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왕의 세가지 소원 (삼하9:1-8)
본문
다윗왕의 세가지 소원 (삼하 9:1-8)
할렐루야!
옆에 사람하고 인사 한 번 합시다. 주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사도 참 잘하십니다.
그러니까 5년 전인가요? 일산에 어느 인쇄소를 갔습니다. 제 친구교회의 장로님이 하시는 인쇄소인데 공장에 들어가니까 기계가 많은 양의 인쇄물을 찍고 있었어요. 그 인쇄소의 특징은 아주 얇은 종이, 그러니까 성경이나 사전같은 것을 인쇄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계에서 인쇄기계를 제일 잘 만드는 나라가 영국인데, 그 기계를 제일 잘 쓰는 사람이 이 교회 장로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영국에서 제일 얇은 종이를 인쇄하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하면, 그 기계를 한국에 들여와서 장로님이 손만 데면 1미리짜리의 종이에 하는 인쇄를 0.7미리에다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종이가 얇아지면 뒷면에 잉크가 번지기도하고, 수백장이 계속 돌아가기 때문에 탄력이 붙어 찢어지기도 하는데, 이 장로님의 기계는 찢어지지 않고 앞뒤로 인쇄가 깨끗하게 잘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영국사람이 와서 보고는 혀를 내두르면서 세상에 이런 기술이 어디 있냐고 묻더랍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이 기술을 가르쳐 주겠어요? 아들도 아직 안 가르쳐 줬다고 하더라구요. 기계는 영국사람이 만들었는데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장로님이 하신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이 "일은 기계가 다 한다"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역사도 사람이 문제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다 그렇습니다. 잘사는 나라는 온 백성이 다 잘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못사는 나라에 가면 다 못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못사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크면 신앙생활 다 잘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작으면 신앙생활도 못하냐? 아닙니다. 잘하는 사람은 어디서건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어디서든 못합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방법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고 꼭 집어서 말하면, 나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오늘 청년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청년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나 생각을 해보니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러분 이 세상에 어느 역사를 보십시오. 아무리 큰 나라도 그 역사가 몇 천 년 가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바벨론도 백년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다윗의 가문과 그의 유대지파는 유대인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바에는 다윗과 같이 믿어서 수 천 년까지 복 받아 누릴 수 있는 그런 가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꼭 그런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지혜를 더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품는 생각들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고, 기쁨이 되는 것들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더 나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더 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다윗은 이스라엘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는 다윗은 어디로 가든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을 시작으로 많은 전쟁 가운데 놀라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았던 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윗의 별이 이스라엘 나라의 국기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가 거둔 수많은 승리에 대한 이야기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이 개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8:8절, 14절에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어디로 가는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까? 이 사실을 알려면, 다윗이 그 마음에 품었던 소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에게는 3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즉 이 말은 다윗이 하나님과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는 뜻도 됩니다.
