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 (창1:1-3,출20:8-11)
본문
오늘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 그리고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을 통해 참된 안식과 주일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안식일은 일부 유대교인들에게 남아있고 요즈음 현대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주일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주의 날이 라고 하여 단 한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주일성수를 절대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울러 많은 성도들은 주일 예배를 빠지게 되면 어떤 큰일이 나거나 왠지 불행한 일이 일 어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 빠지면 목사님의 전화를 받아야 하고, 큰 교회에서는 구역경쟁에서 자기가 예배를 빠지게 되면 구역의 성적이 떨어질 것 같고, 작 은 교회에서는 몇 명 안 되는 교인가운데 자기가 빠져버리면 교회가 썰렁할 것 같아 마지못 해 참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에는 아무 것도 하질 말아야 합니다. 유대교의 습관이 들어와 율법적인 생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물건도 살 수 없고,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도 참아야 하고, 다방 에 가서 커피 마시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아 침에 예배드리고 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조금 쉬다가 주일 저녁 예배를 참석해야 모범된 주일 하루를 보낸 것이 됩니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교회에 있기도 합니다. 교회 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휴식하며 예배드리는 유대인들의 하루 일과입니다.
천지 창조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제7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결론으로 매듭지어 집니다. 이 날에 하나님께서 차조 사역을 끝내시고 안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도 따라서 안식했겠지만 임무는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 었습니다. 여기에 안식일의 근원이 담겨있습니다. 십계명으로 안식일 준수가 성문화된 것은 시내 산 에서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창조의 완성에서 안식일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일곱째 날은 창조의 완성에서 오는 새날이었습니다. 이 미 여섯째 날에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일을 다한 다음 일곱 째 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날에 창조하신 피조물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휴식과 여가 생활에 하나님도 함께 계실 수 없는 곳이라면 그것은 참된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이렇게 6일간과 7일의 분리는 하나님의 일이 끝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7일깨는 하나님의 힘이 인간에게 주어지며 온 세계는 축복에 잠겼습니다. 축복이 없는 생활은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6일간과 7일은 분리하셨듯이 우리는 세속적인 관계와 단절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이, 주일을 철저히 지켜야만 합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세상에 잠 겨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6일간도 결코 더러운 날이 아닙니다.
세속의 날이 6일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날들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좋게 살 아야 합니다. 이 좋은 것의 확인이 바로 일곱째날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완성의 선언이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특히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안식일의 참뜻을 하나님의 휴식, 인간의 휴식, 자연 의 휴식입니다. '바른 휴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서 그 성수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성서에서 안식일에 대해서는 출애굽기에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안식일은 이스라 엘의 영원한 규레가 되었습니다. 그 준수방법은 이사야 58장 13-14절에 잘나와 있습니다. 안식일을 존귀히 여기고 자기l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오락을 하지 말며, 사사로운 말을 하 지 말라고 간단하게 나옵니다. 이것은 어떤 금기사항들은 아닌 것 같은데 엄청난 금기 사항 이 생겨나 안식일의 안짜만 나와도 겁이 납니다. 이스라엘은 멸망당할 때에도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며 율법을 공부하는 날로 발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안식일 문제로 많은 갈등과 대립을 하였는데 지도자들 은 안식일을 무조건 지키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의 유익 을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보고 인간사랑을 안식일 보다 먼저 가르치고 우위에 두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역시 안식일의 회당 예배에 참석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이면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녘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입니다.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 부터는 모든 공공업무, 교통, 상업이 중단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완전히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루 대부분을 회당에 나가 토라를 읽고 예배를 드립니다. 집에 있으면 불을 켜지도 않고 끄지도 않고 전화를 받거나 하지도 않고 텔레비져늘 보 질 않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멀어도 걸어서 갑니다. 