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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의 첫 손길 (출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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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생활을 올바로 하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특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 기 전,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여러 사람과 환경을 통 해 무엇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런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십니다.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고 연단하시는 모 습입니다.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로 나온 이 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하여 훈련시키시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은 현재의 수에즈 운하 근처의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넌 후 시내 반도에 도착했습니다.마침 그곳은 오아시스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샘물을 마시며 구원의 감격과 희망의 노래로 축제의 날들을 보냈습니다(15:1-21 참조).
마음과 육신의 휴식을 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반도 남쪽으로 행진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3일 동안 물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22절).그러나 이들은 며칠 전 누렸던 구원의 감격을 간직한 채 희망을 잃지 않고 행진해 나갔습니다.드디어 쉴 만한 장소에서 물을 발견했습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물은 먹을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구원의 노래와 감격 속에 만난 환경 은 엄청난 실망을 안겨 주는 것이었습니다.그토록 마시고 싶던 물을 찾았 지만 그 물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이들이 실망과 낙심에 빠진 것은 당연 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이들의 원망하는 자세였습니다.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있던,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속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 원망의 자세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의 신앙 행진을 통해 연단하셨습니다.그러나 그 뒤로 계속되는 이 원망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이들이 약속 의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으며,하루에 수만 명이 죽는 벌을 받 기도 하였습니다.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여행 초반에 저들에게 연단 의 과정을 주셨지만,안타깝게도 저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그리스도인 에게 내재하는 옛 사람의 속성 중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역시 원 망입니다.이 원망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요 롭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인의 믿음 생활 초기 단계에 연단의 과정을 허락하십니다.그리고 그 연단 의 과정 속에서 옛 사람의 속성인 원망이 뿌리째 뽑히기를 원하십니다.그 러면 원망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셨습니까 원망이 무엇이 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연단의 환경을 허락하셨습니까 원 망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의 벌까지 내리셨습 니까 원망이 무엇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연단의 과정을 허락하십니까 원망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자신이 죽지 않은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이 바로 자아(ego)가 살아 있는 자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 입니다.그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약속된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잘난 척하고 으스대고 남이 조금 인정해 주면 우쭐하고 남한테 잘 보이고자 하 며 남을 의식하는 사람은,저급한 수준의 자아가 살아 있는 자입니다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수준은 쉽게 벗어납니다.그러면 이런 모습 들이 없는 사람은 자아가 죽고 하나님이 중심에 계신 사람입니까 아닙니다.이보다 더 고차원적으로 자아를 간직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겉으 로는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특별한 환경을 만났을 때,원망하는 자세를 취하여 그 깊숙한 곳에 자아가 살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왜 원망이 자아 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까 바로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 강한 소유욕에서 오는 원망 2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쓴 물이 나오는 마라에 도달했을 때,그 실망 스러운 환경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를 설명합니다.마라에 이르렀더 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 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이스라 엘 백성들이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도달한 곳에서 먹을 수 없는 물이 나오자 이스라엘 군중은 즉시 지도자 모세에게 원망의 반응을 보입니다.무엇 때문에 이들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까 목이 마르고 자신 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닙니까 물론이지요.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 전 홍해를 건넌 후 시내 반도의 오아시스에서 넉넉히 물을 마셨고,또 물을 준비하여 길을 떠 나왔습니다.사흘 길을 시내 반도 남쪽으로 행진하는 동안 오아시스도 없 고 우물도 없었습니다.이들은 애굽을 떠나올 때 소와 염소,양 등의 가축 을 끌고 나왔으며 금은 보화들도 싣고 떠나왔습니다.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12:35).3일 동안 물 없는 광야를 걷는 중에 가축들이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갖가지 소지품들,무거운 금은 보화들을 계속 가지고 갈 수 없는 지 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물이 없으므로 목도 말랐지만 그보다도 지쳐서 자신들의 소유물들을 광야에 버리고 가야 하게 되었습니다.
