치가 있느냐“를 살펴보자.
예레미야 31:31-34을 읽어보자. 31절에 새 언약이라는 말이 나온다. 새 언약은 분명히 은혜를 일컫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은혜를 일컫고 있다. 예레미야 31:31 이하에 비교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면 새 언약으로 줄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은헤 등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는 율법과 어느 부분에서 다른가 하면 율법을 집어 치우고 대신 나온 것으로 과거의 것과 다르지 않다. 새 언약은 무엇과 비교해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할 뿐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2)“ 남편이 되어 이끌만큼 강력하게 하셨어도 그들이 거절했기에 더 큰 힘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예전의 방법은 옛 언약은 손을 잡고 남편이 된 방법인데 그것으로 안되어서 이번에는 마음 속에다 내 법을 주고 내 말을 기록하는 방법을 쓰겠다는 것이다. 방법이 변하지 언약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 속을 바꾸어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동원해야 하는 방법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느니라(롬 7:7)“ 여기에서 율법의 기능이 나온다. 율법은 ’구원얻기 위한 방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들을 이제 ’훈련시키는 도구‘로써 율법이 어떻게 쓰이는가가 나오는 것이다. 졸리면 졸음이 쏟아지는 것처럼 죄는 우리에게는 본능이다. 그것을 지적해 주지 않았던들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롬 7:14-25을 보자.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우리에게 제시할 것은 다 제시하고 있는데 율법이 제시한 것이 우리가 율법을 좇아서 하는데도 불구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율법이 잘못되어서 율법이 잘못 제시해서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약도이다.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분명히 정확한 것이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도록 되어 왔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경되었기에 율법대로 가지 못한다. 율법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광야 길을 걷게 하고, 만나를 먹이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끌고, 아말렉과 싸울 때에 손만 들면 이기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이제는 ‘나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보아서 따라오면 합격, 안 따라오면 불합격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딴전만 피우는 우리가 한심한 족속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속에 거닐었지만 그들은 늘 하나님께 원망만 퍼부어댔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이 장소는 가장 놀라운 곳이다. ‘광야’라는 장소이다. 돌아온 자만이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찌르고 있는가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율법을 만난 것이 아니다. 죽은 자리에서 산 자가 되어 생명의 감각이 있는 자리에 왔을 뿐이다. 우리가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첫 과정의 방법을, 우리가 율법을 좇음으로서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안으로부터 고쳐서 쓰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편도 어쨌든 바깥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 법을 우리 안에 두고 말씀을 우리 안에 새겨야 된다. 눈을 뜨게 할 수 밖에 없다. 비로소 눈뜬 자에게 이제 당장 필요한 것이 약도이다. 눈을 떴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하나님이 제시하고 계시는 약도로서의 율법이 드디어 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율법은 맨 처음 우리가 장님이었다는 것부터 지적하고 나온다.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비례해서 하나님을 안다.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만큼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로 남에게 대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자존심이란 ‘자기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수준을 자존심’이라고 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동정해 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시집도 못가는구나. 내가 결혼해 주자.’ 이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뜻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는 창조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혜와 긍휼로 대접하시는 그의 자녀이다. 말도 안되는 사이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가 사용하신다. 우리를 사랑으로 늘 인도하시며 제대로 밟아 올라가서 우리가 우리를 키워 하나님 앞에 정말 내 마음으로부터 항복을 꺼내 달라고 이렇게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너무나 필요한 조건이다. 성경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도 나를 사랑해달라.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해 달라’ 하신다. 참 놀라운 요구이다. 무릎 꿇으란 요구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송한 요구인가 이렇게 초청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이 요구에 날마다 응답하며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꼭 인물을 들어 쓰신다. 한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 사건 전체를 가장 잘 상징화하는 인물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모세가 대표자로 인도함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모세라는 인물 자신이 출애굽 사건을 집약해서 산징화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자체가 메세지이다. 출애굽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세를 이해하여야 한다. 모세의 일생은 크게 셋으로 구분해서 나타난다. 40년 동안 바로궁에서의 생활, 40년의 광야생활,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40년이다. 80의 나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시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모세에게 가장 큰 상징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 내었기에 주어진 이름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원래대로였다면 ‘물에서 건져냄을 받았다.’라는 뜻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건져낼 자’라는 이름을 갖는다. 출애굽기