설거지도 하질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쉬고 노비, 짐승까지 쉬게 하면서 세속적인 일은 하질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안식일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거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생활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스 라엘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우리의 생활 형편은 주일날이라도 모든 상 황은 우리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인도에 산다면 제 대로 안식일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 그 마음가짐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이라 하질 않고 주일이라고 합니다. 성서에는 주일에 대하여 나 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날은 주일일까요 안식일일까요 주일이라고 한다면 안식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부터는, 일주일 중 첫 번째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이라고 하여 이 날에 예배드리기 시작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예루살렘의 성전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밝히신 유대교, 율법, 전통과의 결별이요, 예수님만을 통해서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방법 을 밝히신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날 모였다가 갈등이 심화되자 그리스도인들은 점 차 주의 날에만 모여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사라지고 주일이 되었습니다. 주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요, 한주간의 첫날이 되었습니다. "주일"은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만 기독교의 주일에 대한 기원은 안식일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정신도 계승되어 왔 습니다. 2세기 중엽부터 주일로 정착되었고, 17세기에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주일은 제4계 명의 안식일과 동일시했고, 유대인들처럼 매우 엄격하게 지켜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7일을 한 주일로 정한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7일간에 천지창조를 완 성하시고 휴식하셔서 일주일의 7일이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칠일을 일주일로 잡은 것은 그리스 로마시대입니다. 그 당시에 다섯 개의 별이름(화 수 목 금 토)과 해와 달의 이름을 따라서 칠일을 정하고 일주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1년을 50일 단위로 해서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50일은 한 주일을 일곱 번 되풀 이해서 7 7 = 49에 하루를 더한 것이고, 이 한달 50일을 일곱 번 되풀이하면 350일이 됩니다. 일년 365일에서 보름이 모자라는데 그 두 주일 동안 축제로 지키고 새해를 맞이하였 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달력의 가장 기본은 바로 이 한 주일 7일입니다. 음력이건, 양력이건 일주일 이 몇 번씩 되풀이되면서 달력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농경사회의 영향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독특하게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그 달력을 가지고 안식일을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중동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 '7'자를 나쁘게 생각하였습니다. 일곱째 날은 한 주일의 마지막이 되어 마지막 날은 악마가 다스린다고 하여 이 날은 어떤 일을 하게되던지 꼭 재가 끼게 되므로 아무 일도 하지 말자고 해서 노동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십계명이 생기기 전에는 중동의 문화는 제칠일을 액이 낀 불길한 날 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날이요, 하나님께서 그 날 쉬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도 함께 쉬는 것이라는 신학적 검토 위에 창조 신앙을 고 백했고, 복된 날로 받아들여 지키게 되었습니다. 중동 사람들처럼 끝날이 아니라 시작의 날이요, 죽는 날이 아니라 쉬는 날로, 악마의 날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 거룩한 날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안식을 취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쉰다고 했을 때면 노는 것으로, 산이나 강, 바다로 떠나는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통혼잡, 바가지 요금, 많은 인파 속에서 우리는 처참하게 쉬 어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온전한 휴식이 아니라 처절한 휴식을 하고 있습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이 말씀의 뜻이 오늘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본다면, 먼저 안식일의 참뜻은 자기 일에서의 해방으로 해석합니다. 성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집의 식구들, 일꾼들, 심지어 짐승까지, 또한 집에 들어있는 손님까지도 안식일에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왔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 일에 몰두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돈과 욕망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왠지 손해보는 것 같고, 경쟁에서 쳐지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명령은 공허하고 엉뚱한 소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이기에 순종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우리 각자의 문제이고 선택이자 의무와 책임이기고 합니다. 어느 노동자의 수기를 보니까 자기는 교회에 다니는 사장님과 부인들이 제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야근이나 특근을 주일에도 하루 종일 매달리는데 사장 부부가 주일날 아침에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테니 일만 열심히 하라고 했답니다.
