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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굴에서의 다니엘 (단6:1)

본문

본 장은 다니엘서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마지막 장입니다. 나머지 기사들은 예언적인 환상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6장은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의 하나이므로 별다른 소개가 필요치 않습니다. 다니엘서의 첫장에 나왔던 다니엘은 불과 14세의 청소년이었지만 본 장은 다니엘이 노년 때에 겪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니엘이 나이가 많을 때까지 하나님께 신실한 자세로 살아왔음을 본문에서 확인할 것입니다. 다니엘을 죽이려는 음모 본장은 세 항목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집니다. 첫 항목은 1-9절까지인데 다니엘을 죽이려는 음모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왕조의 변화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됩니다. 바벨론 제국은 이제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게 정복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 나왔던 두번째 대제국이 역사적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이 새 왕국의 초대 통치자는 다리오라고 불리는 62세의 메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달리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새 왕국을 다스렸고 바사의 고레스 왕이 그의 뒤를 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바벨론 제국을 메대와 바사의 통제 아래 두고 새로운 방향과 모습으로 재조직해야 하는 난제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120명의 도지사들(방백들)을 선정하였는데 아마 각 도지사들은 특정 지역을 관장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고”(2절) 도지사들을 감독하는 3명의 총리들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도지사들은총리에게 국정보고를 하고 총리들은 왕에게 직접 나랏일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다리오는 이러한 행정 체계를 통해서 절대 권력을 유지하였으며 동시에 정부가 백성들로부터 괴리(乖離:벗어나 떨어짐)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다니엘은 3명의 총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3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다른 지도자들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왕은 그에게 국사를 다 맡길 생각이었습니다.
즉, 최고 행정기관에 서열이 정해져 총리들 중에서도 1급 총리와 2급 총리로 나뉘고 1급 총리가 왕의 대리자 노릇을 하게 될 판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어떻게 해서 그처럼 빨리 새 제국의 최고급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을까요 멸망된 왕조를 위해서 일했던 공신(功臣)이 정복자들의 새 왕조에 들어가서 총리가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에는 사실상 간단히 해명될 수 있습니다. 한 제국의 멸망은 다른 제국의 멸망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점점 썩어갔습니다. 백성들은 사치를 사랑하였고, 힘써 일하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원칙들을 내던지고 부도덕과 부정직한 일에 탐닉하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도덕적 분위기에는 악취가 풍겼습니다. 바벨론의 관리들은 대체로 자기 호주머니나 체우고 재산을 늘리는 이권에 깊이 연루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갖 파렴치한 짓들을 일삼았고 출세욕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국가의 도덕적 분위기가 갱신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리오 왕에게는 새로 임명될 도지사들이 이전의 바벨론 관리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들 역시 과거의 술첵들을 원용하여 새 제국의 올바른 행정을 돕기보다는 개인의 잇속만 차리기에 급급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도지사들과 같은 고급 관리들이 공공자금에 쉽게 손을 댈 수 없도록 예방책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다리오 왕에게는 국가 재정을 맡길 수 있는 매우 정직한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만약 그런 흠없는 인물을 찾을 수 없다면 제국의 행정은 조만간 무너지고 말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이야말로 다리오 왕이 찾던 적임자였습니다. 그가 지닌 영성은 뇌물이 통하지 않음을 보장해 주었습니다(3절). 요즘 말로 사람마다 값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는 어떤 값도 없었습니다. 다니엘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통제되었으므로 그가 왕에게 충성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정직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청렴한 품격과 고결한 도덕성을 지닌 자였습니다. 타락한 관리들은 공금을 횡령할 수 없도록 방해는 장벽이 가로놓인 셈입니다. 그 장벽이란 곧 다니엘을 가리킵니다. 아마 대도시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는 쉽게 큰 돈을 벌고 싶어하는 세력가들이 매우 잔인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소규모로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망하더라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경제적 이윤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양심을 버리고 얼굴에 짐승의 탈을 쓰는 자들입니다. 120명의 도지사들과 2명의 총리들도 현대의 악독한 대기업가들처럼 다니엘을 제거시키려고 작당하였습니다(4절). 그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에게 신실하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가 자기 하나님께 신실하기 때문이다. 