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은 것 (전3:11-13)
본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 무엇이겠는가 삶에서 재미있는 것을 다 그만두고 수도사나 목사가 되는 것인가 가진 것 다 팔아서 가난 한 사람들을 주는 것인가 먼먼 오지로 선교사로 가는 것인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 따르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소원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하는 것 그대로이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 한 가지이다. 행복이다. 그것도 영원 히 행복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최고로 행복하게 할 능력이 있다. 이 사실만 확실하게 깨닫는다면 누구든 하나님 앞에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별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신자들까지도 이상스럽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들을 하고 있다. 한번 자연을 둘러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자연을 감상할 힘은 오 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다. 짐승들이나 식물들이 감상하는게 아니다. 그들 은 자연의 일부일뿐이다. 오직 사람만이 그들을 보고 즐기며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들의 행복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다. 너무도 완벽하게 만들어놓지 않았던가! 생각을 해보라. 작은 풀에서부터 각종 나무들, 산과 들과 바람과 소나 기,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다. 한 번 시간을 내어서 동산을 거닐고 가족들 과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 해보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자연을 만들지 않으셨다. 너무도 아름답게 하셨다. 그것도 철따라 다르게 하셨다. 감상할 존재도 없는데 그러했겠는가 하지만 그걸 감상 못하면 자신도 역시 자연의 일부가 되고 만다. 블행 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상할 눈이 없다. 감상을 해도 아주 순간적이 고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열심히 먹고 사는데 그리고 그 자연에 파묻혀 있는데 정신을 잃고 만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을 지 나도 행복하지 않다. 아무리 재산을 모으고 아무리 유명해도 그렇다. 하지만 감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낀다. 더우기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새로운 능력이 생긴다. 그래서 더욱더 감사하게 되고 더욱 더 힘을 내어서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늘 감상하는 눈을 키워보자.
그렇다면 삶 전체는 아름다움의 극장이 된다. 그리고 생 을 즐기며 볼 수 있다. 사랑을 쏟아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생을 관조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를 감상할 힘이 있다. 아픔도 슬픔도 실패도 다 감상하면 서 살 수 있다. 마치 대자연을 보면서 삶을 즐기듯 그런 힘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말하게 된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리고는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더욱 감사와 찬양을 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처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 자기 인생 전체를 놓고 이렇게 감상한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의 작품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손길을 발견한다. 그가 어떻게 하는가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하나님처럼 기뻐한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창조한다. 그것을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기 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기뻐함은 사랑과 같은 감정이 일어나고 선을 행하는 것도 창조와 같은 행위가 된다. 다시 말해서 세상사람들이 돈벌고 애인 얻어서 부러움을 사고 사랑을 받는 기쁨은 수준이 아주 낮은 것이다. 그것도 기쁨이다. 그리고 그것도 즐겨야 한다. 수도사처럼 살 필요는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그것도 다 자 연의 일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답게 화 려하게 수준 높게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오래가질 못한다. 하지만 더 높은 하나님 수준의 기쁨은 사랑의 감정에서나 나올 수 있다. 정말로 사랑을 베풀때 나오는 기쁨이 정말 기쁨이다. 정말로 사랑할 때의 기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미 제일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랑받을 때의 기쁨이 아니라 사랑을 줄 때의 기쁨말이다. 그러기에 프란시스는 기도했다.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주게 하소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요 그것은 우리를 은혜 속에 자라게 한다. 그러기에 사람이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산다면 그야말 로 행복한 삶이다. 그리고 영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감상하는 눈만 주신게 아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도 아울러 주셨다. 영원한 삶을 주신게 아니라 영원한 것을 알고 사모 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그 영원 곧 영원한 행복은 기뻐하며 선을 행함으로 누리게 된다. 정말로 하나님의 영을 받아 중생한 사람들은 누구이건 이러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행복하게 매일을 사는게 신자의 의무이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즐거워하면서 행하라. 절대로 남보다 잘 살고 멋있게 아름답게 잘 살아야한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으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어다."(전9:7) 신자들은 더욱 잘 해야 한다. 그래서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고 명 령하신다. 신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고 누구보다도 성실하며 누 구보다도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또한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온유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하게 살아야 한다. 절대로 구질구질해서 남들의 손 가락질을 받지 않게 기도해야 한다. 각자가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예수를 믿으려고 해도 옆 집 여자 꼴보기 싫 어서 못하겠다." 아파트의 바로 옆 집이다. 몇 년을 살았는데 너무도 얌 체라는 것이다. 복도에 전등이 끊어져도 한 번도 갈아끼우는 경우가 없다. 집에서 나무를 내다 놓으면 꼭 자기 쪽 벽에 다 세워 놓는다. 하는 것 마다 너무도 약삭 빠르고 너무도 악착 같아서 정이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도 만날 때마다 "예수 믿으세요" 한다는 것이다. 자기처럼 되라는 말인지 정말로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고 한다.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 이면 잘못 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강하고 열정적이지만 얌체이고 악착스러운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멍청하고 조금 바보스러워야 한다. 정말로 들의 사슴처럼 새들처럼 순진하고 바보스럽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좌행참에 나오는 이야기다. 양수기를 가진 신자가 논에 물을 댔다.