성서의 제4계명은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집의 아들과 딸들, 여종과 남종, 그리고 집짐승까 지 이 날은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특히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 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쉬는, 그리고 쉬게 하는 사랑의 계명으로 받아들이고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자기 일에서 해방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욕심, 권세, 부, 능력을 채우고 축적하 고 늘리고 자랑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자기와 관계된 모든 것들과 함께 쉬고 기뻐하고 보람되는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시킨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의 날로 안식일 을 지켰습니다. 우리 역시, 여러분 일의 목적은 세상 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쉬면 서 스스로 위로하고 삶의 용기와 꿈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땀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휴식과 놀이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서 안식일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제7일에 쉬신 것을 보면서 그리고 이 계명을 통해서 노동 그 자체,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쉬면서 하나님과 기쁜 놀이를 하기 위하여 6일간을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여야 합니다. 주일이 기다려지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 다는 희망의 생활이 된다면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겠습니까 어떤 때는 우리가 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일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일에 매달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덮어놓고 바빠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바빠야만 인간 노릇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우리는 쉴 줄 알고 놀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일주일 동안에 제 육일은 쉬고 제 칠일은 축제의 날 로 하나님의 날로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서 5일만 근무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문제 중에서 바로 이번 계 명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일날 교회에 오고는 싶지만 직장에 나가야 하는 사람들, 또 장사하는 사람들이 영업하는 것, 주일 오후에 영화를 보거나 친구를 만나는 것, 피지 못할 사정으로 교회 출석 을 못하게 되는 경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 누가 강요할 사항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권면은 할 수 있어도 그것으로 그 사람을 신앙유무를 판단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 댔다고 생각합니다. 식당 하는 사람이 가게에서 술을 팔 때 목회자는 과연 그 분들을 위한 기도는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하겠습니 까 친구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당사자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풀어야 할 숙 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과 입장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일 날 출근하여 일을 하는 노 동자들을 위하여 더욱 기도하여야 하고, 그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 그들이 모든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회구조가 되도록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사회의 모순된 구조를 고쳐나가 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 손해보더라도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업계부터 주일 휴무를 지켜 야 할 것입니다. 계산상으로는 손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십니다. 제 큰 형님도 문구점 을 하는 데 주일날의 매상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와서 오후에 문구점을 열고 있습니다. 주일 날에 결혼식이 하필 12시에 있습니다. 예배를 참석하면 가질 못합니다. 이럴 때에는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늦게 방문하는 것이 좋겠고, 혹 참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 설픈 교인이 아니라 성실한 교인인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보다는 결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이해를 할 것입니다. 교회를 곶감 빼먹듯이 하다가 교회 가기 때문에 결혼식에 갈 수 없다 고 하면 반드시 욕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주일 오후에 다른 일들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지 맙시다. 