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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가야 산다 (출14:15-31)

본문

구약 성경 출애굽기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노예로 고생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전진하는 기록입니다. 성경 가운데서도 출애굽기야말로 시련과 고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희망을 보여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는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사(解放史)인 동시에 현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직접 지도해 주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의 감격을 가지고 모세의 인도를 받으면서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섰는데 너무 빨리 일대 위기를 만났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의 육백 승(乘)이 넘는 병거와 수많은 무장 군인을 이끌고 추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양옆에는 절벽으로 막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進退兩難),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역사 가운데 이 때처럼 가장 큰 위기를 당한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훈하려고 하신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극히 어려운 난관 속에서 반드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대략, 우리 인간들은 시련과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위기가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면해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위기를 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평안과 무사만이 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가나안 새 복지를 향해서 들어가야 할 이스라엘 민족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명확히 알고 또 체험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는 가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은 가장 큰 위기에서 명확하게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다니엘 같은 이는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린다는 제목 때문에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사자 굴에 함께 계셔서 사자들이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다니엘을 해치려고 하던 그 간신 배들이, 왕이 다니엘을 죽이지 아니하려고 사자들에게 미리 배불리 먹여 놓았기 때문에 다니엘이 먹히지 않았다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고약하게 생각해서 "그러면 시험해 보리라" 하고 사자들을 미리 배불리 먹여 놓고, 비난하는 간신 배들을 모두 넣었는데 다 물어 죽였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사건을 경험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하신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체험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니엘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적적 보호를 받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 절하지 않았다고 하는 죄목(罪目) 때문에 칠 배나 더 뜨겁게 데운 불 가마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자(人子) 같은 이가 다니면서 머리 털 하나 거슬리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해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세 친구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애굽의 통치자가 되게 해 주셨고 당시 인민을 살리는 능력을 나타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하는 자녀들이 위기를 당하였을 때에 반드시 함께 계십니다. 온전하신 지혜와 무한하신 사랑의 오른 손으로 붙잡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 함께 계시는 일은 시련을 면제받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이 체험이 있은 후에 위대한 신앙인으로 사명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사정을 모르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왕의 병거가 떠나기도 전에 미리 홍해를 다 건너갈 수 있도록 하실 수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신 까닭은,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실질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애굽의 악한 군대들이 멸망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체험하도록, 또 그런 신앙을 갖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이라 하는 광야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이것을 확신하고 체험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가장 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모세가 당황하고 원망하고 초조해 하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가장 큰 위기를 당하였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가만히 서 있는 일"입니다. 즉, 조용히 하나님을 향하는 이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이끌고 나왔느냐고 거세게 항의만 하였습니다.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이 불신앙은 언제나 환난과 고통, 불행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을 판단하려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자세는 모든 고난과 실패, 역경을 초월해서 진실과 사랑과 능력 있는 하나님을 우러러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짙은 구름이 태양을 덮었다고, 억년 전부터 변함없이 광채를 비추는 이 태양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 환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더욱 풍성하게 베풀어진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조용히 하나님을 향하는 자세입니다. 이 조용하라고 하는 말씀은 깊은 회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들고 초조해 합니다. 자기 회개가 깊은 사람은 조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가 없는 죄인을 위해서 기적을 내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에 위기가 왔을 때 가장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각자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불효하고 방탕한 탕자는 비록 많은 죄를 지었지마는 아버지께 돌아와서 "내가 아버지와 하늘에게 죄를 얻었사오니 감히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고 품꾼의 하나로 영접해 주시옵소서 !" 하고 근본적인 회개를 하였을 때에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아들이 된 것입니다. 세리 삭개오, 마태는 근본적으로 회개하였을 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나 심지어 창기까지라도 근본적으로 회개하였을 때, 세상을 개조하는 경건한 참 능력의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과 하나님의 영접을 받기 위해 서는 먼저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조용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을 때 그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바로 왕의 군대를 물리치는 일을 했습니까 정치적 교섭이나 활동을 해서 해방을 받았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능력을 보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힘만 생각하고서는 두려워하고 미리 초조해 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인간 편에 익숙한 방법을 찾을 때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옛날 도단 성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잡으려고 적들이 와서 포위를 하였을 때, 게하시라고 하는 종은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저들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보호 군대가 있다고 하면서 그 신령한 눈을 통해서 보게 해 주었습니다. 하늘에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도단 성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신앙의 안목이 중요 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하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하는 뜻입니다. 완전 신뢰로 모든 일에 임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기 전에 사람의 생각대로 처사하는 것은 불신앙의 자세입니다. 불신뢰입니다. 우주 여행을 하려고 하면 내 몸 전체를 우주선에다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생활해 나갈 때에 근본적인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겨 버려야 합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합니다. 셋 째로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살길은 앞에 있다고 하는 뜻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적신(赤身), 핏덩어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점점 살아가는 동안에 어제보다 오늘 더욱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육체도, 정신도, 문화도, 도덕적으로도 전진해 갑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전진하여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나간다고 말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복음 전파에 힘을 썼습니다.
우리 국가는 정치적 발전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군사적인 보장도 확실해야 합니다. 산업 생산도 활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평화, 자유, 번영. 이런 모든 것들은 참된 신앙에서 이루어 져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 개인이나 이 사회 그리고 우리 나라는 전진할 때만 반드시 승리가 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힘이들어도 계속해서 밭을 갈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너무나도 복되고 좋은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앞으로 남은 길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개인이나 나라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처하였던 홍해의 위기와도 흡사한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민족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 민족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1945년 815 해방은 인간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그 기적처럼 우리 민족에게 내려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2차 대전의 그 무서운 폭탄 빗발 속에서도 우리 나라는 폭탄 하나를 맞은 일이 없습니다. 도시가 점령된 일도 없었습니다. 극소수의 희생으로써 해방을 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해방의 은택을 입었지마는 아직 가나안 복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회개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완전히 신뢰하는 일에 힘을 쓰십시다. 그리고 담대하게 앞으로 전진해 나가도록 하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진하니까 바로 어떤 일이 생겨났습니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으로 전진하면 반드시 홍해가 갈라집니다. 무신론의 홍해가 갈라집니다. 공산주의라는 홍해가 갈라집니다. 사회악이라고 하는 홍해, 경제난이라고 하는 홍해, 불신앙이라고 하는 홍해가 곧 갈라집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진하였으므로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습니다. 원망만 하던 백성들은 다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 뒤를 돌아보던 민중들은 모두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던 인민들은 모두 멸망 받았습니다. 오로지 신앙적으로 전진한 하나님의 자녀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앙적으로 전진할 때만이 약속의 복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상적 국가 민족의 참된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의 전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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