3,4장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얼마나 많은 변명들을 늘어 놓는지 모른다. 모세는 하나님께 항복할 수 없는 응어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권세와 영화를 다 버리고 하나님 편에 섰던 40년 전에는 가만 계시다가 80노인이 된 지금 왜 나타나셨습니까’하는 것이다. 모세의 항변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 서 계신다.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았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이것이다. “모세야, 네가 스스로를 태워서 일으킬 수 있는 불꽃이란 하루 밖에 지탱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너를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태우리라” 하나님의 불이 아닌 자기를 재료로, 자기가 근거로 되어서 하는 신앙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재고가 바닥이 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밖에 땔감이 없다. 이 문제가 출애굽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성경은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에서 이미 완벽하게 상징화시켜 놓고 출발한다.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애굽에서 꺼내는 것은 가나안 땅에 보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계획을 갖고 계시는 분이고, 그 계획을 이루어 내시고야마는 고집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들어가야 할 것과 들어가기 위해서 출발해야 될 것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가나안 입국의 경험을 가질 수도 있고 못 가질 수도 있는데, 출애굽의 경험은 누구나 가진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사람 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가 출애굽 사건을 들어가면서 확인할 것은 모든 출애굽 사건은 ‘출애굽=가나안입국’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출애굽-광야-가나안’으로 되어 있지 않다. 가나안은 천국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 우리가 들어가야 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생활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사탄의 권세 아래서 놓여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출애굽=가나안이라는 상징을 하나 보여준다. 가나안은 우리가 ‘들어가 있는 곳’이며 동시에 ‘들어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의인’이라고 떳떳하게 고함지르고 늘 ‘죄인’이라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매어달릴 수 밖에 없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십자가만큼 무서운 자리는 없다. 거기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서 인간의 죄를대속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불신자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그대로 드러낸 장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죄를 절대 그냥 용서하시지 않는다. 죄가 무엇인지를 십자가만큼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메세지도 없다. 예수님이 올라 갔어도 예외가 없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셨던 말씀이 불신자들이 하게 될 말이다. 출애굽 때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양을 잡아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우습게 여기며 설마 했던 애굽인들의 장자는 다 죽었다. 사람 수마다 하나씩이면 유월절 기간에 그곳은 피비린내로 진동했을 것이다. 11절을 보면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원래 식사를 비스듬히 누워서 취침 스타일로 한다.
그런데 지금은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들고 서서 먹으라 하신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유월절은 ‘고울 인(결승점)’이 아니라 ‘스타트(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시작이다. 성경에는 전도하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만큼 “네가 처음에 가졌던 복음을 놓치지 말아라, 인내하라, 주님이 곧 오신다.”등의 말씀이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면 시작해서 와성에 있지 않고 와성의 길을 향하여 지금 닦여가고 있는 과정을 사는 것이 신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고의 사명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내가 얼마나 닦여졌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헌금과 기도와 성경공부와 전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자의 바른 신앙은 내가 부대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이것을 인정받지 못하면 교회와 그리스도가 욕을 먹는다. 유월절 사건이 출발로서 상징되어졌다면 그 다음에 구원에 관한 또 하나의 사건은 홍해이다. 홍해를 건넌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기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서 시나이 반도를 건너서 시내산에 내려 왔다가 가나안 정탐꾼 열두명을 보낼 때 가데스바네아에서 보낸다. 가데스바네아가 있고 사해와 갈릴리 바다가 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 사이에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바네아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가데스바네아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요단강이 없다. 40년이 지나 그들은 요단강을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요단강은 홍해의 재판이다. 이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홍해를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모세도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홍해를 건넌 이상에는 중간지대 없이 가나안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신자의 구원얻은 신분의 즉각성을 더 분명히 하려는 데 있다. 