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 (출16:11-20)
본문
어떤 학생이 학기말 시험을 앞에 두고 공부는 하지 않고 딴 일 에 몰두하다가 드디어 시험날을 맞았습니다. 앞에 놓여진 시험 문제의 답을 모르는 것은 뻔한 일이었지요. 한참을 그냥 붙들고 있다가, "그래도 백지로 낼 바엔"하는 궁여지책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고 써 놓고는 교실을 나왔습니다. 시험지를 회수 한 교수는 우습기도 하거니와 너무나도 기가 막힐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의 답안지에 이러한 채점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100점학생은 0점" 하나님은 다 아시니 100점이시지만, 학생은 아무것도 모르니 0점 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다 아시는 데 기도할 필요가 무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드니, 기도 동기유발이 안 된다는 거예요. 또 하나님 은 나와 동행하는 데 굳이 말씀을 읽고 묵상할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 세요. 하나님은 우리와 늘상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기억 하세요. 하나님은 백점 그대는 빵점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주님과 하루 하루의 교제입니다. 어떤 분은 하루하루 살아요 이렇게 복음 성가를 부르니까, 아- 저 사람들은 내일이 없구나!, 막가파 인생이구나!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은 그게 아니지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오늘을 주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산다는 뭐 그런 뜻입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오늘 하루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것, 이건 좋은 겁니다. 오늘 우리 본문이 말하는 하루살이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결론 적으로 영적 양식을 하루 하루 공급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 떨어졌습니다. 에굽을 탈출한지 한달 째가 되었습니다. 가지고 나온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은 또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에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국 솥 단지 옆에 있어 배불리 먹지 않았느냐 이제 이 황량한 광야에서 어 서 죽게 되었구나! 사실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비상식량은 다 떨어지고, 인구는 100만을 넘고 그렇다고 농경지가 있는 것도 아니요, 다른 국가나 부족에게 가서 식량을 구할 처지도 못 되었 습니다. 전쟁을 치르고 약탈을 하거나 먹을 것을 전리품으로 차 지하면 좀 숨통이라도 트일텐데, 갓 탈출한 이스라엘은 전쟁을 벌일 형편도 못 되었습니다. 파라오의 군대는 추격을 포기하지 않고 있고, 이집트 제국의 영향을 소부족들에게 뻗치고 있어서 사막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100만이나 되는 탈출자들이 이제 딱 앉아서 굶어 죽을 형편입니다. 속수무 책입니다. 원망이 나올 법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신 것입니다.
첫째, 만나도 하루, 교제도 하루입니다. 이때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릴 것이니 나가 일용할 것을 날마 다 거둘 것이니라'(출16:4) 일용할 것을 주십니다. 그걸 날마다 거두는 거예요. 각 사람의 양식 대로 거둘지니 한 사람 앞에 한 오멜 씩입니다. 주님의 가 르친 기도가운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는 일용이라는 원어는 "애피우시오스"라는 말인데, 헬라 주부들이 장보러 갈 때 그 날 필요한 식료품 목록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의 일용할 양식은 밥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일용할 양식은 말씀과 기도이지요. 그래서 흔히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요, 말씀 은 영혼의 양식이다'라고 말합니다. 딱 맞는 비유입니다. 만나는 하루 먹는 양식, 그리스도인의 만나는 기도와 말씀입니다. 어김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음 깊이 들어가면 갈 수록, 하루 하루 하나님의 말씀 으로 공급받지 못하면 허덕거리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 해 질수록 매일 기도의 호흡을 하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기분 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 시장끼 느끼고 깊 은 심폐호흡 하는거 봤습니까 영적인 뇌사상태에 빠진 사람은 기도와 말씀의 필요를 장기간 느끼지 않고서도 생존합니다. 또 병든 사람은 식욕이 떨어지고 숨도 억지로 쉽니다. 영적 식욕과 영적 호흡을 보면 우리는 영적 건강 상태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매일 공급받는 하나님의 만나에 민감해져 있습니다. 하루만 안 먹어도 배가 고파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교우들 밥 잘 먹는 데 선수들입니다. 교회 교우들 만 초대 되면 그집은 보통 사람들 보다 2배 더 차려야 합니다. 7 명이 왔다면 14인분 해야 합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리고 우리교회 교우들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밥 때가 되면 정신을 못 차린다는 것입니다. 밥 때가 삼 십분 이라도 넘으면 정신이 아득하고 힘이 다 빠지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가 하 고, 부엌을 들락 날락합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이거 참으로 건강하다는 표시입니다. 남편이 이러면 아내 여러분들은 너무 구 박주지 말아야 합니다. 병들면 안 그럽니다. 건강하다는 표시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양식인 기도와 말씀을 매일 먹지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 참으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매일의 양식에 민감한 사람들 하나님에게 중심이 이동된 사람들입니다. 천 하장사는 더 먹어야 합니다. 힘을 많이 쓰는 사람은 더 먹어야합니다.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은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목사는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장로나 집사도 많이 먹어야 합니다. 