그의 품위와 인격은 그의 영성에 달려 있다 그가 국왕과 그의 하나님을 놓고 양자택일을 하게 만들면 그는 분명히 자기 하나님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왕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어 목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다니엘의 원수들은 이처럼 다니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습니다. 정직과 공의의 편에 서는 사람은 남의 시선에 띄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므로 미움을 받습니다. 악인들은 지금도 경건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고 모든 것을 잃도록 하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보존하고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려고 애씁니다. 다니엘의 원수들은 아첨과 거짓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이 무기들은 마귀가 에덴 동산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지금도 똑같은 무기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남편과 함께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첨이었습니다! 마귀는 또한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다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사단의 전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의 해묵은 수법이 성공할 확률은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다리오 왕에게 진언한 제안은 왕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아첨이었습니다. 이 제안의 골자는 30일 동안 왕이 다른 모든 신들의 대리자 노릇을 한다는 것과 왕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신들에게 드리는 일체의 기도들을 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다”(7절). 그러니까 이것은 종교를 금한 것도 아니고 기도를 못하게 한 것도 아니고 누구든지 신에게 드릴 소청이 있으면 다리오 왕을 통해서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방백(도지사)들과 총리들은, 다리오 왕에게 위와 같은 제안의 필요성을 여러 가지로 역설하였을 것입니다. 즉, 이 제안은 새 젝구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연합의 계시가 되며 새 왕조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왕의 권위를 확립시켜 준다는 등등의 구실을 대었을 것입니다. 만일 지헤로운 자였더라면 이런 제안에 가리운 흑막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첨은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이첨은 인간의 자존심을 풍선처럼 부풀게 만들고 문제의 핵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고대 제국에서는 흔히 왕들을 신격화시켰습니다. 다리오 왕도 그의 측근들의 제안에 의해서 신으로 행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첨은 다리오 왕으로 하여금 국사에 막중한 영향을 끼칠 세부 사항들에 대해 눈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히 잠언에서 아첨하는 혀를 조심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리오 왕이 간과한 세부 사항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그는 우선 7절의 내용이 명백한 거짓말임을 간파했어야 했습니다. “모든 총리와…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가장 총명한 다니엘 총리가 이 제안을 왕에게 올릴 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모든 상급 관리들이 다 동의한 일이었다면 가장 높은총리인 다니엘이 그 제안을 왕에게 해야 옳은 절차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문들이 다리오 왕의 마음에 떠올랐어야 할텐데 왕은 간신들의 제안에 어인을 찍고 말았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관습에 따르면 일단 어인이 찍히면 불변의 법이 되어 누구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다리오 왕이 자신이 인준한 규정을 번복시킨다면 그의 제국 내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준을 번복하는 행위는 그의 보좌를 흔드는 위험한 처사인데다가 대는 그의 통치 초기이므로 더욱 속수무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형상에 온 백성이 절을 해야 한다고 명령했을 때 그로 인해 곤경에 처한 자들은 경건한 남은자들뿐이었음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다리오 왕의 이번 어명도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메대와 바사 제국의 백성들은 다신교를 믿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금령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각종 종교 활동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신격화된 다리오 왕을 통해서 기도를 올리거나 자기 우상 앞에서 기도를 하거나 별 차이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다니엘로 하여금 인간에게 엎드려 경배하거나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 이외의 어떤 중재자도 인정하지 않도록 금하였습니다.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과 왕의 칙령에 함께 순복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의 딜레마는 심각하였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여호와께 종전처럼 기도를 올리면 왕의 금령을 어기는 일이 되므로 사자굴에 던져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평생 동안 계속해 온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중단한다면, 그는 영성을 잃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품위마저 떨어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왕을 노엽게 한 경건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든지, 아니면 불경건한 자로서 목숨을 이어나가든지 둘 중에서 한 쪽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길을 택하든지 악인들의 꾀가 이길 판이었습니다. 