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 (신1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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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명절인 설날의 그믐날이 되었습니다. 뉴스 시간마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무려 이천 칠백만명의 민족 대이동이 이번 설을 통하여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국가에서 아무리 교통 정책을 잘 한다고 해도 이 숫자 앞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더구나 영동 지방과 경상도 지방에 눈이 많이 와서 차량 통행이 어렵다고들 하는데도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 형제가 있고 추억이 있고 따뜻한 이웃이 있는 고향은 언제나 마음에 풍요로움을 줍니다. 그래서 한 번 명절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기를 쓰고 고향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태어난 곳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원천이 있는 곳이 사람에게 평안과 안정을 주는 모양입니다. 저도 가끔씩 가는 고향이지만, 너무나도 멀어서 애들이 지겨워하는 고향이지만 고향 가까이 있는 산천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이는 것은 아마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이 있는 모양입니다. 연어라고 하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이 고기는 맑은 시내에다 알을 낳습니다. 알이 부화가 된 뒤에 바다로 어린 고기가 나갑니다. 우리나라 동해안에 있는 남대천에서 새끼가 바다로 나가서 북태평양 근처에서 자랍니다.
그 거리는 비행기로도 지겹게 가야 되는 머나먼 거리입니다. 이 연어가 어른 고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우리 나라 동해안까지 와서 자기가 나온 시내를 찾아가 알을 낳고는 죽습니다. 마지막 죽기 전에 자기의 원천을 찾아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해서 찾아오는지는 모르지만 고향을 찾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도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사람에게도 이 연어처럼 자기의 근본을 찾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근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모르지만 아마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평상시에는 생활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다가 명절이 닥치면 어쩔 수 없는 향수에 그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고향을 찾는 대열에 합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시골에서 노인들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죽을까 ·········· 차를 타고 가면서 잘 꾸며진 무덤을 보고서는 그것이 그렇게도 좋아 보이고 부러워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이 흙에서 나와서 자기가 가야 하는 고향을 찾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고향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에게 고향이 그리워질 때가 서러움을 겪고 객지 생활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멸시를 받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너무도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안고서 밖을 나와 보니 그날 따라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하늘을 보니 고향집에서 보았던 그 달이 하늘에 새하얗게 떠 있었습니다. 불현듯 집이 그리워지고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영원한 고향을 생각하는 때는 편하고 좋을 때가 아니고 삶이 어렵고 힘이들 때 아무도 자기를 기쁘게 맞아 주지 않을 때 영원한 존재를 그리워하며 자기를 맞아 줄 영원한 고향에 대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그 정체를 정확히 모릅니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간절한 소망의 정체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천국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들로서 우리를 존재하게 해주신 그분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그 분이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가야 할 곳이 바로 그곳인 것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고향이 우리가 찾아가는 고향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고향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변해 버린 고향의 모습에 실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문학가로 잘 알려진 '토마스 월트'의 소설 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모든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지식도 얻었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똑똑한 자녀도 골고루 두었습니다. 모든 소원하는 것들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오랫동안 그리던 고향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옛날에 자기가 살던 고향 땅에 갔습니다. 노오스 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애쉬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역전에 내리는 순간 그는 몹시 당황하고 실망했습니다. 고향은 너무나 변해 있었습니다. 거리는 현대화되고 인심도 변해 있었습니다. 친구는 남이 되고, 고향 땅에 온 자기는 오히려 이방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자기가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에 다시 올라 슬프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아마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영원한 고향이 있음을 가르치시고 그곳을 사모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영원한 그 고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인 것입니다. 본향을 향하네라는 성가곡이 있습니다.
