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바라보자 (신32:1-14)
본문
우리가 1998년을 처음 시작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999년 첫 주일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년수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시90:10)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복되고, 심지어 죽음조차도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그와 영원토록 교제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연대를 구분할 때 기원전(B.C. Before Christ)과 기원후(A.D. Anno Domini)로 구분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세계에 오시기 전과 오신 이후를 중심으로 구분한 것인데 이러한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1999년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1999년이 되었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기원후(A.D.)라는 용어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원후(A.D.)는 라틴어로 안노 도미니(Anno Domini)의 약어입니다. 이 뜻은 "우리 주님의 시대 안에 있는"(in the age of our Lord)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시대 안에 있는 1999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주님 안에 있고, 또한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될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의 역사는 끝나게 될 것이라는 역사의식이 기원전(B.C.)과 기원후(A.D.)라는 역사구분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이 구분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주님의 시대 안에 있는 1999년을 맞이하면서 지난 한 해는 어떻게 살았으며, 새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의 문제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쩌면 불확실한 시대에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걸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한국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면이나 심지어 기독교회조차도 어떤 방향으로 굴러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신자로서 한 가지 확신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역사의 방향을 조정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하나님과 관계 속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할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래로 된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첫 번째로는 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노래의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겠고, 두 번째로는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이 노래를 지어부르게 하신 실제적인 목적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노래의 성격 이 본문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항상 부르게 될 노래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이 노래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언제 주셨으며, 왜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언제 주셨으며, 왜 주셨을까요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신명기라는 책의 이름은 두 번째 율법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첫 번째 율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아 광야 40년의 생활을 시작할 때 시내산에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불순종함으로 광야 40년의 생활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그 40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의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에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하기 위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는 약속의 땅이면서 미지의 세계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 미래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노래가 이스라엘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신명기 31:14-2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은 19, 2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 그들이 재앙과 환란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여기에 "증거가 되게 하라"는 표현이나, "증인처럼 되리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노래가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 사건의 증인과 같은 역할 것을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언약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약이라는 말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일종의 계약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계약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계약의 형태를 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히. segulla, my treasured possession)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그런데 이 약속을 누리는 조건으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언약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언약적인 배경에서 이 노래를 이해한다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며 은혜를 누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하나님:언약의 하나님 그러면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하나님,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모세는 이 노래에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에 대한 증인을 먼저 세우고 있습니다. 그 증인은 하늘과 땅입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신3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앉히고 있습니다. 먼 후대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 그 죄를 지적하며 벌을 선포할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워 고소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1:2-3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워서 하시는 말씀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주의해 보십시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신32:2) 여기에 주님의 말씀을 당시 팔레스틴의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비와 이슬, 연한 풀 위에 가는 비, 채소 위에 내리는 단비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만물의 생장에 필요한 비, 풀잎마다 맺히는 이슬,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 채소 위에 내리는 단비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맺히는 이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슬이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커다란 극적인 변화없이 이슬처럼 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말씀을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연한 풀에 가는 비가 아니고 폭우가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적절하게 부드럽게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채소 위에 "단비"(히브리어 원문은 많은 비)같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고 분명하게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볼 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했고,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어서 3-4절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며 특별한 관계 속에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여러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은 반석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반석은 아주 익숙한 그림입니다. 성경에 보면 반석은 든든한 기초요 변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나타낼 때와, 광야에서 여행자들에게 사막의 폭풍 가운데서 피난처를 제공해 주거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삼상2:2; 삼하22:2-3; 시18:2; 31:2; 61:2-3; 71:3; 사32:2). 여기서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약을 확실하게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반석이 어떤 것인지 말하기 위하여 이 본문은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이루시되 변함없이 끝없는 사랑으로 이루시며, 항상 공의롭게 행하시는 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신명기 32:6-9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으로, 창조하신 분으로,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선택하신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매 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을 기업으로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라." 또한 신명기 32:10-14에서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 있을 때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때로는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연단하시는 분으로,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젖기름과 어린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더 설명이 필요없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실제적 목적: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노래를 지어 부르라고 하신 실제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결론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 노래의 내용을 보면 신명기 32:1-14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 있고, 15-18절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말씀을 어김으로 범죄하게 되었다는 것과 19-42절은 범죄의 결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3절은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관계를 회복하시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처음의 1-14절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는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신명기 32:5-6에 이러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우매 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 " 그리고 15절에는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여수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인지 그 신분적 특성을 상징적 표현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는 말입니다. 