그러나 집안에 애경사가 있을 경우에는 가급적 참석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시간을 비켜 나가는 것이 좋겠지만, 가족들끼리 남남이 되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날이 라고 해서 꼭 자기만 찾아서 인간적인 고뇌와 고통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둘째로 저는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손을 멈추시고 쉬셨다는 성서의 내용을 보면서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면서 쉬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쉬신 대로 우리도 쉬어 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산에 가셔서 쉬셨을까 바다에 가서 쉬셨을까 텔레비전을 보셨을까 야구장에 가셔서 어느 편을 응원하셨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휴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한일에 대해서, 자기가 만드신 것을 돌아보면서, 반 성하시고 그리고 친히 만드신 인간과 대화를 나누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쉬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라면 우리들도 내가 하는 일들 대해서 성찰 을 하고 그리고 대화를 하는 날이라고 생각됩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일을 하면서 잊어버리기 쉬운 자기자신을 되찾는 랄, 자신과 대화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웃과 대화를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함께 자연 안 에서 자연과 대화를 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기자신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던지 주일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놀이에서 무너지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논다면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셋째로 안식은 인간의 안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와 자연의 안식도 병행하여야 합니다. 창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향해 하나님과 인가니 함께 일을 하여 야 합니다. 새하늘과 새땅은 천지가 없어지거나 개벽되거나 이 땅과 우주를 인류문명으로 뒤덮는 것이 아니라 처음 창조하셨던 모습을 간직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우리들에 의해 서 다시 회복되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만 쉬는 것이 아니라 육축도 쉬고 산천초목이 쉬는 계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땅이 쉬지를 못하고 하늘이 쉬지를 못하면 우리는 그 땅과 하늘과 함께 죽 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서에는 칠년마다 경작하던 땅을 쉬게하는 안식년을 두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 산업사회를 살펴봅시다. 자연을 쉬게 하지 못할 망정, 오히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며, 하나님 의 계획을 부수는 것이 됩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는 일을 끝내고 자연에 안식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연과 인간은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 각자가 개인부터 하나뿐인 자연을 파괴하는 일들을 자제하도록 합시다. 일과 휴식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과 기쁨은 없게 됩니다. 바로 안식일에 쉬는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창조하신 그 일들 속에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찾는 동시에 또한 일곱째 날에 쉬신 그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인간의 모습 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쉬고 놀이하며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인간의 근원인 하나님을 기억하는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인 주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안식일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의 근원이 되었으며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특히 신약 시대에서는 주의 날로 다시 제정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오는 안 식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그 정신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이기신 주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과 사람을 사랑하신 그 모 습, 초대교회 이후 신앙인들이 지켰던 주일의 의미를 오늘 우리가 되새겨서 참된 주일을 지키는 복된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주일성수를 절대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울러 많은 성도들은 주일 예배를 빠지게 되면 어떤 큰일이 나거나 왠지 불행한 일이 일 어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 빠지면 목사님의 전화를 받아야 하고, 큰 교회에서는 구역경쟁에서 자기가 예배를 빠지게 되면 구역의 성적이 떨어질 것 같고, 작 은 교회에서는 몇 명 안 되는 교인가운데 자기가 빠져버리면 교회가 썰렁할 것 같아 마지못 해 참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에는 아무 것도 하질 말아야 합니다. 유대교의 습관이 들어와 율법적인 생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물건도 살 수 없고,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도 참아야 하고, 다방 에 가서 커피 마시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아 침에 예배드리고 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조금 쉬다가 주일 저녁 예배를 참석해야 모범된 주일 하루를 보낸 것이 됩니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교회에 있기도 합니다. 교회 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휴식하며 예배드리는 유대인들의 하루 일과입니다.