아 침에 나가보니 옆 논 사람이 자기 논의 물을 모두 자기 논으로 끌어갔다. 그래서 다시 양수기로 물을 펐다. 다음 날 아침에 나가보니 자기 논의 물 을 모두 다 뽑아갔다. 밤에 그렇게 한 것이다. 밤을 새우고 지킬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얌체 짓이지만 물이 적으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신자는 양수기로 물을 펐다. 그리고 옆 논에 먼저 물을 댔다. 오후가 되어서야 자기 논에도 물을 댈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나가 보니까 물이 비슷하게 줄어있었다. 옆 논 사람도 남의 논의 물을 빼 서 가져가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신자는 기뻐하며 선을 행한다. 이게 제일 좋은 삶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좀 멍청한게 특징이다. 신자는 삶의 행동거지에 더욱 신경을 쓴다. 기뻐하며 선을 행하기 위 해서다. 주차를 할 때도 자리가 없으면 돈내는데로 가고 그것도 없으면 안한다. 운전하면서도 얌체짓을 해서는 않된다. 직장에서도 사회에 나가 서도 언제나 조금만 손해보자. 항상 양보하는 바보가 될 생각을 하자. 왜 그런지 아는가 하나님 믿는 사람은 무엇인가 남보다 더 여유가 있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에게 언제나 양보를 하는 편 이다. 언제나 주고 또 주어도 계속 남는게 신자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삶이요 창조하는 삶이다. 이런 사람 속의 행복을 빼앗을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특별한 시간을 내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는게 아니다. 자 연 속에 있어도 자연 속에 뒤섞이는 것으로 그치면 않된다. 우리는 자연 을 감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분복을 마음껏 즐긴다. 아름다 운 공기와 환경 속에 뒤섞여 뛰논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을 우리는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귀고 서로를 향해 기뻐하며 선을 행한다. 서로 사랑하 고 서로가 감상하며 감사한다. 오늘만 그런게 아니다. 계속 그래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삶을 그런 식으로 보아야 한다. 너무 지악스럽고 너무 악 착스럽게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부모 아닌가. 자 모든 것을 감상하자. 그 속에 파뭍혀 평생을 보내서는 않된다. 그 것에 사로 잡혀도 않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역경과 아픔과 실패까지도 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신 자연이요 감상할 대상이다. 기뻐하며 선을 행하라. 그렇게 행복하라. 영원토록.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최고로 행복하게 할 능력이 있다. 이 사실만 확실하게 깨닫는다면 누구든 하나님 앞에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별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신자들까지도 이상스럽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들을 하고 있다. 한번 자연을 둘러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자연을 감상할 힘은 오 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다. 짐승들이나 식물들이 감상하는게 아니다. 그들 은 자연의 일부일뿐이다. 오직 사람만이 그들을 보고 즐기며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들의 행복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다. 너무도 완벽하게 만들어놓지 않았던가! 생각을 해보라. 작은 풀에서부터 각종 나무들, 산과 들과 바람과 소나 기,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다. 한 번 시간을 내어서 동산을 거닐고 가족들 과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 해보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자연을 만들지 않으셨다. 너무도 아름답게 하셨다. 그것도 철따라 다르게 하셨다. 감상할 존재도 없는데 그러했겠는가 하지만 그걸 감상 못하면 자신도 역시 자연의 일부가 되고 만다. 블행 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상할 눈이 없다. 감상을 해도 아주 순간적이 고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열심히 먹고 사는데 그리고 그 자연에 파묻혀 있는데 정신을 잃고 만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을 지 나도 행복하지 않다. 아무리 재산을 모으고 아무리 유명해도 그렇다. 하지만 감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낀다. 더우기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새로운 능력이 생긴다. 그래서 더욱더 감사하게 되고 더욱 더 힘을 내어서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늘 감상하는 눈을 키워보자.
