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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아야 합니다 (신2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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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할 수 있지만 잊지는 않겠다”고 했던 유태 지도자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스라엘의 전쟁 박물관에도 그 입구에 “잊어서는 안 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역사를 잊어 버려서는 오늘이 없고, 내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수천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그 역사와 기록들이 보관되어 자녀들에게 전수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민족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일제의 수달과 압제도 너무 쉽게 잊어 갑니다. 가난하던 때, 보릿고개를 염려하며 초근목피로 끼니를 대신하던 민족의 어려운 때도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잊어 버립니다. 국적이 없는 문화, 외국 것이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문화 사대주의는 오늘날 우리 민족의 취약성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신명기 사가의 가장 중심적인 사상의 하나는 하나님의 행하신 구원 역사를 다시 기억하고 자손 대대로 전수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그러한 관점과 태도를 아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나안을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거기 들어가 살게 될 때에 행할 일을 지시해 주고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일은 “여호와를 기억”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애굽의 노예로 억압과 압박으로 민족이 시들어 가고 있을 때, 보잘 것 없는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여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물질적인 번영과 풍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물질주의와 맘모스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 교히가 쇠하여지지 않았던 때는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수구 교회의 전철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은혜에 대한 자각과 감격이 새롭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애굽의 모진 압제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했고 부르짖었던 이스라엘은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물질적인 풍요에 젖고 이방 신에 빠졌던 이스라엘은 얼마나 쇠약해졌던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자기 정체성의 확인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구속 역사를 깊이 기억함으로써 갖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잊지 않는 사람만이 바른 신앙인으로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첫 곡식과 예물을 가지고 나와와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십니다.(10절) 본문의 배경은 추수기 축제와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해의 농사를 지어 추수할 때, 가장 좋은 것, 첫열매를 가지고 나아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이모든 것을 얻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도 햇곡식과 첫열매를 귀히 여겨서 구별했던 민간신앙이 있었습니다. 첫 열매, 첫 것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렇게나 드리지 말과, 성별하고 구별하여,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속하심에 대해 너의 신앙을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5, 9절) 유리방황하던 사람들에게 땅을 주시고 기업을 주셔서 거하게 하시며, 풍성히 얻게 하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죽어 가던 그들을 건져 주시고, 인도하시며 축복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받은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풍요롭게 사는 것이 철절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속의 은혜에 대해 고백하는 신앙인이 될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고백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만 연인들의 사랑도 무르익어 가며 더욱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확신에 찬 신실한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속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오늘 나는 구원받은 천국 백성으로 결코 설 수 없는 죽음의 덫에 결려 있던 죄인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이 달라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예물은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인하여 함께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십니다(11절). 큰 은혜받은 사람들이 주신 복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보시는 모습입니다.
주신 복을 인하여 형제들과 함께 기뻐하며 축제를 벌이고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축제의 성격을 가집니다. 현대 예배학에서는 예배를 지칭할 때 worship이라는 말도 쓰지만 축제의 뜻을 가진 celebration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고 있는데, 예배의 축제적 성격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모여 주님 주신 사랑에 감격하여 예배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바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기억하며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며 더 귀한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18-19절)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주시는 말씀이요, 사순절을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베푸신 은헤와 사랑을 새롭게 기억하며 감격하며 살 것을 재촉하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삼일절 기념 주일을 지키면서 민족의 가장 어려웠던 일제 36년의 시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민족의 밝은 장래가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잊어 버린 민족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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