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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진 (출15:25-27)

본문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조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의 찬양을 부르고 광야의 건조한 땅을 사흘 동안 걸었습니다. 그러나 마실 물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마라' 라고 하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 찾아 헤매던 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허겁지겁 물을 펴 마시려는데 써서 도무지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을 보고도 마실 수가 없어서 이들은 더욱 애가 타고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펴서 마시려던 컵을 던지며 불평과 원망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있었더라도 마찬가지로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모세가 물 때문에 이성을 잃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었습니다. 홍해 앞에서의 위기 때에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었던 모세가 이제는 마라의 쓴물 때문에 다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한 나무'를 지목하여 주고 그것을 쓴물에 던지니 그 물이 단물이 되어 온 백성이 마음껏 마시고 새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알리시기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 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이 계시의 말씀을 성령님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펴 가려고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광야길 가는 인생입니다. 광야의 길은 피곤하고 고달픈 길이요 때로는 암담한 상황과 현실 앞에 위기를 느끼며 가야 하는 두려운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광야길에 나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해 주십니다. 지치고 병든 몸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엉킨 상황을 풀어 주시며 앞으로 나아갈 새 힘을 늘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 치료해 주시는 여호와가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치료의 여호와께서 치료해 주시는데-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이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 "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문제의 열쇠를 받기 전에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부르짖어야 할 백성들을 대신해서 모세가 부르짖었습니다.쓴물 때문에 아우성치는 백성들을 위해서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 먼저 아픈 환처를 끌어안고 아프다고 소리를 친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오늘 계시의 말씀, 이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가는 길에 어려움이 가로막을 때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환경만 들어다 보면서 한탄하고, 원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부르짖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사람을 의지하여서 사람에게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홍해를 갈라 길을 만드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제 마라의 쓴물을 마실 수 있는 단물로 치료하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교우들이여! 이제 우리 부르짖읍시다. 부르짖다 쓰러지더라도 부르짖어 봅시다. 필사적으로 부르짖어 봅시다.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고 일어서지 말고, 응답이 없는 줄로 믿어 버리지 말고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부르짖어 봅시다. 거할 집이 문제이면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바른 길로 인도하여 거할 처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시 107:4-7). 자유가 문제이어서 기도하면 얽은 줄을 끊어주실 것이며(시 107:12-13), 아직 해야 할 일 많은데 병으로 위경에 처한 자는 봉사할 한 때를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사 그 위경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시 107:18-19). 삶이 광풍에 휘말리고 있는 자는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광풍을 평정케 하시고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시 107:27-29). 이스라엘을 위해서 모세가 대신 부르짖었습니다. 교우들이여, 우리는 모두 미련하여 부르짖어야 할 터인데도 부르짖지 못했음을 회개합시다. 부르짖는 일에도 하나님께 실격되었음을 인정합시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시는 우리의 하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나를 위해 쉬지 않고 간구하시는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백성은 불평과 원망을 하다가 좌절해 있을 때 모세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성소에서 쉬지 않고 간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지금도 간구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냥 일을 것입니까 주님과 함께 간구합시다. 부르짖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25절을 함께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그 나무는 갑자기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나무를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해 주실 때까지는 모세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나무가 쓴물을 단물로 소생시키는 나무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광야길을 가는 우리 인생은 어둡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보게 하고 귀를 열어 듣게 해 주셔야 하나님의 지시를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잠20:1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여 보게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한 나무"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여 보게 하셨습니다. 이 나무가 무엇입니까 이 나무는 쓴물을 단물로 바꾼 나무입니다. 여기에 계시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를 나무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시편 1:3에서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로, 아가서 2:3에서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적 표현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들입니다. 여기에 광야길 가는 성도가 배워야 할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마셔야 할 고난의 쓴잔을 감미롭고 향기로운 잔으로 바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실 수 없는 쓴잔, 고난의 잔이 주어질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붙들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쓴잔을 단맛으로 바꿔 주십니다. 우리의 쓴잔, 죄와 죽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흡수해 버린 것입니다. 의와 평화와 기쁨의 삶으로 바꿔 주십니다(롬14:17). 성도들이여! 이제 여러분은 고통스럽고 쓴 맛나는 사건을 만나면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나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순간, 그 쓰디쓴 독을 흡수해 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소개된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그 어두운 곳에 던져졌을 때, 그곳은 그들에게 '마라' 였습니다. 쓴 곳이 였지요.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서 찬양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부른 찬양을 다른 죄수들이 들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단(sweet)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습니까 빌립보 감옥에서 그들은 '한 나무' 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쓴 마라의 상황에서 그 나무가 던져진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5장 41절을 봅시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쓰디쓴, 마실 수 없는 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게 되니 단물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먹을 수 없는 쓴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그 이름으로 받게 되니 쓴 맛이 변하여 입에 달아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찬송할 수가 있었습니다. 광야길 가는 성도들이여! 괴로움과 권태로움과 고독함이 엄습해 올 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라비안 형제단의 젠센돌프 라는 사람은 뒤셀도르프에 있는 한 미술관에 걸려 있는 십자가 상 앞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그 무미건조했던 삶은 순간적으로 단맛 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나 너 위해 이 몸 죽기까지 했는데, 너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라는 글을 보는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맛없는 삶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던져진 그의 삶에 달디 단 생수가 끊임없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끝으로 광야길에서 하나님의 치료를 경험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5장 25절과 26절을 다시 봅시다. " …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시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라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계명이나 규례를 지키라고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경험했고 하나님을 위해서 훈련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치료를 받은 지금, 하나님의 주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지금, 법도와 율례를 정하여 주면서 그것을 지킬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제정해 주신 법도와 율례는 구원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그저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지켜야 할 법도와 율례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안정과 복리를 위해서 입니다. 그들의 땅위의 평안을 위해서 입니다. 그들의 삶에 행복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도들이여,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례와 말씀은 기록된 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을 임의대로 풀 것이 아니라 선지 사도의 빛 속에서 해석하여 설교하는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에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이 산, 저 산 예언한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점도 한 번 두 번 하기 시작하면 중독성이 생깁니다. 선지 사도의 예언으로 주신 말씀을 성령님의 빛 속에서 음미하고 해석하고 적용해 주는 교회의 공적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면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재난을 너희는 하나도 받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국회위원과 장관들이 얼마나 무서운 재난을 당합니까 민족의 지도자라고 자칭하고 행세하던 분들이 하루아침에 얼굴을 들 수가 없는 부끄러운 처지로 굴러 떨어지지 않습니까 이보다 큰 재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재난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법도와 율례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그런 무서운 재앙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주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병들고 아플 때 고쳐 주시고 쓴물을 단물로 바꿔 주시는 치료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지만 미리 그런 재난에 들어가지 않도록 예방하고 막아 주시는 치료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현대에는 예방의학을 더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병들고 나서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이 들지 않게 예방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치료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예방주사를 주시고 있습니다. "내 계명을 지키라 그리하면 모든 질병이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니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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