그런 의미로 요단강은 홍해와 마찬가지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구원의 의미로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초대받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서 제일 곁길로 빠지는 자리가 어디인가 하면 애굽을 벗어나서 가나안에 안가고 중간에서 미아가 된다는 사실이다. ‘너희를 부른 것은 가나안에 두기 위함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우리는 광야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12:25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유월절 예식을 ‘가나안’에 가서 행하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가기보다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불평하고 헤매이기만 하였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것을 경험하고 계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침에도 만나, 점심에도 만나, 저녁에도 만나, 드디어 화가 난 것이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재미를 못 갖는 이유는 ‘이럴 바에야 뭣하러 출애굽을 했느냐’하는 비교 때문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 뭐 나은 것이 있어야지 먹는 게 만나요, 보이는 건 사막이니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물론 구름기둥도 있고 불기둥도 있다.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도 있고, 발도 부르트지 않고 입을 옷도 있다. 그러나 애굽과 비교하면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선지자가 매일 삶을 살아가면서 비교해야 핳 곳은 과거 불신앙 생활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천국이다. 여러분은 가나안에 들어와 있는가 그곳을 바라보며가슴 설레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가나안은 신자 누구나 들어가야 할 장소이다. 그러나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현주소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아야 한다.
제 2 강 출애굽 사건, 그 둘째 (고전 10: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에 있어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 사이에 ‘광야’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출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직접 들어간 것이 아니라 ‘광야 40년’이 있었다. 모세의 오해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신의 불길을 유지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다 타버리져 더이상 불길을 연장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생애의 상징성이다. 하나님의 불은 타 오르는데 꺼지지 않는다. 이 메세지야말로 출애굽 사건 전체의 상징이다. 이것은 출애굽을 해놓고 가나안에 입국하지 않고 사는 신자들을 향하여 들이대는 꾸짖음이 모세의 생애이고, 떨기나무 불꽃이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죽은 사건이다. 우리가 구원의 즉각성을 살피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출애굽은 곧 가나안 입국을 의도하신 것이었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출 3:8)’하셨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중간에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아 죽이는 희생과 댓가를 치루고라도 계획했던 일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시다. 유월절은 그 출발에 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신앙의 출발이지 완성은 아니다. 부활까지 모두 이르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광야에서 불신앙하므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광야에서 죽고 그의 후손들만이 들어갔다. 홍해를 건넌 그들은 처음에는 가데스바네아로 진행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려 했으나 불신앙으로 실패했다. 40년 후에 그들은 요단강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간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은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세례라고 성경은 풀이하고 있다. 세례는 일시적으로 죽음이다. 죽었으면 가나안이고 천국에서 살아야 한다.
민 20:7-12을 보면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는 사건이 나온다. 모세는 하나님이 반석을 명하여 물이 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경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 큰 문제처럼 여겨지는 것은 이상하게 그냥 넘어간다. 이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무너져서는 안되는 일관성을 가진 어떤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가나안을 못들어가는 데는 단 하나의 이유 밖에 없다.홍해 사건이 무엇인지 모르면 못들어간다. 가나안은 따로 들어가느 자리가 아니라 애굽을 나오면 바로 들어가야 할 장소이다. 모세가 가나안에 못들어가는 것은 것은 그도 홍해를 건넌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한번 밖에 없다. 반석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반석을 치라 말씀하시고 두번째는 ‘명하라’ 하셨다. 그 이유는 처음 출애굽기 17장에서의 신광야 르비딤에서의 호렙산 반석을 지팡이로 친 것은 수난이고, 두번째는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모든 자에게 넘치도록 모든 것을 주시는 내주하심이다. 민 20장에서 모세는 백성의 패역을 인하여 반석을 쳐서 물이 솟게 한다. 수난은 한번으로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내주와 부활사건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두번째 반석을 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 수난으로 인간의 완전한 대속의 길이 열렸음을 부정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언제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이야기할 때 수난이라고 한다. 수난 뒤에는 언제나 부활이 불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언제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이야기할 때 수난이라고 한다. 수난 뒤에는 언제나 부활이 붙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인 동시에 제사장이다. 그가 열납된 것은 그가 살아나온 것으로 증명된다. 구약의 속죄제에 있어 제사를 드리러 들어간 제사장이 죽어 나오면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의미였다. 우리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들어가신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그가 드린 제사가 완벽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는 한번 죽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요로운 삶이다. 