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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개혁자 (신3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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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드디어 첫 발걸음을 떼어놓았습니다. 밀리니움버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1000년을 맞는 역사의 분기점에 와 있 다는 것을 누구나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석학이나 예언자가 아 니더라도 그 정도의 위기감은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나라가 겪고 있는 경제홍역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위기를 위기로 알고 대처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 받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요즈음 우리 나라에 평안하 다고 잠자도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론을 통해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단어가 '개혁'이라는 것만 보 아도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직장에서 쫓 겨나고, 앞길이 막막한데도 '구조조정은 해야 되나봐요''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하려면 차라리 빨리나 했으면 좋겠어요'하는 말들을 들 어보면 국민들도 거기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련의 흐름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첫째는 개혁의 주체가 종교가 되어야 할텐데, 헤게모니를 우리가 그 렇게 경멸하는 정치인들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서글픔입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이 변해야되고,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 역사의 현장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주역이 되어 야 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둘째는 개혁의 목표와 방향입니다. 우리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당위 성에는 대다수가 동의하지만 어떻게 변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는 듯합니다. 저는 제2건국위원회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당황스럽 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헌법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 월과 억울한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북한의 공산정권과는 얼 마나 처절한 투쟁을 했고, 호시탐탐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주변 열 강과 세계의 강대국들과는 얼마나 힘든 싸움을 싸워왔습니까 그래서 조금씩 얻어낸 자유고 민주주의고, 경제적인 성과입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제2의 건국이라면 어떤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위기니까 힘드니까 뭐 새로운 탈출구를 찾고 보자는 식의 자포자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얼마 전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평소에 별 볼일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소위 건국위원회위원이 되어 있더라고 합니다. 어느 날은 회의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식사나 같이 하시죠'라는 말을 하는데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도 두고두 고 분이 속이 편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평소에 사람같이 보이지도 않 던 사람이….라며 말끝을 흘렸습니다. 저 사람들이 제2의 건국을 하면 어떤 나라를 만든다는 거냐 며 저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두 세계를 바라보는 모세를 발견했습니다. 여기 에서 저는 위기와 갈등에 처한 우리들의, 크리스챤들의 선택과 행동 양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먼저 애굽을 바라봅니다. 바로의 궁정의 화려 함을 보면서 왕자의 대우를 받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바로의 대를 이 을 서열 3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당시 최고의 문화, 최고의 학문 을 자랑하던 애굽을 그는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것을 그는 다 누려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고개를 젓습니다. 애굽 에서 그는 하루도 편안한 밤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고개를 돌려 광야를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몸을 뉘일 초가도 양을 먹일 풀한 포기도 없었습니다. 북풍을 막아줄 언덕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 벌판에 작렬하는 태양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서슴지 않고 애굽을 등지고 사막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2백만 이스라엘을 이끌고 당당하게 까마득히 보이지 않는 가나안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울립니다. 왜 그는 가나안을 택했을까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다 려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오히려 강인하고 전투적인 7족속이 칼을 갈고 기다리는 곳이지만, 거기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바로는 그곳으로 향해 멀출 수 없는 순례의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 것을 엑소더스, 인류 역사의 대 전환점의 하나로 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일까를 찾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일상생활을 통해서 실현해 가는 것이 우리 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경이로운 일들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약속의 땅 가 나안을 향해 가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역사가들은 대 변혁의 사건으로 보여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 신 교수님의 아침 청소운동, 전남대교수들의 어린이 15명 용돈 대주기-'성경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 다'는 말만 되풀이(중앙일보기사)