그렇다면 삶 전체는 아름다움의 극장이 된다. 그리고 생 을 즐기며 볼 수 있다. 사랑을 쏟아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생을 관조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를 감상할 힘이 있다. 아픔도 슬픔도 실패도 다 감상하면 서 살 수 있다. 마치 대자연을 보면서 삶을 즐기듯 그런 힘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말하게 된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리고는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더욱 감사와 찬양을 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처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 자기 인생 전체를 놓고 이렇게 감상한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의 작품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손길을 발견한다. 그가 어떻게 하는가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하나님처럼 기뻐한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창조한다. 그것을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기 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기뻐함은 사랑과 같은 감정이 일어나고 선을 행하는 것도 창조와 같은 행위가 된다. 다시 말해서 세상사람들이 돈벌고 애인 얻어서 부러움을 사고 사랑을 받는 기쁨은 수준이 아주 낮은 것이다. 그것도 기쁨이다. 그리고 그것도 즐겨야 한다. 수도사처럼 살 필요는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그것도 다 자 연의 일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답게 화 려하게 수준 높게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오래가질 못한다. 하지만 더 높은 하나님 수준의 기쁨은 사랑의 감정에서나 나올 수 있다. 정말로 사랑을 베풀때 나오는 기쁨이 정말 기쁨이다. 정말로 사랑할 때의 기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미 제일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랑받을 때의 기쁨이 아니라 사랑을 줄 때의 기쁨말이다. 그러기에 프란시스는 기도했다.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주게 하소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요 그것은 우리를 은혜 속에 자라게 한다. 그러기에 사람이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산다면 그야말 로 행복한 삶이다. 그리고 영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감상하는 눈만 주신게 아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도 아울러 주셨다. 영원한 삶을 주신게 아니라 영원한 것을 알고 사모 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그 영원 곧 영원한 행복은 기뻐하며 선을 행함으로 누리게 된다. 정말로 하나님의 영을 받아 중생한 사람들은 누구이건 이러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행복하게 매일을 사는게 신자의 의무이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즐거워하면서 행하라. 절대로 남보다 잘 살고 멋있게 아름답게 잘 살아야한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으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어다."(전9:7) 신자들은 더욱 잘 해야 한다. 그래서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고 명 령하신다. 신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고 누구보다도 성실하며 누 구보다도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또한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온유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하게 살아야 한다. 절대로 구질구질해서 남들의 손 가락질을 받지 않게 기도해야 한다. 각자가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예수를 믿으려고 해도 옆 집 여자 꼴보기 싫 어서 못하겠다." 아파트의 바로 옆 집이다. 몇 년을 살았는데 너무도 얌 체라는 것이다. 복도에 전등이 끊어져도 한 번도 갈아끼우는 경우가 없다. 집에서 나무를 내다 놓으면 꼭 자기 쪽 벽에 다 세워 놓는다. 하는 것 마다 너무도 약삭 빠르고 너무도 악착 같아서 정이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도 만날 때마다 "예수 믿으세요" 한다는 것이다. 자기처럼 되라는 말인지 정말로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고 한다.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 이면 잘못 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강하고 열정적이지만 얌체이고 악착스러운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멍청하고 조금 바보스러워야 한다. 정말로 들의 사슴처럼 새들처럼 순진하고 바보스럽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좌행참에 나오는 이야기다. 양수기를 가진 신자가 논에 물을 댔다.
아 침에 나가보니 옆 논 사람이 자기 논의 물을 모두 자기 논으로 끌어갔다. 그래서 다시 양수기로 물을 펐다. 다음 날 아침에 나가보니 자기 논의 물 을 모두 다 뽑아갔다. 밤에 그렇게 한 것이다. 밤을 새우고 지킬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얌체 짓이지만 물이 적으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신자는 양수기로 물을 펐다. 그리고 옆 논에 먼저 물을 댔다. 오후가 되어서야 자기 논에도 물을 댈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나가 보니까 물이 비슷하게 줄어있었다. 옆 논 사람도 남의 논의 물을 빼 서 가져가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신자는 기뻐하며 선을 행한다. 이게 제일 좋은 삶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좀 멍청한게 특징이다. 신자는 삶의 행동거지에 더욱 신경을 쓴다. 기뻐하며 선을 행하기 위 해서다. 주차를 할 때도 자리가 없으면 돈내는데로 가고 그것도 없으면 안한다. 운전하면서도 얌체짓을 해서는 않된다. 직장에서도 사회에 나가 서도 언제나 조금만 손해보자. 항상 양보하는 바보가 될 생각을 하자. 왜 그런지 아는가 하나님 믿는 사람은 무엇인가 남보다 더 여유가 있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에게 언제나 양보를 하는 편 이다. 언제나 주고 또 주어도 계속 남는게 신자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삶이요 창조하는 삶이다. 이런 사람 속의 행복을 빼앗을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특별한 시간을 내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는게 아니다. 자 연 속에 있어도 자연 속에 뒤섞이는 것으로 그치면 않된다. 우리는 자연 을 감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분복을 마음껏 즐긴다. 아름다 운 공기와 환경 속에 뒤섞여 뛰논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을 우리는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귀고 서로를 향해 기뻐하며 선을 행한다. 서로 사랑하 고 서로가 감상하며 감사한다. 오늘만 그런게 아니다. 계속 그래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삶을 그런 식으로 보아야 한다. 너무 지악스럽고 너무 악 착스럽게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부모 아닌가. 자 모든 것을 감상하자. 그 속에 파뭍혀 평생을 보내서는 않된다. 그 것에 사로 잡혀도 않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역경과 아픔과 실패까지도 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신 자연이요 감상할 대상이다. 기뻐하며 선을 행하라. 그렇게 행복하라.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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