봉 사를 하는 사람도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영적 양식은 활동 양에 따라 비례해야 합니다. 왕도는 없습니다. 강한자 도 없습니다. 먹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성자나 목사나 장로나 집 사나 먹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일용이 뭡니까 하루 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루 쓸 것을 날마 다 매일 거두어야 하는 겁니다. 하루살이지요. 매일 하루 쓸 것 만 주니까 하루 하루 받아 먹어야 삽니다. 그러니 하루 살이입니다. 게으르면 굶습니다. 허세를 부려도 굶습니다. 자존심을 내 세워도 굶습니다. 6시간이면 배가 고프게 되어 있습니다. 세끼를 먹어야합니다. 하루살이 인생들입니다. 쌓아 놓거나 매점 매석할 수 없습니다. 독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패배나 승리도 원천적으로 매점매석할 수 없습니다. 정렬을 다해서 힘써 거두는 자만이 승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노력하는 자 만이 승자입니다. 계급, 인종, 학식, 능력 다 평등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는 원칙에서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까지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 습니다.(출16:35)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만나가 그쳤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죄의 가능성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만나를 먹어 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5 절) 양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만나는 여호와께로 부터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옵니다. 우리가 제조할 수 없 습니다. 우리가 생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소비자일 뿐입니다. 요6:35에서 예수님이 친히 만나라고 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생명의 떡인 주님과의 교제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성만찬도 주님과의 교제의 상징입니다.
둘째, 실패도 하루, 승리도 하루입니다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19절) 승리든 패배 든 아침 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어제의 말씀의 효력도 오늘 아침 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 오늘의 양식은 오늘 먹어야 합니다. 내일 까지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의 승리는 오늘 이미 벌레가 생기고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어제의 승리는 오늘 나의 삶에 신선한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승리가 필요합니다. 그런 까닭에 어제의 패배를 오늘까지 연장하지 말아 야 합니다. 오늘은 새로운 싸움입니다. 어제의 승리를 자랑하지 도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승리가 진정한 힘입니다. 하루의 만 나를 채운자 만이 하루의 패배를 누르고 하루의 승리를 누립니다. 패배도 하루, 승리도 하루입니다.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20 절) 그날의 몫은 밤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승리도 패배도 밤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벌레도 생기고, 냄새도 납니다. 썩어버립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의 화려했 던 믿음의 순간을 자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제의 패배를 오늘 아침 까지 연장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대개 실패와 좌절을 잊어 버리지 못해 인생을 망가뜨리곤 합니다. 패배와 좌절을 확대 재생산 합니다. 슬픔을, 의기소침을,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위하여 아 가노 라' 그렇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완전히 잊어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실패와 좌절, 오류와 죄책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제의 실패를 오늘에도 지겹도록 끌 고 다니는지요. 털어도 될 무거운 짐을 이상하게 지고 다닙니다. 이 무거운 짐만 놓으면 다 펄펄 날아다닐 사람들이 불필요한 짐 을 달고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어제의 실패는 어제로 끝나야 합니다. 어제의 실패에 너무 연연해서도 안 됩니다. 어제의 실패는 교훈으로는 삼아야 되지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치고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 모세, 야곱, 다윗, 솔로몬, 베드로, 바울 다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제의 실패에 푹 빠져 그 실패의 짐에 자 신을 자학하고 괴로워했던 사나이 가룟 유다는 결국 목매 달아 죽음으로서 장렬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잘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똑 같은 잘못 세 번이나 했습니다. 사랑하던 스승이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는 자리에서 목숨을 던져 스승을 구출하지는 못할망정 세 번이나 스승을 저주하고 배반했습니다. 어디 의 리있는 사나이로서 할 짓입니까 스승이 평소 가장 아끼고 믿던 수제자가 그럴 수 있습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찍은 것이고, 스승 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이지요. 이런 뻔뻔스런 베드로는 활복 자살 해 마땅 한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이 자결함으로써 실수와 패배 에 대한 책임을 졌습니까 잘못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목놓아 울면서 어제의 저주스런 실패를 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순교의 자리 까지 간 것이지요. 잘한 것입니다. 복음의 방식입니다. 그러니다 털어버리세요. 바로 어 제의 실패를 완전히 털어버리세요. 오늘은 또 오늘의 만나가 있 을 뿐입니다.