여기에 항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간장독이고 다른 하나는 된장독이고 또 하나는 고추장독입니다. 같은 모양의 항아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 것은 그 내용물 때문입니다. 결국 그 내용물에 따라 장독의 이름이 달라진 것입니다. 내용물이 그 독의 이름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사람됨이 내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랬잖아요.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너희 속에 성령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간장독에 가까이 가면 냄새가 나잖아요. 내용물이 없는 빈 독을 봐도 냄새가 아직 남아서 간장독인지 된장독인지 알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쟁이에게는 예수님 향기가 당연히 나는 겁니다. 예수님 냄새가 나야 하는데 성령의 냄새가 나야 하는데 우리 어떤 냄새가 납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이 사는 성, 다윗 성,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오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오기 위해 백성들 가운데서 삼만 명을 뽑아 함께 가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려 했어요. 그런데 수레가 덜컹하는 바람에 법궤가 흔들려서 떨어지려고 했어요. 그래서 호송하던 웃사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궤에 손을 뎀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다윗은 '아니 세상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방법, 내 생각대로만 했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법궤는 수레로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레위인들이 수레를 어깨에 매어서 예루살렘 성에 모셔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궤와 같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이 성령님을 어떻게 모시어 놓고 삽니까? 성령의 뜻을 따라서 마땅히 귀히 여기고 살아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언젠가 청년회의 한 자매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 자매에게 신앙적인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교회에 다녀야 하는지? 이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마음에 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땅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이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워서 행진을 하고 전쟁을 하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제사장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갖고 나가면 이길 것이다고 해서 나갔는데 전쟁에서 졌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나갔는데도 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나를 이날까지 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산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모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다가 사람이 죽었지만 다윗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귀하게 섬겨야 하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더욱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환경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미 순교적 믿음으로 담대해졌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붙들었던 하나님의 뜻을 향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불완전한 믿음으로 감정에 휘둘리고 환경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런 신앙은 잘 못되면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행복을 추구한다면 자신이 우상인 샘입니다. 명예를 추구하든, 자식을 위하든, 성공을 꿈꾸든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자 하는 소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속에 가장 강력한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시도를 합니다. 더욱 철저한 준비를 합니다. 그리하여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셔 들이면서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모릅니다. 춤을 추며 환호하였습니다. 나팔을 불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다윗이 준비한 장소, 준비한 장막 안에 모셔졌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드디어 그의 간절한 첫 번째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대하여 시편 23편:1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 왕은 양을 기르던 목동 출신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가 없는 동물입니다. 집을 떠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를 못하고 맹수를 만나면 자기를 방어하지 못하고 살이 오를 때는 몸이 무거워 넘어지면 혼자 일어서지 못합니다. 벌레들이 자기 몸에 둥지를 틀고 살을 파먹어도 모르는 것이 양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동물이 양인데, 그 양이 바로 자신이며, 하나님은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인생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래할 때에, 하나님 여호와를 목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하는 소원을 지닌 다윗을 하나님도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찔러 주시고 다윗 왕이 평안히 살게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소원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자하는 소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거절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예배당을 지은 사람보다는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세요.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에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났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으니 식사를 대접하려고 분주하게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가지고 소곤소곤 얘기만 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도와주지 않아요.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님께 "예수님! 저는 분주하게 식사준비를 하는데 마리아는 도와주지 않습니다. 나와서 준비하라고 좀 말해주세요."하며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리아는 너보다 더 좋은 것을 택했노라."하셨습니다.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일하다가 불평하는 것은 일 안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다윗이 예배당을 지은 사람보다는 좋은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반대하실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내 생각이 아무리 중요하고 아무리 큰일이라도 하나님이 "아니다" 하면 "예" 하고 순종하길 바랍니다.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누구에요? 다윗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원하는 대로, 소원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사울임금은 그 반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무어라고 말합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제사보다 예배당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배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사건이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식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뵈옵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칩니다. 예배 속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진리를 붙들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거룩한 은혜를 받습니다.
‘삶이 예배다’란 말을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삶이 예배가 되려면 공적인 예배를 정성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없이 차가운 예배의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만이며 신성모독입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 아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2-13)
그리고 참된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심을 인정하고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령한 신학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죽어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원수같이 미운 사람들이 있었지?" " 예"
"그 사람들 중에 죽은 사람도 있나?" "예"
"그러면 내일 그 사람의 무덤에 찾아가 실컷 욕하고 발길질도 하고 오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아무튼 시키는 대로 하게"
그래서 죽는 법을 알기 위해 교부가 시킨 대로 원수 같은 사람의 무덤을 찾아가서
"나쁜놈, 고약한 놈"
하며 온갖 욕을 다 퍼붓고 무덤에 발길질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교부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시킨대로 다 했습니다. 이젠 가르쳐 주십시오"
"아니 아직 한가지 더 남은 것이 있네. 자네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 중에도 죽은 사람이 있지?"
"예. 있습니다."