마시지 못하는 쓴 물 앞에 선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그 이유는 목마름도 있지만 3일 동안의 과거를 돌아볼 때 잃어버린 소유물들,쓰러진 가축,무거워서 버린 것들 때문에 마음이 온통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출애 굽기에는 이스라엘 군중들이 물이 없어서 원망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오는 데,목마른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일 때는 꼭 죽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 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17:3). 그러나 마라의 쓴 물에 대한 원망은 목마름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으므 로 죽겠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주된 동기는 잃어버린 것들,곧 소유물들 때문이었습니다.물이 없어서 가지고 왔던 가축들과 금은 보화들을 잃게 되자 원망이 터져나왔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때때로 인간 관계에서,혹은 삶의 문제 속에서 원망을 쉽게 하는 것은 강한 소유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사람들 의 삶의 태도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입니다.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 서 수없이 원망스런 일들을 경험합니다.부부간,부모 자식간,친구간,주 인과 일꾼간에는 끊임없이 원망이 존재합니다.이 원망은 철저한 자기 소유욕이 상처를 받을 때 생깁니다.자기 계획이 어긋날 때,목표가 깨 어질 때,물질을 잃어 버릴 때,지위를 놓칠 때,체면을 잃을 때,시간을 낭비할 때,성공하지 못할 때,명예가 실추될 때,평판이 나빠질 때,자신 이 소유하고 싶은 것들을 얻지 못할 때,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다소 차이는 있지만,철저히 자기 소유욕을 만족시 키기 위해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그 소유욕이 만족되지 않을 때 원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을 원망할 때,남편이 아내를 원망할 때,혹은 자식이 부모를 원망할 때,그 마음에 흐르고 있는 의식을 자세히 살펴보면,무엇인가 잃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모든 일이 계획대로 안 될 때,하는 일이 생각대로 안 될 때,목표의 성취가 암담할 때 원망하는 이유는,사실 자신의 꿈과 계획과 생각들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 지 않기 때문입니다.그 근본 동기는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강한 소유욕 ,바로 그 소유욕이 채워지지 않는 데 있습니다.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깊 이 뿌리 박힌 자기 소유욕이 원망의 근본 요소입니다.이 소유욕이 제거되 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자기 중심적 신앙인이 됩니다.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생각하기보다,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와 예 배로 시간과 정성을 드렸고 십일조에 감사 헌금까지 바쳤는데 무엇이 내게 돌아왔나를 따집니다.가만히 생각하니 잃은 것밖에 없어 보입니다.결국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것을 기쁨으로 잃어버리고자 하는,하나님 중심의 신앙인이 되지 못합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할 때 자신의 힘 으로 금은 보화와 의복을 갖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더욱이 하나님 께서 홍해를 갈라 주시는 능력을 베풀지 않으셨다면,갖고 있던 것들은 다 시 애굽인의 소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순간 모든 소유물은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자신들은 단지 심부름꾼임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잃어버린 물건 만을 기억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소유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는 구속(救贖)의 은혜로 구원하시는 순간,우리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 이후에 주어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장 26,30절은 그리스도로 인해 자신의 물질 과 건강까지 다 잃었지만 조금도 원망의 자세를 보이지 않으며 소유욕을 없앤 위대한 신앙인인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그가 너희 무 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 지라…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 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그리스도인에게는 생명,물질,시간,명예,성공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내 것을 잃을 때 그것을 아까워할 것이 아니라,왜 주신 분이 거두어 가시는가 하고 그 속에 담긴 뜻을 찾고자 하는 겸손함을 지녀야 합니다.비록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의 것들을 필요로 하고 또 얻는다 할지라 도,그것은 자신의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 롭게 태어난 존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하나 의 수단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편에서 든지 원망하는 자세가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곧,환경에 순복할 줄 아는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왜 거두어 가실까를 생각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당신도 세상을 살다 보면 저절로 원망을 하게 되는 환경을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그때는 즉시 당신의 의식 구조를 살펴보십시오.아직 당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그 자아 중심적 사고 방식을 개선하십시오. 어려운 환경은 당신을 성숙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임을 기억하십시오.그리고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십시오. 당신으로 하여금 원망하게 만드는 일을 통해,당신에게 하나님 앞에서 새 로워져야 할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그 환경을 통하여 정금같이 빛나는 정련(精鍊)된 인격체가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음에서 오는 원망 =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른 후 사흘 동 안 광야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 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2
2,23절).그러나 이스라엘 군중들은 사흘 동안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 도 하지 않았습니다.이들이 원망의 목청을 높인 곳은 사흘 만에 당도한 마라라는 지역이었습니다.왜 사흘 동안 원망이 없었습니까 물이 넉 넉해서요 아닙니다.수많은 사람들과 가축을 위하여 한꺼번에 사흘치 물 을 갖고 여행하기는 힘든 일입니다.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막 체험한 기적의 사건으로 감격해 있었습니다.그 감격에 찬 마음으로 앞 을 바라볼 때,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그 믿음으로 인하여 별로 많은 물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이 들이 원망치 않고 사흘 길을 꾸준히 걸은 것은 그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기적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좋은 물이 나오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사흘 만에 당도한 마라에서 나오는 물은 기대에 어긋난 쓴 물이었습니다.그러자 드디어 원망의 함성 이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이들의 원망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 다는 생각 때문입니다.