이것이 얼마나 취소될 수 없는 일인가 결코 취소될 수 없다. 애굽으로 돌아가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오면 곧 가나안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실수하는 그 배역을 모세를 시키신다. 모세는 120세였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신 34:7).“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네가 이 백성을 데리고 들어가라(수 1:2)”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죽어야 하는 사람이 모세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신다. 나오면 곧 가나안이다.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고전 10장에서 반석은 그리스도라 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님의 전이다. 성령님이 그 안에 와 있는 것이다(고전 6:19). 출 12:25에 하나님은 유월절을 가나안 땅에서 지키라고 명렬하셨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유월절을 지키는 데는 양뿐만 아니라 무교병이 필요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은 일년 이상을 버틸 수 없다. 여호수아 5:10 이하에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켰는데 가나안 땅의 소산으로 지켰다. 유월절을 여호수아 5장에서 지켰는데 그 곡식은 어디서 구했을까 아직 여리고성은 정복되지 않았고, 씨앗은 뿌리지 않았는데 성경은 그들이 가나안의 소산을 먹고 무교병을 먹으며, 유월절을 지켰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가나안 땅에 오니까 있더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약점이 있다면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여호수아 1장에서 ‘네가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너희에게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광야와 흡사한가 우리에겐 기억할 가나안은 없다. 그곳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되는 애굽은 많다. ‘우리가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이다. 그래서 지금이 광야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애굽이 가소롭다.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애굽은 추억의 대상이다. 거기는 어떻게 들어가는가 새삼스럽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
당연히 그 안에서 살아야 할 우리임으로 하나님께 새삼스런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늬 소원은 애굽으로는 돌아가지 않더라도 한달쯤 애굽에서 휴가를 즐기겠다는 생각 밖에 없다. 우리가 가나안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또 어떤가 광야에서 살 때는 자꾸만 애굽에서의 추억을 되씹더니 가나안에 들어오자 이제는 쫓아내야 할 민족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 사사기는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가장 처참하고 가장 실패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이있는 책이다. 신자가 자기 안에서 몰아내야 할 육체를 몰아내지 않고 육체와 더불어 살기를 좋아해서 ‘비빔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자의 생활을 그린 것이 사사기이다. 광야 생활은 피곤하다. 우리만큼 피곤에 대하여 절실한 사람은 없다. 이제 그만 집을 짓고 내 땅을 가지고 내 가정을 꾸리는 그리스도인만의 생활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주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간절하게 하나님께 구해야 할 우리 모두의 기도제목이다. 제 3강 출애굽 사건, 그 세째(롬 3:19-28) 출애굽 사건에서 우리는 구원의 두가지 측면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된 구원에 대한 확인과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롬 3:19-28을 가지고 풀어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이 다루어 있는 것이 어떤 내용을 사실상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행위로 구원얻지 않고 믿음으로 얻기 때문에 성경은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자랑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은혜라고 한다. 구원은 삯이 아니요 은혜이다.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구원을 얻거나 못 얻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삯이다. 믿음의 주체가 무엇인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면 믿음이라는 이 단어가 명사인지 동사인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가 아니다. 행위 개념에서 행위를 이해시키기 위한 단어로 성경이 등장시키는 것이 ‘자랑과 삯’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과율이라고 한다. 성겨은 이것을 행위라고 한다. 내가 한 것이변 ‘삯’이고 내가 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가 있으면 ‘선물’이다. 믿음이란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생긴 것이다.미듬은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원인 없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잉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롬 3:24)”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가에 대한 설명의 말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 생각하기를 지렁이가 메니큐어 생각하듯 한다.” 생각을 안하는데 구원의 조건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에게서 구원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신다. 그럼으로 능력이고 지혜이다.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만들고 결과는 우리에게 다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원인은 나에게 있지 않고 몽땅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도 예수, 살아도 예수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혼동을 일으킬 수 없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다. 구원 얻지 않은 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마저 갖지 않는다. 