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광야행진 (출15:22-25)
본문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일로 인하여 감격하고 찬양하였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앞서 싸우며 나아가시는 하나님, 바닷물까지 갈라서 마른 땅을 만들어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을 온 백성은 찬양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홍해를 건넌 후 본격적인 광야의 순례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홍해를 건넌 후 사흘 길쯤 지났을 때, 그들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마라라는 지역에 이르러서야 물을 찾았는데 그것은 마실 수 없는 쓴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실망하고 괴로워서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나무를 지목받아 그 나무로 해서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광야길 경험은 오고 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친히 인도하는 코스를 그의 백성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광야길로 인도하신 목적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2)"
첫째는 그 백성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패된 존재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인간이 겸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가시면서 그들에게 길을 제시하시고 그들의 필요를 때에 따라 공급해 주셨는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뒤로하고 3일 길쯤 광야로 깊숙이 들어옴으로 해서 그들은 새로운 신분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옛 애굽의 노예의 신분이 아니라는 자각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의 노예였던 신분이 아님을 인식했습니다. 이제 모세에게 속하여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자라는 의식이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 자율 의식이 생겨지는 순간, 이들에게 찾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마실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입에 단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전개되는 것은 황량한 광야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한 첫 과목이 무엇입니까 목마름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순간, 지난날에 즐겨 마셨던 것들을 이제는 입에 넣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지난 날에 나를 매혹시켰던 것들이 이제 그 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난날에 그토록 나를 끌었던 것들이 이제는 생명없는 죽음의 그림자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는 지난날 즐겨 마셨던 세상의 물은 써서 입에 댈 수도 마실 수도 없게 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영구적으로 살 장소가 못됩니다. 광야는 여행자의 길입니다. 다른 나라를 가기 위해서 잠시 통과해 가는 길목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르는 이 세상은 시간의 세상에서 영원의 세상으로 가는 여행 코스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거기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놓지 말고, 가야 할 본향을 생각하면서 이 광야의 의미를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광야길에서 만난 사건 사건들을 피하지 말고 그 사건을 통해서 역사의 주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살피면서 응답하고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구원의 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면서 즐거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본향이 없는 자는 이 세상에다 영구한 장막을 치려고 합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불신자를 묘사하기를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시 49:11)" 라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없는 자는 이 세상에다 집을 짓고 대대로 영원히 살고자 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시 49:12)" 그러나 주를 믿는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이곳이 그의 본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지으신 도성을 바라봅니다. 성도는 이곳 광야의 세상을 나그네의 길이므로 행인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고달픈 길이요 쉼이 없는 길이요 피곤한 길입니다. 오직 우리의 안식처는 이곳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그 안식처를 향해서 가는 길목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엇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목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목마른 성도의 심령에 다른 것으로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만 목이 시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성도의 만족의 근원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끝없는 고독에 안식이 되시고, 끝없는 목마름에 시원한 음료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7:37-38)" 광야길에서 목마른 인생들아,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그대의 심령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의 광야길은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길임을 잊지 맙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달프고 목이 타는 여행길에서 물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습니다. 찾았다고 찾았는데 마시려고 하니 마실 수가 없는 물,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도들이여, 이것은 성도가 광야길에서 치르는 시험입니다. 이때에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토록 찾고 찾았던 그것, 이제 마음을 놓고 시원함을 마음껏 누리리라고 생각했는데 시원치를 않는 것, 목이 타서 마시려고 하는데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경험하는 시험입니다. 마음을 놓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풀려고 하는데 뜻밖에 쓴 맛, 쓰디쓴 실망의 잔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 내 안식의 자리다, 여기에다 내 인생을 투자하자' 라고 마음을 풀려는데 뜻밖의 쓰디쓴 물로 인하여 실망하신 적이 없습니까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치르는 test입니다. 그 시험에 합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마라 코스'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마라 코스에서 실격하고 말았습니다. 마라의 쓴물 때문에 중심을 잃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마라의 쓴물만큼이나 실망의 쓰디쓴 좌절에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여행에 가담했던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던가 …' 하면서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책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앞에서 인도하는 모세가 저주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라의 쓴물! 이것은 입에만 쓴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쓰고 정신에도 쓰고 영혼에도 써서, 그들은 지금 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갈수록 기쁨이 넘칠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저주요 이 무슨 재앙인가!' 그래서 이스라엘은 원망했습니다. 마라 코스에서 실격한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이것은 오늘 여러분의 탄식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광야행진이 지금 마라에 이르신 분은 없습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못 올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와야 할 코스에 오신 것입니다. 출애굽 백성 이스라엘이 통과한 길은 새 이스라엘이 된 여러분도 통과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의 테스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코스에서 낙제하지 않도록 합시다. 