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의 은혜 (왕하20:1-7)
본문
긍휼의 은혜 / 왕하20:1-7, 막7:24-30
1961년에 독일의 뷔렌 베르그에서 나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훗날에 미국의 ‘촬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묘사한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재판을 받던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가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나치 독일의 지도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아우슈비츠에서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으며 또한 얼마나 죽이라고 명령했느냐?”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법정 증인으로 나온 유대인 가운데 ‘에히엘 디노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확인을 시키는 장면에서 재판관이 에히엘 디노르씨,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던 장본인, 당신이 그때 거기서 만났고, 보았던 ”아돌프 아이히만“ 그 사람 맞습니까? 가까이 가서 그의 얼굴을 확인하시죠.” 라고 말하자, 에히엘 디노르가 가까이 가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는 쓰러져 기절을 했다가 한참 후에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 그가 한 얘기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습니다. 아주 유명한 얘기입니다. “내가 기절한 이유는 ‘저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앞에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얘길 덧 붙였습니다. “그가 아우슈비츠에서는 달랐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그는 정말 다른 인간이었습니다. 광기가 사로잡힌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광기가 빠지고 나니까 평범한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 얘기가 전 세계를 흔들었던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날 나도 아돌프 아이히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무서운 죄 성을 폭로한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에게 무서운 악령의 공격이 있습니다. 악령이 내 마음을 지배하면 어떤 악한 일도 서슴없이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 가운데 빠지게 하고 죄의 종노릇 하다가 지옥의 멸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죄 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들이 지은 수많은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주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은혜로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긍휼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 얻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긍휼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긍휼은 주님의 사랑에서 속성에서 오는 귀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긍휼(矜恤)’이라는 히브리어 ‘라하밈’(רחמים)은 주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애정(사 13:18, 49:15) 또는 형제간의 우애(암 1:11, 슥 7:9) 등을 뜻합니다. ‘인자’ 또는 ‘자비’라는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쓰이는 용어입니다. (시 51:1, 사 33:2, 단 9:18). 하나님의 긍휼은 주로 ‘용서’로 나타났는데(신 13:17, 삼하 24:14, 시 25:6, 애 3:32) 이 개념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사역입니다(벧전 1:3, 2:10). 예수님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마 9:13,27).
이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롬 9:23)이라고 했으며, 야고보 사도는 긍휼이 하나님에게서부터 임하는 지혜라고 했습니다(약 3:16). 따라서 긍휼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시며,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속성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긍휼의 사랑에 대한 절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아무리 중한 죄인이라도 진심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용서받을 수 있는 능력의 십자가요, 긍휼의 십자가입니다.
벨마 바필드는 22년 만에 미국에서 처음 사형이 집행된 여죄수였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어머니, 약혼자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벨마는 감옥살이하는 동안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 여인의 가까운 친구인 앤 그래함 럿츠에 의하면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 시간이 가까워지자 벨마에게는 용서의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럿츠 부인은 벨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면서 게들이 들랑날랑하는 구멍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네,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어린애가 모래성을 쌓으려고 파서 생긴 구멍을 본 일이 있습니까.” 네, 보았지요. “그러면 수로를 넓히기 위해서 기중기로 바다 속 깊이 판 곳을 본 적도 있습니까?”라고 럿츠가 물으니까, “본 일이 있고말고요.”라고 벨마가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럿츠 부인은 말하려고 했던 요점을 설명했습니다. “당신은 작은 구멍, 중간치 구멍, 그리고 큰 구멍을 본 적이 있습니다. 벨마. 밀물이 밀려오면 그 구멍들은 어떻게 됩니까? 구멍들은 다 똑같이 없어지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것이 예수님의 보혈이 당신을 덮을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당신의 죄는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없어졌습니다.”