합창으로 불리워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곡입니다. 이 세상-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인생의 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난의 궂은 비바-람 환난의 비-바-람 환난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모질게-불 어-도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기쁜 찬송 주예수님 은혜-로 이끄시네 이끄시네 생-명강 맑은 물-가에 백화 가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 찬송가 부르실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이세상-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본향을 향하네 이스라엘 사람들도 뒤에 두고 온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 되는 고향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도 두고 온 고향이 아닌 그들 앞에 있는 본향을 찾아가기 위해 뒤에 있는 고향을 고향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히11:13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다가 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11: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11: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히11: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가야하는 곳은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은 인내를 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해야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I.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때로는 너무나 지치고 되는 일도 없고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언제라도 훌훌 털고 고향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든든한 배경이 있기에 조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돼도 돌아가면 맞아 줄 곳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시골에서 보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갔다가 병들고, 또는 사업에 실패를 해서 가진 것 다 없애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골에는 빈집이 있고 벌어먹을 수 있는 땅들이 있고, 이웃들이 여러 가지로 도와주어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잡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고향이 좋은 것입니다. 실향민들이 있습니다. 수몰 지구, 공업단지, 이북 ········ 이들은 가진 것들이 있고 친구들도 있지만 남들이 다들 고향을 찾을 때 혼자 눈물을 흘려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절망감이 그들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이 어렵고 살기가 각박한 어려움 속에서 살지라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든든합니다. 우리가 언제라도 가서 살 수 있는 우리의 집이 천국에 예비가 되었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90장2절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너머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 영원한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서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를 못 합니다. 아내조차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기 남편에게 그의 병명을 말하지도 못 합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를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그런데 이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수필을 썼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입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입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난 후에 불란서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가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 고백 교회 신학자 본훼퍼입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훨씬 앞서서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어 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옵니다. 직감적으로 본훼퍼은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는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그를 뒤덮고 있었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나와 감옥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서 충격과 감동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고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참된 고향을 확신하면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I. 고향의 의미 (신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는 고향은 뒤에 두고 온 고향이 아닌 앞에 가야 할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그 만난의 고난을 무릅쓰고 앞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땅이요,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과 그 땅위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과 깊은 관심. 그리고 애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고향은 하나님과 온전히 함께 하는 삶인 것입니다. 아마도 저 천국은 완전히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곳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금 당장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는 이 땅 위에서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가 바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 주님 안에 주님 내 안에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천국 고향의 포근한 분위기를 느끼며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아브라함의 선택-가나안 선택-하나님을 잘 섬기고 함께 살아가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 된 것
III. 소망을 주는 고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고향으로 주시면서 소망을 가지고 그 고향을 찾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신1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신11: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아름다운 땅인 고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소망을 든든히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고후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히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희망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말씀하시면서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이겨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앞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기 위하여 험한 광야 길을 지났듯이 우리 성도들이 영원한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는 오늘의 여러 장애물들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1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찾아가는 중에 우리는 성별해지고 훈련을 받아 강해지고 하나님과의 각별한 관계가 되어서 하늘나라 백성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명절이 되어서 고향에 가고 싶어서 모든 고난도 마다 않고 기를 쓰고 찾아가고 있는데 우리 성도들은 더 좋은 우리들의 본향을 향하여서 담대하게 전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거리는 비행기로도 지겹게 가야 되는 머나먼 거리입니다. 이 연어가 어른 고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우리 나라 동해안까지 와서 자기가 나온 시내를 찾아가 알을 낳고는 죽습니다. 마지막 죽기 전에 자기의 원천을 찾아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해서 찾아오는지는 모르지만 고향을 찾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도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사람에게도 이 연어처럼 자기의 근본을 찾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근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모르지만 아마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평상시에는 생활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다가 명절이 닥치면 어쩔 수 없는 향수에 그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고향을 찾는 대열에 합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시골에서 노인들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죽을까 ·········· 차를 타고 가면서 잘 꾸며진 무덤을 보고서는 그것이 그렇게도 좋아 보이고 부러워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이 흙에서 나와서 자기가 가야 하는 고향을 찾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고향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에게 고향이 그리워질 때가 서러움을 겪고 객지 생활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멸시를 받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너무도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안고서 밖을 나와 보니 그날 따라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하늘을 보니 고향집에서 보았던 그 달이 하늘에 새하얗게 떠 있었습니다. 불현듯 집이 그리워지고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영원한 고향을 생각하는 때는 편하고 좋을 때가 아니고 삶이 어렵고 힘이들 때 아무도 자기를 기쁘게 맞아 주지 않을 때 영원한 존재를 그리워하며 자기를 맞아 줄 영원한 고향에 대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그 정체를 정확히 모릅니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간절한 소망의 정체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천국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들로서 우리를 존재하게 해주신 그분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그 분이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가야 할 곳이 바로 그곳인 것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고향이 우리가 찾아가는 고향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고향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변해 버린 고향의 모습에 실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문학가로 잘 알려진 '토마스 월트'의 소설 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모든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지식도 얻었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똑똑한 자녀도 골고루 두었습니다. 모든 소원하는 것들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오랫동안 그리던 고향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옛날에 자기가 살던 고향 땅에 갔습니다. 노오스 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애쉬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역전에 내리는 순간 그는 몹시 당황하고 실망했습니다. 고향은 너무나 변해 있었습니다. 거리는 현대화되고 인심도 변해 있었습니다. 친구는 남이 되고, 고향 땅에 온 자기는 오히려 이방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자기가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에 다시 올라 슬프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아마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영원한 고향이 있음을 가르치시고 그곳을 사모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영원한 그 고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인 것입니다. 본향을 향하네라는 성가곡이 있습니다.