대개의 성도들이 이 코스에서 실격을 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경험을 봅시다.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리니 … (출 14:24)" 백성이 마실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한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3일 전에 구원의 하나님을 감격으로 찬양했던 이스라엘입니다.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 14:31)" 3일 전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던 이스라엘이 이제 못 믿겠다고 원망하며 함성을 지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홍해 바다, 죽음의 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바다가 되었던 그 바다 그 물결을 바라보면서 원망, 불평, 저주의 함성을 터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그들의 신앙과 인격이 폭로되었습니다. 그렇게 감격했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쉽게 마음이 변하여 버릴 수 있습니까 홍해 앞에서 애굽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아우성치던 이들이 마라의 물 때문에 지금 다시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의 들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의 지혜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은폐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있는 그대로 발가벗겨져 버리는 곳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성도의 시험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뜻밖의 사건을 접하고서 하나님의 지혜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내 자신에게 있는 중대한 결함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순간들,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중대한 실수를 해 버렸을 것을 생각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무지해서 모르기 때문에 사건과 환경을 만들어 우리의 결합과 약점을 보게 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그저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왜 이스라엘이 마라에서 하나님 앞에 실수를 했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봅시다. 현실적인 원인은 마실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더운 사막길을 3일이나 걸어왔는데 마실 물을 찾지 못했다면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원망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고 동정이 되어집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압도당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주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 앞에서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해 주시는데도 (출 13:22), 그 하나님의 동행, 그 하나님의 임재,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대하는 믿음이 이들에겐 없었던 것입니다.
홍해에서 구원해 주셨던 그 하나님을 마라에서도 기대하면서 구원을 요청했어야 했는데 이들은 그러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볼 눈이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하나님의 종 모세만 보고 모세에게 원망했던 것입니다. 모세인들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를 원망하던 이스라엘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주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그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모든 사건, 모든 때에 항상 나와 함께 해 주신다, 항상 나를 도와주신다'는 신앙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놓쳐 버리면 전개되는 상황에 밀려 침몰합니다. '너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너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떼는 순간 마음에 의심의 구름이 드리워지고 진리의 빛이 차단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진리의 빛이 차단되고 의심의 구름이 덮이면 인격을 받쳐 주는 인격의 통제력이 풀리게 되고, 그래서 할 수 없는 말, 할 수 없는 행동을 마구 해 버리게 되고 맙니다. 성도들이여! 이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자가 아닙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1)"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주도되고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순간 순간 사건 사건마다 그 분의 의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거기에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문제 해결을 봅시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 (출 15:25)" 부르짖어야 할 백성들을 대신해서 모세가 부르짖었습니다. 어려움이 올 때는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도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홍해의 위기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모세는 이제 또 다시 마라의 쓴물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입니다.
성도여! 이제 기도합니다. 부르짖다가 쓰러질 때까지 부르짖읍시다. 필사적으로 부르짖읍시다. 부르짖다 응답이 없다고 일어서지 말고 응답이 없는 줄로 믿어 버리지 말고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부르짖읍시다. "저희가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여 거할 성을 찾지 못하여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시 107:4-7)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 중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은 끊으셨도다 (시 107:12-13)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막의 문에 가깝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시 107:18-19)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제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시 107:27-29)" 교우들이여 부르짖읍시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고 위경에서 건져 주시고 광풍을 평정케 하시고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해결을 봅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그 나무는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곳에 있던 나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나무가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나무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광야길 가는 우리 인생은 어둡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보여 주셔야만 볼 수 있습니다(창 21:19, 왕하 6:17). 우리의 귀와 눈을 만드신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면서 내 귀로 주의 기이한 말씀을 듣게 하시고 내 눈으로 주의 진리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잠 20:12). 모세에게 지시한 그 한 나무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상징성을 가진 진리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시 1:3, 아가 2:3).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나오는 말씀에 대해서 열려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의 써서 먹을 수 없는 물을 단물로 바꾸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 드립시다. "우리를 어둠의 세력에서 건져 주신 구원의 주 하나님! 우리를 친히 새 삶의 길로 인도하시는 우리의 주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현실보다도 더 우대하신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우리 주 하나님! 우리의 삶의 행진이 어디에 와 있든지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든지 우리로 하여금 먼저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뜻을 알게 하소서. 주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인하여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들의 구원의 주 하나님! 마라 코스에서 실격하지 않게 하소서. 마라에서 오히려 주님의 지혜를 배우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에 대하여 할 말을 갖게 하소서. 그 위대하심, 그 선하심, 그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홍해를 건넌 후 사흘 길쯤 지났을 때, 그들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마라라는 지역에 이르러서야 물을 찾았는데 그것은 마실 수 없는 쓴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실망하고 괴로워서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나무를 지목받아 그 나무로 해서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광야길 경험은 오고 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친히 인도하는 코스를 그의 백성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광야길로 인도하신 목적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2)"