그 죄가 작든지 중간이든지 크든지 관계없이 모든 죄는 갈보리 십자가에 의해 전부 죄 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를 누구나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를 마음속에 구주로 받아 들였다면 정죄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밀물이 밀려오면 어떻게 되는지를 바로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은 아무리 사악한 죄인이라도 그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고 영생 얻는 후사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갈보리 십자가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을 믿고 긍휼이 충만하신 주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는 주님의 긍휼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에는 남 유다의 13대 왕인 히스기야가 나옵니다. 그는 39세의 나이에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병에서 치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생명이 15년이나 연장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히스기야 왕은, 우상 숭배하고 방탕하고 타락했던 다른 왕들과는 달리, 신앙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의 단을 제거하고, 성전의 제사를 회복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감사 제물과 첫 열매,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교육을 시키고,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신실한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예루살렘 온 성에는 큰 기쁨이 있었고, 백성들도 복을 받았습니다(대하 30:26∼27). 또한 히스기야 왕, 개인도 범사에 형통하는 복을 받았습니다(대하 31:21).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재물을 주셨습니다(대하 32:27∼30). 또한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남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하룻밤 사이에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죽게 하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위기에서 모면하는 은혜 체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큰 위험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고 난 다음에, 갑자기 그는 병에 걸렸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보통 병도 아닌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아마 당시 훌륭한 의사는 다 와서 고쳐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고치지 못하고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여러 가지 걱정, 근심에 빠졌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아직까지 자식이 없으니 누가 왕권을 계승하겠는가? 내가 지금 시작한 종교 개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상 숭배와 불신앙에 빠진 이 민족을 누가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겠는가? 내가 죽으면 앗수르 군대가 다시 쳐들어와 우리 유다를 점령할 것이 아닌가?' 등등의 근심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통곡하고 기도했습니다. 부르짖고 기도했습니다. 왕의 체면도 버리고 높은 신분도 접어두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회개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눈물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나는 잘 믿으려고 믿었는데,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습니까?' 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책임을 하나님 앞에 전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부족과 연약함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구원과 도움을 구했습니다. 본문 왕하 20:2절에 "히스기야가 낯을 벽(壁)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祈禱)하여 가로되" 했는데, 여기 '낯을 벽으로 향했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벽만 바라보고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성전 쪽의 벽을 바라보고 기도만 했습니다. 그는 전심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의 기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 38:14에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앙망하나이다." 긍휼의 하나님은 그의 이런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시34:18 말씀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痛悔)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정말 내가 겸손하고 깨어져서, 낮아져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고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기도했던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하갈도 눈물로 통곡하고 기도했을 때 샘을 발견했으며(창 21:16∼19), 한나도 통곡으로, 눈물로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삼상 1:10, 20). 느헤미야는 민족을 위해서 슬퍼하고 주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응답 받게 되었습니다(느 1:4, 9). 한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 발치에 엎드려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으며 주님의 발에 입맞춤을 했을 때 ‘여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님께 자기의 어린 딸이 귀신에 잡혀서 고통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여자의 간청을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님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긍휼히 여기실만한 간절히 긍휼을 위해 간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성도는 바른 믿음으로 살면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다른 왕들처럼 바알을 섬기고 타락되어 하나님을 떠 난 삶을 살았다면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살길을 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다른 왕들과 달랐습니다. 분열왕국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신앙의 암흑기 시대였습니다. 세워진 왕들마다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과 함께 섬기는 영적 간음을 행하고 온 나라에 우상을 들여와 타락시키는 일들을 앞장서서 했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왕이 되는 즉시로 종교개혁을 일으켜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철폐 하였습니다. 여러 산당들을 제하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놋 뱀을 부수고,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의롭게 통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자였기 때문에 그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눈물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히스기아 왕처럼 바른 믿음으로 살면서 하는 기도는 더욱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딸의 병으로 그의 마음이 몹시 상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자기 딸에게 악한 귀신이 들려 어머니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즉시 예수님께 달려와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들은 예수의 소문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서부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여인은 남다른 자녀의 사랑을 가지고 귀신들린 딸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 하며 있었던 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이러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딸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했던 이 여인은 주님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아뢰었습니다. 아무리 모욕적인 언사라 해도 이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딸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은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웃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질 때 주님 앞에서 복 있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대한 말씀 중 하나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가 주인을 보고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사가 주십시오. 저희 모자가 함께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이 말했습니다. "안돼" 그리고는 아들만 끌고 가는데 그 엄마는 생명을 내걸고 함께 사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고.... 한번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그 선교사는 모자 종을 불쌍히 여겨 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 그 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선교사가 풀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습니다. 실신이 된 선교사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자 엄마 노예가 입을 대어 독을 빨아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거의 죽었던 선교사가 일어나 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던 엄마 노예는 얼굴이 퉁퉁 부어 죽어 있었습니다. 엄마 노예는 자기를 사 준 그 고마운 선교사,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자유를 준 이 선교사를 위하여 사망의 독을 입으로 빨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면 자신도 긍휼을 입을 때가 있음을 알고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다가 주님 앞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긍휼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긍휼은 주님의 사랑에서 속성에서 오는 귀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긍휼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도는 바른 믿음으로 살면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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