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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신10:12-19)

본문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정성껏 치료한 다음에 환자가 어느 정도 건강하게 되어서 퇴원을 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내게 되는데 이 사람을 돌려보낼 수 있을까 혹은 아직도 미급해서 돌려보내지 말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정도를 정신 건강의 정도를 시험하는 시험방법을 개발한 한 의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건강 정신 건강 측정 방법은 이렇다합니다. 그 환자가 있는 방에 수도 장치를 해놓고 그리고 수돗물 꼭지를 적당히 열어놓아요. 그래 수돗물이 '줄줄줄' 흐릅니다. 방으로 흘러서 방에 물이 가득히 고입니다. 이때에 환자에게 걸레를 주고 물을 닦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먼저 척 보고는 수도꼭지부터 먼저 잠그고 다음에 엎드려서 물을 닦습니다. 이렇게 되면은 퇴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아직 미급한 환자는 수도꼭지는 돌아보지 않고 방에 흘려 놓은 물만 열심히 닦는답니다. 이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무슨 생각이 듭니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지금 내가 당한 현실만 가지고 잘됐느니 안됐느니 뭐 죽겠느니 살겠느니 그저 몸부림을 치고 이 사람 원망 저 사람 원망하지요. 그러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그 근원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는가를 깊이 추적해 들어가면서 원인에서부터 고치려고 해요. 그리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건강한 사람 이예요. 왜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람은 사십이 넘으면 주변환경에 책임을 지라는 거예요. 자, 이제사십이 됐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하면 좋은 일이요.
내가 남에게 친절하게 했다는 거예요. 왠지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영 나로부터 멀어지고 반가워하지 않아요.
그렇다면'something long with me'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주변 환경 사람들로부터 어떤 말이 주어지느냐 하는 것은 바로 내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 원인을 생각해요. 경제고 정치고 무엇이든지 그 근본원인으로 돌아가서 먼 뿌리에서부터 생각할 줄 아는 그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에 모습이다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가 '무엇을 가졌냐' 에 따라서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뭐 부자를 높이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그 가진 소유대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은 가장 잘못된 평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소유에 의해서 평가 하는게 아니라 그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평가해야 됩니다. 그에 철학, 그에 지식,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평가입니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은'무엇을 아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평가할 것이 못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행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왜냐하면 알기는 아는데 행하는 것이 없어요 머리에 든 것은 많아 가지고 생각은 많아요. 말도 많아요. 실천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이런 사람이 문제예요. 누구라고 말 안 하겠습니다만, 그 부인은 가정학과 교수요. 가정을 어떻게 꾸미고 가정을 어떻게 하고 이것은 아주 도사예요.
그런데 그 집은 그저 '돼지우리 같다'고합니다. 그 남편의 말에 의하면 아무 상관이 없데요. 저 나가서 가르치는 것하고는 집에서 사는 모습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래 어디서 평가해야 합니까 그의 지식,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 그의 행동거지가 문제예요. 뭐 안다고 떠드는지 행하는 것이 없어요.
그러므로 그의 행위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행동만이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될 것이 아니고 그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행동은 있는데 사랑이 없거든요. 가령 우리 결혼생활 할 때 부부간에 살면서 어떤 부인들 보면은 참 한평 생 남편을 위해서 수고 많이 하고 아이들 위해서 치닥거리 하고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그러나 가슴에 사랑이 없어요. 억지로 했어요. 팔자 타령 신세 타령 다 해 가면서 운명이 어떠니 해가면서 죽지 못해서 한 거에요. 그것은 평가될 가치가 없어요. 그런고로 무엇을 행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 그 속에 얼마나 사랑이 담겼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 윤리학에 유명한 명제가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의 행동방법을 정당화 할 수 있다 . 그렇습니다. 사랑! 사랑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가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했느냐 아니냐 사랑에 소재가 문제입니다. 한 젊은 목사의 어렸을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이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님을 사랑했대요. 너무너무 사랑하고 어머니가 너무 고맙고 가난한 살림에서 자기들 위해 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어머니를 사랑해서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야지 해서 어떻게 용케 돈을 모아 가지고 어머니를 위해서 연시 감을 하나 샀어요. 딱 하나를 사 가지고 어머니께 가지고 가서 "어머니,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이것을 샀습니다. 이거 잡수세요." 하고 드렸는데 드리면서 보니까 자기 여동생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어요. 게가 먹고 싶어하니까 어머니가 "얘야 네가 먹어라. 뭐 이것 하나 가지고 그러느냐 " 하니까 "아닙니다. 이건 꼭 어머니가 잡수셔야 합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이것을 받아서 그 품에 있는 여동생에게 주더라. 