첫째는 그 백성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패된 존재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인간이 겸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가시면서 그들에게 길을 제시하시고 그들의 필요를 때에 따라 공급해 주셨는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뒤로하고 3일 길쯤 광야로 깊숙이 들어옴으로 해서 그들은 새로운 신분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옛 애굽의 노예의 신분이 아니라는 자각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의 노예였던 신분이 아님을 인식했습니다. 이제 모세에게 속하여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자라는 의식이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 자율 의식이 생겨지는 순간, 이들에게 찾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마실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입에 단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전개되는 것은 황량한 광야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한 첫 과목이 무엇입니까 목마름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순간, 지난날에 즐겨 마셨던 것들을 이제는 입에 넣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지난 날에 나를 매혹시켰던 것들이 이제 그 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난날에 그토록 나를 끌었던 것들이 이제는 생명없는 죽음의 그림자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는 지난날 즐겨 마셨던 세상의 물은 써서 입에 댈 수도 마실 수도 없게 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영구적으로 살 장소가 못됩니다. 광야는 여행자의 길입니다. 다른 나라를 가기 위해서 잠시 통과해 가는 길목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르는 이 세상은 시간의 세상에서 영원의 세상으로 가는 여행 코스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거기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놓지 말고, 가야 할 본향을 생각하면서 이 광야의 의미를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광야길에서 만난 사건 사건들을 피하지 말고 그 사건을 통해서 역사의 주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살피면서 응답하고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구원의 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면서 즐거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본향이 없는 자는 이 세상에다 영구한 장막을 치려고 합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불신자를 묘사하기를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시 49:11)" 라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없는 자는 이 세상에다 집을 짓고 대대로 영원히 살고자 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시 49:12)" 그러나 주를 믿는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이곳이 그의 본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지으신 도성을 바라봅니다. 성도는 이곳 광야의 세상을 나그네의 길이므로 행인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고달픈 길이요 쉼이 없는 길이요 피곤한 길입니다. 오직 우리의 안식처는 이곳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그 안식처를 향해서 가는 길목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엇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목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목마른 성도의 심령에 다른 것으로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만 목이 시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성도의 만족의 근원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끝없는 고독에 안식이 되시고, 끝없는 목마름에 시원한 음료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7:37-38)" 광야길에서 목마른 인생들아,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그대의 심령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의 광야길은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길임을 잊지 맙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달프고 목이 타는 여행길에서 물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습니다. 찾았다고 찾았는데 마시려고 하니 마실 수가 없는 물,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도들이여, 이것은 성도가 광야길에서 치르는 시험입니다. 이때에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토록 찾고 찾았던 그것, 이제 마음을 놓고 시원함을 마음껏 누리리라고 생각했는데 시원치를 않는 것, 목이 타서 마시려고 하는데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경험하는 시험입니다. 마음을 놓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풀려고 하는데 뜻밖에 쓴 맛, 쓰디쓴 실망의 잔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 내 안식의 자리다, 여기에다 내 인생을 투자하자' 라고 마음을 풀려는데 뜻밖의 쓰디쓴 물로 인하여 실망하신 적이 없습니까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치르는 test입니다. 그 시험에 합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마라 코스'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마라 코스에서 실격하고 말았습니다. 마라의 쓴물 때문에 중심을 잃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마라의 쓴물만큼이나 실망의 쓰디쓴 좌절에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여행에 가담했던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던가 …' 하면서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책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앞에서 인도하는 모세가 저주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라의 쓴물! 이것은 입에만 쓴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쓰고 정신에도 쓰고 영혼에도 써서, 그들은 지금 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갈수록 기쁨이 넘칠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저주요 이 무슨 재앙인가!' 그래서 이스라엘은 원망했습니다. 마라 코스에서 실격한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이것은 오늘 여러분의 탄식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광야행진이 지금 마라에 이르신 분은 없습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못 올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와야 할 코스에 오신 것입니다. 출애굽 백성 이스라엘이 통과한 길은 새 이스라엘이 된 여러분도 통과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의 테스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코스에서 낙제하지 않도록 합시다. 대개의 성도들이 이 코스에서 실격을 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경험을 봅시다.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리니 … (출 14:24)" 백성이 마실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한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3일 전에 구원의 하나님을 감격으로 찬양했던 이스라엘입니다.