즉 앞으로는 다니엘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아주 없어지든지, 아니면 자신의 원칙을 희생시키고 종전의 빛나던 인품을 매도한 한 사람의 비굴한 다니엘이 남게 될 것이었습니다. 모함꾼들의 작전은 이래도 저래도 성공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 본 장의 두번째 항목은 10-17절까지로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기까지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번복할 수 없는 칙명에 어인이 찍힌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오늘날 다리오 왕의 금령과 비슷한 국법이 통과된다면 우리는 대부분 전화통에 매달리거나 혹은 이주를 위해 공항으로 몰려갈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너무도 놀라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전에 행하던 대로’(10절) 정상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대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 창문을 예루살렘을 향해 열어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해 왔지만 자기가 잡혀오기 전의 예루살렘과 조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예루살렘을 재건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왜 공적으로 드러내 놓고 기도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릴 때에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라고 교훈하시지 않았습니까(마6:6). 우리는 다니엘이 중동 제국의 최고 귀빈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집에는 많은 시종들이 들락거렸을 것입니다. 그의 사생활이 유지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다니엘의 헌신 생활이 은밀히 행해질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왕의 금령이 내려진 이후로는 다니엘이 개인 헌신을 지속하는지를 알아내려는 스파이들이 다니엘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시간을 자랑한 일도 없지만 이를 비밀에 부친 일도 없었습니다. 그는 평소의 습관대로 하던 일을 계속할 뿐 갑자기 비밀로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다고 해서 옳은 일을 중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옳은 일은 계속 옳을 뿐입니다. 환경은 변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시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맡아서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나이 많은 다니엘이 그처럼 굳게 서서 담대한 믿음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요 그런 믿음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일생 동안 악에 대해서 “안된다!”고 말해 온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절급한 상황에서도 다시 한번 단호하게 처신할 수 있었습니다. 6장 10절의 말씀을 설명하려면 1장 8절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당시 14세의 청소년이었으나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였고 또 직면했던 문제가 비교적 경미한 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였으며 그 후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갖가지 악한 유혹들을 항상 배격하였습니다. 그는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지 “안된다!”고 잘라 말하는 확고한 자세를 견지해왔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안된다!”고 말하면 그만큼 다음 유혹에서도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저버리면 악에 대한 저항력은 그만큼 약화됩니다. 이 사자굴은 사실상 하나님께 무릎을 굻고 기도하는 다니엘의 침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왕의 어명을 어기면 야수들엑 찢겨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지킬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고찰했듯이 마귀는 우리가 살아 가면서 우리의 신앙을 더럽히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이 무릎을 꿇을 때마다 그는 사단의 간악한 유혹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을지를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당신은 쉽게 살지를 못하오 당신이 지닌 직책과 특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현재의 높은 벼슬을 유지할 경우에 끼칠 수 있는 큰 영향들을 생각해 보시오. 30일간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당신의 장래는 아무 염려가 없소. 단기간 동안 즐길 기도 때문에 장기간 누릴 수 있는 영예들을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정 원한다면 속으로 기도하면 되지 않소, 구태여 종전처럼 창문까지 열어 젖히고 공개적으로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어. 사람의 눈에 틀림없이 뜨일텐데 왜 그런 어리석은 모험을 해야 하겠오 꼭 기도를 해야 한다면 당신의 종들이나 스파이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하시오. 30일만 지나면 넘어갈 일이니 제발 드러내 놓고 기도하는 우행을 범치 말기를 바라오.” 이런 유혹의 소리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계속해서 다니엘에게 들려왔을 것입니다. 기도를 포기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들을 다니엘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날마다 거듭되는 똑같은 유혹의 속삭임을 듣는 것은 사람을 매우 지치게 만듭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나거나 눈에 띄는 유혹들에는 강하지만 서서히 침식해오는 유혹에는 약한 교인들이 많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을 조금씩 지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잘 알려진 수법입니다(단7:25).