천지 창조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제7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결론으로 매듭지어 집니다. 이 날에 하나님께서 차조 사역을 끝내시고 안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도 따라서 안식했겠지만 임무는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 었습니다. 여기에 안식일의 근원이 담겨있습니다. 십계명으로 안식일 준수가 성문화된 것은 시내 산 에서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창조의 완성에서 안식일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일곱째 날은 창조의 완성에서 오는 새날이었습니다. 이 미 여섯째 날에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일을 다한 다음 일곱 째 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날에 창조하신 피조물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휴식과 여가 생활에 하나님도 함께 계실 수 없는 곳이라면 그것은 참된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이렇게 6일간과 7일의 분리는 하나님의 일이 끝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7일깨는 하나님의 힘이 인간에게 주어지며 온 세계는 축복에 잠겼습니다. 축복이 없는 생활은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6일간과 7일은 분리하셨듯이 우리는 세속적인 관계와 단절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이, 주일을 철저히 지켜야만 합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세상에 잠 겨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6일간도 결코 더러운 날이 아닙니다.
세속의 날이 6일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날들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좋게 살 아야 합니다. 이 좋은 것의 확인이 바로 일곱째날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완성의 선언이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특히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안식일의 참뜻을 하나님의 휴식, 인간의 휴식, 자연 의 휴식입니다. '바른 휴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서 그 성수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성서에서 안식일에 대해서는 출애굽기에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안식일은 이스라 엘의 영원한 규레가 되었습니다. 그 준수방법은 이사야 58장 13-14절에 잘나와 있습니다. 안식일을 존귀히 여기고 자기l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오락을 하지 말며, 사사로운 말을 하 지 말라고 간단하게 나옵니다. 이것은 어떤 금기사항들은 아닌 것 같은데 엄청난 금기 사항 이 생겨나 안식일의 안짜만 나와도 겁이 납니다. 이스라엘은 멸망당할 때에도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며 율법을 공부하는 날로 발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안식일 문제로 많은 갈등과 대립을 하였는데 지도자들 은 안식일을 무조건 지키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의 유익 을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보고 인간사랑을 안식일 보다 먼저 가르치고 우위에 두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역시 안식일의 회당 예배에 참석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이면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녘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입니다.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 부터는 모든 공공업무, 교통, 상업이 중단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완전히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루 대부분을 회당에 나가 토라를 읽고 예배를 드립니다. 집에 있으면 불을 켜지도 않고 끄지도 않고 전화를 받거나 하지도 않고 텔레비져늘 보 질 않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멀어도 걸어서 갑니다. 설거지도 하질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쉬고 노비, 짐승까지 쉬게 하면서 세속적인 일은 하질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안식일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거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생활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스 라엘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우리의 생활 형편은 주일날이라도 모든 상 황은 우리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인도에 산다면 제 대로 안식일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 그 마음가짐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이라 하질 않고 주일이라고 합니다. 성서에는 주일에 대하여 나 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날은 주일일까요 안식일일까요 주일이라고 한다면 안식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부터는, 일주일 중 첫 번째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이라고 하여 이 날에 예배드리기 시작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예루살렘의 성전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밝히신 유대교, 율법, 전통과의 결별이요, 예수님만을 통해서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방법 을 밝히신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날 모였다가 갈등이 심화되자 그리스도인들은 점 차 주의 날에만 모여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사라지고 주일이 되었습니다. 주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요, 한주간의 첫날이 되었습니다. "주일"은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만 기독교의 주일에 대한 기원은 안식일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정신도 계승되어 왔 습니다. 2세기 중엽부터 주일로 정착되었고, 17세기에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주일은 제4계 명의 안식일과 동일시했고, 유대인들처럼 매우 엄격하게 지켜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7일을 한 주일로 정한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7일간에 천지창조를 완 성하시고 휴식하셔서 일주일의 7일이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칠일을 일주일로 잡은 것은 그리스 로마시대입니다. 그 당시에 다섯 개의 별이름(화 수 목 금 토)과 해와 달의 이름을 따라서 칠일을 정하고 일주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1년을 50일 단위로 해서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50일은 한 주일을 일곱 번 되풀 이해서 7 7 = 49에 하루를 더한 것이고, 이 한달 50일을 일곱 번 되풀이하면 350일이 됩니다. 일년 365일에서 보름이 모자라는데 그 두 주일 동안 축제로 지키고 새해를 맞이하였 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달력의 가장 기본은 바로 이 한 주일 7일입니다. 음력이건, 양력이건 일주일 이 몇 번씩 되풀이되면서 달력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농경사회의 영향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독특하게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그 달력을 가지고 안식일을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중동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 '7'자를 나쁘게 생각하였습니다. 일곱째 날은 한 주일의 마지막이 되어 마지막 날은 악마가 다스린다고 하여 이 날은 어떤 일을 하게되던지 꼭 재가 끼게 되므로 아무 일도 하지 말자고 해서 노동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십계명이 생기기 전에는 중동의 문화는 제칠일을 액이 낀 불길한 날 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날이요, 하나님께서 그 날 쉬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도 함께 쉬는 것이라는 신학적 검토 위에 창조 신앙을 고 백했고, 복된 날로 받아들여 지키게 되었습니다. 중동 사람들처럼 끝날이 아니라 시작의 날이요, 죽는 날이 아니라 쉬는 날로, 악마의 날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 거룩한 날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안식을 취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쉰다고 했을 때면 노는 것으로, 산이나 강, 바다로 떠나는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통혼잡, 바가지 요금, 많은 인파 속에서 우리는 처참하게 쉬 어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온전한 휴식이 아니라 처절한 휴식을 하고 있습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이 말씀의 뜻이 오늘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본다면, 먼저 안식일의 참뜻은 자기 일에서의 해방으로 해석합니다. 성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집의 식구들, 일꾼들, 심지어 짐승까지, 또한 집에 들어있는 손님까지도 안식일에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왔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 일에 몰두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돈과 욕망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왠지 손해보는 것 같고, 경쟁에서 쳐지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명령은 공허하고 엉뚱한 소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이기에 순종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우리 각자의 문제이고 선택이자 의무와 책임이기고 합니다. 어느 노동자의 수기를 보니까 자기는 교회에 다니는 사장님과 부인들이 제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야근이나 특근을 주일에도 하루 종일 매달리는데 사장 부부가 주일날 아침에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테니 일만 열심히 하라고 했답니다.