"그러면 내일 그 사람의 무덤에 찾아가 온갖 칭찬과 사랑의 말을 하고 오게"
이번에도 그는 교부의 말대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의 무덤에 찾아가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사랑의 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다시 교부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다 했습니다. 이젠 죽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다 가르쳤으니 돌아가게"
"아니, 다 가르치다니요? 저는 이틀동안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보게, 자네가 원수 무덤에 가서 욕을 하고 발길질을 하고 원수가 뭐라고 말하던가?"
"아무 대답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에 가서 사랑과 칭찬의 말을 하니그 죽은 사람이 좋아하던가?"
"아니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던 사람의 무덤에 가서 사랑과 칭찬의 말을 하니 그 죽은 사람이 좋아하던가?"
"아니.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원래 죽은 사람은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야. 죽은 사람은 원수가 오른 뺨을 치고 겉옷을 벗겨가고 오리를 끌고 가는 불평이 없는 법이야, 또 사람들이 칭찬을 하고 높여주어도 그것에 기뻐하거나 보답할 수가 없어. 원수가 욕을 하든 사랑하는 사람이 칭찬을 하든 그런 것에 좌우되지 않고 주님만 따라갈 때,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이 되는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바라는 것은 예배당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한 자를 하나님이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예배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하는 일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큰 사명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역시 예배입니다. 여러분 이시간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길 바랍니다. 우리하나님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내 눈에 보이는게 좋다고 해서 다 좋은게 아닙니다. 내 눈에 나쁘다고 해서 다 나쁜게 아닙니다.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할수록 여러분은 심각한 영적 손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생기를 잃어버릴 것이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향한 갈망과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이 무엇인지도 잊게 될 것입니다. 박약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의 삶을 마귀의 지배아래 갖다 두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령한 은혜의 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행동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너희 마음을 감동시키면 그때 기도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연민의 정이 솟아나면 그때 전도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예배하라. 너희는 기도하라. 너희는 전도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것이 의무라는 것입니다.
'삶이 예배다'란 말을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삶이 예배가 되려면 공적인 예배를 정성으로 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더욱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였습니다. 수많은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나라에는 승전의 기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주변 나라에서는 선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이럴 때마다 다윗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비록 그가 짓지는 못해도 성전 건축을 위한 물질은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예배한 다윗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다윗은 그 때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드림으로 모두가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는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소원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야 요나단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은혜를 갚고 저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이는 참으로 강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요나단이 아니었으면, 다윗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라고 할 정도로 다윗은 요나단의 사랑으로, 희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할 요나단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다윗을 숨겨주고 살려주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전쟁에 나가 죽게 되고 다윗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요나단을 기억하였습니다. 이제 요나단의 자손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궁금하였습니다. 그 자손들에게 그동안 받은 사랑을 갚고 싶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7년 6개월이 걸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다윗은 사울의 집안과 계속되는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안은 강하게 하시고, 사울의 집안은 쇠하게 하심으로 결국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사울의 집안과 다윗은 철저한 원수가 되었습니다. 남겨두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함에도 다윗은 사울의 집안 중에서 특별히 요나단의 자손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였습니다. 요나단을 향한 사랑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소원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생존해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인데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므비보셋을 데려왔습니다. 므비보셋이 두려워 그 앞에 엎드려 절할 때에 다윗이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왕자 중 하나처럼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로 대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이후로 므비보셋은 다윗의 아들이 받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마음에 품은대로 하였습니다.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교회를 향해 은혜를 갚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은 기성세대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간에 몽골을 다녀왔습니다. 선교사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몽골 선교지를 돌아보는데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이 드는 가운데
'야! 감사합니다. 내가 대한민국 사람인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안내를 한다고 해서 버스를 탔더니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중고 버스입니다. 한글이 다 그대로 써 있습니다. 지나가다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썼던 시내버스가 다 있어요. "한남, 수색, 은평"이런 글씨가 그대로 다 써 있더라구요. 봉고차, 그레이스도 많습니다. 보니까 "천사유치원"이런 문구도 그대로 있더라구요. 한국의 중고차는 다 거기 가 있더라구요. 옆에 있던 선교사 한분이 "여기 80%가 한국 중고차입니다." 그러더라구요. 대한민국 사람인 것이 감사하더라구요. 다르항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계셨는데 울란바트라 수도에서 3시간 반 걸리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거기는 어떤가 여쭤봤더니 "굶어죽는 사람이 많습니다."고 하더라구요. 21세기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제가 몽골사람과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가 이런 얘기를 헀습니다.