여수룬은 일반적으로 야샤르(yshr, upright)라는 말에서 파생된 용어로 보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LXX인역 성경에는 "여수룬"이 상징하는 말을 "사랑받는 자"(, beloved)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속에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백성들이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한 말을 할까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예언하는 말일까요 물론 예언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노래는 대단히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두려운 느낌이 들지만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담고 있는 노래임에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에게 공부에 대한 책망을 들을 때 다시 한번 이러한 일을 한다면 학교에 다니지 않게 하겠다든지, 공부를 하지 않고 노는 일에 열중할 때 극단적으로 책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든지 하는 위협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자녀를 낳아서 키우고 있는 우리도 자녀들에게 이와 비슷한 협박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부모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부모의 마음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세의 노래가 처음의 몇 절을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고 위협적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가 역설적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잘못을 하게 될 경우 그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노래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약속의 땅이며, 새로운 세계인 가나안에서 약속된 복을 누리며 사는 방법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노래의 중요한 의미를 살펴본 것은 1999년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한 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이면서 새로운 미지의 땅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개인이나 가정, 사회가 점점 나아지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살지만 실제에 있어서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데이터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데이터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에게는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그 법을 지키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체계가 깨어지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정의롭게 살거나 가난하게 사는 일에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존재 의미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 한국교회에 아주 많이 알려진 영국의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 목사님이 매일의 묵상 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점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그 중에 저는 우리가 늘 생각하고 있는 것같지만 잊어버리기 쉬운 세 가지를 인상깊게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의 차이점은 삶의 목표가 다릅니다. 비그리스도인은 돈과 명예와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을 얻는 일에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목표가 있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수단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는 일에 삶의 목표를 두고 그것을 추구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일을 이 일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두 번째의 차이점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차이점은 자기 자신을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능력을 확신하고 자기가 마음을 굳게 먹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사실 이러한 차이점들은 그리스도인됨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이요 미지의 세계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언약의 노래를 지어부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의 노래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노래하는 내용도 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노래도 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특히 이 노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의 말씀을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 때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고 말씀에 따라 우리의 삶을 일치시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버리면 이 노래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노래가 지어진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나 사사기, 열왕기 상하와 역대기 상하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살 때 튼 축복을 주었지만 하나님을 버릴 때 큰 고통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 다른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계획을 먼저 세우십시오.
왜냐하면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그와 영원토록 교제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연대를 구분할 때 기원전(B.C. Before Christ)과 기원후(A.D. Anno Domini)로 구분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세계에 오시기 전과 오신 이후를 중심으로 구분한 것인데 이러한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1999년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1999년이 되었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기원후(A.D.)라는 용어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원후(A.D.)는 라틴어로 안노 도미니(Anno Domini)의 약어입니다. 이 뜻은 "우리 주님의 시대 안에 있는"(in the age of our Lord)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시대 안에 있는 1999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주님 안에 있고, 또한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될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의 역사는 끝나게 될 것이라는 역사의식이 기원전(B.C.)과 기원후(A.D.)라는 역사구분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이 구분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주님의 시대 안에 있는 1999년을 맞이하면서 지난 한 해는 어떻게 살았으며, 새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의 문제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쩌면 불확실한 시대에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걸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한국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면이나 심지어 기독교회조차도 어떤 방향으로 굴러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신자로서 한 가지 확신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역사의 방향을 조정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하나님과 관계 속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할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래로 된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첫 번째로는 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노래의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겠고, 두 번째로는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이 노래를 지어부르게 하신 실제적인 목적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노래의 성격 이 본문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항상 부르게 될 노래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이 노래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언제 주셨으며, 왜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언제 주셨으며, 왜 주셨을까요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신명기라는 책의 이름은 두 번째 율법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첫 번째 율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아 광야 40년의 생활을 시작할 때 시내산에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불순종함으로 광야 40년의 생활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그 40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의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에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하기 위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는 약속의 땅이면서 미지의 세계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 미래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노래가 이스라엘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신명기 31:14-2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은 19, 2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 그들이 재앙과 환란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여기에 "증거가 되게 하라"는 표현이나, "증인처럼 되리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노래가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 사건의 증인과 같은 역할 것을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언약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약이라는 말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일종의 계약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계약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계약의 형태를 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히. segulla, my treasured possession)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그런데 이 약속을 누리는 조건으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언약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언약적인 배경에서 이 노래를 이해한다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며 은혜를 누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하나님:언약의 하나님 그러면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하나님,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모세는 이 노래에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에 대한 증인을 먼저 세우고 있습니다. 