마귀는 계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들 대부분은 급격하지 않고 유순하며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마귀는 동일한 속삭임을 계속 들려주어 머리에 박힐 때까지 반복합니다. 마귀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서 어떤 죄들은 해롭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주입시킵니다. 이같은 마귀의 교묘하고도 끈질긴 접근을 받으면 신자들의 저항력은 약화되고 신앙고백은 흐려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이런 묵은 수법이 다니엘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날마다 자기 방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며 사자굴에 있는 듯한 위기를 당했지만 그때마다 “안된다!”고 답하며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10절)하였습니다. 스파이들은 다니엘에게서 아무런 변화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종전과 똑같은 신앙생활을 지속하였습니다. 아무것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전처럼 견고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그가 협박에 단호하게 맞서고 마귀의 간교한 제안들을 거절한 것은 나중에 그가 사자굴에서 구원된 것보다 사실상 더 큰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함꾼들은 다니엘이 왕의 칙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를 처형시킬 절차를 밟았습니다. 우선 그들은 왕에게 다니엘의 어명 불복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12절). 그러나 그드르이 보고 내용에는 다니엘의 평소 인품이나 청렴한 생활 자세, 현직에서으 공헌 등은 조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모함꾼들은 왕에게 후속 왕국은 열등한 것이라고 예고했었습니다(2:39). 이 예고는 후속 사건들에서 그 진실성이 확증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절대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다리오 왕은 자신의 법망에 걸려 자기 조신(朝臣)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대제국의 왕이 자기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숙고해 보지도 않고 그 문서에 쉽게 어인을 찍고 말았습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궁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금령은 다니엘을 정죄하지만, 그의 마음은 다니엘을 살리고 싶어하였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칙령으로 다니엘을 죽여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왕은 온종일 다니엘을 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찾으려 하여지만 모함꾼들은 그가 결코 칙명을 뒤집을 수 없다고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일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자는 왕이 아니고 악한 대신(大臣)들이었습니다. 다니엘서를 강해한 책들을 보면 본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 사건과 연관시켜 설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공의의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을 주신 분에게는 우리를 구하시려는 사랑에 찬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의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신령한 율법의 요구들을 맡아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준수할 책임도 지셨고, 율법을 어긴 형벌의 책임도 모두 대신 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로 인해 빚어진 딜레마를 당신의 아들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이오 왕은 딜레마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경솔한 금령을 내려놓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유약한 왕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는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으면서 하나님이 제발 다니엘을 구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어명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역설적인 사건을 목격할 것이었습니다. 사자굴의 입구는 어인을 쳐 봉해졌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왕명에 의하여 갇혔다는 것과 그를 구조하려는 어떤 시도도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반역임을 나타내는 표정이었습니다. 모함꾼들은 기뻐하면서 귀가했지만 왕은 수심에 가득차서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풍악도 거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를 잊게 할 수 있는 음악 소리가 세상에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사자굴에 갇힌 사랑하는 다니엘에 대한 연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신체적으로 커다란 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영적 상태는 조금도 위태롭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귀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마귀는 그런 다니엘에게서 흠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는 다니엘에게서 어떤 승리도 주장할 수 없었고 그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다니엘은 이 말씀이 쓰여지기 전에 이미 이 교훈의 진실성을 증명하였습니다. 그의 품위와 명성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마귀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와 마주서는 것입니다. 그 외에 마귀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고 그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9). 다니엘은 유혹에 대하여 “안된다!”고 소리쳤기 때문에 마귀가 그를 떠났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해방된 곳에 있었습니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다니엘이 새로 만난 무리들은 휠씬 나은 자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의 구원과 마지막 결과 본 장의 18절에서부터 끝부분까지는 다니엘이 받은 크나큰 구원과 마지막 결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리오 왕은 밤새껏 자지 못하고 깨어 있다가 동이 트기가 무섭게 사자굴로 황급히 달려갔습니다. 사자굴의 뚜껑에는 하나의 구명이 있어 안쪽을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왕은 이 구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구슬픈 소리로 목메어 외쳤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희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나”(20절) 왕은 아무런 응답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간밤에 끔찍한 죽음을 당했을 다니엘의 잔해(殘骸)들만 볼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21절). 