둘째, 모세는 죽어야 했습니다. 지금 모세는 홀로 죽기 위하여 높은 산에 올라왔습니다. 자기 주변 에 아무리 많은 군중이 있어도 그는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그는 백성 들이 얼굴을 직접 대면하여 볼 수 없을 정도의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국의 절대군주의 권세를 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업적은 실로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영웅적인 것이었 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외롭게 느보산에서 홀로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하고 미련도 없이 훌쩍 하나님의 나라로 갔습니다. 그의 삶은 온전히 이스라엘의 제단에 바쳐진 것입니다. 그는 죽어서도 무덤 하나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신34:6 에' 오늘날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모세의 무덤이 있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죽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십자가를 지 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죽으심으로 이 원리를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가 로마를 이겨 주기를 바 랐습니다. 자신의 원통함을 시원케 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해 주시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일축 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와 11사도들은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자신들 의 역할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시고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유 다의 종교인들도 로마의 정치인 권력가들도 헬라의 지식인들도 다 정 복하고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해야 합니다. 적어 도 사회와 국가에 영향을 주고 새롭게 하려는 뜻이 있으면 내가 먼저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계백도 나를 위해 싸우러 나가기 전에 먼저 아내와 자식의 목을 쳤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을 바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 땅에는 개혁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개혁이라는 메뉴를 대단히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주기로 매번 되풀이해도 실증하나 느끼지 않고 받아먹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서민들과 백성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흘린 땀방울 위에 이 나라는 이만큼 발전하고 성장 해 오지 않았습니까 내 기득권을 챙겨놓고, 그것을 변호하기 위한 개혁이 어떻게 성공 할 수 있겠습니까
예) 황영시감사원장과 엄장로-자랑스러웠던 그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으로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죽음으로서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말고 또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너무 어려운 길이 아 닙니까 신앙생활도 더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것도 챙겨가면 서.' 바로 그 길을 바울 사도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132절 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현재의 손해, 고난, 상실, 억울함, 핍박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축복과 비교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건 내가 받을 영광과 축복 이 너무 엄청나서 현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 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의 자리까지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 이 비교의 원리만 체득한다면 여러분들은 어 느 곳에서든지 소리 없는 개혁자가 될 것입니다. 권력의 힘에 끌려 다 니는 하수인이 아니라, 자유인다운 신선함과 향기를 발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들이 앞으로 우리 나라 교육계를 개혁할 선봉장으로 인정받은 분들로서 짧은 연수 기간 동안 교육부 장. 차관이 서너 번이나 다녀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지난 연말 교수님 들이 마련한 식사자리에서 듣고 이번에는 나오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 리려는 계획을 바꾸고, 오히려 여러분의 얼굴을 하루 속회 보기를 고 대했습니다. 부디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교육계 개혁의 사명은 대통령이나, 장관 이 준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바로를 통해서 요셉을 들어 쓰신 것처 럼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가시시기를 바랍니다. 그 리고 사람들의 낯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십 시오. 당장 보상을 받으려 생각하지 마시고 희생을 각오하십시오. 바울처럼, 마틴루터처럼,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개혁자로 부르셨다는 데 긍지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이리저리 눈치보는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 라 진정한 하나님 사람들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자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상급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존경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우리는 터프가이'라는 제 시를 낭송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를 신문에 발표하니까 '가족애가 잘 그려져 있다' '영 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자상한 아빠 같아 부럽다' 이런 이야 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나이보다 좀 어려서 장난기가 있고, 특히 우리
둘째 아이 규화와는 개구쟁이처럼 노는 것도 사 실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개구쟁이 같은 이야기를 통해 서 세상을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신앙인으로서의 욕망을 표현한 것 입니다. 흙탕물 속에 뛰어 들어서,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쓸 때 비 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Identity를 확인할 수 있고, 그 길을 포 기하지 않고 달릴 수 있기를 소망하는 시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시를 바치고 싶습니다. 경향각지에서 오신 선생님 여러분! 저와 함께 터프가이가 되어 보시 지 않으렵니까 우리는 터프가이 황대성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고 규화는 대청댐으로 드라이브 가 잔다 타이어가 물보라를 일으키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유혹한다 '아빠, 우리는 터프가이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인 물 속으로 내달리면 흙탕물이 차를 덥석 들어 세상 밖으로 내던지는 희열을 맛본다 새침한 딸아이까지 환호한다 '아빤 역시 터프가이야!' '터프가이는 겔로퍼를 타야 해!' 아내는 점잖지 못하다고 투덜대면서도 비오는 날의 드라이브를 좋아한다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도로를 물바다가 되도록 포장한 배려를 고마워하며 손바닥만큼 고인 물까지 다 뒤집어 놓으려 달려간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내는 비가 그치지 않고 바다로 가는 길이 막힌 물이 없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터프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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