합창으로 불리워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곡입니다. 이 세상-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인생의 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난의 궂은 비바-람 환난의 비-바-람 환난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모질게-불 어-도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기쁜 찬송 주예수님 은혜-로 이끄시네 이끄시네 생-명강 맑은 물-가에 백화 가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 찬송가 부르실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이세상-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본향을 향하네 이스라엘 사람들도 뒤에 두고 온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 되는 고향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도 두고 온 고향이 아닌 그들 앞에 있는 본향을 찾아가기 위해 뒤에 있는 고향을 고향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히11:13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다가 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11: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11: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히11: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가야하는 곳은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은 인내를 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해야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I.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때로는 너무나 지치고 되는 일도 없고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언제라도 훌훌 털고 고향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든든한 배경이 있기에 조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돼도 돌아가면 맞아 줄 곳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시골에서 보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갔다가 병들고, 또는 사업에 실패를 해서 가진 것 다 없애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골에는 빈집이 있고 벌어먹을 수 있는 땅들이 있고, 이웃들이 여러 가지로 도와주어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잡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고향이 좋은 것입니다. 실향민들이 있습니다. 수몰 지구, 공업단지, 이북 ········ 이들은 가진 것들이 있고 친구들도 있지만 남들이 다들 고향을 찾을 때 혼자 눈물을 흘려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절망감이 그들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이 어렵고 살기가 각박한 어려움 속에서 살지라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든든합니다. 우리가 언제라도 가서 살 수 있는 우리의 집이 천국에 예비가 되었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90장2절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너머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 영원한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서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를 못 합니다. 아내조차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기 남편에게 그의 병명을 말하지도 못 합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를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그런데 이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수필을 썼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입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입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난 후에 불란서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가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 고백 교회 신학자 본훼퍼입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훨씬 앞서서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어 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옵니다. 직감적으로 본훼퍼은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는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그를 뒤덮고 있었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나와 감옥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서 충격과 감동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고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참된 고향을 확신하면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I. 고향의 의미 (신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는 고향은 뒤에 두고 온 고향이 아닌 앞에 가야 할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그 만난의 고난을 무릅쓰고 앞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땅이요,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과 그 땅위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과 깊은 관심. 그리고 애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고향은 하나님과 온전히 함께 하는 삶인 것입니다. 아마도 저 천국은 완전히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곳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금 당장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는 이 땅 위에서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가 바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 주님 안에 주님 내 안에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천국 고향의 포근한 분위기를 느끼며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아브라함의 선택-가나안 선택-하나님을 잘 섬기고 함께 살아가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 된 것
III. 소망을 주는 고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고향으로 주시면서 소망을 가지고 그 고향을 찾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신1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신11: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아름다운 땅인 고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소망을 든든히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고후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히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희망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말씀하시면서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이겨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앞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기 위하여 험한 광야 길을 지났듯이 우리 성도들이 영원한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는 오늘의 여러 장애물들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1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찾아가는 중에 우리는 성별해지고 훈련을 받아 강해지고 하나님과의 각별한 관계가 되어서 하늘나라 백성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명절이 되어서 고향에 가고 싶어서 모든 고난도 마다 않고 기를 쓰고 찾아가고 있는데 우리 성도들은 더 좋은 우리들의 본향을 향하여서 담대하게 전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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