사흘을 참고 여기까지 왔는데 쓴 물뿐이니 더 가 면 무엇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이들의 원망 속에는 모세여,우리는 더 이상 가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왜 못 가겠다는 것입니까 기대했던 것,바로 사흘 동안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고 더 이상 자신들의 목표가 달성되지 않을 것 같기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동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행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즉,자신들의 목마름을 축여 주는 물이었습니다.물론 이들 이 지녔던 궁극적인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었습니다.그러나 하루하루를 행 진해 가는 동안 온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물이었습니다.모든 백성들 이 기대하고 바라던 여행 목적이 물의 발견이었습니다.곧,육신의 갈급함 을 채우는 것,육신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동안 행진한 목적이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나아가게 하신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을 목적으로 삼고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아무리 힘들더라도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것만을 추구했어야 옳았습니다.물의 발견에 목적을 둔 것은 잘못된 태도였습니다.이스라엘 백성 들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마실 물이 없자 즉시 원망의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계획 하신 목적(가나안 입성)을 항상 마음에 되새기며 행진을 했어야 했는데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물)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자신들의 목적을 포기하지 아니하면,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원망이 쏟아지는 것 입니다.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에 형성되었던 삶의 목적을 정립해야 합니다.만일 변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해 나가면, 쉽게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이 이 루어지고 있느냐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합니다.이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삶의 목적에 자신을 맞추기 위하여 애쓰기보다는,자신이 세워 놓은 삶의 목적에 하나님을 맞추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원망이 자아가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오늘날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반드시 지녀야 할 삶의 목적은 저 하늘나라의 하나님 보좌 앞에 담대히 서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시하신 인생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당 당히 들어가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담대히 서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은 그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여 신령한 길을 가고 있는 믿음의 순례자들입니다.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에,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흘간의 여행 목표가 물이었던 것처럼,육신의 것들을 만족시키는 세상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돈,성공,안정,부귀 영화,학 위 취득,출세가 목표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에 세운 삶의 목표는 결국 세상에 두고 갈 것들입니다.이 목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자기 기질,성격,교육,환경에 따라 임의대로 결정한 것입니다.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세운 인생의 목적을 신앙 생활에도 그대로 연결시키는 그리스도인을 볼 수 있습니다.기도와 예배와 말씀 생활에 힘 을 쏟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중단합니다.자기 목적을 이루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느껴 그만두는 것입니다.마치 이스라엘 군중들이 물을 얻어야 겠다는 목적으로 마라에 이르렀으나 목적 달성이 안 되자 모세를 원망하며 낙심과 회의에 빠졌듯이,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육신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기도와 예배와 말씀 묵상을 게을리합니다.하나님께 헌신하겠다던 결심을 포기합니다.그리고 영적 갈등자,회의 자,낙심자로서 신앙의 길에서 도중 하차합니다.왜 기도합니까 왜 말씀 대로 삽니까 왜 열심히 예배드립니까 우리의 세상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이는 그리스도인의 삶 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에 담대히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야 하고 기도하며 말씀대 로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세상에서 우리가 성취하고 소유하는 모든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께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은 주 하나님의 나라,그분의 심판대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 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主)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主)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 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소유의 목표,성취의 목표는 심판 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목적,존재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서는 것입니다.이러한 목적을 갖지 않은 이들은 신앙 생활이 자기 목적을 이루는 데 큰 효과와 도움이 없고 유익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열심과 헌신의 다짐을 잃어버립니다.예배에 참석하 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어떤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됩니까 너무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이지 않습니까라고 염려합니다.이것은 어리석은 소리입니다.하나님의 보 좌를 의식하는 자는 하루를 살더라도 철저히 바르게 살고자 합니다.철저 한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왜 모든 부귀와 성공과 풍요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그 모든 것을 주지 않으십니까 아직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삶의 목적을 잘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천국에 대한 목적 그리고 그 천국에 마 련된 심판대 앞에 서야 된다는 분명한 삶의 목적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 신앙 생활을 게을리하는 이들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맞춘 인생의 목표로 인해 원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께 그 무엇을 간구하기 전에,먼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어떤 것인지 를 확인하여 보십시오.당신도 어려운 환경을 만나면 원망부터 할 때가 있 었습니까 자신이 바라보고 추구하는 목적이 어디에 기초한 것인지 확인 해 보십시오.그 목적을 성취한다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당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당신 속에 있는,하나님께서 싫 어하시는 요소들을 없애고자 하는 그분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닌 지 생각해 보십시오.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까 바로 그 상황이 하나님의 시험대라 생각하고,당신이 하나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고 기뻐하 십시오.당신의 세상적인 소원과 꿈이 무너지는 데서 낙담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의 목적을 다시한번 점검해 보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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