모두들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다니엘이 오히려 왕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정중한 인사말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왕은 다니엘의 음성이 계속되자 더욱 기쁨에 넘쳤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미치지 아니하였나이다”(22절). 다니엘은 그날 밤 마귀의 무리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다니엘을 피해 도망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 밤을 보내었습니다! 야곱의 긴 일생을 인도하셨던 주의 천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용광로 속에서 거닐었던 그 주의 천사가 다니엘을 축복하셔서 사자굴에서 그를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후일에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실 주의 천사가 그날 밤 사자들을 주관하셔서 희생자의 몸을 물어뜯는 본능적인 야수의 욕구를 통제하셨습니다! 다이오 왕은, 사자들이 들어가는 곁문에 붙인 어인을 떠고 다니엘을 출옥시키는 과정이 더딜 것 같아 당장 동앗줄을 내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이 동앗줄을 타고 올라왔는데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안색도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자기 종들을 용광로 속에서 구해내셨듯이 이번에도 또한번 자기의 종을 고낭르로부터가 아닌, 고난 중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후서11:23-33에 나열된 고난의 목록들을 보십시오! 그렇지만 바울은 그런 고난들 속에서도 자기를 주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확신하였습니다(롬8:35-39). 우리도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ㄹ 살려는 자들은 핍박을 받기 마련입니다(딤후3:12).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스럽고 힘든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 심지어 순교에서까지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 고난에 처하게 되는 상황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고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순교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들에게는 그런 위로가 없습니다. 24절의 끔찍한 장면이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모함꾼들은 바사의 관습대로 그들의 처자들과 함께 사자들의 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행위를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의 기록입니다. 모함꾼들은 그들의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의 밑바닥에 미처 닿기도 전에, 달려드는 사자들에 의해 사지가 찢기고 뼈까지 으스려졌습니다.
소름이 끼치는 이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구원을 다니엘에게 베풀어주셨는지 재삼 확인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리오 왕도 그의 조서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장 크신 신이라고 온 백성에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느부갓네살 왕의 용광로 사건에서처럼 하나님을 유일하신 주님으로는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영적 무지는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그의 나라가 무긍하며 그의 통치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자각으로 인해 그분의 앞에 떨면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을 원하시는 대로 이루시는 분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은 채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다리오 왕이 그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다리오 왕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메대의 왕은 바사의 고레스 왕으로 대치되었습니다(28절). 제국들과 마찬가지도 왕들도 왔다가 갑니다. 그러나 남은자들은 보존됩니다. 이것이 본 장의 주된 교훈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금이 만약 그 짠맛을 잃으면 어떻게 됩니까 남은자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거나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거나 양단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살아 남으려면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신앙고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타협의 삶을 살면 관련 당사자는 조금 더 편안하게 잘 살지 모르지만 남은자를 남은자답게 만드는 경건의 모습은 살라지고 맙니다. 남은자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영적 순결을 본조하는 데 진력해야 합니다. 영적 순결은 어떤 악에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자세를 요구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증인이 필요한 만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남겨질 것입니다. 비록ㄹ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신실한 주의 백성들은 그들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서 나올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악인들이 사자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함꾼들의 사자굴이 아니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굴이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심판의 사자굴로 홀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령하신 임재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조의 손길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의 형벌은 영원히 게속돌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불신자들은 현세를 살면서 그리스도아 그의 복음을 위해서 핍박받기보다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기를 원합니다. 반면 신자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은 목숨보다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원하며 주님의 영광을 항상 앞세우며 삽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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