눅 15장의 방탕한둘째 아들의 이야기에서도 그렇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실패가 너무나도 후회스럽고 저주스러웠습니다. 부끄 럽고 낯뜨거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삶의 패배로 인 한 회한에 견딜 수 없어 허랑방탕하던 이국 땅에서 자살을 해 버 렸다면 어떻게 될 까요 송아지를 잡아 베푸는 잔치도, 금가락지 를 끼워주는 환대도, 살아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 버지의 사랑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의 패배를 잊어 버립시다. 다 훌훌 털어버립시다. 우리에게는 오늘과 내일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결단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다시 주님께 모든 걸 맡기고 의지하고 투쟁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승리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신앙 대화를 하 다가 보면 꼭 옛날 얘기를 합니다. 청년시절에 정렬적으로 신앙 생활 했던 얘기, 처녀 시절에 열심히 믿었던 얘기, 처음 믿었을 때 뜨거웠던 얘기, 학생시절에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했던 얘기 뭐 전부 과거 사건을 얘기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현재형입니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이 원칙은 적용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어제 홍해를 가르고도 오늘은 원망하고 우상숭배하 고 죄에 빠집니다. 어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도 오늘은 아이 성에서 패배를 하지 않습니까 사울은 어제 하나님에게 합한 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오늘은 질투심에 눈 먼 비겁자가 되 어 하나님의 눈밖에 나지 않습니까 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이런 증거를 대라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입니다. 어제의 승리는 오늘 힘이 되지 못합니다. 어제의 승리 가 오늘의 승리를 보장하지도 못합니다. 오늘의 승리는 오늘 새 롭게 퍼 올려야 하는 물입니다. 오늘의 승리는 오늘 나가서 거둬 들여야 하는 하루 만나입니다. 오늘의 승리를 말합시다. 오늘의 믿음을 이야기 합시다. 지금 이 자리의 승리를 이야기 합시다. 지금 이 자리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합시다. 신앙은 회고록이 아 닙니다. 신앙은 생방송이라야 합니다. 신앙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 세요. 하나님은 우리와 늘상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기억 하세요. 하나님은 백점 그대는 빵점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주님과 하루 하루의 교제입니다. 어떤 분은 하루하루 살아요 이렇게 복음 성가를 부르니까, 아- 저 사람들은 내일이 없구나!, 막가파 인생이구나!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은 그게 아니지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오늘을 주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산다는 뭐 그런 뜻입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오늘 하루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것, 이건 좋은 겁니다. 오늘 우리 본문이 말하는 하루살이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결론 적으로 영적 양식을 하루 하루 공급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 떨어졌습니다. 에굽을 탈출한지 한달 째가 되었습니다. 가지고 나온 비상식량은 다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은 또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에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국 솥 단지 옆에 있어 배불리 먹지 않았느냐 이제 이 황량한 광야에서 어 서 죽게 되었구나! 사실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비상식량은 다 떨어지고, 인구는 100만을 넘고 그렇다고 농경지가 있는 것도 아니요, 다른 국가나 부족에게 가서 식량을 구할 처지도 못 되었 습니다. 전쟁을 치르고 약탈을 하거나 먹을 것을 전리품으로 차 지하면 좀 숨통이라도 트일텐데, 갓 탈출한 이스라엘은 전쟁을 벌일 형편도 못 되었습니다. 파라오의 군대는 추격을 포기하지 않고 있고, 이집트 제국의 영향을 소부족들에게 뻗치고 있어서 사막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100만이나 되는 탈출자들이 이제 딱 앉아서 굶어 죽을 형편입니다. 속수무 책입니다. 원망이 나올 법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신 것입니다.