"대한민국이 왜 잘사는 줄 아십니까?" 그랬더니 "우리는 120년전에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 축복받아서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100년전에 공산당을 받아들여가지고 이렇게 망한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이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거에요. 감사한 것은 교인이 2000여명 되는데 선교사 가족이 200명이 된다고 그래요. 1/10입니다.
어제 인터넷에서 뉴스를 잠깐 봤는데요. 어느 통계에 의하면 우리사람이 세계에 나가서 선교하는 숫자가 세계 2위라고 합니다. 미국이 1등이고.. 그런데 인구비율로 따지게 되면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훨씬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30년이 지나면 이 숫자대로 하면 한국의 선교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을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때 이것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받아가지고 나만 잘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것을 남을 위해서 도와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이 선교의 열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우리 한국 사회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우리교회가 봉사활동을 많이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나라, 우리 그리스도인을 봉사하는 마음보시고 더 큰 축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1895년 우리나라 교육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윤치호 선생님은 미국의 네시빌 테네시 주에 잇는 핸즈벨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는데 그는 미국 삶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사람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배 삯까지 계산하고 나니 300불이 남더랍니다. 이 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내가 미국 사람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는데 300불을 가지고 가서 무엇을 하느냐?'
생각하고 그 300불을 남 감리교 선교부에 찾아가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는데 사용하여 주십시오"
하고 헌금을 해버렸답니다. 이에 직원들이 큰 감동을 받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연세대학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300불이 얼마나 가치 있게 쓰여졌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드렸기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드렸기에 그 돈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믿음이 좋아지고 성장할까? 라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많은 비결이 있지만 그것을 바
로 봉사입니다. 건강할 때, 물질 있을 때, 능력 있을 때 열심히 섬기고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없을까를 항상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 봉사하시는 분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고 감당했으므로 이것이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러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수번이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요셉처럼 사양하지 말고 힘껏 봉사해 보겠다는 자세로 감당할 때 의외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습니까? 답답합니까? 반드시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 마시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당장 봉사해 보십시오. 어린아이 하나라도 전도해 보시면 자신도 모르게 확신이 올 것입니다.
은혜를 갚고 사랑을 베푸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곳에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15:58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여 흘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일은 실컷 했어도 헛되고 오히려 망하는 경우가 있지만 주안에서 하는 수고는 절대로 공짜가 없습니다. 그것은 땅에 곡식을 심는 원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반드시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할 때, 그 일의 결과는 엄청난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보라고 하는 봉사, 사람 생각으로 하는 봉사도 않는 것보다야 낫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봉사하는 것이 봉사의 기본원칙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에서 섬기며 봉사할 때에 기왕이면 하나님을 생각하며 봉사하므로 여러분이 드린 시간, 물질, 여러분의 흘린 땀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치는 이상으로 봉사하는 이상으로 우리가 섬기는 이상으로 채워지십니다. 육신도 사용할수록 튼튼하고 강해지듯이 우리의 속마음인 믿음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 사업에 봉사하고 힘쓸 때 더욱 성장하고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나누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년 여러분 마음에 품고 있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방법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 안에 무슨 생각을 넣고 있는지 다윗의 소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에 품은 소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이 되고, 그 소원이 이루어짐으로 좋은 청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