이거야 이 목사님이 화가 나가지고 그것을 뺏어 가지고 땅에다 던져버렸어요. "이것 왜 네가 먹냐 어머니가 드셔야 될텐데" 빼앗긴 동생은 울고 자기도 속상해서 울고, 어머니는 넉넉지 못한 살림 때문에 울고, 다 울었돼요. 이젠 묻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린 것입니까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성어거스티'는 말합니다.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 누구를 사랑하겠느냐 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 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만, 아니올시다. 경험이 아니라 사랑한 것만큼만 압니다. 사랑해서 행한 일 만큼만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벼랑에 선 것같이 많은 위기를 느끼고있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다시 돌려서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느냐 누구를 사랑하고 있느냐 내가 지닌 사랑을 제 점검해야 되겠다는 말이요. 그것에 따라서 내 존재의 가치가 오늘 평가되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적어도 내 운명은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고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러분이 즐겨 읽었었던 책 '눈의 혁명'이라는 책을 보면, 과학자의 과학적이론입니다. 이 우주에는 어떤 신비로운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이 아니라 높은 차원에서 신비로운 강한 의지가 있는데 그 의지로부터 받은 유전인자가 우리 몸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 의지에 가까이 가며 살면 건강할 수 있고, 이에서 멀어지든가 역행하면은 그 몸에서부터 악한 호르몬이 나와서 그를 병들게 한다. 이것은 의학적 이론입니다. 그 신비로운 의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의지가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 그리로 향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같은 길로 갈 때 육체도 정신도 건강할 수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 현실 여기에 몰두하지 말고 생각을 돌려서 내 마음속에 깊이 있는 사랑을 재점검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오늘본문 15절에 보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라.'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깊이 깨닫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을 해야 합니다. 사랑에 응답할 줄 아는 존재요, 사랑을 알고,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개개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돌이켜서 과거에 그것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계속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애굽에 종 되어 있을 때에 너를 구원해 냈느니라. 자꾸만 강조합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움 당할 때 그 많은 혼란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셨어요. 그 엄청난 사랑을 다시 확인해야 됩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다시 마음에 불러 일으켜야 되고, 확인해야 됩니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섯 번 사선을 넘었습니다. 자주 꿈을 꿉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너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여러분 개개인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재확인하고, 더 깊이 깊이 깨닫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두 번째 로 주신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 그의 계명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것,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계명이라는 것은, 그 깊은 사랑에 고백 속에서 계명을 대할 것이요. 그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목사님이 교회 젊은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됐더랍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중에 그 젊은 사람이 모처럼 목사님 옆에 앉았어요. '뭐 좀 물어 봐야겠다.' 질문을 하는데 질문이 맹랑한 질문이요. "목사님, 나는 십계명을 싫어합니다.그건 왜" 십계명을 보니까 하지 말라, 하지 말라, 여러분, 몇 가지 하지 말라 하고, 몇 가지 하라고 하는지 아세요 그렇게 물으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일곱 가지나 하지 말라고 했어요. "뭘 하지 말라, 뭘 하지 말라, 나는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질색이요, 나는 자유를 좋아하기 때문에 뭐 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 나는 십계명을 싫어합니다. 그래, 그렇구먼" 하고 한참 가는데 모르는 길을 가는데 이정표가 나왔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부산, 이쪽으로 가면 광주, 이쪽으로 가면 뭐 어디가 나왔단 말입니다. "자네, 저 이정표를 좋아하나 저것도 저 어디로 가라고 그러는데. 그거야 그것 따라가야지. 우리 갈곳을 가니까요.마찬가지야. 저 이정표를 고마운 줄 알아야해. 저 이정표를 세워주신 분들에게 대해서도 고맙게 생각해야해. 저것이 아니면 내가 모르는 길을 어떻게 찾아가겠는가 그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너희 잘살고 너희 잘되라고 가르쳐 준거야. 이것하지 말라, 이것하지 말라. 누구를 위했던 것이냐" 십계명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도 이 계명을 놓고 바리세인 교인과 서기관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아주 이것을 어려운 법으로 가르쳤어요. 그래서 이 법을 지키는 것 자체를 괴로워했어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요. 공포에 하나님이요. 저주하는 하나님이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느끼면서 그 계명 앞에 벌벌 떨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유의 법을 가르쳤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신 계명이다. 