구원얻은 자만이 죄와 하나님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겠다’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기에 꺼내는 것이지 꺼내 놓고 내 백성을 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의 경험 속에서 예수를 알지 못할 그때에 이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은혜란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얼마나 뿌리 깊이 우리의 구원을 얻는데 대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자랑으로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6-18)” 여기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번 나온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우리가 보통 쓰는 믿음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셔서 우리에게 결과로 말미암아 뜨게 해준 눈을 말한다. 지금부터는 우리에게 무슨 요구가 하나님 앞에서부터 내렸는가 하면 두번째 믿음이 떨어진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는 책망을 제자들이 자주 듣는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설득한 것을 말한다. 너무나 확실히 설득당한 일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만지게 하시고, 보이신 사실들이다. 내가 그 안에 설득당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찌니라(신12:8)”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한 유언이다. 여기는 광야이고, 거기는 가나안이다. 지금 성겨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두가지 비유 중에 그 첫 비유인 구원의 즉각성, 곧 우리가 구원을 얻으면 성령님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소유 아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한 바보같은 신앙생활을 광야생활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10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셨고, 성령님을 상징한 만나도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단코 기 쁘지 않다는 것으로 그 심각성이 나타난다. 광야생활을 애굽과 비교하면 오히려 애굽이 더 재미있었다. 여호수아 5장 13절로 15절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를 막아선다. 그곳이 가나안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주인노릇하러 오신 것이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거룩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신을 신으면 돌아다니는 것인데 벗으라는 것은 이제 너는 꼼짝 말라는 것이다. 가나안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와서 이제부터의 모든 행로를 그가 인도하고 지시할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는 구름기둥이 있고 불기둥도 있지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들고 싸워 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는 싸움을 하느냐 안하느냐로 압축되어야 한다. 매일의 싸움은 내가 구원을 얻었느냐 못얻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느냐 안 맡기느냐의 싸움이어야 한다. 성령님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일을 안하고, 육체를 좇아 살면 성령님의 일을 못한다. 우리에게 있는 싸움은 이 싸움이어야 한다. 매일 이 싸움이 있는 것이지 큰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에 무릎을 꿇는 오늘 하루의 생애를 그가 요구하시는대로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의 싸움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구별해내느 영적 안목이 훨씬 날카로와야 하고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자이다. 발을 내딛어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와 부딪히고자 하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신자로서 부딪혀야 한다. 물론 실수가 대부분일 것이다. 모두가 싸우면 질 것이다. 그러나 진 싸움이어야 한다. 그것이 있어야 다시는 그것을 안하는 것이다. 싸우면 지고 실패할 때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빨리 실수하고 실패하여 더 이상은 실수하거나 실패할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끝에 남는 것은 승리 뿐이다. 제 4 강 출애굽 사건 그 네번째(삼상 15:1-3) 신자는 구원얻는 즉시 그의 신분이 고정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더 이상 보완할 것도 없는 운명이 된다. 그러나 수준의 문제는 다르다. 살아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훈련되면서 동시에 나의 훈련이 하나님께서 제 삼자에게 보이고 싶으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은혜스러우심의 간증이요, 증거요, 살아있는 메세지이다. 분명히 출애굽하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의도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는 광야가 필수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출 17:14-17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했다. 여기서 아말렉은 한 종족의 이름으로 등장을 하면서 동시에 영적인 의미에서 사탄을 의미하고 있다. 이 전쟁은, 이 전투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간 그 대장인 여호수아에게 그 전쟁의 승부가 걸려 있지 않고 누구의 손에 걸려 있는가 모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아론과 훌이 팔을 들어 올려 이긴 것으로 나타나는 이 전쟁은 힘과 전략으로 이길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영에 관한 싸움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다. 출애굽을 해서 홍해를 건넜더니 그들을 맞이한 것은 가나안이 아니요 여호와의 군대장관도 아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나타났다. 출애굽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육신이더라’는 것이다. 출애굽을 하지 않았으면 아말렉과의 싸움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아말렉은 신광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굽의 종이 되어 있는 한 아말렉과의 전투는 필요없다. 출애굽을 하자마자 싸우는 것이 아말렉과의 싸움이다. 지금껏 우리가 죄 안에서 살 때에는 나와 나의 본성이 사탄과 도무지 충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자리와 원리를 바꾸었을 때 충돌이 일어난다. 예수 영접 후 맨 처음 부디치는 현실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갈등과 회의이다. 출애굽기 15장에서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 이스라엘은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 찬송은 합창이었으며 세상 유사 이래로 가장 위대한 합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장에서 아말렉과 싸움이 벌어진다. 