첫째, 만나도 하루, 교제도 하루입니다. 이때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릴 것이니 나가 일용할 것을 날마 다 거둘 것이니라'(출16:4) 일용할 것을 주십니다. 그걸 날마다 거두는 거예요. 각 사람의 양식 대로 거둘지니 한 사람 앞에 한 오멜 씩입니다. 주님의 가 르친 기도가운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는 일용이라는 원어는 "애피우시오스"라는 말인데, 헬라 주부들이 장보러 갈 때 그 날 필요한 식료품 목록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의 일용할 양식은 밥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일용할 양식은 말씀과 기도이지요. 그래서 흔히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요, 말씀 은 영혼의 양식이다'라고 말합니다. 딱 맞는 비유입니다. 만나는 하루 먹는 양식, 그리스도인의 만나는 기도와 말씀입니다. 어김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음 깊이 들어가면 갈 수록, 하루 하루 하나님의 말씀 으로 공급받지 못하면 허덕거리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 해 질수록 매일 기도의 호흡을 하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기분 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 시장끼 느끼고 깊 은 심폐호흡 하는거 봤습니까 영적인 뇌사상태에 빠진 사람은 기도와 말씀의 필요를 장기간 느끼지 않고서도 생존합니다. 또 병든 사람은 식욕이 떨어지고 숨도 억지로 쉽니다. 영적 식욕과 영적 호흡을 보면 우리는 영적 건강 상태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매일 공급받는 하나님의 만나에 민감해져 있습니다. 하루만 안 먹어도 배가 고파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교우들 밥 잘 먹는 데 선수들입니다. 교회 교우들 만 초대 되면 그집은 보통 사람들 보다 2배 더 차려야 합니다. 7 명이 왔다면 14인분 해야 합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리고 우리교회 교우들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밥 때가 되면 정신을 못 차린다는 것입니다. 밥 때가 삼 십분 이라도 넘으면 정신이 아득하고 힘이 다 빠지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가 하 고, 부엌을 들락 날락합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이거 참으로 건강하다는 표시입니다. 남편이 이러면 아내 여러분들은 너무 구 박주지 말아야 합니다. 병들면 안 그럽니다. 건강하다는 표시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양식인 기도와 말씀을 매일 먹지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 참으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매일의 양식에 민감한 사람들 하나님에게 중심이 이동된 사람들입니다. 천 하장사는 더 먹어야 합니다. 힘을 많이 쓰는 사람은 더 먹어야합니다.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은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목사는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장로나 집사도 많이 먹어야 합니다. 봉 사를 하는 사람도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영적 양식은 활동 양에 따라 비례해야 합니다. 왕도는 없습니다. 강한자 도 없습니다. 먹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성자나 목사나 장로나 집 사나 먹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일용이 뭡니까 하루 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루 쓸 것을 날마 다 매일 거두어야 하는 겁니다. 하루살이지요. 매일 하루 쓸 것 만 주니까 하루 하루 받아 먹어야 삽니다. 그러니 하루 살이입니다. 게으르면 굶습니다. 허세를 부려도 굶습니다. 자존심을 내 세워도 굶습니다. 6시간이면 배가 고프게 되어 있습니다. 세끼를 먹어야합니다. 하루살이 인생들입니다. 쌓아 놓거나 매점 매석할 수 없습니다. 독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패배나 승리도 원천적으로 매점매석할 수 없습니다. 정렬을 다해서 힘써 거두는 자만이 승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노력하는 자 만이 승자입니다. 계급, 인종, 학식, 능력 다 평등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는 원칙에서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까지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 습니다.(출16:35)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만나가 그쳤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죄의 가능성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만나를 먹어 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5 절) 양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만나는 여호와께로 부터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옵니다. 우리가 제조할 수 없 습니다. 우리가 생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소비자일 뿐입니다. 요6:35에서 예수님이 친히 만나라고 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생명의 떡인 주님과의 교제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성만찬도 주님과의 교제의 상징입니다.