그래서 안식일 날을 놓고 보더라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 냐 안식일 지키는 것 그렇게 억지로 지킬 것이 아니요. 너희들 잘 살고 너희들 복 받으라고 너희 행복 하라고 주신 율법인데 왜 이것을 마치 저주나 심판처럼 억지스럽게 생각하느냐 여러분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해라. 철 난다는 것이 뭡니까 부모님에 잔소리가 그렇게 싫습니까 철이 나고 보면 그게 다 누구를 위한 거요. 나 자신의 복을 위해서 말씀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고마운 말씀이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바로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이에요.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관심을 두어야 돼요. 내 소원이 아니라 그의 소원입니다. 효자로 말하면 내 소원보다 부모님의 소원 내 처지보다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그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부모에게 대한 사랑이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욕망이 많지만은 이 욕망은 잠깐 두고 우리는 그의 뜻, 그의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거기에 관심의 초점을 모아야 된단 말입니다. 유명한 작곡가 '베르디'라고 했습니다. 그가 오페라를 많이 작곡하는데 맨 처음으로 첫번 작품 오페라를 작곡을 해서 '플로랜스'에서 연주를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이제 연주가 시작이 되었고 연주가 끝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갈채를 보내고 있지만은 '베르디'는 자기를 향해서 박수치는 관중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고 저 높은 데 V
IP석에 앉아 있는 한 분, '로신이'라고 하는 대선배가 되는 작곡가가 있어요. 그 '로신이'를 뚫어져라 하고 쳐다보고 있더랍니다. 그 얼굴이 어떤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여기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던 말던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대 선배 작곡가인 '로신이'가 이 곡을 '어떻게 평가해주느냐' 가 중요한 것이에요. 세상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한 현실을 어떻게 평가해 주시느냐 가 중요해요.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내 행위를 어떻게 평가해 주시느냐' 가 관심사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하나님이 뭘 기뻐하시는지 오늘 이 많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그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기뻐하고 그를 섬길 것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에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들락날락 하던 일 가지고는 안됩니다. 전심전력해서 하나님을 경의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자세부터 먼저 바로잡아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사랑한 자를 사랑해야 됩니다. 그가 기뻐하는 자를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오늘 성경말씀에 " 나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며 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다. 그런고로 너희도 나그네를 대접하라. 그것이 바로 내 뜻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고 몸부림칠 때 1919년 3월 1일 참 자유를 위하여 온 국민이 둘러서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였다면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에 우리는 조용히 일본에 속국으로 평가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독립된 민족이라 고, 일본 속국에서부터 떼어 놓는 일이 바로 이 삼일 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모든 제국주의자들이 서로 나누어 먹기 운동을 할 때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나라가 '이 나라는 일본에 속한 것이다' 그것으로 끝인 것이요. 그러나 3.1 운동이라는 이 사건이 온 세계에 알려지면서 "아니다 이것은 독립된 민족이다 독립된 나라다" 하는 것이 만방에 알려지고 이것이 8.15 해방과 함께 독립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이 삼일절 예배를 소중히 여깁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천도교가 2백만, 불교가 3백만, 기독교가 삼십오만, 전 인구에 1.2% 밖에는 안됩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 1.2%입니다. 그리고 만세 운동으로 인하여 체포된 사람의 수를 일본 정부가 말해 준대로 보면 기독교인들이
2,039명, 천도교가
1,063명, 유교가 55명, 불교가 41명, 이것뿐입니다. 예배당이 불타고 순교를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희생된 사람의 60% 이상이 기독교인이에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애국가를 부릅니다 만은 이 애국가는 그 당시에 있었던 찬송가 14장입니다. 14장이 애국가입니다.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고 애국가를 부르며 우리는 민족운동과 신앙, 교회운동과 애국운동을 하나로 생각했어요. 그런고로 이 상제 선생님 같은 분이 체포되고서 고문을 당할 때 " 네 배우에 누가 있느냐 대라! 하니까 간단하게 '하나님이 시켰다" 그래요. 하나님이 하라해서 하는일이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다 말합니다. 이런 신앙적 운동으로 애국운동을 승화 시켰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뜻도 있고, 우리의 바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라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를 경외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법도를 그의 계명을 지켜나가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요. 이 민족을 사랑하는 길이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니라. 이 민족을 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잊어 서는 안됩니다. 시편 37편 4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소원을 이루어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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