우리의 신앙현실도 이와 똑같다. 분명히 홍해를 건넜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내 자신이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이다. 맨 처음 우리가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내 앞에 둘이 메고 올 포도송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말렉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사실에 혼비백산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뀐 생을 살기로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본성 안에서 튀어 나오는 죄 때문에 놀라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구워이란 넓은 의미로 일회적이지 않다. 시간에 걸친 완성이다. 우리는 모든 죄가 밖에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죄의 구속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들어갔다’라는 뜻이다. 심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차원에서 우리를 붙잡으셨다. 죄는 습관이 붙는다. 나쁜 일을 반복하면 양심이 점점 무디어 진다. 왜 성경이 ‘경건을 연습할’고 했는가 하면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이 내적 원리 이상으로 습관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습관이 될만큼 생활에 배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해져 있는 것일까 몹시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순간에 완벽하려는 습관이 있다. 실수는 있다. 그 실수를 한번으로 그치려는 생각 속에 어제의 잘못을 오늘로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한 것이다. 삼상 15:1-3을 보면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으시고 첫번째로 주신 계명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3절에 “아말렉을 치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까지 죽이라” 하신다. 이것은 육체에 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짐승을 취하고 왕과 일족을 살려 두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 육체를 이겨낼 싸움이 우리에게 주어진 신자의 삶에서의 유일한 싸움이다. 우리의 눈에는 제법 쓸만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 말씀하시며 몰아내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사울의 실수는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삼하 1:1-10을 보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10절을 보자.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음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 왔나이다”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못하자 아말렉이 사울의 면류과을 빼앗아 갔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쫓아내지 못하고 육체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육체가 우리를 거꾸로 정복할 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몰아내야 할 싸움, 곧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원리들, 죄의 습성들을 몰아내는데 참으로 심각하게 싸우지 않으면 거꾸로 면류관을 빼앗기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믿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세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 구원은 취소되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구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님을 좇지 않으면 육체를 좇을 수 밖에 없다.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아직도 내 안에 너무나 많이 있다. 그것을 몰아내기 위해 훈련을 해야한다. 마태복음 7장에 반석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비유 속에는 집이 같다는데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기초가 틀린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인격과 인격으로 부딪혀야 되는 그 풍성한 생명의 깊음들을 나누지 못하고 법조문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의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시는 그 손길을 통한 감격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 광야는 살기 힘든 곳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이 있고, 마나가 있고,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샘이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곳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변하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음미하려고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하나님은 이 사건을 지금 어떻게 보실 것인가’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제 5 강 출애굽 사건, 그 다섯번째(신 8:1-20)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보다 더욱 간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는 광야를 걷게 하시고 우리에게도 어려움을 만나게 하신다. 왜일까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16절을 보면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광야를 하심이었느니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시험하신다는 말씀은 TEST 하신다는 것이다. 참과 거짓을, 옳고 그름을 분별하시기 위함이다. 여기에는 합격과 불합격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라(롬 7:6)” 율법과 복음, 행위와 믿음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어떤 행위, 곧 일을 하는 것을 성경은 ‘행위’라고 하거나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원인이 있고 누구에게 결과가 있느냐 하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성경이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오늘은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설명함으로 광야 40년 생활이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낮추시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율법은 ‘ㅙ 필요했는냐, 은혜가 온 다음에도 율법은 그 가치가 있느냐“를 살펴보자.