그 증인은 하늘과 땅입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신3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앉히고 있습니다. 먼 후대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 그 죄를 지적하며 벌을 선포할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워 고소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1:2-3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워서 하시는 말씀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주의해 보십시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신32:2) 여기에 주님의 말씀을 당시 팔레스틴의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비와 이슬, 연한 풀 위에 가는 비, 채소 위에 내리는 단비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만물의 생장에 필요한 비, 풀잎마다 맺히는 이슬,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 채소 위에 내리는 단비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맺히는 이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슬이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커다란 극적인 변화없이 이슬처럼 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말씀을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연한 풀에 가는 비가 아니고 폭우가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적절하게 부드럽게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채소 위에 "단비"(히브리어 원문은 많은 비)같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고 분명하게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볼 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했고,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어서 3-4절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며 특별한 관계 속에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여러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은 반석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반석은 아주 익숙한 그림입니다. 성경에 보면 반석은 든든한 기초요 변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나타낼 때와, 광야에서 여행자들에게 사막의 폭풍 가운데서 피난처를 제공해 주거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삼상2:2; 삼하22:2-3; 시18:2; 31:2; 61:2-3; 71:3; 사32:2). 여기서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약을 확실하게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반석이 어떤 것인지 말하기 위하여 이 본문은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이루시되 변함없이 끝없는 사랑으로 이루시며, 항상 공의롭게 행하시는 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신명기 32:6-9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으로, 창조하신 분으로,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선택하신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매 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을 기업으로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라." 또한 신명기 32:10-14에서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 있을 때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때로는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연단하시는 분으로,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젖기름과 어린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더 설명이 필요없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신 실제적 목적: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노래를 지어 부르라고 하신 실제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결론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 노래의 내용을 보면 신명기 32:1-14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 있고, 15-18절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말씀을 어김으로 범죄하게 되었다는 것과 19-42절은 범죄의 결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3절은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관계를 회복하시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처음의 1-14절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는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신명기 32:5-6에 이러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우매 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 " 그리고 15절에는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여수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인지 그 신분적 특성을 상징적 표현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는 말입니다. 여수룬은 일반적으로 야샤르(yshr, upright)라는 말에서 파생된 용어로 보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LXX인역 성경에는 "여수룬"이 상징하는 말을 "사랑받는 자"(, beloved)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속에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백성들이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한 말을 할까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예언하는 말일까요 물론 예언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노래는 대단히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두려운 느낌이 들지만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담고 있는 노래임에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에게 공부에 대한 책망을 들을 때 다시 한번 이러한 일을 한다면 학교에 다니지 않게 하겠다든지, 공부를 하지 않고 노는 일에 열중할 때 극단적으로 책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든지 하는 위협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자녀를 낳아서 키우고 있는 우리도 자녀들에게 이와 비슷한 협박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부모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부모의 마음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세의 노래가 처음의 몇 절을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고 위협적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가 역설적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잘못을 하게 될 경우 그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노래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약속의 땅이며, 새로운 세계인 가나안에서 약속된 복을 누리며 사는 방법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노래의 중요한 의미를 살펴본 것은 1999년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한 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이면서 새로운 미지의 땅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개인이나 가정, 사회가 점점 나아지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살지만 실제에 있어서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데이터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데이터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에게는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그 법을 지키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체계가 깨어지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정의롭게 살거나 가난하게 사는 일에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존재 의미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 한국교회에 아주 많이 알려진 영국의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 목사님이 매일의 묵상 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점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그 중에 저는 우리가 늘 생각하고 있는 것같지만 잊어버리기 쉬운 세 가지를 인상깊게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의 차이점은 삶의 목표가 다릅니다. 비그리스도인은 돈과 명예와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을 얻는 일에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목표가 있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수단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는 일에 삶의 목표를 두고 그것을 추구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일을 이 일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두 번째의 차이점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차이점은 자기 자신을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능력을 확신하고 자기가 마음을 굳게 먹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사실 이러한 차이점들은 그리스도인됨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이요 미지의 세계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언약의 노래를 지어부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의 노래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노래하는 내용도 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노래도 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특히 이 노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의 말씀을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 때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고 말씀에 따라 우리의 삶을 일치시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버리면 이 노래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노래가 지어진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나 사사기, 열왕기 상하와 역대기 상하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살 때 튼 축복을 주었지만 하나님을 버릴 때 큰 고통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 다른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계획을 먼저 세우십시오.
왜냐하면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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