성서의 제4계명은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집의 아들과 딸들, 여종과 남종, 그리고 집짐승까 지 이 날은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특히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 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쉬는, 그리고 쉬게 하는 사랑의 계명으로 받아들이고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자기 일에서 해방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욕심, 권세, 부, 능력을 채우고 축적하 고 늘리고 자랑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자기와 관계된 모든 것들과 함께 쉬고 기뻐하고 보람되는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시킨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의 날로 안식일 을 지켰습니다. 우리 역시, 여러분 일의 목적은 세상 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쉬면 서 스스로 위로하고 삶의 용기와 꿈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땀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휴식과 놀이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서 안식일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제7일에 쉬신 것을 보면서 그리고 이 계명을 통해서 노동 그 자체,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쉬면서 하나님과 기쁜 놀이를 하기 위하여 6일간을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여야 합니다. 주일이 기다려지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 다는 희망의 생활이 된다면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겠습니까 어떤 때는 우리가 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일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일에 매달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덮어놓고 바빠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바빠야만 인간 노릇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우리는 쉴 줄 알고 놀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일주일 동안에 제 육일은 쉬고 제 칠일은 축제의 날 로 하나님의 날로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서 5일만 근무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문제 중에서 바로 이번 계 명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일날 교회에 오고는 싶지만 직장에 나가야 하는 사람들, 또 장사하는 사람들이 영업하는 것, 주일 오후에 영화를 보거나 친구를 만나는 것, 피지 못할 사정으로 교회 출석 을 못하게 되는 경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 누가 강요할 사항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권면은 할 수 있어도 그것으로 그 사람을 신앙유무를 판단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 댔다고 생각합니다. 식당 하는 사람이 가게에서 술을 팔 때 목회자는 과연 그 분들을 위한 기도는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하겠습니 까 친구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당사자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풀어야 할 숙 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과 입장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일 날 출근하여 일을 하는 노 동자들을 위하여 더욱 기도하여야 하고, 그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 그들이 모든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회구조가 되도록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사회의 모순된 구조를 고쳐나가 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 손해보더라도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업계부터 주일 휴무를 지켜 야 할 것입니다. 계산상으로는 손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십니다. 제 큰 형님도 문구점 을 하는 데 주일날의 매상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와서 오후에 문구점을 열고 있습니다. 주일 날에 결혼식이 하필 12시에 있습니다. 예배를 참석하면 가질 못합니다. 이럴 때에는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늦게 방문하는 것이 좋겠고, 혹 참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 설픈 교인이 아니라 성실한 교인인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보다는 결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이해를 할 것입니다. 교회를 곶감 빼먹듯이 하다가 교회 가기 때문에 결혼식에 갈 수 없다 고 하면 반드시 욕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주일 오후에 다른 일들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지 맙시다. 그러나 집안에 애경사가 있을 경우에는 가급적 참석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시간을 비켜 나가는 것이 좋겠지만, 가족들끼리 남남이 되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날이 라고 해서 꼭 자기만 찾아서 인간적인 고뇌와 고통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둘째로 저는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손을 멈추시고 쉬셨다는 성서의 내용을 보면서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면서 쉬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쉬신 대로 우리도 쉬어 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산에 가셔서 쉬셨을까 바다에 가서 쉬셨을까 텔레비전을 보셨을까 야구장에 가셔서 어느 편을 응원하셨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휴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한일에 대해서, 자기가 만드신 것을 돌아보면서, 반 성하시고 그리고 친히 만드신 인간과 대화를 나누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쉬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라면 우리들도 내가 하는 일들 대해서 성찰 을 하고 그리고 대화를 하는 날이라고 생각됩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일을 하면서 잊어버리기 쉬운 자기자신을 되찾는 랄, 자신과 대화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웃과 대화를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함께 자연 안 에서 자연과 대화를 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기자신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던지 주일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놀이에서 무너지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논다면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셋째로 안식은 인간의 안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와 자연의 안식도 병행하여야 합니다. 창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향해 하나님과 인가니 함께 일을 하여 야 합니다. 새하늘과 새땅은 천지가 없어지거나 개벽되거나 이 땅과 우주를 인류문명으로 뒤덮는 것이 아니라 처음 창조하셨던 모습을 간직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우리들에 의해 서 다시 회복되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만 쉬는 것이 아니라 육축도 쉬고 산천초목이 쉬는 계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땅이 쉬지를 못하고 하늘이 쉬지를 못하면 우리는 그 땅과 하늘과 함께 죽 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서에는 칠년마다 경작하던 땅을 쉬게하는 안식년을 두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 산업사회를 살펴봅시다. 자연을 쉬게 하지 못할 망정, 오히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며, 하나님 의 계획을 부수는 것이 됩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는 일을 끝내고 자연에 안식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연과 인간은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 각자가 개인부터 하나뿐인 자연을 파괴하는 일들을 자제하도록 합시다. 일과 휴식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과 기쁨은 없게 됩니다. 바로 안식일에 쉬는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창조하신 그 일들 속에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찾는 동시에 또한 일곱째 날에 쉬신 그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인간의 모습 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쉬고 놀이하며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인간의 근원인 하나님을 기억하는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인 주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안식일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의 근원이 되었으며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특히 신약 시대에서는 주의 날로 다시 제정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오는 안 식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그 정신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이기신 주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과 사람을 사랑하신 그 모 습, 초대교회 이후 신앙인들이 지켰던 주일의 의미를 오늘 우리가 되새겨서 참된 주일을 지키는 복된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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