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 14:31)" 3일 전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던 이스라엘이 이제 못 믿겠다고 원망하며 함성을 지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홍해 바다, 죽음의 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바다가 되었던 그 바다 그 물결을 바라보면서 원망, 불평, 저주의 함성을 터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그들의 신앙과 인격이 폭로되었습니다. 그렇게 감격했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쉽게 마음이 변하여 버릴 수 있습니까 홍해 앞에서 애굽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아우성치던 이들이 마라의 물 때문에 지금 다시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의 들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의 지혜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은폐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있는 그대로 발가벗겨져 버리는 곳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성도의 시험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뜻밖의 사건을 접하고서 하나님의 지혜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내 자신에게 있는 중대한 결함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순간들,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중대한 실수를 해 버렸을 것을 생각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무지해서 모르기 때문에 사건과 환경을 만들어 우리의 결합과 약점을 보게 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그저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왜 이스라엘이 마라에서 하나님 앞에 실수를 했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봅시다. 현실적인 원인은 마실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더운 사막길을 3일이나 걸어왔는데 마실 물을 찾지 못했다면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원망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고 동정이 되어집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압도당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주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 앞에서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해 주시는데도 (출 13:22), 그 하나님의 동행, 그 하나님의 임재,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대하는 믿음이 이들에겐 없었던 것입니다.
홍해에서 구원해 주셨던 그 하나님을 마라에서도 기대하면서 구원을 요청했어야 했는데 이들은 그러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볼 눈이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하나님의 종 모세만 보고 모세에게 원망했던 것입니다. 모세인들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를 원망하던 이스라엘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주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그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모든 사건, 모든 때에 항상 나와 함께 해 주신다, 항상 나를 도와주신다'는 신앙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놓쳐 버리면 전개되는 상황에 밀려 침몰합니다. '너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너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떼는 순간 마음에 의심의 구름이 드리워지고 진리의 빛이 차단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진리의 빛이 차단되고 의심의 구름이 덮이면 인격을 받쳐 주는 인격의 통제력이 풀리게 되고, 그래서 할 수 없는 말, 할 수 없는 행동을 마구 해 버리게 되고 맙니다. 성도들이여! 이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자가 아닙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1)"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주도되고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순간 순간 사건 사건마다 그 분의 의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거기에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문제 해결을 봅시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 (출 15:25)" 부르짖어야 할 백성들을 대신해서 모세가 부르짖었습니다. 어려움이 올 때는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사람도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홍해의 위기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모세는 이제 또 다시 마라의 쓴물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입니다.
성도여! 이제 기도합니다. 부르짖다가 쓰러질 때까지 부르짖읍시다. 필사적으로 부르짖읍시다. 부르짖다 응답이 없다고 일어서지 말고 응답이 없는 줄로 믿어 버리지 말고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부르짖읍시다. "저희가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여 거할 성을 찾지 못하여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시 107:4-7)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 중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은 끊으셨도다 (시 107:12-13)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막의 문에 가깝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시 107:18-19)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제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시 107:27-29)" 교우들이여 부르짖읍시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고 위경에서 건져 주시고 광풍을 평정케 하시고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해결을 봅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그 나무는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곳에 있던 나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나무가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나무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광야길 가는 우리 인생은 어둡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보여 주셔야만 볼 수 있습니다(창 21:19, 왕하 6:17). 우리의 귀와 눈을 만드신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면서 내 귀로 주의 기이한 말씀을 듣게 하시고 내 눈으로 주의 진리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잠 20:12). 모세에게 지시한 그 한 나무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상징성을 가진 진리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시 1:3, 아가 2:3).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나오는 말씀에 대해서 열려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의 써서 먹을 수 없는 물을 단물로 바꾸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 드립시다. "우리를 어둠의 세력에서 건져 주신 구원의 주 하나님! 우리를 친히 새 삶의 길로 인도하시는 우리의 주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현실보다도 더 우대하신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우리 주 하나님! 우리의 삶의 행진이 어디에 와 있든지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든지 우리로 하여금 먼저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뜻을 알게 하소서. 주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인하여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들의 구원의 주 하나님! 마라 코스에서 실격하지 않게 하소서. 마라에서 오히려 주님의 지혜를 배우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에 대하여 할 말을 갖게 하소서. 그 위대하심, 그 선하심, 그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게 하소서.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