예레미야 31:31-34을 읽어보자. 31절에 새 언약이라는 말이 나온다. 새 언약은 분명히 은혜를 일컫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은혜를 일컫고 있다. 예레미야 31:31 이하에 비교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면 새 언약으로 줄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은헤 등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는 율법과 어느 부분에서 다른가 하면 율법을 집어 치우고 대신 나온 것으로 과거의 것과 다르지 않다. 새 언약은 무엇과 비교해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할 뿐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2)“ 남편이 되어 이끌만큼 강력하게 하셨어도 그들이 거절했기에 더 큰 힘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예전의 방법은 옛 언약은 손을 잡고 남편이 된 방법인데 그것으로 안되어서 이번에는 마음 속에다 내 법을 주고 내 말을 기록하는 방법을 쓰겠다는 것이다. 방법이 변하지 언약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 속을 바꾸어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동원해야 하는 방법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느니라(롬 7:7)“ 여기에서 율법의 기능이 나온다. 율법은 ’구원얻기 위한 방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들을 이제 ’훈련시키는 도구‘로써 율법이 어떻게 쓰이는가가 나오는 것이다. 졸리면 졸음이 쏟아지는 것처럼 죄는 우리에게는 본능이다. 그것을 지적해 주지 않았던들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롬 7:14-25을 보자.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우리에게 제시할 것은 다 제시하고 있는데 율법이 제시한 것이 우리가 율법을 좇아서 하는데도 불구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율법이 잘못되어서 율법이 잘못 제시해서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약도이다.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분명히 정확한 것이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도록 되어 왔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경되었기에 율법대로 가지 못한다. 율법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광야 길을 걷게 하고, 만나를 먹이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끌고, 아말렉과 싸울 때에 손만 들면 이기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이제는 ‘나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보아서 따라오면 합격, 안 따라오면 불합격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딴전만 피우는 우리가 한심한 족속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속에 거닐었지만 그들은 늘 하나님께 원망만 퍼부어댔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이 장소는 가장 놀라운 곳이다. ‘광야’라는 장소이다. 돌아온 자만이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찌르고 있는가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율법을 만난 것이 아니다. 죽은 자리에서 산 자가 되어 생명의 감각이 있는 자리에 왔을 뿐이다. 우리가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첫 과정의 방법을, 우리가 율법을 좇음으로서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안으로부터 고쳐서 쓰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편도 어쨌든 바깥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 법을 우리 안에 두고 말씀을 우리 안에 새겨야 된다. 눈을 뜨게 할 수 밖에 없다. 비로소 눈뜬 자에게 이제 당장 필요한 것이 약도이다. 눈을 떴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하나님이 제시하고 계시는 약도로서의 율법이 드디어 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율법은 맨 처음 우리가 장님이었다는 것부터 지적하고 나온다.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비례해서 하나님을 안다.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만큼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로 남에게 대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자존심이란 ‘자기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수준을 자존심’이라고 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동정해 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시집도 못가는구나. 내가 결혼해 주자.’ 이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뜻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는 창조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혜와 긍휼로 대접하시는 그의 자녀이다. 말도 안되는 사이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가 사용하신다. 우리를 사랑으로 늘 인도하시며 제대로 밟아 올라가서 우리가 우리를 키워 하나님 앞에 정말 내 마음으로부터 항복을 꺼내 달라고 이렇게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너무나 필요한 조건이다. 성경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도 나를 사랑해달라.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해 달라’ 하신다. 참 놀라운 요구이다. 무릎 꿇으란 요구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송한 요구인가 이렇게 초청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이 요구에 날마다 응답하며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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