둘째, 실패도 하루, 승리도 하루입니다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19절) 승리든 패배 든 아침 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어제의 말씀의 효력도 오늘 아침 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 오늘의 양식은 오늘 먹어야 합니다. 내일 까지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의 승리는 오늘 이미 벌레가 생기고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어제의 승리는 오늘 나의 삶에 신선한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승리가 필요합니다. 그런 까닭에 어제의 패배를 오늘까지 연장하지 말아 야 합니다. 오늘은 새로운 싸움입니다. 어제의 승리를 자랑하지 도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승리가 진정한 힘입니다. 하루의 만 나를 채운자 만이 하루의 패배를 누르고 하루의 승리를 누립니다. 패배도 하루, 승리도 하루입니다.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20 절) 그날의 몫은 밤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승리도 패배도 밤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벌레도 생기고, 냄새도 납니다. 썩어버립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의 화려했 던 믿음의 순간을 자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제의 패배를 오늘 아침 까지 연장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대개 실패와 좌절을 잊어 버리지 못해 인생을 망가뜨리곤 합니다. 패배와 좌절을 확대 재생산 합니다. 슬픔을, 의기소침을,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위하여 아 가노 라' 그렇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완전히 잊어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실패와 좌절, 오류와 죄책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제의 실패를 오늘에도 지겹도록 끌 고 다니는지요. 털어도 될 무거운 짐을 이상하게 지고 다닙니다. 이 무거운 짐만 놓으면 다 펄펄 날아다닐 사람들이 불필요한 짐 을 달고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어제의 실패는 어제로 끝나야 합니다. 어제의 실패에 너무 연연해서도 안 됩니다. 어제의 실패는 교훈으로는 삼아야 되지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치고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 모세, 야곱, 다윗, 솔로몬, 베드로, 바울 다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제의 실패에 푹 빠져 그 실패의 짐에 자 신을 자학하고 괴로워했던 사나이 가룟 유다는 결국 목매 달아 죽음으로서 장렬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잘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똑 같은 잘못 세 번이나 했습니다. 사랑하던 스승이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는 자리에서 목숨을 던져 스승을 구출하지는 못할망정 세 번이나 스승을 저주하고 배반했습니다. 어디 의 리있는 사나이로서 할 짓입니까 스승이 평소 가장 아끼고 믿던 수제자가 그럴 수 있습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찍은 것이고, 스승 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이지요. 이런 뻔뻔스런 베드로는 활복 자살 해 마땅 한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이 자결함으로써 실수와 패배 에 대한 책임을 졌습니까 잘못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목놓아 울면서 어제의 저주스런 실패를 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순교의 자리 까지 간 것이지요. 잘한 것입니다. 복음의 방식입니다. 그러니다 털어버리세요. 바로 어 제의 실패를 완전히 털어버리세요. 오늘은 또 오늘의 만나가 있 을 뿐입니다.
눅 15장의 방탕한둘째 아들의 이야기에서도 그렇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실패가 너무나도 후회스럽고 저주스러웠습니다. 부끄 럽고 낯뜨거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삶의 패배로 인 한 회한에 견딜 수 없어 허랑방탕하던 이국 땅에서 자살을 해 버 렸다면 어떻게 될 까요 송아지를 잡아 베푸는 잔치도, 금가락지 를 끼워주는 환대도, 살아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 버지의 사랑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의 패배를 잊어 버립시다. 다 훌훌 털어버립시다. 우리에게는 오늘과 내일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결단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다시 주님께 모든 걸 맡기고 의지하고 투쟁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승리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신앙 대화를 하 다가 보면 꼭 옛날 얘기를 합니다. 청년시절에 정렬적으로 신앙 생활 했던 얘기, 처녀 시절에 열심히 믿었던 얘기, 처음 믿었을 때 뜨거웠던 얘기, 학생시절에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했던 얘기 뭐 전부 과거 사건을 얘기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현재형입니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이 원칙은 적용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어제 홍해를 가르고도 오늘은 원망하고 우상숭배하 고 죄에 빠집니다. 어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도 오늘은 아이 성에서 패배를 하지 않습니까 사울은 어제 하나님에게 합한 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오늘은 질투심에 눈 먼 비겁자가 되 어 하나님의 눈밖에 나지 않습니까 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이런 증거를 대라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입니다. 어제의 승리는 오늘 힘이 되지 못합니다. 어제의 승리 가 오늘의 승리를 보장하지도 못합니다. 오늘의 승리는 오늘 새 롭게 퍼 올려야 하는 물입니다. 오늘의 승리는 오늘 나가서 거둬 들여야 하는 하루 만나입니다. 오늘의 승리를 말합시다. 오늘의 믿음을 이야기 합시다. 지금 이 자리의 승리를 이야기 합시다. 지금 이 자리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합시다. 신앙은 회고록이 아 닙니다. 신앙은 생방송이라야 합니다. 신앙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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